인간존재의 근원을 투시해 내는 삶의 작가
여성문학인회 회장. 주부편지 발행인. 소설가 정연희
최원현/수필문학가
2001년 9월 29일, 9월의 마지막 토요일 오후 2시, 추석을 이틀 앞 둔 서울의 토요일 오후는 유난히 분주해 보였다. 고향을 향하여 떠나는 사람들, 고향으로 가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 오랜만에 함께 모여 서로 서로 정을 나누고자 그의 준비로 바쁜 사람들, 어쩌면 1년중 가장 바쁜 날이 아닐까싶은 날의 오후에 나는 서초동 예술원 고갯길을 넘고 있었다.
양옆의 가로수에서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국립중앙도서관 뒷길이요 예술원 앞 고개를 살짝 넘자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이신 소설가 정연희 선생 댁에 이르렀다. 집 앞에서 전화를 드렸더니 친히 나오셔서 반갑게 맞아 주신다. 요즘 여러 가지 큰 일들로 많이 힘드셨을 것을 알고 있기에 모처럼 쉬실 수 있는 토요일 오후의 시간을 염치도 없이 빼앗는 것 같아 죄송하단 말씀부터 드렸더니 자꾸 아니라고 하시며 안으로 들기를 권하신다.
30년간을 집안일 돌봐주는 이도 없이 혼자 살림하며 그 많은 활동을 다 하시며 작품을 쓰시는 분, 거실로 드니 김동리문학상 시상식 때 찍은 사진이 소파 위 벽에서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해 주었다.
추석 앞이라고 누군가 가져왔다며 내오신 송편과 친히 담그셨다는 매실차와 과일을 들며 질문드릴 내용들을 대략 말씀드렸더니 질문할 내용을 다 알고라도 계셨던 것처럼 말씀의 문을 여신다.
정연희 선생은 1936년생(66)이시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숙명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57년 이화여대 3학년 재학시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 화려하게 등단한 그는《석녀》《불타는 신전》《내 잔이 넘치나이다》《양화진》《여섯째 날 오후》《순결》등의 장편소설과 많은 단편소설, 그리고 수필집 《언니의 방》《나비야 청산가자》등을 내었으며, 한국소설가협회상, 한국문학작가상, 윤동주문학상, 유주현문학상, 김동리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50여년을 문학을 통해 대중들과 함께 했다. 그러나 아직도 풋풋한 대학생 같은 이미지로 독자들에 기억되고 있는 것은 《석녀》《난지도》《여섯째 날 오후》같은 간결하고 유려한 문체, 날카로운 심리묘사 등으로 작품들이 독자들 가슴 속 깊이에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선생의 삶은 그다지 평탄치 않았다고 한다. 선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일방적인 피해자가 되는 운명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문학을 하게 된 동기를 묻는 필자의 질문에 답하는 선생의 말속에선 그래선지 촉촉한 물기가 느껴졌다.
저희 어머니가 그토록 자랑스러이 여기던 네 살짜리 아들을 하루밤 새에 잃은 지 삼개월 후에 내가 태어났어요. 제 오빠를 잡아먹고 태어났다(?)는 표현만큼 나는 어머니에겐 더없이 미운 존재였지요. 언니와는 6살 차이이고, 내 아래로 여동생이 있지만 나만 보면 잃어버린 아들이 생각나니 내가 불운을 몰고 온 아이처럼 인식을 하셨나봐요. 그래서 나는 늘 어머니가 언니나 동생만을 편애한다고 생각했었어요. 이런 참담한 현실과 가정에서 받는 미운 오리새끼 같은 불공평한 사랑에 대한 억울함에 일기를 썼고, 사람을 기대하지 않고 스스로 깊은 공상을 하며 글을 쓸 수밖에 없었어요.
어머니는 내가 29살 때 돌아가셨는데 어머니의 문학적 소양을 내가 그대로 받은 것 같아요. 어머니는 학교도 안 다니신 분인데도 글을 잘 썼고, 이광수 김동인 등 그 무렵 소설가들의 책을 모두 읽고 목소리도 아주 좋아서 어머니는 자주 책을 읽어주시곤 했는데 그런 소양이 내게 그대로 스며들었던 것 같아요.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영남일보에 콩트를 게재했는데 과연 중학생이 이런 글을 쓸 수 있느냐고 했지만 실어줬던 것을 보면 이미 문학은 내 삶의 위로요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으로 되어버렸던 것 같아요. 그러니 특별히 문학을 하게 된 사명감이라던가 하는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삶 자체가 문학이 되었던 것이지요.
