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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삶의 본질을 직격해 들어가는 우직한 시 의식
돌돌돌 흘러가는
산개울 앞에 두고
어쩌면 희게 희게
닦아온 네 모습이
이제 막
속인(俗人)을 보고
파르라니 놀라다
―〈산도라지꽃〉 전문
1984년 펴낸 조동화 시인의 첫 시조집 《낙화암》 서두에 실린 시 〈산도라지꽃〉 전문이다. 첫 시조집 맨 앞에 올린 시라면 시인에겐 각별한 의미를 지녔을 것. 그로부터 25년 후 유심작품상 시조 부문 후보로 오른 시인들이 지난 한 해 동안 발표한 시를 쭉 읽다 조 시인 편에 이르러 나는 “속인을 보고 파르라니 놀라”는 산도라지꽃을 그대로 보는 양 싶었다. 아니 이미 속인이 된 내가 그 시의 맑고 깨끗함, 소박함이 밀어 올리는 순수의 깊이에 파르르 떨었다.
첫 시조집 서문에서 박재삼 시인은 “시조라는 가락도 어디 한 군데 파격 없이 무리를 빚지 않았고, 또 그 속에 마지막 떠오르는 맑은 정조를 살렸다는 것이 두드러진다”고 평하며 “좋은 시조시인을 얻었다는 뜻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다”며 자신의 일처럼 좋아했다. 요즘 방종의 자유시에서는 물론 완결된 정형의 시조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마지막 떠오르는 맑은 정조’를 조 시인의 오늘의 시에서 보는 것은 멸종에 이른 생물을 보는 것 같은 떨림 그 자체였다.
정말 너무 오래 잊은 채 지냈구나
허망한 세상 불빛에 눈 멀고 마음 홀려
밤이면 저 하늘 가득 반짝이는 별들을.
모깃불 밤새 타던 내 어린 고향 마당
은하 이마에 젖는 멍석 위에 누우면
무엔지 그냥 그리워 잠 못 들곤 했더니.
채우면 채울수록 허전한 삶에 매여
우러러 넉넉했던 먼 날의 그 순수를
아, 정말 너무나 오래
버려두고 살았구나.
―〈별을 보며〉 전문
이 시를 수미상관(首尾相關)으로 놓은 것은 물론 우리가 잊은 채, 버려둔 채 지내온 순수에 대한 그리움을 강조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순수와 그리움은 시의 처음이자 끝이요 영원한 화두다. 때문에 그것을 강조하며 직격(直擊)해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 예스럽고 촌스럽고 아마추어 같아 보이기 십상이다.
또 웬만한 용기와 뚝심 없이 본질로 직격해 들어가단 이카루스의 밀랍 날개처럼 녹아내려 추락할 수 있고, 본질의 핵을 보는 순간 눈멀어 동어반복이나 중언부언으로 끝나고 마는 시들을 우리 시단은 많이 보아왔다. 때문에 요즘에 시의 본질을 정공법으로 직격해 들어간 시를 찾아보긴 여간 힘들지 않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촌스럽고 우직하게 이 시는 시의 본질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있다. 진솔하게, 시조의 자연스런 운율을 타고. 더구나 시조의 구조적 미학으로서는 힘든 수미상관의 기법을 취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첫 수의 초장과 마지막 수의 천금(千金)이어야 할 종장의 무게를 같이 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시의 본질적 측면에서는 물론, 둘째 수에 잘 드러나 있듯 우리의 현실적 삶에서도 그리움과 순수는 초지일관 시와 삶의 고향이요 본질 아니던가. 이런 시와 삶의 본질을 갖은 기법을 활용하면서 자연스레 떠올리는 시에 독자들은 물론 시인들이 더욱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다.
“큰 바다/ 밤새도록/ 타이르고/ 떠나간 뒤// 흠과 티/ 하나 없이/ 누그러진/ 가슴팍을// 도요새/ 가는 발목이/ 찍어 넣는/ 첫 흔적!”(〈첫 흔적〉 전문) 최근 발표한 이 시에서도 조 시인은 우주 삼라만상에 찍힌, 우리네 마음에 찍힌 그리움과 순수의 ‘첫 흔적’, 본질을 찾고 있다.
“썰물이 버리고 간/ 한 개 빈 소라껍질// 오가는 발길에나/ 차이는 줄 알았더니// 보아라, 달 밝은 이 밤/ 찰랑찰랑 괸 달빛!”(〈소곡(小曲)〉 전문) 그 ‘흔적’은 “한 개 빈 소라껍질” 같은 허당이 아니다. 이미 지나간 회고조 고풍스러움도 아니고 오늘 우리네 삶의 가식적 치장도 아니다. 발길에 차이는 빈 깡통, 허섭스레기가 아니라 달빛이 찰랑찰랑 괸 껍질.
