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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업(業)과 윤회(輪廻)①②
행위의 업 내세운 신의론 부정
1. 왜 업보설(業報說)인가
1) 업보 사상의 위치
일찍이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교단을 창립한 최태용 목사는 일본의 한국지배를 신의 뜻이라 하였다. 때문에 한국인은 “신 섬기듯 일본 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했다. 다시 최근에 독실한 기독교인인 문창극 국무총리 지명자도 일제의 한반도 식민 지배와 남북 분단 그리고 6. 25 전쟁 등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이같은 그의 역사적 인식이 크게 물의를 일으키자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는 신문에 광고까지 내어 다음과 같이 그를 두둔하고 있다.
“우리는 문창극 지명자가 기독교 신앙으로 더욱이 장로라는 신분을 고려할 때,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40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한 것과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70년 동안 고난당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듯이 대한민국의 근대사의 아픈 역사도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발언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임을 밝힙니다.”
세상만사 모든 일이 신의 뜻이라는 문창극의 주장은 성경적이고 신학적으로 옳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같은 세계관적 입장을 불교는 존우화작인설[尊祐化作因說)’ 또는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이라 한다. 이러한 입장을 불교에선 삿된 세계관의 하나로 적극 비판한다. 현재에도 바라문의 신의론(神意論)은 힌두교의 다른 이름으로 인도 사람에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 등의 세계관이 대동소이한 것이다.
불교가 동아시아로 소개된 이래 한국인의 깊은 의식 속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사상은 업보(業報)와 윤회사상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도 악재가 겹쳐 일어나거나 뜻하는 바가 제대로 안 풀리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라고 한탄한다. 또는 ‘내 전생에 무슨 업이길래’라고 하거나 ‘자업자득(自業自得)’ 그리고 ‘옷깃만 스쳐도 500생의 전생 인연’ 등의 말을 자연스럽게 되뇌인다. 이럴 정도로 한국인에겐 업과 관련한 전생과 내생의 윤회사상이 불교의 영향으로 깊게 남아있다.
불교 출현 이후로 업 사상은 모든 인도종교의 사상처럼 이야기된다. 하지만 인도종교마다 설명하는 내용이 다르다. 인도를 넘어 기독교나 이슬람교 또는 유교 등의 종교도 불교와 같은 업보 사상과 윤회사상이 없다. 하지만 인도에서 붓다 당시에 이미 서로 다른 인도 종교집단 간에 업에 관한 다양한 견해가 오고갔다. 이는 불교 출현에 즈음하여 이미 업 사상이 중요한 위치로 대두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왜 업보 사상이 대두되었는가? 인간사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다. 도대체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잘 살고 어떤 사람은 못살고, 어떤 사람은 잘 생겼고 어떤 사람은 못생겼고, 어떤 사람은 착한데 일이 잘 안되고, 어떤 사람은 나쁜 일만 골라서 하는데도 일이 잘되고 호의호식한다. 예를 들면, 성인이며 선인이며 정의파인 백이와 숙제는 산중에서 굶어 죽었고 반대로 도척이라는 악당 두목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 잡듯이 빼앗고 사람의 간을 회쳐 먹을 정도로 포악 방자하였으며 수천 사람의 도당을 모아 천하를 횡행하였지만 제명을 누리고 살았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하지만 당대가 아닌 죽고 난 후 또는 몇 십 년 또는 몇 백 년, 나아가 천년 이후에나 진실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이를 보면 세상은 공평하지 않게 보여진다. 근본적인 불평등의 문제가 항상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개개인을 넘어서도 세계는 끊임없이 대립과 갈등, 억압과 착취가 그치지 않고 핵무기의 개발, 전쟁, 살상과 학살, 강간과 강탈, 병고, 무고한 어린아이들의 학대와 죽음, 약자 또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 독재자들의 횡포와 같은 도저히 정당화하기 어려운 악이 횡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신의 뜻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운명처럼 정해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인가?
불교가 일어날 때에 세상은 지역을 막론하고 대개 이같은 세 개의 세계관을 견지하였다. 이에 반해 불교는 이같은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업보로 새롭게 해석해 인간사와 세상사를 설명하였다. 이는 붓다의 깨달음의 내용인 연기법(緣起法)과 관련해 있다. 때문에 경전에서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바로 업보(業報)를 아는 사람이다."라고 한다.
