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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은 어디에 있는가
— 상화의 ‘들’에서 생태시대의 ‘봄’을 찾다
설준원
(이상화기념사업회 감사)
1. 시대적 패러다임의 전환과 이상화 시의 '오독(誤讀)' 극복
하나의 문학 텍스트나 역사적 사건이 지닌 사상적 지평은 고정된 과거에 박제되어 있을 수 없다. 100년의 유구한 역사적 시차를 관통한 유산은, 당대의 특수성에 갇힌 일차적 해석을 넘어 새로운 시대적 패러다임과 학문적 요구에 따라 부단히 재해석(Re-interpretation)되어야 한다. 이는 과거의 유산에 새로운 사유의 숨결을 불어 넣는 작업이자, 문명사적 전환기 속에서 인류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공생의 이정표와 더 나은 미래학적 가치를 도출해 내는 학문적 당위성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지금 지질학적으로 약 6,500만 년 동안 지속되어 온 '신생대(Cenozoic Era)'의 막바지이자, 인간의 파괴적 탐욕이 지구를 뒤흔드는 '인류세(Anthropocene)'의 절망 끝에 서 있다. 환경철학자 토마스 베리는 인간이 지구를 착취하던 신생대적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지구 공동체의 모든 생명체가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맺는 새로운 지질시대를 ‘생태대(Ecozoic Era)’라고 명명한 바 있다. 코로나19라는 전 지구적 재앙을 겪은 21세기의 인류에게 이 생태대로의 진입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절대적 전환이다.
이러한 거대한 문명사적 패러다임의 변화 속에서 이상화의 시를 바라볼 때, 우리는 새로운 시대적 변화에 따른 재해석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그동안 상화의 시가 문단의 일부 문인들에 의해 오독되었던 것은, 인간중심주의에 머물러 있어서 다가올 생태중심시대를 인지하지 못하고 구시대적 평가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1923년 9월 『백조(白潮)』 3호를 통해 발표된 「나의 침실로」는 상화의 영성적인 기도이다. 그러나 문자적으로만 보는 일부 문인들에 의해 퇴폐성이 짙은 낭만주의 시로 해석이 되고있는 것은 여성편력의 선입견과 관능적 속성으로만 작품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상규는 “성모당을 배경으로 쓰인 작품임에도 세속적이고 관능적인 연애 시로 평가되고 있는 마돈나를 오지 않은 애인을 애타게 부르는 환상적 요소로 병적 관능적 속성으로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김한성은 동서 비교문학적 시각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기도 했다.
“이상화(1901-1943)의 「나의 침실로」(1923.9)가 앤드류 마블(1621-1678)의 「그의 수줍은 연인에게」(1681), 보들레르(1821-1867)의 「어느 마돈나에게」(1857)와 비교된 맥락을 이해하고, 「나의 침실로」를 동서 비교문학적 시각에서 바라보려 했다. 송욱과 김춘수는 앤드류 마블의 「그의 수줍은 여인에게」를 인용하여 「나의 침실로」가 형이상학파 시의 미달태임을 주장하였는데, 그들의 주장의 근거에는 당대 유행하였던 T. S. 엘리엇과 신비평의 아우라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반해 조영복과 김학동은 「나의 침실로」를 보들레르의 「어느 마돈나에게」와 비교하여, 텍스트 해석의 편폭을 넓혀 해석학적 실증주의를 추구하려 했다.”
“「나의 침실로」에서 시적 화자가 그의 침실로 초대하고자 한 주체가 신여성인데 반해 실제 저자의 삶은 구여성과의 관계에 놓여 있기에, 「나의 침실로」는 당대 유행한 자유연애의 정사(情死)를 추구하였다는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시적 화자의 자기 분열적 텍스트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상규 역시 그의 저서 『두 발을 못 뻗는 이 땅이 애달파』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며 문학적 해석의 오류를 지적한 바 있다.
“1920년대 상화는 문단의 선두에서 서구 문학사조를 수용하면서도 토속적인 화법으로 또 심미적인 은유와 상징으로 자유시 형식을 다양하게 시험한 시인이다. 그의 토속적인 시적 표현으로 인해 후세 사람들의 많은 오독의 흔적이 남기게 되기도 하였다. 이상화의 삶과 문학텍스트에 대한 재해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어쩌면 필자 스스로가 이상화에 대한 굳은 신념을 독자들에게 설득하기 위한 것이라는 게 훨씬 더 솔직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오류와 구시대적 평가는 코로나 시대를 겪지 못한 결과론적 판단이다. 당시 배경이 일제 강점기에 억압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상화의 의도로서밖에 볼 수 없었음이었을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과 공생을 유지해야만 문제 해결에 앞선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21세기의 현실에서는 퇴폐적이고 관능적이라는 집착된 사고에서 탈피하여, 일제강점기라는 암흑한 시대정신과 대구라는 지역적 모태를 넘어 한반도와 제3세계까지 울려 퍼진 상화의 저항 정신을 '생태학적 영성(Eco-spiritualism)'의 관점으로 재평가해야 한다.
