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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으로 배우는 마을의 지형과 역사
유 자 영 (충북 용문중)
1. 들어가며
나는 옥천군 청성면 화성리에서 나고 자랐다. 이곳은 사면이 온통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늘 산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저 산 너머엔 뭐가 있을까, 어떤 동네가 이어질까. 저 산에 올라가서 한번만 바라보면 좋겠다.’
‘저 산 이름은 왜 가늘이지? 가늘지도 않은데. 저 산은 왜 당산이지?’
‘달뚜배기는 달이 뜨는 산이란 뜻인가 보다.’
우리 동네는 화성리지만 어른들은 늘 ‘돌자시’로 부른다. ‘돌자시’란 말이 하도 이상해서 ‘그럼 여기가 시(市)였나? 이상하다 왜 돌자시지? 돌이 많은가?’ 하는 의문에 아버지께 여쭤보면 역시
“돌이 많아서 돌자시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긴 우리 동네 또랑가엔(우리 동네 발음으론 갱변) 물이 별로 없을 땐 수석 장사들이 돌아다니면서 좋은 돌은 다 주워 가고, 동네 아저씨들이 이쁜 돌을 주워다 뒤꼍에 둔 것까지 몰래 와서 훔쳐가곤 했다. ‘돌이 많긴 많네’ 하면서 나 나름대로 궁금증을 풀었다.
그러다가 대학에서 교수님과 얘길 나누다가 ‘돌자시’가 ‘돌로 쌓은 성’이 있기 때문에 붙은 말이란 걸 알게 되었다. 자시는 ‘’이 변한 말인데 ‘’은 城․ 山․고개를 뜻하는 옛말이다.
우리 동네 뒷산(염소골)에 성이 있단 건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동네 이름으로 붙게 된 것이라니 참 신기했다. 우리 동네를 한자로 石城이라고 쓰는데 그게 바로 돌자시를 그대로 훈차한 것이었다.
알고 보니 그 성은 삼국 시대 때 신라군이 쌓은 성이었다. 신라는 보은에 삼년산성을 보급 기지로 튼튼히 세우고 백제와 싸울 만한 요새마다 성을 쌓았는데, 바로 우리 동네에도 이 시기에 성을 쌓았던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유적을 찾는 순간이었다. 석성이란 이름은 알았지만 돌자시가 바로 석성이라는 걸 아는 데는 10년이 넘게 걸린 것이다.
이런 것을 초등학교 때부터 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을 이름에 수수께끼처럼 숨어 있는 역사를 배웠더라면 쉽게 민족의 말과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었을 텐데.
지리에서는 지층과 퇴적된 화석들을 보며 그 당시의 기후나 생활 환경을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땅이름을 보면 그 곳을 살아온 사람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인류 역사의 퇴적층 땅이름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 보자.
2. 왜 땅이름인가?
우리는 어떤 국어교육을 하고 있나?
교과서 진도 마치기가 힘들어서 쩔쩔 매는 와중이지만 애들을 위해서 뭔가 도움될 만한 자료를 찾아보고, 나름대로 아이들 주변 이야기로 말을 걸어보고 하지만 형식적인 말하기 주제, 기능과 지식 위주로 편성된 국어책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지겨운 국어 시간’에서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국어 교과서나 교육청만 바라보고 있으면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는다. 아이들 생활 주변에서 시작하는 것이 ‘지겨운 국어 수업’에서 탈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국어교육은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자기 마을과 지역부터 시작해서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하는것, 그것도 다양한 감정과 정서를 담아 자신있게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자기를 알고, 자기 마을과 지역을 알아야 한다. 아이들이 자기와 지역을 아는데 국어 교사들이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지난 여름 민족교육연구모임 변산 답사 때부터 우리는 답사하는 지역의 땅이름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땅이름 공부가 워낙 새롭고 재미있으니까 별 생각 없이 해 나갔는데, 그 지역을 알기 위해서는 땅이름에 대한 이해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느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가 사는 동네가 왜 그렇게 불리는지 궁금해한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궁금히 여기는 것부터 쉽게 풀어주는 교육이 필요한데, 그동안 우리는 교육이라고 하면 일반적인 개념과 지식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으로만 여겨왔다.
자기가 사는 곳에 대한 애정은 자기 고장에 대해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과 긍지도 생긴다. 유홍준의 『문화 유산 답사기』가 우리 국토를 10배는 더 넓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땅이름의 뜻과 역사를 알면 우리 땅이 100배 이상 더 넓게 다가온다. 땅이름은 유적지만이 아니라 면, 리 단위를 넘어 자연 마을의 수많은 골짜기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땅과 민족의 역사에 접근하는 데 땅이름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생각해 보고 이렇게 정리해 보았다.
먼저 땅이름은 우리말이 걸어온 길을 담고 있는 좋은 자료다.