2) 업보설의 세계관적 위상
왜 세상사와 인간사가 다양하고 복잡하게 일어나는가는 철학과 종교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종교나 철학에서에서도 나름 설명하고 있다. 불교는 "업(業)에 의해 세상이 움직이고, 업에 의해 사람이 살아간다"는 경전의 언명(言明)처럼 업보설로 대응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에 있어 불교 흥기 당시의 다른 종교에서는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새롭게 출발하는 불교는 어떻게 비판하고 검토하고 있는지 초기경전 <도경(度經)>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경전의 전반부만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유행하시면서 승림의 급고독원에 머무셨다. 그 때에 세존께서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외도들의 세 가지 건네주는 것[度處]이 있으니 ... 남을 위해 설명하지만 아무 이익도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셋인가?
맨 먼저 어떤 사문․바라문은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
‘사람이 하는 일은 일체가 다 숙명(宿命)으로 인해 지어졌다.’
또 어떤 사문․바라문은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
‘사람이 하는 일은 일체가 다 절대적인 존재[尊祐]가 지은 바이다.’
또 어떤 사문․바라문은 이와 같이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
‘사람이 하는 일은 일체가 다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다.’
그 중에서 만일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사람이 하는 일은 일체가 다 숙명으로 인해 지어졌다’고 하여 그렇게 보고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곧 그들에게 가서 ‘여러분, 진실로 사람이 하는 일은 일체가 다 숙명으로 인해 지어졌다고 그렇게 보고 그렇게 말하는가?’라고 묻겠다.
그들이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다시 그들에게 말하겠다.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모두 산목숨을 죽이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일체는 다 숙명으로 지어진 것이라 죽여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러분은 모두 주지 않는 것을 가지며 사음(邪淫)하며 거짓말하고 나아가서는 삿된 견해를 가진 사람이다. 왜냐하면 일체는 다 숙명으로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나 여러분이 참으로 일체는 다 숙명으로 지어진 것이라고 본다면 자기 생활 가운데[內因內]에는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해서 도무지 적극적인 의지도 없고 방편도 없을 것이다. 여러분이 만일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해서 진실 그대로 알지 못하면[如實知] 곧 바른 생각을 잃을 것이요 바른 지혜가 없으면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사문의 법으로써 그와 같이 말한다면 곧 바른 이치로 그 사문이나 바라문을 항복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문에서 ‘사람이 하는 일은 일체가 다 숙명(宿命)으로 인해 지어졌다.’는 ‘숙작인설(宿作因說)’이라 한다. 요즘의 말로는 숙명론 또는 운명론이다. 다음의 ‘사람이 하는 일은 일체가 다 절대적인 존재[尊祐]가 지은 바이다.’는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로 신의론(神意論)이나 신의 섭리론(攝理論) 또는 창조론(創造論)이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하는 일은 일체가 다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다.’는 ‘무인무연설(無因無緣說)’로 우연론(偶然論)이다. 이러한 3가지 세상과 삶의 입장을 불교는 ‘3종 외도설(外道說)’이라 한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 상 처음의 ‘숙작인설’만을 인용하였지만 불교의 비판적 검토는 동일하게 반복된다. 먼저 숙작인설의 운명론은 세상사나 인간사 모든 것은 숙명으로 이미 정해져 있다는 세계관이다. 예를 들면 인간사가 타고난 사주팔자에 이미 정해져 있다거나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타고 난 팔자소관이라 생각하거나 또는 모든 것이 과거의 지은 바에 따라 결정되었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렇게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를 믿는 사람들은 정해진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점쟁이나 역리사를 찾기도 한다. 이렇게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게 되면 인생사를 모두 운명으로 돌리고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해서 적극적인 의지나 노력도 없고 그리고 방편도 쓰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행위에 대한 윤리적 책임성도 애매해지게 되는 문제가 있다.
다음으로 ‘사람이 하는 일은 일체가 다 절대적인 존재[尊祐]가 지은 바이다.’는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인데 여기서 존우(尊祐)는 달리 자재천(自在天)으로도 한역되었다. 자재천은 고대 인도의 창조신인 이쉬바라(Īśvara)을 말한다. 세계 창조의 전지전능한 신이며 그의 뜻대로 세상을 주관하고 있어 신의설(神意說) 또는 신의 섭리론이나 창조론이라고도 한다. 현재 불교에 이웃해 있는 기독교 사상과 거의 비슷하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대로 기독교의 경우를 검토해보면 더 이해가 쉽다. 기독교의 신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후 그에 뜻대로 또는 계획대로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 흔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신이 주관(主管)하고 있다거나 역사(役事)하고 있다는 표현, 또는 그러한 신의 뜻에 따른 사역(使役)을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크게는 창조와 심판 그리고 종말과 구원이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한다.