그것은 오늘도 우리가 품고 맑고 아름답게 사는 삶의 본질이요 실상 아니던가. 그리움과 순수는. 조 시인은 197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30여 년간 그렇게 시와 삶의 본질을 직격해 들어간 시를 써오고 있다. 좌고우면하며 시세에 따르지 않는 우직하면서도 나름대로 치밀한 시의식으로.
방치(放置), 장고(長考) 뒤의 눈부신 포석
해 아래서는
크든 작든 저마다의 푼수만큼
지난밤 어둔 그늘 한 자락씩 나누어
우리 모두 제 발목에다 아프게
꿰찰 수밖에 없지만,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누워
온갖 물상(物象)들의 허물 가슴으로 거두며
더욱 낮은 바다를 향해
홀로 제 아픈 등 밀고 가는 강은
그림자가 없다.
―〈강은 그림자가 없다〉 전문
〈시론(詩論)〉을 연작시로 쓸 정도로 조 시인은 그리움과 순수의 본질에 이르기 위한 시작법에도 깊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 발목에다 꿰찰 수밖에 없는 삶의 어둔 그늘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그 그늘을 모조리 싸안으면서도 아프지 않은 시가 될 수 있을까. 아픔을 발목에 꿰차고 빠져 죽는 나르시시즘 시가 아니라 남의 아픔까지 끌어안고 건네주는 대승적 시가 될 수 있을까. 시가, 아니 삶이 어찌하면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하여 인간의 때, 의미에 그늘지지 않은 온갖 물상들의 환한 세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시 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시다.
우리 현대시사에서 김춘수 시인이 소위 ‘무의미시’를 실험하며 이르고자 했던 시의 해탈의 경지를 조 시인도 노리고 있음인가. 해서 위 시도 시조의 운율과 음보, 3장 구조를 아슬하게 비켜나는 선상에 놓은 것일까.
“섣불리 녀석을 풀려고 하지 말라/ 제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일라치면/ 난마는 난마와 얼려 더 큰 난마가 될 뿐.// 녀석을 만나거든 저 홀로 놓아두라/ 두었다 매정하게 한 번 더 방치하라/ 마침내 녀석은 지쳐 제 매듭을 풀리니.”(〈난마(亂麻)〉 전문)
제목을 그대로 ‘시론’으로 삼은 조 시인의 어떤 시보다도 더 시론적인 시다. 시작법에 대한 오랜 고민 끝에 터져나온 확신이기에 어조도 자신만만한 경구조다. 대상을 시인에게서 놓아주는 방법, 사물을 인간적 의미에서 해방시켜 사물 자체로 놓아두는 방법은 “방치하라”다. 대상에 한 생각 꽂히면 그냥 놔두지 못하고 책상머리에서 더덕더덕 인간의 의미, 자신의 그림자를 덧씌운 작위(作爲)의 역겨운 시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봄은/ 흉내가 역겹고/ 여름은/ 자충(自充)이 싫었다// 저마다/ 대국(對局)이 끝나/ 돌아가는/ 언덕 위에// 비로소/ 장고(長考)를 접고/ 놓아 보는/ 눈부신/ 포석(布石)!”(〈구절초〉 전문). 티 없이 푸른 하늘 아래 가을 산모퉁이에 피어 눈부시게 제 존재를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구절초. 구절 마디마디 바둑판 같은 우주 한 귀퉁이에서 자신의 본디를 알리는 구절초의 청초한 이미지가 선명하게 잡히는 시다. 흉내도, 그렇다고 자충도 거부하며 외롭고 질박하지만 본디의 모습 그대로 피어난 들국화. 그렇다. 좋은 시는 그저 ‘방치(放置)’가 아니라 씨줄 날줄의 바둑판 같은 우주의 장고 끝에 익어 저절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익은 열매들이
후둑후둑 떨어져내려
오히려 더 적적한
가을 산을 오르노라면
어디쯤 이승의 끝이 있을 것만 같았다
한 톨 작은 목숨 위에
크고도 높은 사유(思惟)
투명한 여울 속에 조약돌 드러나듯
하늘 뒤 또 한 세상이
보일 것도 같았다
―〈가을 산을 오르며〉 전문
익어 후드득 떨어져내리는 것들을 보며 이승의 끝을 보고 있다. 투명한 가을 하늘 속을 들여다보며 장고 끝에 “하늘 뒤 또 한 세상”을 열고 있는 시다. 이승 저승의 속된 구분이 아니라 생시에 하늘 뒤 또 한 세상이 열리고 있는 “크고도 높은 사유”의 경지를 넘보고 있는 것이다.
