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이후 랍비 유대교와 피 없는 속죄 지침의 한계
유대 민족의 기억 속에서 ‘티샤 베아브’(תִּשְׁעָה בְּאָב, Tishah Be’Av, “아브월 아홉째 날”)는 서로 약 656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난 두 성전의 파괴가 하나의 애도 속에서 만나는 날입니다. 솔로몬이 세운 제 1성전은 주전 586년경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군대에 의해 불탔고, 헤롯이 웅장하게 증축한 제 2성전은 주후 70년 로마의 티투스 군대의 끈질긴 공격에 의해 예루살렘 성은 함락됨과 동시에, 성전과 함께 화염과 돌무더기 속으로 무너졌습니다. 제단의 불은 꺼지고, 제사장들에 의해 드려지던 제사의 희생 제물의 피가 더 이상 흐르지 못하게 되었고, 노래는 멎었으며, 순례자들의 발걸음으로 가득하던 성전 뜰에는 연기와 탄식만이 남았습니다.
그 이후, 유대 공동체는 단순한 건물의 상실보다 더 깊은 본질적인 질문 앞에 서야만 했습니다. 대제사장도 지성소도 제물도 없다면, 토라가 명한 속죄일을 어떻게 살아 낼 것인가? 랍비 유대교의 답은 회개와 기도와 자선과 토라 연구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답의 역사적 무게를 인정하지만, 성경적 요구인 속죄의 효력에 대한 충분성에 대한 질문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1. 성전 파괴가 남긴 물음
성전이 사라졌을 때 유대 공동체는 무너진 제단 앞에서 신앙의 언어를 다시 짜야 했습니다. 그들의 역사적 고민과 해결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결코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토라가 명한 속죄의 요소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따져 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AD 70년 로마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니, 속죄일의 핵심인 대제사장의 속죄 제사를 통한 성전 봉사는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랍비 유대교는 테슈바(תְּשׁוּבָה, Teshuvah, "돌아옴과 회개"), 테필라(תְּפִלָּה, Tefillah, "기도"), 체다카(צְדָקָה, Tzedakah, "의로운 구제"), 토라 연구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재구성했습니다. 이것은 정체성의 상실이라는 큰 재난 속에서 공동체를 보존한 역사적 응답이었고, 회개와 정의와 자비의 가치를 진지하게 붙들려 했던 그들의 진지한 노력이었습니다.
아보트 데라비 나탄 판본 에이(אָבוֹת דְּרַבִּי נָתָן נוּסַח א׳, Avot de-Rabbi Natan Version A, "랍비 나탄의 조상훈계 A본", 핵심 전승은 이르지만 현존 형태는 대체로 서기 6–8세기 편집으로 추정) 4장은 성전 파괴를 보며 슬퍼한 예호슈아 벤 하나니아(רבי יהושע בן חנניה, Rabbi Yehoshua ben Hananiah, "랍비 예호슈아", 1세기 후반–131년경)에게 요하난 벤 자카이(רבן יוחנן בן זכאי, Rabban Yohanan ben Zakkai, "라반 요하난", 서기 1세기 활동)가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며 게밀루트 하사딤(גְּמִילוּת חֲסָדִים, Gemilut Hasadim, "사랑의 행위")이라는 또 다른 속죄 수단이 있다고 위로했다고 전합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베라호트(תַּלְמוּד בַּבְלִי בְּרָכוֹת, Talmud Bavli Berakhot, "바빌로니아 탈무드 축복 편", 서기 5–6세기경 최종 편집) 26b는 정해진 기도 시간을 성전의 상번제와 대응시키며, 바빌로니아 탈무드 메나호트(תַּלְמוּד בַּבְלִי מְנָחוֹת, Talmud Bavli Menachot, "바빌로니아 탈무드 소제 편", 서기 5–6세기경 최종 편집) 110a는 제사 법을 연구하는 일을 마치 제사를 드린 것처럼 말합니다. 이 문헌들은 회당과 연구와 자비 행위가 성전의 기억을 이어 가도록 만든 랍비적 논리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성경 해석에서 이 도덕적 가치가 곧 레위기 16장의 예식을 대체할 성경적 권한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호세아 6장 6절의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언약적 사랑 없는 위선적 제사를 꾸짖는 예언자적 비교이지,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제사와 속죄일의 피를 폐지하는 새 법전이 아닙니다. 