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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이론♡학술방 스크랩 黃鐘에 관하여
금향芩香 최세현[서울] 추천 0 조회 287 18.10.23 12: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본문은 晩堂 李惠求 博士(1909~2010) [百壽頌祝論文集](서울: 晩堂李惠求博士百壽頌祝論文集刊行委員會, 2008), 557~582쪽에 게재된 논문임. color는 內註이며 내주는 말미에 있는 참고문헌과 대조해야 함.

 

 

국문 초록

 

 

黃鐘에 관하여

 

이해식(영남대 교수)

 

 

본문은 고대 중국의 12律에서 陰數에 三呂(大呂ㆍ仲呂ㆍ南呂)와 三鐘(夾鐘ㆍ林鐘ㆍ應鐘)이 배치된 의미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이러한 音列的(serial)인 陰數를 창조의 근원으로 본다. 본문의 중요점은 呂不韋의 [呂氏春秋]에 근거하여 고대 중국의 黃帝가 음악가 伶倫을 Bactria(현재 Balkh)의 서쪽에 있는 阮?山 북쪽 계곡으로 보내어서 대나무로 黃鐘 律을 만들게 한 阮?山을 찾는 “黃鐘은 어디에서 왔는가?”이다. 그런데 조선조 [樂學軌範]의 집필자들이 阮?山을 崑崙山으로 바꾸었음은 阮?山이 신화여서 구체적으로 들어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본다. 그래서 본문 제목도 “황종에 관하여”로 하게 되었다

回族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고대 중국 신화의 黃帝의 발원지가 中原이 아니라 북적(北狄) 지역, 즉 西域(western region)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더 서쪽으로 음악가를 보냈음은 서쪽의 음악을 가져왔음이나 다름이 없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관점을 유대민족의 신비주의와 관련하여 秘敎的 敎義의 고대 동방(old orient)에도 있었던 중국과 같은 音組織이었으리라고 보는 학설로 뒷받침하고자 한다. 형편이 이렇게 되면 서역이 근거지가 되는 중국 음악 이론이 우리 나라 음악의 한 자락이 되었음도 看過할 수가 없다(hsik42@hanmail.net).

 

중심어: 黃帝ㆍ鳳凰ㆍ阮?山ㆍ崑崙山ㆍBactriaㆍ西域ㆍPhrygiaㆍ三呂ㆍ三鐘.

 

 

 

 

황종에 관하여

 

이해식(영남대 교수)

 

나는 2004년 5월 24일자 [영대신문] 11면 <교수 칼럼>에 “노란 색 소리의 씨앗(黃鍾)”이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나는 이 칼럼을 2004학년도 제2학기 영남대학교 대학원 <한국음악분석연구> 수업에서 논문의 각주를 달고 참고문헌을 쓰는 방편으로 사용하였다. 본문은 그때 사용한 칼럼을 아래에 [인용문 1]로 제시하고 각각의 문단을 확대 설명하면서 그에 따르는 문헌을 보완한 것이다. 문단마다 붙인 번호는 편리한 설명을 위해서이다.

 

 

[인용문 1]

 

노란 색 소리의 씨앗(黃鍾)

 

① 우리 나라의 음악이론에도 적용되는 중국의 12음율(音律)은 <황종(黃鍾)ㆍ대려ㆍ태주ㆍ협종(夾鍾)>ㆍ<고선ㆍ중려ㆍ유빈ㆍ임종(林鍾)>ㆍ<이칙ㆍ남려ㆍ무역ㆍ응종(應鍾)>이다. 이 12율을 ‘ ’로 네 율씩 묶어보면, 각 묶음의 끝엔 <쇠북 종(鐘)>이 들어있는 율이 규칙적인 음조직(tonal system)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동양음악은 시작보다 끝나는 소리(終止 cadence)가 더 중요함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첫 그룹의 첫 율만 황종으로 시작한다.

② 鍾은 종(種)으로 통하며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듯 특히 황종이 모든 소리(律)의 씨앗이란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농경의 풍물굿에서 꽹과리를 상쇠(leader)라 함은 이것이 일단은 쇳소리어서 그렇다고 볼 수 있다.

③ <누런 종소리>, 황종이 음율의 처음에 놓인 까닭은 오행(五行)과의 관련이다.