기독교에서 운명론의 신학적 용어인 ‘예정론(豫定論)’이 오랫동안 이야기되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모든 사람은 아담과 이브의 원죄 때문에 운명적으로 모두 죄인이 되어 있다. 그러면서 신은 세상을 다스리고 있기에 그의 뜻에 따라 인간의 길흉화복이 있고 이러한 신의 뜻을 돌이키기 위한 기도나 미사와 같은 신앙행위가 강조된다.
신이 세상을 다스리는 데 어느 정도인가는 <신약>에 “하늘에 나는 두 마리 새도 떨어뜨려 시장에 내다 파는 것도 신이 허락하지 않다면 가능하지 않다”는 성경 구절이 있을 정도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에서는 어디까지가 신의 뜻이고 어디까지가 인간 의지인가 하는 문제가 현재까지도 기독교 신앙인을 괴롭히고 있다.
기독교에서 신의 뜻에 따른 섭리와 인간 의지의 양립문제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으며 그것을 기독교 신학에서 호신론(護神論: Thiodicy)이라 한다. 이렇게 되면 앞의 숙작인설의 운명론처럼 신이라는 절대자 뜻에 따라 세상만사가 유지되고 진행되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인간과 세상 또는 역사를 변화시키려하는 여지가 크게 줄어든다. 인간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계획하고 변화시키려는 적극적인 의지나 노력도 약하게 되고 그리고 과감한 방편도 나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신이 이 세상에 개입하고 관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사도 결국 신의 뜻에 의한 것으로 되어 그 책임성도 애매해지게 된다. 어떻든 간에 인간은 신이 계획하고 진행시키고 있는 심판과 종말이 인간의 문제이지만 인간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속수무책으로 오직 기도와 함께 결국에는 인간 스스로가 아닌 특정한 존재인 신이나 예수의 선택에 의해서만 구원이 있다하여 그의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하는 일은 일체가 다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다.’는 무인무연설의 우연론은 인간사 모든 것은 원인도 조건도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고방식이다. 즉 인간사는 앞의 두 가지에 의한 것도 아니고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因緣)이나 인과(因果)도 아닌,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우연히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또한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해서 적극적인 의지나 노력도 없고 그리고 방편도 쓰지 않게 된다. 다만 인생사를 우연에 맡기게 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행위에 대한 책임성도 애매해지게 되는 문제가 있다.
불교는 이같은 운명론도 신의론도 그리고 우연론도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부정한다. 운명적으로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의지로 다시 변화시키거나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이 되어 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 인간사이지만 인간과 세계의 문제는 인간 스스로 관여 개입할 수 없는 외적인 힘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밖에서 인간세계를 주관하는 주재신(主宰神)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사고방식도 인간의 자율적인 도덕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이는 전지전능한 절대자에 의한 세계통치라면 인간의 주체적인 의지 작용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경우에 따라서 인간은 신의 전지전능 속에 놓여있어 결국 신의 꼭두각시나 연출하는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3) 불교 업보설의 대비적 의미
기독교가 1,000년 동안 유럽사회를 지배 장악하던 시기를 ‘중세암흑시대’라 한다. 이어 15세기 중엽부터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났다.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유럽에서는 하나같이 기독교의 신본주의(神本主義) 세계관과 인간관을 비판하고 인간의 존엄성 및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인문주의(Humanism) 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 새로운 인간성으로 이탈리아의 젊은 인문주의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a, 1463~1494)는 그의 저서「인간의 존엄성」에서 “인간은 자기의 운명을 조정할 수 있는 자기의 주인”이라고 선언한 것은 기독교 유럽의 역사에서 유명하다. 그는 다른 인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고 인간이 주체가 되어 인간과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같은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선언은 현대인 또는 불교인이 보면 당연한 말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기독교 신본주의가 지배하던 유럽에서는 감히 신권에 눌려 이러한 인간의 주체적인 발상자체가 파격적이고 힘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신본주의를 부정하는 유럽의 근대의 인간 이해는 재미있게도 그보다 2,000년 전의 인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업 사상에 접근해 있다. <맛지마 니까야>에 업 사상이 시설된 유명한 <소품 업에 대한 분별의 경>이라는 의미의 Cūlakammavibhanga Sutta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인간의 의지적 행위인 업에 대해 말씀하신다.