지는 꽃 피는 꽃이 어우러진 천지간에
주체 못할 기쁨으로 떠나는 신행(新行)이 있고
쓸쓸히 이승을 뜨는 꽃상여도 있어라
바위마저 꿰비칠 듯 투명한 이 가을날
익은 상수리 다시 부리께로 놓이는데
목숨이 육신을 벗고 가는 곳은 어디뇨
구절초 눈이 부신 맞은편 등성이로
불현듯 적막을 깨고 풀무치 날아간다
미답(未踏)의 그 한쪽 끝을 저는 안다는 듯이
―〈가을 언덕에서〉 전문
주체 못할 기쁨과 슬픔이 그냥 방치되고 있는 시다. 난마의 매듭을 작위적으로, 친절하게 다 풀어놓아 이승 저승이 따로따로 펼쳐지고 있다. 시조의 정형으로 잘 갈무리돼 있지만 크고도 높은 사유의 지경에는 아직 들지 못한 시다. 첫 수와 둘째 수가 마지막 수에 오르는 사다리 구실에 그친 것도 그렇고, 그러했기에 마지막 수도 방치 끝의 장고(長考), 문득 하늘에서 떨어진 돌 같은 긴장되고 눈부신 포석의 경지에 이르진 못한 시로 보인다.
그래도 전문을 옮겨 놓은 것은 조 시인이 지향하는 시의 세계, 그리고 거기에 이르기 위한 시작법의 궤도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여느 시 같은 경지를 벗어난 조 시인의 비범한 시세계과 그 작법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이런 시에 대한 끝없는 반성과 장고 끝에 ‘구절초의 눈부신 포석’도 놓였을 것이며, “하늘 뒤 또 한 세상”도 열렸을 것이다.
먼 하늘 저쪽에도 날 아는 이 있는가
오늘 이따금씩 흰 구름이 건너와서
몇 송이 환한 안부(安否)를 내 쪽으로 부리네.
―〈수련(垂蓮)〉 전문
〈가을 언덕에서〉는 알 듯 말 듯하던 “미답의 그 한쪽 끝”, 그리고 〈가을 산을 오르며〉에서는 보일 듯 말 듯하던 “하늘 뒤 또 한 세상”과 이 시에서는 직접 소통을 하고 있다. 이 세상의 연꽃과 저 세상의 흰 구름이 서로 안부를 묻고 있다. 연못 위의 연꽃과 하늘의 흰 구름 이미지를 순하게 겹쳐지게 하면서. 혹은 단청(丹靑) 속의 연꽃 그림에 환한 구름 햇살 겹쳐지게 하면서. 이때 시인과 연꽃과 흰 구름은 하나가 된다. “먼 하늘 저쪽”의 공간과 “오늘 이따금씩”의 시간은 하나의 시공(時空)으로 겹쳐진다.
2003년 조 시인은 다섯 번째 시집 《낮은 물소리》를 펴내며 “그 옛날 거문고의 명인 백결 선생이 살았다는 낭산과 이웃한 이곳에 살면서, 내 노래도 언젠가는 천년 전의 그 떡방아 소리 정도는 돼야겠다는 생각을 자주했다.”고 말했다. 천년고도 경주에 살면서 천년의 시를 일구고 싶다는 이 말과 〈수련〉 등 조 시인의 좋은 시들을 보면 미당 서정주 시인이 말한 ‘영통(靈通)’이나 ‘풍류(風流)’가 홀연 떠오른다.
미당은 풍류나 영통을 우주 만물이 불치의 등급 없이 하나의 유기체로 어울려 통하는 우주관, 또 과거, 현재, 미래가 등급 없이 흐르는 영원관으로 보고 그런 삶을 살며 시를 썼다. 조 시인도 이런 미당의 경지와 같은 듯하나 불치의 등급 없는 천생의 시인으로서의 무위자연의 선(仙)적인 미당과 그 방법론은 달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로 세로 축 위의 세밀한 장고 끝에 어느 한 순간 단순하게 내려놓는 포석, 선(禪)적인 방법론을 택한 것 같다. 조 시인의 시선집 《눈 내리는 밤》의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이호 씨가 밝혔듯 “오랜 점수(漸修)가 돈오(頓悟)를 어느 순간 도래시키듯” 하는 시작(詩作) 방법을.