우선 오방(五方)은 동ㆍ서ㆍ남ㆍ북과 그 중앙으로써 대구에 동성로ㆍ서성로ㆍ남성로ㆍ북성로와 중앙통처럼 동서양의 지명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오방은 또 오색(五色)으로 상징되는데, 처용무(處容舞)를 출 때 동쪽에 있는 무공(舞工 dancer)은 청색 의상을, 서=백색, 남=적색, 북=흑색, 그리고 중앙의 무용수는 황색 의상을 입는다.

④오색 중에 황색이 으뜸임은 동양은 거의 농경지역이어서 산야의 오곡이 짙은 황색으로 무르익는 데서 연유한다. 그래서 오직 중국의 천자(天子)만이 봉황(鳳凰)이 그려진 노랑색 황포(黃袍)를 입었다.

⑤?여씨춘추?(呂氏春秋)에 의하면 봉황은 대하(大夏)의 서쪽 원유산(院?山) 기슭에 산다는 아주 상서로운 새인데 황종의 음높이(standard pitch)를 이 봉황의 암수(雌雄) 울음소리에 맞추어서 음양의 육율(六律)과 육려(六呂), 즉 12율을 구별하였다. 상상(想像)의 새인 봉황의 울음소리가 일정했는지는 모르되 악기의 음높이를 새의 울음소리에 맞추었음은, 음양이 끝없이 변화하는 우주만물의 상대적인 관계이고 오행이 자연현상의 원리라고 보는 동양의 생각이라 하겠다. 이러한 생각은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32?~497?)가 대장간의 해머 소리를 듣고 음높이를 물리적 원리로 설명한 서양의 생각과 서로 통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이며, 이 방법에서 앞의 12율이 체계적으로 상생한다.

⑥동양의 생각은 또 우리 나라의 ?악학궤범?(樂學軌範) 서문으로도 이어지는데, “악(樂)이란 하늘에서 나와서 사람에게 이름이요, 허공에서 생겨서 자연에서 이루어짐이니,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여 혈맥을 뛰게 하며 정신이 통하게 함”이 그것이다.

⑦서울 명륜동에 있는 성균관에서는 춘추, 즉 음력 2월과 8월 달의 일진에서 정(丁)자가 들어 있는 첫 날에 공자와 그의 일가를 제향(祭享)하는 문묘제례악을 거행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이 문묘악은 완전히 한국화(Koreanized)되었지만 일찍이 본토에서는 소멸된지 오래여서 오히려 그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배워갔다. 이 문묘악을 본 서양음악가들은 이거야말로 가장 현대적인 음악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악ㆍ가ㆍ무(樂歌舞)로써의 좁은 의미의 아악(雅樂, classic music)은 바로 전통적인 12율이 엄격하게 적용된 문묘제례악을 가리킨다.

⑧미학자 C. 작스는 <대하>는 박트리아(Bactria)라고 했는데, 이곳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발크(Balkh) 지역을 가리키며 최근에 국내의 한 건설기업이 진출한 곳이기도 하다. 원유산은 그 서쪽이라고 했으니 아마 이슬람 권이 아닌가 싶다. 우리 나라의 피리ㆍ장고 등이 중국의 서역을 통하여 들어온 이슬람의 악기인 점으로 보면 이들 지역은 우리 문화와 깊은 관계가 있는 곳이다. 또한 일진으로 쓰이는 <정(丁)>을 갑골문에서 보면 고대 중국인들의 <제단(祭壇)>이 형상화된 글자이다(영대신문, 2004).

 

 

 

 

 

 