본 발표자는 이미 『생태대 시 담론』(2022년)을 집필하면서 일제강점기라는 과거의 틀에 갇혀 있던 이상화를 21세기 지구 기후 위기 시대와 생태 시대를 구원할 '영성적 생태 시인'으로 표현한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구식 신비평과 인간 중심적 자유 연애관, 혹은 단순한 '계급주의적 저항시'나 '정치·사회적 조국 광복의 염원'이라는 도식적 틀에 갇혀 있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의 생태학적 재평가를 시도하고자 한다.
2. 1926년의 시대적 배경과 '들(자연)'의 생태적 수탈
이상화 시인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 1926년(『개벽』 70호)은 일제강점기 역사에서 매우 기만적이고도 잔혹한 시대적 전환기였다. 이 시가 발표된 연도와 그 당시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연결해 보면, 상화가 왜 단순한 정치적 슬픔을 넘어 "들을 빼앗겼다"고 절규했는지 그 필연적인 생태적 이유가 명확히 드러난다.
첫째로, 1926년 '산미증식계획'의 극치와 대지(들)의 수탈 시대로서 1920년대 일제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뒤로는 한국의 대지를 철저히 파괴하고 수탈하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강행하고 있었다. 특히 1926년은 제2차 산미증식계획이 대대적으로 갱신·확대된 해이다. 일제는 일본 본국의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한반도의 논과 들을 오직 '쌀 생산 공장'으로만 취급했다.
수리조합을 강제로 만들고 저수지를 파며 자연적인 물길을 뒤흔들었는데, 이는 대자연의 자생적 생태계를 인간의 탐욕(제국주의 자본)으로 규격화하고 훼손한 대표적인 사건이다. 시에 등장하는 "가르마 같은 논길", "삼삼한 바람", "지심(잡초)을 매던 그 들"은 단순한 목가적 풍경이 아니라, 바로 그해 일제의 농토 수탈과 영양 착취로 인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신음하는 우리 대지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둘째로, 농민의 몰락과 생태적 고향의 상실 (토막민과 유랑민)이다.
산미증식계획과 토지 조사 사업의 여파가 극에 달한 1926년 무렵, 수많은 조선의 농민들은 땅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그마저도 버티지 못해 만주와 연해주로 떠나는 유랑민이 되었다. 도시로 흘러든 이들은 땅을 파고 움집을 짓고 사는 '토막민(土幕民)'이 되었다. 인간이 대지(들)에 뿌리를 내리고 자연과 교감하며 공생하던 오랜 전통이 1926년에 이르러 완전히 파괴된 것이다. 화자가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라며 미물에게 애틋하게 말을 건네는 것은, 이미 땅과의 연결고리를 잃고 쫓겨나기 직전인 조선 농민들의 '생태적 고향 상실'에 대한 깊은 슬픔과 저항이 투영된 것이다.
세째로, 6·10 만세운동과 시대적 무력감, 그리고 순수 생명력으로의 회귀
1926년 6월에는 순종의 인산일을 기해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1 운동 이후 겉으로는 문화통치를 외치며 속으로는 민족의 혼을 말살하던 일제에 대한 분노가 다시 폭발한 해였다. 하지만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인해 정치가나 지식인들이 주도하던 해방 운동은 서서히 한계와 무력감에 부딪히고 있었다. 이처럼 인간 사회의 정치적 저항이 일제의 총칼에 막혀 좌절되는 삼엄한 감시 속에서, 상화는 인간의 힘이 아닌 '대자연의 거대하고 신성한 순환력(봄)'에서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본 것이다. 인간은 총칼로 묶어둘 수 있어도, 대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봄의 활력은 일제도 막을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3.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생태학적 분석과 재해석
① '들(Nature)'의 재발견: 식민지 국토를 넘어선 생명 공동체의 모태
기존 평론에서 '들'은 빼앗긴 주권이나 국토라는 정치적 공간으로만 해석되었다. 그러나 문명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구시대적 시각을 거두고 생태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들'은 단순한 부동산이나 영토(Real estate)를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생명을 여위하는 '대지(Gaia)의 태반'이자 신생대적 파괴로 인해 신음하는 ‘생명 공동체의 터전’이다.