나라도 잃어버렸고 그래서 우리말조차 쓸 수 없는 시대에 태어나 유년시절 어머니로부터 우리 나라 작가들의 소설을 엿들으며 자랐던 소녀, 그저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하나같이 불리하게 작용되던 사춘기 때 그가 본 주검, 파괴, 증오, 복수, 가난, 절망, 권태들이 폐허 위에 널려있던 세상은 그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었을까. 그런 그였기에 어머니로부터 부여받은 문학적 소양은 그를 더욱 일찍 문학적 성인으로 만들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무엇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을까? 50여년의 문단 생활과 70여년의 삶 중 선생은 언제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까? 그리고 그로 인해 그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왔을까, 또 문학은 그 때 어떤 역할을 했을까.
나는 행복을 보장받지 못한 첫 번째 쓰디쓴 결혼생활의 결과 1966년 이혼을 했는데 고통을 감내하는 것보다도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더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그런 극한의 오해와 실망들이 내 문학에는 자양분이 되었어요. 그 시대에 이혼이라는 것은 아주 드문 때이기도 했지만 사정도 제대로 모르는 채 일방적으로 오도하고, 참기에 가혹한 행동을 공공연하게 해올 때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들이었어요.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일방적인 피해를 받고 살아왔다고 했듯이 내가 청운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아주 조그만 아이였던 그 때도 크게 영혼의 상처를 입곤 했어요. 그런데 60이 되던 해에 그런 40년의 광야가 아니었다면 내가 본연의 생명을 만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 40년의 광야 끝에서 그는 신앙을 만났고, 그 신앙은 절망의 구덩이에서 자신을 끌어 올려준은혜의 줄이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입증되지 않은 믿을 수 없는 것들이다.그러나 그가 불혹의 나이에 맞이한 신앙은 생명의 본질을 순식간에 깨닫게 해주었다. 이미 30대 중반에 커다란 고난을 겪으면서 그 속에서 예수를 만났던 그는 40대 초반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에게 40년의 광야생활이 없었다면 본연의 생명을 만날 수 없었다고 깨닫게 된 것은 60이 되어서라는 것이었다. 죽음과 같던 땅을 뚫고 나왔을 때 만난 그 빛은 내가 내 것이 아니고 그분의 것이란 것을 깨닫게 했다던 그의 고백은 어쩌면 그가 얼마나 내면적으로 힘들고 고통스런 삶의 나날을 살아왔는가를 느끼게 해 주는 것이었다.
삶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섭리 속에서 누군가에 의해 주어진다고 하면 어떻게들 말할까. 그러나 정연희 선생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몇 번이고 그의 삶 속에 절대적으로 와 계신 분의 힘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서 필자가 선생의 문학을 구분하여 정리해 보고 또 그 문학에서 제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드렸을 때 순간 많은 감회가 이는 것을 놓칠 수가 없었다.
1950년대는 창조주에 대한 저항과 반항으로 삶의 불공평에 대한 신의 책임을 왜 인간에게 돌리느냐는 고발성 작품의 때지요.『파류상』(波流狀)도 수녀원의 수녀를 통한 고발성 작품입니다. 60년대엔 에로스의 허망함, 에로스가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석녀』『목마른 나무들』의 작품에서 에로스조차 회임 할 수 없는 실존적인 시대에 태어난 여성들의 이야기를 썼지요.
70년대 들어선 20세기 문명 비평적인 글들로 69년에 경향신문 순회특파원으로 세계일주를 하면서 인류가 편리를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멸망을 초래하는 것이며, 크레디트 카드가 인간에게 어떤 병폐가 되는가도 얘기했었지요.『2000년의 독백』『갇힌 자의 자유』등이 그 때 작품들이에요. 80년대는 인간의 피해에 대한 관심으로『난지도』『양화진』『여섯째 날 오후』등 아가페란 무엇인가를 얘기하게 되었어요. 90년대 들어서는 『언니의 방』같은 자연에의 회귀, 그리고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살면서 어디를 향해서 걸어가야 하는가? 생명이 안고있는 영혼의 문제, 영혼이 안고있는 생명의 문제, 생명의 본질, 생명을 담고있는 육신과 영혼의 문제들을 다루게 되었지요.
정연희 선생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들에서 여성의 안 깊이 숨어있는 문제들을 보여주고자 애쓴 것 같다. 1970년대 단편소설 중 <중음신>은 분단과 남한의 반공 이데올로기로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과 그 가족의 삶을 그렸고, 남편의 질서에 편입되어 제한된 자유를 수용하는 여성의 독백을 들려주는 <갇힌 자유>,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대합실의 남자들에게 어이없이 당하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합실>, 세 여성의 삶과 선택을 통해 여성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살으리> 등은 선생이 무엇을 말하고싶어하는 지를 짐작케 하지 않은가.