[인용문 1] 문단 ①과 관련하여 “12율을 네 율씩 묶어보면” 아래 [표 1]과 같다. 이 표에서 회색 음영과 진한 bold체로 표시한 짝수의 자리에 三呂(大呂ㆍ仲呂ㆍ南呂)와 三鍾(夾鐘ㆍ林鐘ㆍ應鐘)이 배치되어 있다(황종은 홀수지만 12율의 으뜸이어서 bold체로 표시했음). 이른바 육려(六呂)요 음려(陰呂)요 음성(陰聲)이다. 이를 육동(六同)이라고도 한다(금문 文庫의 ‘同’ 자는 후세의 ‘呂’ 자와 형태가 비슷하여 ‘同’과 ‘呂’를 같이 쓰게 되었다. 금문 ‘同’ 자의 고증은 인 파루陰法魯의 [先漢樂律初探] 참조(양 인리우 이창숙 옮김 1999, 81쪽 각주 34번 재인용임). 또 6동(六同)을 6간(六間)이라고도 하며 홀수의 율을 6시(六始)라고도 한다([국역 악학궤범] Ⅰ 1979, 원문 12쪽, 번역은 36쪽). 秦나라 때의 모든 數는 六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보통 쓰는 말에 六親(온 친족)ㆍ六合(온 세상)ㆍ六穀 …六法ㆍ六呂ㆍ六禮 등의 수 없는 말들이 모두 秦漢之際를 거쳐 兩漢時代에 성립했던 말들임을 알게 된다(김용옥, 1989, 208~209쪽에 六에 관한 자세한 記述이 있다). 이러한 음렬적(音列的 serial)인 육동 음조직(tone system)이 본문을 집필하게 된 단초가 되었다. 짝수 율 육동은 또한 <상대ㆍ중간ㆍ측면>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홀수 율은 <표준>이라는 의미가 있다(쿠르트 작스 三頀出版社 編輯部 譯 1986, 173쪽). 나는 <상대ㆍ중간ㆍ측면>과 <표준>이 융합하여  창조의 바탕이 된다고 생각한다.

 

 

[표 1]

1. 黃鍾

2. 大呂

3. 太?

4. 夾鐘

5. 姑洗

6. 仲呂

7. ?賓

8. 林鐘

9. 夷則

10. 南呂

11. 無射

12. 應鐘

 

 

[표 1]과 같은 음조직을 가진 “동양음악은 시작보다 끝나는 소리(終止 cadence)가 더 중요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은 시작과 끝 음이 동일한 <문묘제례악>을 두고 한 말이다. 문묘제례악, 즉 <응안지악>은 12율이 각각 궁(宮, 첫 音)이 되기 때문에 끝나는 음이 분명함으로써 다음 음을 명확하게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첫 음과 끝 음이 을 나는 <선법 본능>(이해식 1997, 57쪽), 또는 <선법 본성>이라고 밝힌 바 있다(이해식 2006c, 303쪽) 이것은 마치 그리스에 근원을 둔 유럽의 교회선법(church mode) 음악을, 또 12율이 각각 궁이 된다는 말은 12반음을 평준화한 쉔베르크(Arnold Schoenberg 1874~1951)의 12음기법(dodecaphony)을 연상케 한다.

참고로 아래의 [표 2]는 <동동>의 율명 구조를 연구한 이해식의 논문 “동동의 구조”에서 인용한 것인데(李海植 1997, 56쪽, 또는 이해식 2006c, 302쪽), 회색 음영으로 표시한 3각에서 7각까지는 앞꾸밈음으로써 중려가 나오지만, 1각에서 8각까지 일정한 자리에 임종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8각이 배임종임은 종지 관련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해식의 “동동의 구조”를 거론한 까닭은 [표 1]의 구조와 같이 일정한 장소에 일정한 율명이 배치된 구조가 상통하기 때문이다. [표 2]를 보면 <동동>은 ‘임종의 음악’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더하면 이해식의 “수제천의 선율구조”도 전통음악에서 율명이 조직적 합리적으로 운용되고 있음을 밝힌 논문이다(李海植 1992, 327~342쪽, 또는 이해식 2006a, 76~109쪽).

 

 

 [표 2]

악구

악 구 - A

(1ㆍ2소절)

악 구 - B

(3ㆍ4소절)

악 구 - B1

 

(5ㆍ6소절)

1

태주-중려(MM)

임종-태주

2

임종-(임)남려

임종-청무역

3

임종-(임)남려

임종

(중)임종-중려

4

(황)태주 ―――――

(중)임종-태주

5

임종-청황종

임종-

(중)임종-태주

6

임종-청황종

임종-

(중)임종-태주

7

황종 ―――――

(중)임종-중려

8

황종-협종-중려

임종-임종

배임종

(황)태주

 

 

 

문단 ②에서 “鍾은 種으로 통하며”는 “황종의 황은 중앙의 빛이고 황종의 鍾은 종(種)으로 통한다” 함은 [악학궤범]에서 가져온 “黃鍾, 黃者中之色也…. 種種也”이다(국역 악학궤범 Ⅰ 1979, 10쪽, 번역은 31쪽). 鍾은 원래 시간과 술잔(酒器)을 뜻하며 鐘은 쇠북 종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귀인만이 종고(鐘鼓)를 사용할 수 있었다. “鐘聲堅. …”와 같이 [禮記] ?樂記? 등에서는 <鐘>을 쓰는데 [악학궤범]에서만 <鍾>을 씀은 鍾을 소리 그릇(聲器)으로 봄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무릇 황종이야말로 모든 <소리의 씨앗>이다. 또한 아래의 인용 문단을 보면 시간의 씨앗이기도 하다.