시의 서두에서 화자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묻는다. 여기서 '봄'이라는 대자연의 순환적 생명력은 인간의 정치적 억압(일제강점)과 상관없이 도래한다. 대지는 봄을 맞아 살아나려 하지만, 그 땅을 딛고 선 인간(화자)은 국권을 빼앗겨 영성적·신체적으로 위축되어 있다. 이는 인간의 탐욕과 권력투쟁(제국주의)이 자연의 신성한 생명 순환 고리를 오염시키고 균열을 내고 있음을 고발하는 생태적 저항으로 읽을 수 있다.
② 푸른 웃음과 푸른 설움: 물아일체(物我一體)와 생태적 영성
「나의 침실로」의 '마돈나'를 성모당을 배경으로 한 구원의 영성으로 보았듯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대자연 역시 화자에게 단순한 풍경이 아닌, 영적 교감의 대상인 것이다.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을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거나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라는 구절은 땅과의 직접적인 육체적 접촉을 통한 '생명적 연대'를 갈구하는 행위이다. 호미를 쥐고 흙을 파는 행위는 노동을 넘어 대지의 신성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생태적 제의(Ritual)이다.
또한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 꽃에도 인사를 해야지"에서 화자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미물인 나비, 제비, 그리고 들꽃과 수평적 관계를 맺는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에서 느끼는 "가르마 같은 논길"의 시각적 이미지는 인간의 핏줄과 대지의 물줄기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태-영성적 물아일체의 경지를 보여준다.
③ "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생태적 길잃음과 근대 문명 비판
시의 후반부에서 시인은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라며 자아분열적 탄식을 뱉는다. 이는 단순히 빼앗긴 주권에 대한 절망을 넘어, 자연의 순리(봄)대로 살지 못하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서구식 '근대 문명'에 휘말려 생태적 고향을 잃어버린 인간의 근원적 소외(Alienation)를 뜻한다. "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라는 탄식 역시, 근대 자본주의적 수탈에 휘말려 방황하는 당대 유랑민과 지식인의 영적 고독을 대변한다.
자연은 변함없이 푸른 활력을 뿜어내는데("푸른 웃음"), 인간은 그 풍요 속에서 홀로 슬퍼한다("푸른 설움"). 대자연의 생명력과 소외된 인간의 대비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른 인간 중심적 문명이 필연적으로 맞이할 영적 파산을 경고하는 생태시의 선구적 모습이다.
4. 결어 : "봄조차 빼앗기겠네", 신생대적 파멸에서 생태대의 구원으로
마지막 연의 절규인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는 단순한 정치적 패배주의가 아니다. 21세기 생태시대의 관점에서 이 구절은 가장 강력한 '생태적 위기의식의 천명'이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인간의 탐욕이 '들(자연)'을 훼손하여 인간과 대지의 영적 교감이 끊어진 상태에서, 생태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신생대적 파괴에 머물면 인류에게 더 이상 생명(봄)은 없을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인 것이다.리는 코로나 시대 이후의 '생태적 영성' 연결을 통해 인간이 대자연을 통제할 수 없음을 절감했다.
이상화에게 '들을 빼앗긴다'는 것은 단순히 영토를 점령당하는 것을 넘어, 인간이 대지와의 영성적 연결고리를 차단당하는 재앙을 의미한다. 대지(들)를 잃어버린 인간은 자연이 무상으로 베푸는 생명의 에너지(봄)조차 온전히 누릴 수 없게 된다는, 즉 '환경과 생태의 파괴는 곧 인간 영성의 파멸'로 이어진다는 대전제를 100년 전에 이미 간파한 것이다. 상화는 인간의 정치적 압제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대자연의 순환력(봄)을 목도하며, 인간과 자연이 다시금 영성적으로 결합해야만 이 지구적 위기에서 구원받을 수 있음을 노래했다.
상화의 생가에서 가까운 성모당(대구 중구 남산동 225-1번지)에서 천주교인들의 기도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상화 자신도 함께 동참하며 성모마리아에게 간절한 구원의 기도를 드리는 소리가 「나의 침실로」에 표현되었다. 시에서 ‘마돈나’를 ‘마리아’, ‘아씨’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성역(聖域)에서 세속적인 연인으로 표현하여 친근함을 신성화한 것이다. 혹자는 육체적 퇴폐주의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마돈나’를 부르는 환상적인 요소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 억압된 사회 환경에 대한 저항하고, 하느님의 대리자 예수님을 대신한 성모마리아에게 오롯이 기대어 도움을 청하는 청원 시로 보는 것이 더 접근성이 있다.
결국 상화가 성모당에서 빌었던 '간절한 구원의 기도(나의 침실로)'와 들판에서 호미를 쥐고 대지와 하나 되려 했던 '생명 제의(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는 신생대의 파멸적 문명에서 벗어나 생태대라는 새로운 구원의 시대로 나아가고자 했던 영성적인 몸부림으로 철저히 연결된다.
