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명소- 사직공원 풀장 (1975)
사직공원 내에 노천식으로 만들어진 이 풀장은 487평의 규모로 1971년에 개장,
많은 시민이 이용하였는데 1986년까지 운영하다가 폐쇄되었다.
사라진 명소-시민관 (1970)
대인시장 입구에 있었는데 이 극장이 철거되고 한미쇼핑 건물이 들어섰다
사라진 명소-동방극장 (1948)
충장로 1가 무등극장 자리에 있었는데 많은 시민이 이 극장을 이용하였다.
사라진 명소-사직공원 전망대 (1950)
시민들의 휴식처 였으나 1972년 철거되고 그 자리에 팔각정이 들어섰다.
사라진 명소-태봉산 (1967)
조선 인조 2년(1624) 이 괄(李 适)의 난 때 임금과 왕비가 피난 중에 왕자를 얻었으나
어린 왕자는 잔병이 많아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근심 끝에 왕비가 백일 불공을 드리자 꿈에 도사가 나타나
『왕자의 태를 묻은 곳은 땅 기운이 불순하여 태를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니
광주 고을 복판에 있는 여의주(如意珠) 모양의 둥글고 작은 산에 태를 옮기고 금을 태와 함께 묻으라』하였다.
도사의 말대로 왕자의 태를 이곳에 이장하였더니 병이 나았다고 하는데
태봉(胎峰)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후 1929년 7월 광주지방에 극심한 가뭄이 들자 촌로(村老)들은
태봉산에 남몰래 쓴 무덤 때문에 가뭄이 들었을 것이라는 미신에 현옥되어 산 꼭대기를 파헤쳤다.
이때 태를 담은 백자 항아리와 태실(胎室),
그리고 1돈 5푼의 금박(金箔)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태를 묻었다」는 뜻의 태봉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풍수지리상 광주의 지형은
이무기가 용이 되어 여의주를 물고 하늘에 오르는 화룡승천(化龍昇天)의 형국인데,
태봉산은 바로 여의주에 해당되는 산이었다고 한다.
북구 신안동에 있었던 태봉산은 높이 30m에 약 3,000평 정도의 둥글납작한 산이었는데
1967년 이 산을 깎아 경양지를 매립하여 없어지고 말았다. (현 광주역 부근)
왼쪽하단에 있는 사진은 태봉산에서 출토된 태실로 민속박물관 앞뜰에 전시되고 있다.
사라진 명소-미니 골프장 (1947)
계림동 경양호(경양방죽) 옆에 있었는데 산책 나온 시민들이 즐겨 이용 하였다.
사라진 명소- 경양지의 겨울모습 (1946)
얼어붙은 경양호에서 스케이트를 즐기고 있는 모습
사라진 명소-물이 빠져있는 경양지 (1946)
물이 빠진 경양호를 농부가 바라보고 있다.
사라진 명소-만수때의 경양지 (1946)
광주시에서 1967년에 태봉산을 헐어 메워 없어진 경양방죽은
조선 세종 때에 축조한 저수지였다.
이 저수지에는 인간과 개미의 사랑과 의리가 깃든 이야기가 전해온다.
광주에 김 방(金 倣)이라는 성품이 어질고 착한 농부가
흙탕물에 떠내려 오는 커다란 개미집을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물결이 미치지 않는 무등산 기슭에 개미떼를 옮겨다가 살게 하고 먹을 양식까지 가져다 주었다.
그런지 얼마 뒤부터 매일아침 일어나 보면
마당 가운데 쌀더미가 쌓여 있어 가난하던 김씨는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때마침 광주 고을의 창고에 있던 쌀이 밤마다 줄어들므로
원님은 범인을 찾다가 이 소문을 듣고 농부를 데려다 문초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허공에서『그가 범인이 아니다』하는 소리가 계속 들려오므로 그를 석방하였다.
무사히 집에 돌아온 김씨의 꿈에 개미가 나타나
「생명의 은인인 당신에게 은혜를 갚고자 저희들이 한 짓」이라고 쌀의 이동 경위를 밝혔다고 한다.
이에 김씨는 자기 재산을 털어 이곳에 방죽을 쌓고 경양지라 하였다고 한다.
이 경양지는 수심 약10m, 면적 약 5만평 이었으며,
1967년 태봉산을 깍아 매립하여 현재의 시청사와 인근 주택지를 조성했다
사라진 명소-무덕전(년대미상)
도청 건너편 구 전남 경찰청 기동대 옆에 있었는데 금남로 확장공사시 철거되었다.
앞마당에 있던 재명석등은 전남도청내 자리로 옮겨졌다.
중앙 여객자동차 주식회사 (1976)
금남로 소재 현재의 남선빌딩 자리에 있었으며 76년 9월 16일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이전되었다.
1977년 3월 (주)송광교통으로 상호가 변경되었다.
광주 여객자동차 주식회사 (1976)
금호고속 전신인 광주여객자동차(주) 전경이다.
광주역내의 구름다리 (1930)
대인동 소재 현재 동부소방서 자리에 있었는데
지금의 광주역으로 옮겨갈 때까지 역내에서는 구름다리를 이용하였다
광주천 풍경 (1965) |
지금의 광주대교에서 천교 사이의 광주천의 모습이다.
뽕뽕다리 (1960)
현재의 학림교가 가설되기 이전에는 방림동 주민이 이 다리를 많이 이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