국어 사전에 올라 있는 말 중에서 70%가 넘는 말이 한자어다. 그 외에 서양 외래어를 빼면 나머지 20%도 안되는 우리말이 남는다. 국어 사전이 이런 사정인데 실제 말글살이에서는 더 심한 지경이다. 우리가 쓰는 말은 정말 토씨나 부사를 빼면 대부분이 외래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우리말 땅이름이 많이 남아 있어 순 우리말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 배우고 익힐 수 있다.
심천은 ‘기프내’라고 지금도 부르는데 참 이쁜 이름이다. 그 곳은 구강과 초강이 합쳐져서 물이 깊어지는 곳이다.
‘수리’는 정수리에서 볼 수 있듯이 높은 곳을 뜻하는 말인데 이 말은 여러 땅이름에서 시루, 수루, 수레로 발음이 변한 곳도 있다.
수리와 비슷한 뜻으로 달(다락, 다랭이)과 잣(재, 자시), 마루(말, 모래, 마니산)를 들 수 있다.
또 별골은 벼랑골이란 뜻인데 ‘별’은 벼랑의 옛말이다.
이런 우리말 땅이름들이 어떻게 한자 이름으로 변하게 되었는가를 얘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향찰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앞의 별골은 한자로 옮겨서 星谷이다. 星은 하늘의 별을 뜻하지만 벼랑을 뜻하는 땅이름으로 빌려 쓴 것이다.
永同은 吉同이라고도 불렸는데 영동의 永이 ‘길다, 오래되다’의 뜻이고 길동의 吉이 ‘길’이라는 음으로 읽기 때문에 같은 곳을 부르는 이름이 될 수 있었다. 옛 지도를 확인해 보니 옛날 영동은 양 옆에 황간현과 양산현으로 나뉘어서 길고 좁은 모양이었다.
용산면 매남리는 梅南이란 한자를 쓰는데 ‘매내미’라는 우리말 이름을 풀어보니 ‘매(뫼, 山) + 내미(너미)’가 되었다. 매남리는 매화나무 남쪽이란 뜻이 아니라 산너머에 있는 동네라는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서 확인해 보니 역시 매남리는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여서 산을 넘어야 갈 수 있었다.
향찰의 원리를 향가를 풀이하면서 가르칠 때는 아이들이 이해하기 어려워 해서 참 힘들었는데, 지금의 마을 이름이 바로 향찰의 원리로 문서에 정착되었다는 것을 같이 확인하니까 쉽게 이해했다.
둘째로 그 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이를테면 용산면 구촌리의 대문안은 200여년 전 쯤에 영산 김씨 5형제가 옮겨와 살면서 동네 앞에 큰 대문을 세워서 붙은 이름이고, 한골의 담뒤는 안동 권씨가 지은 집 뒤에 있어서 그렇다.
이렇게 땅이름에 얽힌 이야기는 마을의 역사를 생생하게 말해준다.
마을 안의 역사만이 아니라 땅이름은 마을이 생긴 순서까지 드러내 준다. 새터(신기, 신촌)라는 땅이름은 그 마을이 다른 곳보다 가장 나중에 생겨서 그렇고, 잣밭골(용산면 백자전리)에 있는 북징이는 잣밭골에서 보면 서쪽에 있는데 그 옆 동네인 밑골(산저리)에서 보면 동네 뒤 북쪽에 있다. 잣밭골(160여년전)보다 밑골(405년전)이 먼저 생겨서 북징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셋째로 땅이름은 주로 산이나 물줄기가 만드는 동네 모양을 따라 이름을 짓기 때문에 지역의 지리, 지형을 이해하는 데 땅이름이 도움이 많이 된다.
용산면 한석리에는 넓은 열이 있는데 이것은 물길이 넓어져서 붙은 이름이고, 밑골(산저리)은 산 밑에 있어서 밑골, 가래실은 가래 모양으로 동네가 산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모양을 이루고 있어서 그렇다. 또 버들뱅이는 버드나무가 많아서 그런 게 아니고 다른 동네로 통하는 길이 길게 뻗어 있어서 버들뱅이(뻗어있는 곳)가 되었다.
땅이름이 어떻게 마을의 모양, 산줄기 물줄기와 관련되는지 살펴 보려면 당연히 지도를 펴놓고 확인하고, 또 마을 지도를 직접 그려보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정확한지 확인하기 위해 마을에서 전망 좋은 산 언덕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 보면서 자연스럽게 지도 보는 법도 배우고, 지리․지형도 쉽게 배울 수 있다.
넷째, 땅이름 변화를 보면서 지역의 행정 제도사를 공부할 수 있다.
땅이름이 많이 변하게 된 것은 경덕왕이 전국 각 지방의 군 단위 이름까지 한자로 바꾸면서 시작했다.
