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갱이/엄명자
내가 여섯 살 때인가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고, 고향인 문경 마원리를 떠나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던 마사우 아재의 권유였다. 월남전에 다녀온 마사우 아재는 누구보다 세상의 소식을 많이 아는 분이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겠다던 삼촌의 약속 때문이었는지, 장남인 아버지는 자유롭게 고향을 떠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삼촌은 서울로 떠났다. 결국 우리 가족은 다시 문경으로 돌아가야 했다. 자연적으로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말 봄방학 때 까지 괴산에서 살았다.
칠성면 외사리 마을 앞으론 달천이 흘렀다. 달천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우리들은 나룻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어른들 틈에 끼여 놀거나, 올갱이를 잡아 돈을 벌곤 했다. 올갱이는 ‘다슬기’의 방언인데, 경북지역에선 ‘고디’라고 부르기도 한다.
올갱이는 우리들에게 보물 같은 존재였다. 강물 속을 들여다보면 새까만 올갱이가 돌이나 바위에 바글바글하게 붙어있었다. 돌을 뒤집어 보면 더 많은 올갱이가 흰색 빨판을 내보이며 침입자의 방문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우리들은 손으로 올갱이를 쓰윽하고 훑어서 준비해간 통에 옮겨 담곤 하였다. 올갱이를 잡으러 나간 날 밤에는 꿈속에서도 올갱이를 잡았다. 두 손 가득 올갱이를 훑어서 옮겨 담는 꿈이었다.
그렇게 잡은 올갱이를 중간상인들에게 팔았다. 그날 잡은 올갱이의 양을 저울에 달고 돈을 받을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거기서 받은 돈으로 학용품도 사고, 학교에 들고 가서 저축도 하였다. 예전엔 학교에서 저금을 거두었다.
우리가 장소를 떠날 때는 무언가를 뒤에 남기고 가게 된다. 우리가 가버린다 해도 우리는 거기에 머문다. 거기에 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우리만의 그 물건들이 거기에 있다. 어느 장소에 간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여행을 간다는 것이다. 내가 머물렀던 곳, 내 안에 무언가를 두고 온 곳, 의젓한 내가 울컥한 내가 되던 곳, 그곳은 어디일까? 내가 나를 만나고 싶은 이 무렵. 꼭꼭 접어 두었던 마음의 지도를 펼쳐본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 의 글귀처럼 올갱이를 잡던 기억은 ‘내가 나를 만나는 그 곳’이 될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곳에 다시 가보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곳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을 찾아 가는 동굴의 작은 문과도 같은 곳이었다. 에고와 수많은 생각들로 파묻혀 현존에서 멀어진 자신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여행지와도 같은 곳이다. 영적지도자인 ‘에크하르트 톨레’의 말처럼 그곳엔 ‘순수 존재’가 뛰어놀던 곳이기 때문이다.
올갱이를 잡던 그 기억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던 성공경험이기도 하고, 세상 여기저기 숨어있는 보배로운 이야기들에 감동하는 마음의 불씨이었으며, 세상의 진리를 찾아내는 확대경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올갱이를 잡던 달천과 내가 살던 외사리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고, 산막이 옛길을 찾아온 관광객의 행렬이 단풍만큼 화려하다. 쌉쓰레한 물내가 풍기는 올갱이 해장국이 물컹한 부추 맛 뒤에 숨어 아쉬움을 달래준다.
첫댓글 교장선생님~
글을 읽으며 저도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 마을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갑자기 따뜻하고 행복해지네요~^^~♡
돌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으니 실타래 풀리듯 다른 기억이 저절로 따라옵니다. 천천히 그런 이야기들을 글로 써 볼까합니다. 선생님은 요즘 어떤 이야기를 쓰고 계실지 궁금해 집니다. 멋진 가을 행복하게 보내세요~
새로움을 발견 했습니다. ㅎㅎ
교장선생님, 응원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교장선생님을 처음 뵌지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멋진 모습으로 멋지게 학교 경영하시는 모습 좋아보이십니다. 보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