씨줄 날줄의 과녁, 천년의 시 영통(靈通)의 삶
나무는 나면서부터 그리움을 안고 산다
비 오고 눈 내리고 바람은 드세지만
젖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가슴 속의 동그라미.
키가 하늘에 닿고 몸통이 굵어 갈수록
병보다 더 아프게 그리움도 자라난다
한 해에 꼭 한 겹씩만 그려 넣는 고뇌의 무늬.
낙뢰(落雷)가 짓이겨도 보여 주지 아니하고
칼이 목을 쳐도 털어놓지 않던 비밀
톱으로 밑동을 잘라야 과녁처럼 떠오른다.
―〈나이테〉 전문
조 시인의 시 세계의 뿌리와 시작(詩作) 방법을 육성으로 그대로 드러낸 시로 읽힌다. 시의 본질은 그리움, 순수를 드러내는 것. 그것의 시원(始原)과 오늘을 겹쳐지게 하는 것. 나만이 아니라 남, 삼라만상과 소통하게 하는 것. 하여 그런 감흥으로 오늘을 살게 하는 것. 이것이 천년의 시이고 영통하는 삶 아니겠는가.
그런 그리움, 순수의 동심원이 어찌 쉽게 드러날 수 있겠는가. 병보다 더 아프게 한 해 한 겹씩 그려지는 동심원이 어찌 쉽게 토설될 수 있겠는가. “젖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가슴 속의 동그라미”를 보고 그리려 시인은 그 밑동, 본질로 직격해 들어가라 한다. 들어가서 보는 것은 과녁. 시공이 씨줄과 날줄로 마주치는 지점, 공시태(共時態)와 통시태(通時態)가 마주치는 순간이다.
“해안은 둥두렷이/ 활등인 양 휘어지고// 수평(水平)은 또 아득히/ 시위처럼 팽팽한데// 뉘라서 광명을 쏘아/ 새아침을 여는고”(〈영일만(迎日灣)〉 전문) 지명(地名) 그대로 해맞이 명소를 그린 시다. 천년의 시를 원(願)으로 세운 조 시인의 시는 순간과 영원이 마주치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꿰는 과녁이 정확히 설정돼 있다. 활등처럼 휜 해안과 시위처럼 팽팽한 수평선. 팽팽히 긴장된 우주가 쏘는 햇살은 수수만년 오늘도 새 아침을 열고 있다.
잔잔한 강물 위 허공에 못 박힌 듯
물총새 문득 날아와
정지비행을 한다
팽팽한 일촉즉발의
숨 막히는
한 순간
표적이 잡히자마자
온몸을 내리꽂아
홀연히 그 부리로 잡아채는 은비녀,
비린 살 마구 파닥이는
저 눈부신
화두(話頭)여!
―〈강가에 앉아〉 전문
일촉즉발의 팽팽한 긴장으로 숨 막히게 읽어 내려가다 “저 눈부신/ 화두여!”라는 감탄 종결에서 그만 맥이 탁 풀려버렸다. ‘또 그놈의 화두라는 어정쩡한 관념의 사기인가’라며. 그러나 이내 “비린 살 마구 파닥이는” 살아 있는, 정말 오랜만에 싱싱한 화두와 만날 수 있었다. 물총새 부리에 물린 파닥이는 비린 생명, 은비녀의 화두에 물총새와 피라미와 햇살과 광물체와 시인과 함께 나도 이내 화살에 꿴 듯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강가에 앉아’라는 제목처럼 정태적인 명상의 한 순간에 우주에서는 또 얼마나 역동적인 시공을 연출하고 있는가. 첫째 수에서는 우선 강물과 허공의 두 평행선을 긋는다. 그 수평의 평행 공간에 문득 점 하나 찍듯 물총새 한 마리 날아든다. 불현듯 찾아든 한 생각. 그러나 여기에 시간은 없고 공간만 있다.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은 생물이 아니듯 시간에 의해 구체화되지 못한 생각 또한 죽은 관념일 터.
둘째 수에서는 그런 평행의 공간에 수직의 시간이 들어온다. 내리꽂히며 들어와 시공의 좌표가 완성돼 아연 우주만물이 함께 어우러지는 다이내믹한 상황이 연출된다. 물총새뿐 아니라 시인도 우주 전체도 시인의 생각도 시를 읽는 독자도 내리꽂히며 “비린 살 마구 파닥이”며 신선하게 살아 오르는 시공간.