 

 

황종은 한겨울 밤에 북쪽 하늘에 떠 있는 별자리들과 닿아 있다. 이때가 동지라고 했다. 아주 옛날에는 동지가 설날이었으므로 황종은 곧 한 해의 생명이 시작하는 소리였던 것이다. 참으로 신화적 세계에서 이분법은 없다. 동지는 낮이 짧다는 점에서 죽음의 날인 반면, 이 날을 기점으로 다시 태양 기운이 되살아나므로 부활의 날이기도 하다. …황종은 바로 이 무렵에 들리는 소리인 것이다(이지훈의 살림의 예술찾기 2007, 16~17쪽. 황종과 <동지>에 관하여 국역 악학궤범 Ⅰ, 번역 29쪽의 각주 24와, 31쪽의 각주 31~34, 35쪽의 각주 64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음).

 

 

夾鐘ㆍ應鐘ㆍ林鐘은 三鐘으로써 黃鐘 다음으로 소리의 씨앗이 되며, 三呂인 大呂ㆍ仲呂ㆍ南呂는 三呂로써 12율에서 척추의 역할을 하여, 12율이 생명체임을 상징한다. 이중에서도 大呂는 黃鐘을 도와서 음양을 완성 한다(大呂. 呂旅也. 言陰大呂助黃鐘. [국역 악학궤범] Ⅰ 1979, 10쪽, 번역은 31쪽의 각주 36 참조. 서양음악에서는 장ㆍ단음계의 제1도 상의 음을 으뜸음(主音 tonic), 제2도 상의 음을 윗으뜸음(上主音 super tonic)이라 하는데 작곡가는 이들 음에서 다양한 화음 변화를 구사하여 작품을 전개한다). 이들이 모두 음수(陰數)에 배정되어 있음은 음(陰)이 창조의 근원이어서 그러함으로 본다. 이들 黃鐘과 大呂의 관계-陰大呂助黃鐘-를 서양음악으로 보면 장ㆍ단음계의 제1도 상의 음인 으뜸음(主音 tonic), 제2도 상의 음인 윗으뜸음(上主音 super tonic)이라 할 것인데 작곡가는 이들 음에서 다양한 화음 변화를 구사하여 작품을 전개한다.

문단 ③과 관련하여 오(五)는 하늘과 땅이 교신하는 의미의 글자로써 오행에는 오음(五音)ㆍ오방(五方)ㆍ오색(五色)ㆍ오미(五味)ㆍ오장(五臟)ㆍ오성(五星) 등, 모든 우주 만물을 오(五)로 변별한다.

문단 ④에서 “오직 중국의 천자만이 봉황이 그려진 노란색 도포를 입었다”는데 여기서 <봉황>을 알아보면,

 

 

[인용문 2]

 

중국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새. 기린ㆍ거북ㆍ용과 함께 4령(四靈)의 하나로 여겨지며, 수컷은 봉, 암컷은 황이다. 매우 드물게 출현하여 커다란 사건의 징후가 되거나 군주의 위대함을 증명했다고 전해진다. BC 27세기경에 중국을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전설상의 제왕 황제(黃帝)가 죽기 전에 이 새가 출현했다고 하며, 마지막으로 나타난 곳은 안후이[安徽] 지방에 있는 명의 창건자 주원장(朱元璋)의 아버지 무덤이었다고 한다. 이 새는 매우 아름답고 의미 있는 노래를 불렀고, 인간 음악에 대한 뛰어난 감상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봉황의 모습에 대해서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으나 모두 상서롭고 아름다운 새로 나타내고 있다. <설문해자 設文解字>(1세기 또는 2세기)에는 가슴은 기러기, 후반부는 수사슴, 목은 뱀, 꼬리는 물고기, 이마는 새, 깃은 원앙새, 무늬는 용, 등은 거북, 얼굴은 제비, 부리는 수탉과 같이 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키는 2.7m 정도였다고 한다. 봉황의 문양은 건축ㆍ공예 등에 두루 쓰였고, 여인들이 놓는 수(繡)의 소재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봉황은 한국에서도 중국과 비슷한 의미로 인식되어 왔다. 고려시대 때 이미 중국에서 음악과 함께 전래되었고, 조선의 개국과 함께 성군의 덕치를 상징하는 의미로 가무에 이용되었다(http://enc.daum.net/dic100/viewContents).

