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중순까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특별전시되었던 러시아의 예르미타시 미술관의 그림(프랑스 화가 작품)을 봤을 때, 즉각적으로 연상되었던 다른 나라의 미술작품이 있었습니다.
벌써 1달 전에 특별전시는 끝났지만, 그때 무척 흥미롭게 구경했던 그림인지라 늦었지만 소개해 봅니다.
1. 인형을 안고 있는 소녀 vs. 개를 안고 있는 어린 아이
(왼쪽 사진) 인형을 안고 있는 소녀 (장바티스트 그뢰즈 (1725-1805): 1758년, 캔버스에 유채)
18세기 중엽에 프랑스 화가들은 서민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파리 빈민가 출신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인형과 컵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있다. 어색한 자세로 앉아 자신의 소중한 보물을 지키고 있는 소녀의 토실토실하고 매끈한 손이 주변 사물과 대비되어 더욱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오른쪽 사진) 개를 안고 있는 어린 아이 (기원전 1세기, 고대 그리스 대리석상, 그리스 아테네 국립박물관)
오늘날 터키 영토인 소아시아 니싸(Nyssa)의 게론티콘(Gerontikon)에서 발굴되었다. 1922년에 난민에 의해서 아테네로 옮겨졌다. “어린 난민(little refugee)”으로 알려진 어린 아이는 목 부분에서 질끈 동여맨 후드 티를 입고 있는데 두 팔로는 어린 강아지를 꼭 안고 있다.
*19세기 초, 영.프.러시아 등 유럽열강의 지원으로 오스만제국(오늘날 터키공화국의 전신)의 400 여년간 지배로부터 어렵게 독립한 그리스는 세브르 조약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많은 영토 (이스탄불을 제외한 유럽쪽 오스만 제국 영토, 에게해의 섬, 소아시아(터키 본토)의 에게 해 지역인 스미나르 지역 등)를 할양받았다.
오스만 제국이 몰락해가던 1919년 그리스는 내친 김에 옛 동로마제국의 고토회복를 기치로 내걸고(오늘날 그리스 국교인 동방정교가 동로마제국의 국교였다. 현대 그리스인은 아마도 동로마제국의 역사를 그리스 역사로 삼는 것 같다.) 터키 땅 아나톨리아 반도를 침공하여 당시 아타튀르크의 국민회의(부패하고 병든 오스만제국에 반기를 든 터키 국민의 임시정부와 같은 것)가 있는 앙카라로 진격했다. 이는 당시 서유럽 강대국의 지원으로 오스만제국에 비해 강성해진 그리스가 고대 그리스가 지배했던 아나톨리아 반도(소아시아)의 지중해 연안지역을 다시 그리스 영토에 편입시켜 그리스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1919년-1922년 사이에 벌어진 그리스-터키 전쟁은 나중에 '튀르크인의 아버지'로 불린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 이끄는 국민회의의 민병대에 의해 그리스군이 완벽하게 격파되었고, 소아시아 지역에 사는 그리스인들은 터키인들로부터 엄청난 고초를 겪게 되었다. 1923년 터키와 유럽 강대국간에 다시 맺은 로잔조약 (터키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세브르 조약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다.)에 의해 에게해의 모든 섬을 그리스에 넘겨주는 대신에 아나톨리아 반도와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유럽)쪽 영토 일부)는 터키 영토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또 아나톨리아 반도의 그리스인 (약 150만명)은 모두 그리스로 추방되었고, 그리스 본토의 터키인(약 50만명)들은 터키로 추방되었다. 그리스 인이냐? 터키인이냐? 구분은 인종도 언어도 아닌, 종교(무슬림이냐? vs. 동방정교를 믿는 기독교인이냐?)였다고 한다. 위 사진 설명에서 '1922년 난민에 의해 아테네로 옮겨졌다'란 말은 바로 이 때의 사건을 압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2. 어린 시절의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공주)의 초상 vs. 소년 상 (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 대리석상, 아테네 국립박물관)
(왼쪽 사진) 어린 시절의 옐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공주)의 초상: 장루이 부아이유 (1744-1806) 추정, 1792년 캔버스에 유채
부아이유는 1771년부터 1803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면서 황실과 귀족들의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높였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인 옐레나 파블로브나는 황제 파벨1세와 황비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둘째 딸이다. 옐레나의 할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는 손녀의 이름을 옐레나로 지은 이유를 설명했다. “이 아이의 미모가 매우 뛰어나 트로이의 미녀, 헬레네의 이름을 따 옐레나로 부르게 되었다.”
