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처음 일정으로 쉘부른 궁전으로 갔다. 쉘부른 궁전은 음식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설명에 의하면 쉘브른 궁전은 오스트리아 관광 중에는 반드시 보아야할 것 중의 하나란다. 이 궁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별궁으로 궁전의 주인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곳에서 궁정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쉘브룬 이라는 이름은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 도중 ‘아름다운 샘(Schonner Brunnen)’을 발견한데서 유래한단다. 궁전은 방이 1400실이 넘는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중 39실만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듣는 전통적인 가옥 중 제일 큰 규모는 99칸 집이다.
단순 비교로 14배 규모인 셈이니 상상을 초월한다.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 궁전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연말을 기해서 행사를 하는 모양으로 한창 매장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왕의 마당에서 장이 서는 셈이다. 안으로 들어갈 때 가이드가 당부를 한다. 안에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주의를 하란다. 결국 수많은 보물들을 눈에 담고 오라는 말인데 그건 참 황당한 일이다. 돌아가면 그 중 몇 개를 기억이나 할까 싶다. 그러고 보니 20년 전 이곳에 왔을 때도 그랬던 것 같다. 넓은 홀을 둘러보고 감탄하고, 다시 복도를 따라가며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감탄하고 했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오늘도 그와 마찬가지리라. 가이드는 농담 삼아 “얼마 전에 ‘뭉쳐야 뜬다’ 팀이 와서 촬영을 했는데 출연자들이 모두 여기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을 수는 있는데 사진 촬영 비용이 천만 원입니다. 그러니 사진을 찍으면 천만 원을 지불하면 됩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궁전 안으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복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곳이 너른 홀이었다. 무도회가 열리던 곳이다. 바닥에서 천장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곳 소홀하게 빈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잠시 영화의 한 장면으로 보았음직한 무도회의 한 장면을 연상해 보았다. 그러나 눈으로만 본 것이라 더 이상 구체적으로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관람이 허용된 방들은 황재 일가의 화려한 생활을 잘 읽을 수 있도록 해놓았다. 곳곳에 황제의 그림이 걸렸으나 황제보다는 황비의 존재감이 더욱 부각되고 있었다. 황제는 별로 실권이 없었다고 한다. 그림 속의 황제는 늘 한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는 듯했다. 그 가리키는 곳에 황제의 부인이자 이 궁전의 주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있단다. 말하자면 황제는 데릴사위 같은 인물로 실권은 없었단다. 궁전의 주인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대단한 권력의 소유자였으며 욕망도 컸고 사치 또한 넘쳤다고 한다.
여러 방을 보았는데 모든 방들은 그 각각이 하나씩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되는 것은 ‘중국식 작은 방’이었다. 17세기에는 중국의 도자기들이 실크로드를 따라 유럽으로 많이 유입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궁전들은 중국 도자기로 방을 장식하는 것은 최고로 여겼던 것 같다. 사실 도자기라면 우리도 뒤질 것이 없으나 오늘날까지도 세계적 범위에서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아 아쉽다. 우리의 도공들이 임진왜란 당시 수도 없이 일본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오히려 도자기라면 일본 도자기가 명성을 얻었다.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일본은 우리에게 참 불편한 이웃이다. 궁전 안은 복도를 따라 관람을 하도록 되어 있어 그저 부지런히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훑어 지나는 것이 전부라 지금도 본 것을 하나씩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떻든 궁전의 방들에는 황실의 영욕, 그리고 나아가 오스트리아의 영광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야 테레지아는 황제와 사이에 16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그 자녀들은 모두 주변국과의 정략결혼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 확장을 꾀하는데 활용되었으며 이 시기 합스부르크 왕가가 역사상 가장 넓은 식민지를 보유한 전성기였단다. 그런 합스부르크 왕가도 마침내 제 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국토는 오늘날과 같이 왜소해지고 결국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영광은 영원하지 않은 법이다. 오호 애제라 ㅡ
-이게 나라냐?
-이런 정권은 물러나라.
-000을 구속하라.
언 땅에서 촛불이 타올랐다. 촛불의 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마침내 촛불은 광화문 너른 광장을 모두 메웠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촛불의 반대편 사람들은 그 촛불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는 그런 자들에게 우리의 삶의 일부분을 맡겼었다. 자괴감이 들었다. 자괴감을 타고 촛불은 들불처럼 번졌다. 촛불은 목마름이었고 축제였다. 촛불 아래의 초는 제 몸을 녹여 촛불의 가운데 초심 바닥으로 자꾸 밀어 넣었다. 촛불은 촛농을 따라 활활 타올랐다. 정말이지 영광은 영원하지 않은 법이다. 의식화한 익명들이 촛불 뒤에서 어른거렸다. 촛불은 순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양보가 없었다. 혁명군처럼 진군만이 있을 뿐이었다. 세상은 촛불의 흔들림에 따라 춤을 추었다. 이 땅은 모든 이들이 그렇게 염원했던 그런 나라가 아니라 촛불의 나라가 되었다. 우리에게 촛불은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었다. 그런 간절함은 세상을 뒤집었다. 그러나 염원은 엉뚱한 분노로 표출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분노는 가라앉지 않은 채로 또 다른 분노를 잉태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영광은 영원하지 않는 법이다.
궁전 밖으로 나와 건물 뒤로 돌았다. 그곳에 너른 정원이 있는데 사실은 그곳이 궁정의 앞이다. 정원의 화단은 기하학적인 아름다움과 많은 분수 그리고 조각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갔을 때는 겨울 채비를 하느라 화단의 꽃들을 모두 뽑아내어서 그 멋진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고 그저 잔디 위로 기하학적 무늬 형태만 파헤쳐진 채로 남아있었다. 그래도 궁전 앞마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늦은 가을볕을 즐기며 사랑스런 연인들이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천천히 걷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 뒤로 멀리 정원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가을볕이 그리로도 환하게 쏟아졌다. 젊은이들의 가녀린 금발이 여린 바람에 가을빛에 사이로 흩어졌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는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정원은 마치 그들을 위해 펼쳐놓은 것 같기도 했다.
정원에 둘러선 석상들이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사랑을 속삭이던 젊은이들이 멀어져가자 주변에 도열해 서 있는 석상들을 둘러보고 사진에 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석상들은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것으로 모두 44개가 있다고 한다. 짧은 시간에 그 석상들을 일일이 감상할 여유가 없어 그저 몇 개만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석상을 보다보니 권력의 의미를 이해할 것 같기도 했다. 정원의 저 끝 언덕위에 쉘부른 궁전과 마주보고 있는 건물이 있는데 그저 신전의 기둥 같기도 했으나 설명을 메모해 놓지 못해 자세히 알 길이 없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