 

 

봉황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상상(想像)의 새이다. 이와 같은 거대한 또 하나의 새로써 [장자] ?소요편?(莊子 逍遙遊)에 나오는 붕(鵬)새가 있다. 이 새는 하루에 구만 리(里)를 날아간다는 매우 큰 상상의 새로써 북해(北海 Aral lake)에 살던 곤(鯤, 鯤?: 물고기 뱃속의 알. 큰 물고기)이라는 물고기가 변해서 되었다고 한다(莊子, ?逍遙遊 第 一?: 北冥 有魚 其名爲鯤 鯤之大 不知其幾千里也 化而爲鳥, 其名爲鵬 鵬之背 不知其幾千里也 怒而飛 其翼 若垂天之雲 是鳥也 海運則 將徙於南冥 南冥者 天池也 齊諧者 志怪者也 諧之言曰 “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 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 봉황과 함께 중국에서 들어온 음악은 아마 고려 예종 11년(1116년) 때의 대성아악(大晟雅樂)으로 보인다.

문단 ⑤와 관련하여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의 여불위(?~BC 235)는 자신의 집에 거느리고 사는 수많은 식객들에게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게 했는데 이것이 오늘 날 [여씨춘추](呂氏春秋)이다. “[여씨춘추]에 의하면 봉황은 대하의 서쪽 완(원)유산 기슭에 산다”는데 그러면 <대하>는 어느 곳인가? 한서(漢書) 응 소(應?)의 주에 의하면 대하는 서역(西域)에 있는 나라(Bactria)라 했다([국역 악학궤범]Ⅰ 1979, 번역 29쪽의 각주 21번). 여기서 대월지(大月氏)로부터 더 자세히 알아보면,

 

 

[인용문 3]

 

대월지(大月氏): 중국 전국(戰國)시대에서 한(漢)나라 때까지 중앙아시아 아무다르야강(江 Amu-darya 일명 Oxus강) 유역에서 활약한 이란계(系) 또는 투르크계의 민족. 전국시대 말기에는 서몽골로부터 간쑤[甘肅] 서부, 황허강[黃河] 상류, 동(東)투르키스탄, 중가리아(Djungaria), 서(西)투르키스탄의 일부에까지 미치는 대세력이었다. BC 3세기 말 흉노(匈奴)가 갑자기 일어나자 그 압박에 쫓겨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무다르야강 북안에 중심을 두고 그 남쪽의 대하(大夏: 드하라의 음역으로, 아프가니스탄의 北半 드하레스탄을 가리키며, 당시 그리스인 식민왕국 박트리아의 중심지)를 지배하였다. 그것은 한(漢)나라가 대월지(大月氏)와 더불어 흉노를 협격(挾擊)하고자 하여 장건(張騫)을 파견한(BC 139) 직후의 일이었다(http://100.naver.com/100, 또는 무하마드 깐수 1992: 21~26쪽 참조).

 

 

위의 [인용문 3]은 흉노족에게 서쪽으로 쫓긴 무슬림(Muslim) 대세력의 대월지가 아무다르야강 북쪽에 중심을 두고 그 남쪽의 대하를 지배하였는데 대하는 드하라의 음역으로, 아프가니스탄의 北半 드하레스탄을 말하며 이곳은 당시 그리스인 식민왕국 박트리아의 중심지였다.

 

 

 

[그림 1] 장건이 BC 139년에 使行했던 대월지의 위치(호아상ㆍ팽안옥 지음, 이익희 옮김 2007, 22쪽).

지도에서 대완(大宛)은 Turkman(Ferghana), 강거(康居)는 Uzbekistan Samarkand, 소륵(疎勒)은 Kashgar, 총령(?嶺)은 파미르(Pamir)고원, 사차(莎車)는 yarkand, 엄채(奄蔡)는 Alan, 이해(裏海)는 Caspian海, 함해는 Aral海(鹽湖), 안식(安息)은 Persia(이란), 남지성(藍氏城)은 Afghanistan, 신독(身毒)은 인도이다.