이상화는 우리들 현대시 초창기에 서구의 낭만주의 사조를 『백조』 동인과 더불어 선구적으로 수용하면서 사회주의적 문학 태도를 견지하며 국권 회복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토로했던 위대한 시인이다. 저항을 기조로 한 그의 시 정신 토양이 되었던 비슬산 자락인 앞산과 그가 살고 있었던 서성로에서 남쪽으로 바라보이는 성모당의 언덕은 그의 문학 산실이자 배경 역할로 본다.
따라서 상화의 시 정신은 대구 분지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뿜어 올렸지만,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사정거리는 실로 한반도를 건너 제3세계로 뻗쳐 있다. 이제 상화의 문학은 대구 분지와 비슬산, 앞산의 토속적 자연 역동성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이 공존과 공생을 유지해야만 문제 해결에 앞선다는 '생태-공생적 영성 시학'으로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
1. 독립정신의 '박제'가 아닌 '영원한 부활'입니다
역사는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한 세기 전의 도식적 세계관으로는 다가올 미래의 격변을 담아낼 수 없다. 100년의 시간을 넘어선 역사적 유산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형성(Re-contextualization)하는 일은, 구시대의 인간 중심적 모순을 극복하고 더 나은 공존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발전적 요청이다. 과거의 저항 정신을 오늘날의 생태적 영성으로 승화시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재평가야말로, 인류 문명이 영적 파산을 면하고 지속 가능한 생명 공동체로 전진하게 하는 지적 동력이 된다고 본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가’ 시 탄생한 지 100년이 흐른 지금, 역사의 유산을 재평가하는 것은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계를 향해 지평을 확장하는 생성적 실천이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행해지는 역동적 재발견만이 과거의 기억을 미래의 예언으로 변모시키며, 문학이 시대와 호흡하며 인류의 영적 발전을 견인하는 진정한 생명력을 획득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본 발표문을 듣고 보면, 100년 가까이 우리 민족의 뼈아픈 역사와 선열들의 고결한 희생을 상징해 온 시들이기에, 이를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혹여 그 숭고한 독립정신과 가치를 흐리거나 퇴색시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와 거부감이 드는 것은 당연하고도 건강한 반응이다. 청중의 그러한 날카로운 질문에 대해, 이 재평론이 왜 독립정신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치를 위대하게 확장하는 길로 볼 수 있다.
저항 시들을 오직 '일제강점기'라는 100년 전의 특수한 시대 상황 안에만 가두어 둔다면, 역설적으로 이 시들은 교과서 속에만 존재하는 '박제된 역사'가 될 위험이 있다. 일제가 물러간 오늘날의 청중에게 "독립 정신을 기억하자"는 말은 자칫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 다가올 수 있지만 당시 선열들이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조국의 산천과 들판'을 오늘날 우리가 지켜야 할 '지구와 대자연'으로 확장할 때, 선열들의 정신은 과거에 멈추지 않고 현재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살아있는 정신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과거의 적이 '일제'였다면, 오늘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은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이다. 이 재평론은 선열들의 저항 정신을 이어받아, 현대의 거대한 위기에 맞서 싸우자는 '21세기형 독립운동'으로 그 정신을 계승하는 일인 것이다.
2. 우리 문학을 '세계적 수준의 보편 철학'으로 격상시키는 일입니다
그동안 한국의 저항시는 해외 문학계에서 "한국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식민지)을 알지 못하면 깊이 공감하기 어렵다"는 한계에 부딪히곤 했습니다.
보편적 가치 획득: 하지만 질문자님이 제안하신 평론처럼 이 시들을 '성경적 구속사'와 '인류 공동의 과제인 생태주의'로 읽어낼 때, 이 시들은 전 세계 그 어떤 나라의 독자가 읽어도 깊은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세계 문학·철학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이 단순한 영토 회복을 넘어 '인류와 지구 공동체를 구원하고자 한 거대한 철학적 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증명해 내는 작업이 바로 이 재평론입니다.
3. 선지자적 시인들에 대한 가장 높은 예우입니다
이상화 시인은 당대의 좁은 현실만을 보고 시를 쓰지 않았을 것이고, 동서양의 철학을 종횡 무진하고 우주적인 스케일로 시대를 앞서 갔다고 본다. 100년의 미래를 내다 보며, 시 속에 생태학적인 서사가 읽히고, 자연과의 거대한 물아일체가 나타나는 것은 상화의 의식이 이미 시대를 초월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는 단순히 "독립을 염원했다"로만 끝내기보다, 그 속에 담긴 깊은 생태적 선견지명을 발굴해 내는 것이야말로 현대 문학인들이 도달해야만 하는 정신의 높이에 걸맞은 가장 격조 높은 예우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