시편 51편도 상한 심령을 강조한 뒤 의로운 제사를 다시 말합니다. 열왕기상 8장의 성전 봉헌 기도는 포로지에서 드리는 회개 기도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지만, 속죄일의 성소 정결 규례를 인간이 임의로 변경해도 된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또한 성경의 모든 속죄 행위에 예외 없이 동물의 피만 사용되었다고 과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레위기 5장 11–13절은 가난한 사람이 고운 가루를 속죄제로 가져올 수 있게 했고, 히브리서 9장 22절도 "거의 모든 것"이 피로 정결하게 된다고 표현합니다. 그럼에도 연례 대속죄일에 관해서는 레위기 16장이 수송아지와 여호와를 위한 염소의 피를 명시하며, 레위기 17장 11절은 하나님이 피를 제단에 주어 생명을 위한 속죄가 되게 하셨다고 밝힙니다. 제한된 예외를 들어 속죄일의 명시적 명령 전체를 무효화하는 것은 본문의 범주를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따라서 회개와 기도와 자선이 제사 없는 시대의 속죄를 스스로 완성한다는 주장을 토라의 직접 가르침처럼 제시한다면, 그것은 성경 본문이 전승에 부여하지 않은 대체 권한을 부여하는 셈입니다. 회개는 반드시 필요하고 선행은 회개의 열매이지만, 어느 것도 대제사장과 속죄 제물과 피의 자리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공로가 속죄의 원인이 되는 순간, 은혜는 무용지물이 되고, 보상과 배상이라는 시장적 거래로 전락하고 맙니다.
2. 랍비 유대교가 붙든 성경의 언어
속죄를 위한 랍비들의 재구성은 아무런 근거 없이, 또는 즉흥적으로 자아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호세아 6장 6절의 인애, 호세아 14장 2절의 입술의 열매, 시편 51편의 상한 심령, 열왕기상 8장의 포로지 기도를 통해 성전 밖에서도 회개하는 사람을 들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강조했습니다. 예호슈아 벤 하나니아가 성전의 멸망을 슬퍼했을 때, 요하난 벤 자카이가 사랑의 행위를 또 다른 속죄의 길로 제시했다는 전승도 이런 해석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가르침에는 그리스도인이 배워야 할 진실이 있습니다. 입술의 예배와 정의 없는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며, 회개 없는 제의는 공허합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위선적 제사를 꾸짖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친히 명하신 속죄일의 대제사장과 피와 성소 정결을 인간이 다른 제도로 대체할 권한까지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선행이 귀하다는 명제와 선행이 속죄 제물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명제는 본질적으로 서로 완전히 다릅니다.
3. 피 없는 속죄를 논할 때 피해야 할 두 과장
첫째 과장은 구약의 모든 속죄가 예외 없이 동물의 피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5장 11절부터 13절은 극빈자가 고운 가루를 속죄제로 가져올 수 있게 했고, 히브리서 9장 22절도 ‘거의 모든 것’이 피로 정결해진다고 표현합니다. 둘째 과장은 이 제한된 예외를 근거로 대속죄일의 피가 본질적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6장은 그 날의 성소 정결과 백성의 속죄를 위해 수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명시합니다. 정직한 논증은 예외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 예외가 속한 범위를 넘겨 사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비판은 유대인의 회개를 조롱하거나, 선행의 가치를 낮추는 방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질문은 훨씬 더 좁고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속죄일에 세우신 대제사장과 희생의 피와 성소 정결을 누가 완성하는가? 신약 성경은 그 답을 인간의 참회 강도나 선행의 총량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신 한 분에게서 찾습니다. 다음으로 계속..., 샬롬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