 

 

그러면 다시 박트리아에 관하여 알아보면,

 

 

[인용문 4]

 

박트리아(Bactria):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부,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등으로 이루어진 고대지방 이름. 옥수스강(일명 Amu-darya강) 중류지역의 비옥한 계곡을 포함한다. 중국ㆍ인도ㆍ서방을 잇는 내륙교역로의 교차점이다. 그 이름은 옥수스강 지류인 박트로스강에서 비롯되는데, 수도 박트라는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다가, 후세에는 발흐라 하였다(http://kr.dic.yahoo.com /search/enc/=박트리아).

 

 

[인용문 5]

 

박트리아(Bactria): 힌두쿠시산맥과 아무다리아강 사이에 고대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BC 246∼BC 138). 중국에서는 대하(大夏)라고 하였다. 아케메네스왕조 때는 페르시아제국(帝國)의 박트리아나주(州)였다. 알렉산드로스대왕 제국이 붕괴한 뒤에는, 그 유장(遺將)인 셀레우코스 1세가 세운 시리아왕국의 한 주가 되었다. 그러나 시리아왕국이 쇠퇴한 틈을 타, 사트라프(Satrap: 州知事)로 임명된 디오도투스가 중앙으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왕이 되고, 박트라(지금의 Balkh)에 수도를 정하였다. 서쪽으로부터 파르티아의 침입을 받았고, 특히 북쪽에서 유입(流入)한 대월지(大月氏)에 정복되어 왕국은 멸망하였다. 박트리아는 그리스계(系)의 왕국으로서, 오랫동안 동방에 있어서 헬레니즘의 기수였다(http://100.naver.com 백과사전).

 

 

[인용문 4ㆍ5]를 종합해 보면,

박트리아는 힌두쿠시(Hindu Kush)산맥과 옥수스강(Oxus는 Amu-darya강의 옛이름) 사이에 고대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BC 246∼BC 138). 박트리아라는 이름은 옥수스강 지류인 박트로스강에서 비롯되어, 후세에는 발흐(Balkh)라 하였다. 그후 서쪽으로부터 파르티아가 침입하고, 옥수스강 북쪽으로부터의 대월지(인용문 3)에게 멸망하였다.

한편 다른 문헌을 보면, 몽고의 징기스칸이 중앙아시아를 정복하는 중에

 

 

[인용문 6]

 

1221년 봄 蒙古軍의 주력은 옥수스 강을 건너서 발크 시를 완전히 황페화시켜 버렸다. 당시 몽고군의 파괴는 철저하였기 때문에, 같은 이름을 가진 아프가니스탄의 도시는 현재 그 유적 부근에 위치하고 있지 않다. 사실은 舊 발크 시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룩 콴텐 宋基中 譯 1984, 203쪽).

 

 

[인용문 4ㆍ5]에서 찾아본 박트리아, 즉 구(舊) 발크는 [인용문 6]에 따르면 아직도 그 위치가 정확치 않다는 것이다. 다시 [인용문 3ㆍ4ㆍ5]에 의하면, 대월지의 지배를 받은 대하(大夏)는 그리스인 식민왕국 박트리아의 중심지로써 오늘날의 발크임이 분명하다.

呂不韋의 ?여씨춘추?에서 대하의 서쪽에 있다는 ‘완유산의 북쪽 해계의 골짜기’(院?之陰 ?谿之)를 1700여년 후에 조선조 성종 24년(1493)의 ?악학궤범? 집필자(成俔ㆍ柳子光ㆍ申末平ㆍ朴棍ㆍ金福根)들은 ‘곤륜산의 북쪽 해곡’(崑崙之陰 ?)으로 기록해 놓았다. 아래 [표 3]은 [여씨춘추]의 완유산과 [악학궤범]의 곤륜산을 이항(二項)으로 대조해 봄이다.

 

 

[표 3]

呂不韋(?~BC 235)

(鄭英昊 편역), [呂氏春秋](서울: 자유문고, 1992), 160~162쪽.