"중생은 스스로 자신의 행위(業)에 있어 주인/책임자이며, 스스로의 행위에 있어 원천/기반이 되며, 자신이 스스로 행위의 근거이고 뿌리이고 관계자이며 행위의 상속자이고, 스스로 행위에 의지하고 있다. 행위야말로 중생을 분별하여 천하게도 고귀하게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업보 사상이 운명론이나 신의론과 차원이 다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세상사와 인간사에 있어 어떠한 외적인 주관자도 갖지 않음이 대단히 강조되어 있음이 전제되어 있다. 대신에 인간 행위는 고스란히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 그리고 책임성의 문제에 놓여있음을 말한다. 즉 불교는 쉽게 신의 뜻으로 가져다 붙이기 전에 먼저 인간의 마음을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도 문창극 국무총리 지명자처럼 제 마음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알고 있는 듯이 말하는 이들이 많다.
부처님은 이미 2,500년 전에 ‘삼종외도설’의 비판을 통해 세상사와 인간사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새롭게 업보설을 제시하고 있다. 업보설이 얼마만큼 심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동서양의 여러 사상이나 종교를 비교해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인류 역사 상 그 누구도 아직까지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세계관과 인간관 그리고 가치관을 밝힌 것이다. 불교의 업보사상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세계관과 인간관의 문제를 극복한 것으로 다시 말해,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해서 적극적인 의지나 노력이 있고 그리고 방편이 강구되도록 하는 인간관이며 세계관임을 말해준다.
이번 호에는 부처님의 업보사상이 다른 종교와는 다른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먼저 기독교와 같은 신의설과 사주팔자를 말하는 숙명론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우연론을 중심으로 업보사상의 위치를 대비적으로 살펴보았다. 다음 호에 본격적이고 구체적으로 업설의 의미와 성격 등을 살펴보도록 한다.
-조준호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연구교수
(22) 업(業)과 윤회(輪廻)②
자업자득 자작자수가 업보의 이론
1. 업설의 근본의미
연기법(緣起法)과 업보(業報)가 밀접한 관계에 있음은 “지혜로운 자는 이와 같은 참된 이치로 업을 본다. 지혜로운 자는 연기(緣起)를 보는 자로서, 업과 그 과보(果報)를 잘 안다”라는 경구이다. 불교의 중심 가르침인 연기를 보는 자는 바로 업보를 아는 사람임을 말하고 있다. 초기경전 가운데 업을 설하고 있는 유명한 경전은 부처님께 인생사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인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된다.
“어떠한 원인과 조건 때문에 사람들 가운데는 낮고 높기도 합니까? 왜 사람들 가운데는 목숨이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하고, 병이 많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모습이 추하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합니까? 그리고 권세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가난하기도 하고 부자이기도 하고, 천하기도 하고 귀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하고 지혜롭기도 합니까?"
이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은 바로 ‘업’ 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경 전체가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나타난다. 다른 경에서도 이러한 가르침이 압축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거나 또는 되는 것이 아니라 업으로 바라문이 되기도 하고, 업으로 바라문이 되지 않기도 한다.” 또는 “업으로 인해 농부가 되고, 업으로 인해 수공업자가 되고, 업으로 인해 장사꾼이 되고, 업으로 인해 하인이 되기도 한다. 업으로 인해 도둑이 되고, 업으로 인해 무사가 되기도 하고, 업으로 인해 사제가 되고, 업으로 인해 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업은 마치 세상사와 인생사의 수레바퀴 핀과 같다는 비유로 “세상은 업에 의해 존재하고, 사람도 업에 의해 존재한다. 존재들이 업에 매어 사는 것은 마치 수레가 바퀴의 고정 핀에 매어 달리는 것과 같다”고 하여 업의 중요성을 설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업보설은 세상사와 인간사를 신이나 운명 또는 우연의 문제로 보는 것을 불합리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업보설의 입각점이다. 달리 말하면, 다양하고 복잡한 인간사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 새롭고 합리적인 대안으로 제시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업설(kammavāda : 業說)은 합리적인 ‘인간의 행위설’을 설명하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흔히 업을 사주팔자와 같은 어떤 운명적인 법칙처럼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부처님이 처음 의도했던 업에 대한 가르침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오히려 이러한 오해를 염려하시고 업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意圖:cetanā)를 업이라고 언명한다. 누구든 의도가 일어나면 신구의(身口意)에 의해 업을 짓는다.”