고려 때의 도 이름과 조선의 도 이름이 많이 다른 것도 이유가 있다. 고려는 5도 양계로 나누었는데 그 기준을 산천 경계로 삼았고, 조선은 중심 주로 도 이름을 삼았다. 그래서 충주와 청주가 합쳐서 충청도를 이루고 경주와 상주가 경상도를 이룬 것이다.
조선 시대 도 이름은 자주 변해서 충청도는 공청도(공주+청주), 공홍도(공주+홍주) 등으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는데, 이것은 충주나 청주에서 역적이 나타나거나 반란이 일어났을 때마다 바뀌어서 그렇다.
황간현은 선조 26년에 청산에 병합되었는데, 이것은 황간 현감 박몽설이 진주성에서 왜구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고 혼자 살아서 도망쳐 왔기 때문에 그렇다.
옛날 황간현은 영동현의 속현이었고 조선 시대까지 바로 옆의 양산현은 옥천현의 속현이었다. 양산은 옥천보다 영동에서 더 가까운데 왜 옥천에 속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알고보니 조선 시대에 지방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견아상제’(개 어금니처럼 행정 구역 경계를 지어서 반란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제도)를 적용해 행정 구역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또 일제 강점기에 일제히 이루어진 행정구역 통폐합은 지역의 문중, 성씨와 그 고장을 떼어 놓고, 창씨 개명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땅이름을 공부하다 보니 지역의 역사만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에 금방 연결이 되고, 지리․지형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땅이름을 공부하는 것은 국어 교사만이 할 일이 아니고 역사․사회․지리 선생님까지 참여해서 통합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지역의 할아버지․할머니, 부모님도 마을 이름을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니, 땅이름으로 지역을 배우는 것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대화를 나누는 좋은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
바야흐로 수능 시대를 맞아 통합 교육을 여기저기서 강조하고 있다. 땅이름 공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접근해서 우리말과 민중의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좋은 통합교육 소재가 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이 자신있게 자기 지역을 얘기할 수 있고, 또 아는 만큼 애정도 생겨나게 되니 자기 땅과 민족에 대한 사랑과 긍지도 생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기본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3. 땅이름 수수께끼를 풀려면 준비해야 할 것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가 아이들이 사는 곳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다. 아이들을 이해하려면 당연히 아이들이 사는 환경이 어떤지, 어떤 동네에 사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왜 그애가 사는 동네는 그런 이름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땅이름을 접근하는 데는 책을 보고 아는 방법과 직접 찾아가서 조사하는 방법이 있는데, 먼저 책을 통해 기본 이해를 하고 나서 현지 조사를 하면 그 곳의 땅이름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문헌 조사 방법을 들면
군지나 시지, 향토지의 지명편을 보면 기초 자료를 구할 수 있다. 군마다 다 나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구할 수 있다.
그리고 땅이름에 관한 여러가지 책이 있다.
배우리의 『우리말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1, 2』나 강길부의 『땅이름 국토 사랑』은 땅이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것을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한글학회에서 나온 『지명사전』은 정신문화원에서 정리한 『지명총람』을 찾기 좋게 정리한 것이다. 『지명사전』과 『지명총람』둘 다 참고할 수 있다.
땅이름에 관한 것 말고도 우리 말의 어원에 대해서도 알면 더 쉽게 땅이름을 풀이할 수 있다. 어원에 관한 책으로는 서정범 교수의 『우리말의 뿌리』를 비롯해 여러 가지 책을 찾아볼 수 있다. 『중세국어사전』도 도움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사는 동네를 찾아가서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아이들이 사는 동네에 가 보지 못했지만 자꾸 관심을 갖고 아이들 동네에 가 보려고 노력해야겠다.
아이들과 함께 동네에 가보면 아이들이랑 훨씬 가까운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 동네에 있는 높은 산에 한번 올라가서 지형을 살펴보고, 들과 산에 널린 여러가지 풀이야기, 꽃 이야기, 나무 이야기……. 소재는 정말 무궁무진하다. 같이 다녀보면서 아이들의 새로운 면을 보면서 뿌듯하기도 하다. 정말 공부 시간에는 고개가 땅 속으로 처박힐 것만 같은 애가 자기 동네에 가선 어깨부터 당당하게 펴고 말한다.
또, 아이들이랑 다니면서 동네에 전해오는 땅이름 유래랑 실제 지형을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실제 지형에 맞지 않고 비슷한 발음을 근거로 내려오는 전설이 참 많다. 학자들은 샅샅이 다니면서 증명하기가 힘들지만 우리 교사들이 힘을 합치면 전국에 있는 땅이름 뿌리를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땅이름을 공부하면 마을의 역사와 연결되고, 마을의 역사는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빼면 말할 수 없는데, 사람들의 역사를 알려면 그 사람들의 족보를 보아야 한다.
아직도 시골은 대부분 동족 마을을 형성하고 있어서 중심 성씨를 위주로 족보를 찾아보면 마을의 역사를 복원할 수 있다.
[출처] 땅이름으로 배우는 우리의 역사 (비공개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