成俔(1439~1504)

[국역 악학궤범]Ⅰ(서울: 민족문화추지회, 1979), 원문 10쪽

昔黃帝伶倫作,

爲律

伶倫自大夏之西

乃之院?之陰,

取竹於?谿之谷

以生空竅厚鈞者

斷兩節閒 其長三寸九分

以取之以爲黃鍾之宮 吹曰舍少次制十二筒

以之院?之下聽鳳凰之鳴以別十二律

其雄鳴爲六 雌鳴亦六

以比黃鍾之宮適合 黃鍾之宮皆可以生之故曰黃 鍾之宮律呂之本.

昔黃帝使伶倫,

自大夏之西,

崑崙之陰

?谷之竹,

自然圓虛, 其竅厚均者,

斷兩節間以取之,

以爲黃鍾之宮, 又制十二?,

以象鳳凰之鳴,

其雄鳴爲六, 雌鳴亦六, 陽六爲律, 陰六爲呂, 六 律六呂, 總謂之十二律, 以配十二月...,

 

 

 

위의 [표 3]은 내가 2005학년도 제2학기에 영남대학교 국악과 <전공세미나>에서 수업한 내용인데 이항 대조에서 院?之陰이 崑崙之陰으로 바뀐 것 말고는 별다른 차이는 없다. 원문인 [여씨춘추]를 해석하면 [인용문 7]과 같다.

 

 

[인용문 7]

 

옛날에 黃帝는 樂人인 伶倫에게 律管을 만들 것을 命하였다. 伶倫은 大夏의 西쪽에 있는 院?山 北쪽으로 가서, ?谿의 골짜기에서 구멍의 두께가 고른 대나무(竹)를 取하고 마디와 마디 사이를 잘라, 그 길이를 3寸 9分으로 하였다. 이것을 불어서 음계의 출발음인 黃鐘의 宮으로 定하고, 이것보다도 차례로 짧게 해서 12구멍(筒)을 만들었다. 이것을 院?山 기슭에 사는 鳳凰의 울음소리에 맞추어 12律을 구별하였는데, 그 수컷(鳳)의 소리에서 6律, 암컷(凰)의 소리에서 6呂, 이렇게 하여 黃鐘의 宮에 比較하여 그 音들을 적당하게 調和시켰으니, 黃鐘의 宮은 나머지 모든 音들을 이룰 수 있으므로, 黃鐘의 宮을 律呂의 根本이라고 한다(尹良錫 1981, 156쪽, 또는 국역 악학궤범 Ⅰ, 원문 10쪽, 번역은 29쪽).

 

 

[인용문 2ㆍ7]에 나오는 <황제>에 관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인용문 8]

 

중국 역사는 BC 4,700여 년경 초기 목축시대에 25현 거문고를 만든 태호(太昊) 복희씨(伏羲氏)로부터 비롯되었다. 복희씨 다음으로 생황을 만든 여와(女?) 여황씨(女皇氏)가 있고 그 다음은 염제(炎帝) 주양씨(朱襄氏)가 있는데 그는 백성들에게 영농법을 가르쳐서 신농씨(神農氏)로도 불리며 5현 거문고를 만들었다(김병훈 2004, 13~15쪽 요약).

 

신농씨 다음이 [여씨춘추]에 나오는 영륜에게 황종을 만들게 한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이다. 황제 헌원씨에 관하여 알아보면

그는 BC 26세기경(인용문 2에서는 27세기) 중원(中原) 부족연맹의 수장이 됨으로써 창조력이 뛰어난 황제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문자ㆍ음률ㆍ산수 등이 그의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특히 황제의 악을 함지(咸池)라 했는데 이 시대에 출현한 악기는 뿔로 만든 피리와 대나무로 만든 피리, 그리고 징과 북이다. “제정된 12율이 귀신과 합치한다(制十二律合鬼神. 재인용 陳夢雷 2a)는 말은 하늘과 땅의 이치에 맞아 조화를 이루었다는 말로 자연적 원리를 담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봉황의 암ㆍ수컷 울음소리를 듣고 12율에 적합하도록 대나무 통을 잘라서 12개를 만들었다(制十有二笛以之阮?之下聽鳳凰之鳴以定其. 재인용 陳夢雷 4a)”는 것이다. 바로 여기가 율려의 발원지이다(김병훈 2004, 16쪽).