이 경구는 불교적 정의의 업설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인용된다. 여기서 업에 대한 설명어로 사용된 cetana는 적극적인 의지가 담긴 ‘의도’를 뜻하여 영어권에서도 intention, volition, will, active thought, determinate thought 등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업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말이다. 함의(含意)하는 바는 행위이되, 의지가 개입된 행위, 의도가 개입된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행위는 가치 있는 행위로서 결과[報]를 생산해낼 수 있는 행위를 말한다. 때문에 업은 항상 보(報)와 함께 이야기되며 선악(善惡)과 같은 가치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와 같이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이 언급된다. 이러한 점에서 업설을 굳이 분류하자면 신의설이나 운명설 그리고 우연설과 전혀 다른 ‘의지설’로 이름 할 수 있다.
2. 업설은 운명론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불교의 업보설은 팔자소관과 같은 운명론의 일종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를 필자는 통속적인 업보설로 규정하고 있다.
주로 <전설의 고향> 같은 민간에 내려오는 전설 등에서 그려진다. 불교의 업보설이 운명론이 아님은 자이나교의 업보설을 비판하는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초기불교경전에서 불교는 자이나교의 중심세계관인 이원론(二元論)을 비판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세계관에 바탕한 자이나교의 업보설을 비판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자이나교에서는 ‘A라는 업에 반드시 A라는 과보만이 결정된다’라는 기계적인 업보설을 주장한다. 즉 상황과 조건에 따른 과보의 가변성보다는 엄격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만이 있을 뿐이라 한다. 다시 말해, 한번 지은 죄악이나 불선업은 벗어날 수 없는 ‘기계적이고 결정론적 업보설’을 말한다. 때문에 불교에서 운명적이고 숙명론인 업보설이라 비판하는 이유가 된다. 이러한 자이나교의 기계적인 업보설은 그들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다. 영혼의 정화를 위해서는 미세한 물질과 같은 업을 물리적으로 떨쳐내는 고행이 필요하다. 즉 자이나교의 수행은 육체에 고통을 주어야 한다는 신업 중심의 업설인데 반해 불교에서는 의업의 질적 개선을 더 강조하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처럼 숙명론적 업보설을 비판한 부처님의 의도는 중생들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인생의 문제를 변화시키려는 실천의지를 깨우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불교의 적극적인 실천론은 다음의 압축적인 경문이 유명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행위(業)를 하였으되 그 행위와 아주 똑같은 과보(果報)만을 받는다라고 한다면 그에게 더 나은 성스러운 생활 또는 종교적인 수행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지은 이전에 지은 업에 따른 고(苦)를 멸진(滅盡)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행위에 대한 과보(果報)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종교적 삶은 가치가 있게 되고 고를 멸진할 기회가 있게 될 것이다.”
자이나교와 대비되는 불교의 업보설은 업에 대한 과보에 있어 상황과 조건, 그리고 노력 여하에 따라 달리 나타날 수도 있다 한다. 즉 가변적인 결과의 가능성을 강조하고 있다. 경전 비유에 의하면 농부가 한 나무의 씨앗이라도 밭의 상태와 김매기와 같은 밭의 관리 등에 따라 그 결과로서 수확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한 줌의 소금이라도 컵이나 세숫대 그리고 저수지라는 각각 다른 조건에 집어넣어졌을 때 그 결과로서 짠 맛의 정도도 또한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밭의 상태와 김매기 등의 밭의 관리나 컵이나 세숫대 그리고 저수지라는 상황과 조건은 바로 연(緣 : paccaya)을 말한다. 업보의 인과(因果)에 함께 연(緣)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이 불교 행위론의 큰 특징이다.