곧 선생은 5,60년대에는 실존적 삶의 모습과 인간존재에 대한 탐구를 서정적으로 그려내었지만 1970년대 이후에는 산업화로 인한 자연의 파괴와 인간관계의 소원화 그리고 존재의식의 불안정성 등을 지적하면서 인간존재에 대한 현실차원의 탐구를 해나가려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선생이 신앙을 갖게 되면서부터 많은 변화가 오는데 그러면 선생의 삶 속에서 신앙과 문학은 얼마큼이나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종교는 생명의 본질입니다. 또 문학은 학문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고 삶의 한 모양입니다. 삶에서 추출된 열매나 가장 진실된 삶의 에센스가 문학이 되어 나타난 것으로 즐거워서 하다보니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된 것 그것이 문학이 되는 것입니다. 목적이 있어서 글을 쓰면 안됩니다. 그냥 썼는데 영혼을 울릴 때 그래서 독자를 울릴 수 있을 때 그것이 문학입니다. 가짜와 진짜, 삶에 대해서 얼마나 정직성이 있고 그 정직성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 그렇기에 삶의 철학에서 문학은 스며나는 것이고, 신앙과 문학 모두 내가 만난 삶과 신앙에서 그냥 우러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부침(浮沈)의 인생을 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60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ꡐ네가 걸어온 60평생이 광야더냐? 그 광야가 아니었다면 네가 어떻게 나를 만날 수 있었겠느냐ꡑ는 물음을 들었다고 한다. 60세에 이르러 비로소 ‘광야의 사랑ꡑ을 느낄 수 있었고, 또 은혜 받기 이전엔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눈을 뜰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이전에 갖지 못했던 문학의 조화를 찾았다고 말한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종교에 대한 문학적 수용으로 변용한 종교적 색채를 띤 소설들이 그런 소산이라고 할 것 같다.
선생은 1990년에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했는데 유다광야에 첫발을 들여놓는 순간 냇물처럼 눈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회갈색 구름이 떠있는 유다광야엔 회갈색빛 구릉뿐이었는데 그 광야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 광야에서 ‘내 평생에 광야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이 땅으로 날 보내셨구나’하고 깨달았다는 것이다.
선생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이제 삶의 전부요, 문학의 전부요, 그리고 살아가야 할 목적 그 자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서 잠깐씩 드러나는 이면의 ‘여림’ 같은 것, 그것은 인간의 순수 곧 진실을 가꾸고 보듬고 싶어하는 마음임을 또한 느끼게 했다.
그래서일까 선생은 문명과 현실, 인간관계를 풍자하는 동화도 많이 쓰셨다. <칡꽃>, <난장이 나라의 조종사>, <겨울새와 개나리>, <똑똑한 바보>, <꽃을 먹는 하얀 소>, <혼자 서 있는 나무>, <죄수와 비둘기>, <천치>, <꿈을 낳는 과자>, <이젠 춥지 않아요> 등인데 이런 동화의 창작에 대해서
"70년대 초반부터 동화를 많이 쓴 것은 어른들의 마음도 어린아이와 같은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빨리 아파하고, 무서워하고, 결국 내가 나에게 하고싶은 말들이 많아 동화를 쓴 것입니다.”라고 한다.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느냐고 했더니 “여성문학인회 회장 일을 1년 반 째 해 오고 있고, 14년간 주부편지를 발행해 오고 있어요. 주부편지는 1987년 한국기독여성문학인회가 성경공부를 하다가 무언가 보다 뜻있는 일을 하자고 시작한 일인데 김자림, 나연숙 선생 등이 나서서 87년과 88년에 걸쳐 <이 민족을 주소서>, <하늘의 종소리> 등을 공연하고 그 수익금과 1만여명 회원들의 참여로 발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그 일을 하고 있어 늘 죄송스럽답니다.”
앞으로는 또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시느냐고 했더니 “자연 속에서 사는 것이 제일 좋아요. 10월말에 용인에 새 집이 마련되면 서울 집도 청산하고 내려갈 겁니다. 그리고 작품은 한국의 역사, 그 역사의식을 일깨울 수 있는 작품을 쓰려고 합니다.”
선생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에게 문학이란 독특한 무늬를 그려 주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앞으로 근세사 속의 한국민족 변천사를 쓰고자 하는데 일제 강점기와 6․25사변 등 19세기말을 살면서 그가 만난 하나님을 고백하고자 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자신이 왜 크리스천으로 살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글들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결국 선생이 겪은 고통이 이 땅에 정연희 문학을 내는 씨밭이 되지 않았을까싶다.