하여 이 시는 바슐라르가 말 한 소위 ‘수직적 순간’으로서의 시적 시공간, ‘포에지’를 떠올린다. “한 편의 짧은 시 속에 전 우주의 비전과, 하나의 혼의 비밀, 그리고 여러 대상의 비밀을 동시에 드러내는 순간화된 형이상학으로서의 포에지”가 그대로 이 같은 시를 두고 한 말은 아닐는지.
돌보다 더 단단한 깊음을 곧장 뚫고 한 차례 굴절도 없이 먼 우주 가로질러 사람들 가슴가슴에 와 닿는 빛이 있다
눈썹 밑 두 눈으론 감지할 수 없는 빛, 바위나 흙벽으로도 가로막지 못하는 빛, 마음눈 밝은 자들이 무릎 꿇고 받는 빛
백에 아흔 아홉이 감지조차 못해도 햇빛과 달빛이 아닌, 별빛은 더욱 아닌, 잘 부신 질그릇마다 찰랑찰랑 담기는 빛
자그마치 3조 광년 천억 은하 건너와서 굳이 잠긴 빗장을 따 마음 문 열어젖히고 미망의 어둔 골짝들 비추는 빛이 있다.
이번 유심작품상 수상작 〈빛〉 전문이다. “미답의 그 한쪽 끝”이 이 세상 너머 저 세상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시인과 이어지며 우주의 끝까지 나아가고 있는 시다. 수평 수직의 과녁도 벗어버리고 빛으로, 마음으로 길게 직격해 들어가고 있는 시이다. 그래서일까. 시의 형태도 한 수가 행, 연 구분 없이 한 행으로 길게 놓인 산문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조의 자수율과 음보율에 더욱 충실하고 있다. 산문시에서 더욱 운율에 충실해야만 산문과 구분되듯이 이 시 또한 정형의 운율에 충실하면서 시조임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와 마지막 수에서는 우주의 먼 시공을 가로질러 지금 여기에 닿는 빛을 그리고 있다. 그 빛은 천억 은하의 공간과 3조 광년의 시간을 건너온 빛이다. 한 차례 굴절도 없이 먼 우주 가로질러 우리 가슴, 마음속에 직격해온 시원(始原)의 빛, 순수 자체로서의 빛이다.
둘째와 셋째 수에서는 그런 빛을 쉼표 찍어 가며 중언부언 사설조로 설명하며 구체화시키려 하고 있다. 햇빛도 달빛도 별빛도 아닌 그 빛, 잘 부신 질그릇같이 마음눈 밝은 자만이 받을 수 있는 빛. 그 빛은 시 말미에 붙은 주석에 따르면 “우주의 끝 가장자리에 절대온도로 얼어 있다는 거대한 물층”에서 나온 빛이다. 여기서 무궁무진의 시공은 관념이 아니라 실재가 되는 것이다. 추상이 아니라 구상이 되는 빛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시작(詩作) 전략이 사설조 설명으로 나아가게 한 것일 게다.
조 시인의 이런 시의식과 시작 방법론이야말로 시조의 현대화의 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천년 만년의 시이면서도 항상 새로운 시. 돌보다 더 우직한 믿음이면서도 그 위에 난초 한 촉 막 피우는 시. 수평 수직으로 정확하게 과녁을 겨냥하면서 마침내는 그 표적마저 순수와 그리움으로 증발되는 시. 시조라는 정형의 그릇이 우주 너머까지 담는 시. 무거운 생각이 깃털같이 가볍게 날아오르는 시.
하여 3조 광년 천억 은하 우주 창생의 가슴을 감동으로 꿰뚫는 시. 그런 시와 삶의 순수와 그리움을 향한 직격을 나는 조 시인의 좋은 시들에서 본다.
이경철 | 1955년 전남 담양 출생. 동국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문학박사). 저서로 《천상병, 박용래 시 연구》와 공저로 《대중문학과 대중문화》 《천상병을 말하다》, 편저로 《꽃필 차례가 그대 앞에 있다 : 한국 현대시 100년 기념 명시·명화 100선 시화집》 《시가 있는 아침》 등이 있음.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문화전문기자, 《문예중앙》 주간으로 일하며 다수의 현장비평적인 평론과 산문을 발표했다. 현재 문학 사업과 지원 모임인 ‘문학과 문화를 사랑하는 모임’ 부이사장, 솔출판사 주간, 동국대 문창과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