3. 업설은 적극적인 의지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처님은 스스로 “업론자(業論者)이며, 업과론자(業果論者) ․ 정진론자(精進論者)이다”라고까지 규정한다. 업보설은 초월자의 힘을 빌어 인과를 조절하고 해결하겠다고 하는 통속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자율적인 윤리적 실천으로 인과를 조절하고 해결해야함을 말한다. 이에 대한 비판은《가미니경(伽彌尼經)》과 그에 대한 빠알리 대응경전에서 잘 보여준다. 당시 인도 사회에는 인생사를 업보라는 인과보다는 주술과 기도를 통한 주법으로 해결하려는 비과학적인 종교와 기복신앙이 사회 일반에 널리 성행하고 있었다. 양재초복(讓災招福)의 타력신앙으로 갖가지 종류의 주문, 주술, 의례, 그리고 기도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앙행위와 함께 인간의 운명을 주관한다는 유신종교의 절대자에 기도하는 것 또한 인과업보를 모르는 소치라 한다. 엠브로즈 비어스(1842~1914)는 ‘기도하다’라는 말을 그의 사전에서 “지극히 부당하게도 한 명의 청원자를 위해서 우주의 법칙을 무효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익살스럽게 정의하는 맥락도 그것이다. 불교의 업보설과 관련하여 재미있게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업보는 기본적으로 자업자득(自業自得) 또는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성격을 갖는다. 경전에서 “자신이 지은 업은 부모도 형제자매도 일가친척도 그리고 친구나 지인들도 대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은 시람 만이 받는 것이다”라는 것이 업설이다. 이는 셈족의 종교관념인 원죄(原罪)와 상속죄(相續罪) 개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상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원죄나 상속죄라는 종교관념에 따른 예수의 대속(代贖)이라는 구원 개념 또한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가 없다.
불교가 일어나기 전 인도 종교에서도 창조신인 뿌르샤(Purṣa)에 의해 인간차별제도인 사성계급(四姓階級)이 천부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셈족의 <성경>에 나타나는 유대 선민주의(選民主義)도 마찬가지로 신에 의한 민족 간 차별이다. 유대교나 기독교 등의 셈족종교에서도 아담과 이브의 원죄에 의해 모든 인류가 이미 상속죄를 타고 나 죄인으로 정해져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죄를 특정한 한 존재인 예수에 의한 대속이 가능하다는 식의 교리는 자업자득의 이치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비합리적이고 독단(dogma)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의 <성경>에서 신은 “조상들의 죄악을 아들 손자들을 거쳐 삼대 사대까지 벌한다” 라고 한다. 하지만 불교의 업설에 의하면 이러한 연좌죄(連坐罪)는 성립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 두 사람에 의한 죄가 다른 사람에 모두 전가되는 연좌죄는 물론 예수와 같은 한 존재의 희생 또는 죽음에 의해 다른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부정된다. 불교의 자업자득이나 자작자수는 자신의 업이 다른 사람에게 전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행위 당사자로서의 도덕적 책임의 소재를 분명하게 하고 있다.
최근 필자가 보는 신문에서 얼마 전 월드컵 축구 경기에서 상대선수의 어깨를 깨문 일을 용서했다는 글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술이 업보설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나게 했다. ‘밀양’에서 전도연은 아들 유괴범을 용서해주기로 마음먹고 교도소를 찾았다. 그런데 범인은 ‘주님의 이름으로 참회했다’면서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용서한 적이 없는데 가해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스스로 용서한 것이다.”(경향신문 2014-06-29 [여적]축구장의 용서) 지금도 세상은 무자비한 학살자가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켜 사람들을 살상한다.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용서받은 듯 세상을 활보하며 호위호식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세상사 ‘신의 뜻대로’이니 신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겨 살상의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편리함이 내장되어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맨정신으로 생각해보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여기서 인간의 위치는 무엇인가? 윤리적 책임의 문제는 어떻게 설명해야하는가? 그래서 이전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선교사에게 “너나 잘하세요”라는 명대사를 남기고 셀프 용서란 건 없음을 직접 보여준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부처님의 문제의식도 마찬가지였다. 삼종외도설로 절대신의 뜻대로 세상만사가 이루어진다는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과 같은 신의론(神意論)을 비판하고 부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의지를 가진 인간은 신의 뜻에 의해 세상이 진행된다는 식의 부조리한 세계관의 문제를 명료하게 깨우쳐주고 있다. 특히 초기경전의 《도경(度經)》에서 자재화작인설과 업설과 관련하여 인간행위의 적극성과 책임성의 문제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인간과 세상은 본질적으로 각기 자신의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지 인간 스스로 관여 개입할 수 없는 외적인 힘의 영역으로 설정될 때 인간의 자율적인 도덕은 파괴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설한 불교의 업설의 대의이다.
조준호/한국외대 인도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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