온 세상이 던지는 돌팔매의 질타와 변명이 필요 없는 참담한 오해, 그 극심한 고통은 그때까지의 어둠을 찢어내고, 눈멀었던 내 영혼의 눈이 열리게 해 주었습니다. 비로소 딱지가 떨어지면서 인식의 창문에도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죄(罪)는 실존이었습니다. 광야에 홀로 세워지고서야 존재는 눈을 떴습니다. 죄의 바탕 위에 세워진 자신의 몰골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풀 포기 하나 없는 듯 보이는 광야에서 만난 빛이었습니다. 그 빛 속에 사람이 있고 사물이 있고 소리와 바람과 해와 달과 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홀로 선 뒤에야 존재가 갖는 관계는 생명으로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광야 40년은 생명과 진리의 빛을 만나게 되고 관계가 아름답게 형성된 축복이었습니다. 고통은 인식의 씨눈을 벗겨 빛을 만나게 해 준 스승이요, 끝없는 소외감은 광야의 의미를 일깨워 준 어머니였습니다.(김동리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작가가 발표의 지면(紙面)에 연연하지 않고, 독자에 대한 종속관계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움은 홀로 설 수 있는 힘이라는 사실, 그런 눈뜸이 있을 때 쓰고싶은 작품도 쓸 수 있다는 생각에 동감이 갔다.
선생을 뵈면서 작가의 사명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작가의 삶은 작품으로 나타나기 마련이고, 그 작품은 곧 그 시대, 사상, 문화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과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생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문단 및 삶의 후배들을 위하여 한 말씀을 부탁드렸다.
나는 선배라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동료로써 한 마디 한다면 첫째 삶이 희석된 글을 쓰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남의 글에 공정한 평가를 할 줄 알라는 것이고, 셋째는 남의 글을 북돋아 주라는 것입니다. 곧 쉽게 쓰려고 말고, 쉽게 일가를 이루려는 생각을 버리고, 내 삶을 정직하게 수용하라는 것이지요. 일가를 이루었다는 렛델이나 목적의 수단으로라면 글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수용하는 무게가 바로 문학의 무게가 되기 때문입니다.
소설가 정연희 선생, 여성문학인회 회장과 주부편지를 발행하면서 삶의 방향성과 내실에 관심을 집중하고 바른 문학, 바른 삶을 살고자 촌음을 아끼는 작가 정연희 선생을 뵙고 나오면서 나는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 읽어봤던 스토리뱅크 개원 특별강연회의 마지막 내용을 떠올린다.
‘삶은 그 자체가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역사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정신 유산은 이야기뿐입니다. 만리장성보다 전설이나 신화가 더 유구한 역사를 갖는 것이 그렇습니다. 유형 건조물이나 종교적인 유물이 인간의 땀과 피와 생명을 빼앗은 독재자의 흔적일 뿐, 시간의 엄숙성을 뛰어 넘지 못하고 폐허로 남는 것에 비하여 설화나 신화 등 인간의 이야기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인간과 함께 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어느 나라 못지 않게 전설과 설화가 많습니다. 어느 나라 못지 않게 고난을 계속해서 당해 온 민족입니다. 고난의 깊이가 그 민족의 성숙도(成熟度)를 높여 주었음을 역사는 가르쳐 왔습니다.
한 민족의 정신적인 유산(遺産)은 고난 속에서 열매를 맺어 왔음을 역사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그 고난의 유산, 정신적 자산(資産)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문학이 문학으로서의 구실을 다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고개를 넘어 예술원과 학술원, 국립중앙도서관이 있는 그곳을 지나오면서 문학인의 한 사람으로 깊은 자책을 느낌은 선생의 안타까운 마음과 그리고 이 시대, 우리 문학을 향한 그의 애정을 짧은 글에 다 담지 못한 아쉬움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현실의 튼튼한 긍정 위에서 인간존재의 근원을 투시해 내는 '렌즈'가 바로 문학이라고 말하는 소설가 정연희 선생, 그리고 작품 속에서 신에게 다가가려는 인간의 몸부림과 이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면서 실존적 자기응시의 문제를 다각적이고 지속적으로 탐구해 가는 작가,
선생의 신앙고백과 같은 작품인 <내 잔이 넘치나이다>(83년), 선교 1백주년을 맞아 이역 만리 타국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이 안고 온 사랑이란 무엇이며, 왜 그들은 이 땅에 목숨을 심지 않으면 안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양화진>(84년), 복음의 그루터기로 남은 순교자의 삶을 조명한 <순교자 주기철>(97년) 등 선생의 작품을 읽다보면 어느새 내가 그 주인공이 되어있는 것을 느낀다.
‘문학은 호흡하는 생명과 같아서 멈출 수가 없어 계속 씁니다. 그래서 만족이나 불만족이 없어요’ 선생의 문학에 대한 열정과 자세를 생각하며 이 땅에 참 문학인의 빛과 향기가 어떠해야 할까를 다시 새겨본다. 일기예보에선 비가 올 것이라고 했는데 오후의 햇볕이 유난히 맑고 밝다. 오랜만에 가슴 후련하게 시원한 귀한 말씀을 들은 내 마음 같기만 하다.
< 한국문인 인터뷰 2001.11.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