(오른쪽 사진) 소년 상 (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 대리석상, 아테네 국립박물관)
라미아(Lamia, 고대 리라이아 Lilaia 지역) 근처에서 발굴되었다. 기둥에 다리를 기대고 있는 옷을 벗은 소년 누드 상. 기둥 위에는 오리가 한 마리 있다. 소년은 리본을 머리에 두르고 있고, 한 손으로 오리를 지그시 누르면서 얼굴에는 웃음을 띤 채 오리를 쳐다보고 있다.
3. 영웅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공주 (그림) vs. 스페인 라 그랑하 데 산 일데폰소 궁전의 청동상
(사진) 영웅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공주: 샤를앙드레 반 후 (1705-1765), 캔버스에 유채
그리스 신화에서 에티오피아의 왕 케페우스의 부인인 카시오페이아가 신들 앞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에티오피아에 홍수를 일으키고 바다괴물을 보낸다. 이때 카시오페이아는 자신의 딸 안드로메다를 바다괴물에게 제물로 바쳤는데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가 괴물을 물리쳐 그녀를 구하고 부인으로 삼는다.
(사진) 바다괴물에게 제물로 바쳐진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출하는 페르세우스 (라 그랑하 데 산 일데폰소, 스페인)
* 라 그랑하 데 산 일데폰소 (Royal Palace of La Granja de San Ildefonso)
세고비아 근교의 라 그랑하라는 도시에 위치한 스페인왕실의 여름궁전으로, 루이 14세의 손자로 베르사유 궁에서 태어난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를 위해 지은 궁전이다. 펠리페 5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그리워했기 때문에 이와 비슷하게 지어져 '스페인의 베르사유 궁전'이라 불린다. 엄청난 면적을 차지하는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과 그리스 로마신화를 모티브로 한 수많은 조각상, 그리고 라 그랑하 데 산 일데폰소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20개가 넘는 분수까지 펠리페 5세 통치기간인 1720년대부터 스페인을 대표하는 여름 궁전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공개되고 있다.
- 고대 그리스 신화는 유럽에서 르네상스 이후 건축, 미술, 음악을 비롯한 예술의 샘물이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중세 동로마제국 시절에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유산을 철저히 파괴했지만, 르네상스 이후 그리스.로마의 신화와 유적은 유럽인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넣어 역시 카톨릭을 국교로 삼은 스페인의 왕궁을 장식하는데도 왕성하게 응용되었다.
4. 목욕하는 여인들 (프랑스 vs. 한국의 풍속화)
아래 그림은 그림의 구도가 깜짝 놀랄만큼 너무나 비슷하다. 여인들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는 두명의 남정네, 왼쪽으로 살짝 휘어진 개울가에서 목욕하는 여인들, 오른쪽에 숲으로 우거진 약간 비탈진 언덕 등. 100 여년의 시간 차이가 있지만, 혜원의 그림이 더 애로틱한 것 같다. ^^
(사진) 목욕하는 여인들: 장바티스트 파테 (1695-1736), 캔버스에 유채
목욕장면은 파테가 즐겨 그렸던 주제들 중 하나이다. 파테의 작품은 우아한 분위기와 인물들의 화려한 복장, 가벼운 터치, 경쾌한 색조가 특징이다. 목욕하는 여인들을 훔쳐보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들을 좋아했던 당시 관객들의 관심을 끌었다.
(사진) 단오풍정(端午風情): 혜원 신윤복, 1805년, 지본 담채(紙本淡彩)
빨강 치마에 노랑 저고리를 입은 기녀가 사뿐히 그네를 타고 있는 모습, 기녀들이 속살을 드러낸 채 목욕을 하고 있는 모습과 함께 남정네들이 바위 뒤에 숨어 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그림. 바로 조선 시대 3대 풍속화로 손꼽히는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758~?)이 그린 ‘단오풍정’이다. 기생의 풍모는 도시적인 세련미가 흐르고 그것을 표현한 선이나 채색도 아주 감각적이며 그네를 타는 여인의 치마저고리가 내뿜는 화려한 원색은 배경 색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또한 두 명의 어린 승려가 바위 틈새로 엿보는 선정적인 장면에서도 시선을 각각 다른 곳을 향하게 해 그림을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하나로 엮어주고 있다.
단오풍정은 ‘월하정인’ ‘뱃놀이’ 등과 함께 국보 제135호로 지정된 《혜원풍속화첩》속에 나오는 작품으로 당시 봉건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남녀 간의 성 풍속을 과감하게 화폭에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조선 시대 사회풍속의 숨겨진 이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