한편 최근의 보도에 의하면, 중국 란저우(蘭舟)대학 생명과학학원의 회족(回族)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DNA 조사로써 황종을 만들게 한 <황제>의 발원지는 중국 사람들(漢族)이 중원(中原)이라고 믿는 산시(山西)성 남부와 장쑤(江蘇)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성 일대가 아니라 현재의 간쑤(甘肅)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원래 북적(北狄 북쪽 오랑캐) 지역이라고 밝혔다([東亞日報] 2007). 여기서 적(狄)은 융적(戎狄)이라고도 하여 북방 이민족을 통틀어 가리키는 경우도 있고 귀방(鬼方), 또는 투르크계 민족이라고도 하며, 이들은 BC 8∼5세기(인용문 3에서는 3세기) 춘추시대에는 중원에까지 진출하였다(www.naver.com).

전통적으로 중원 漢族의 혈통을 이은 임금만이 천자(天子, The son of heaven 문단 ④관련)라 부르면서 동쪽 민족을 東夷, 서쪽 민족을 西戎(또는 西夷), 남쪽 민족을 南蠻, 북쪽의 흉노ㆍ돌궐ㆍ거란ㆍ몽고 따위의 겨레들을 北狄, 즉 이들을 4륭(四戎)이라 하여 오랑캐로 업신여겨 일컫는 우월적인 중원사상(中原思想)에 젖어 왔다.(우리가 알고 있는 <天高馬肥>라는 말은 북쪽 匈奴族(오랑캐 유목민족)들이 여름 동안 초원의 풀을 먹고 살찐 말을 몰고 와서 漢族의 가을 곡식을 약탈해가는 데서 생긴 故事成語인데 후에 좋은 의미로 轉化된 것이다. 萬里長城은 2천여 년 동안 漢族을 괴롭히는 匈奴族을 막기 위해서였다. <塞翁之馬>도 북방 흉노족과의 관계에서 생긴 고사성어이다).

[인용문 8]에서 율려의 발원지는 중원, 즉 산시성 남부와 장쑤(江蘇)성 서부 및 안후이성(인용문 2)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성 일대가 되는데 셰샤오둥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 발원지가 간쑤(甘肅)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원래 북적이었던 오랑캐 지역으로 바뀐다. 이곳은 중원의 서북쪽으로써 서역계(western region) 민족(오랑캐)들이 사는 곳이어서 그들의 음악문화와 충분히 교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데다 거기서 더 서쪽으로 사람을 보낸 일은 서역의 12율 음악을 가져온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이미 이해식의 “경상도쪼(調) 민요의 통시성과 토속성”에 이에 관한 논의가 있다(이해식 2006b, 212~218쪽). 12율은 [표 1]에서와 같이 탁월한 음조직이다. 이러한 음조직의 한 지점인 <완유산>을 우리 나라의 ?악학궤범?에서는 <곤륜산>으로 기록했다. [인용문 9]은 ?악학궤범?에 기록된 <곤륜산>에 관한 검색을 요약한 것이다.

 

 

[인용문 9]

 

곤륜산(崑崙山 쿤룬산)

중국의 전설에서 멀리 서쪽에 있어 황허강[黃河]의 발원점으로 믿어지는 성산(聖山). 신산(神山)이다.

<昆侖ㆍ崑芍>이라고도 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이후 신선설(神仙說)이 유행함에 따라 신선경(境)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되어, 산중에 불사(不死)의 물이 흐르고 선녀인 서왕모(西王母)가 살고 있다는 신화들이 생겨났다. 중국의 쿤룬산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곤륜산은 특정한 공간을 지니지 않은 신화적 산임에도 불구하고 고대 중국에서는 이 낙원이 서쪽 어딘가에 있다고 믿어졌다. 서방 낙원에 대한 이러한 열망은 후세의 한무제(漢武帝) 때에 장건(張騫)의 서역 탐색을 자극하여 비단길의 개척을 조장하였다. 불교가 전입된 이후로는 서방 정토(淨土)의 설법과 결합하여 중국인들의 서방 낙원에 대한 관념이 더욱 강화되었고 마침내 ‘서유기’(西遊記)와 같은 환상문학의 걸작을 낳게 되었다.

중국 티벳 자치구 보란현(普蘭縣) 지역에 위치한 해발 6,714m이며, 1년 내내 흰 눈으로 덮여 있다. 산은 마치 거대한 피라미드 형상이며, 투명하고 맑은 빛을 띤다. 강인포제(깡런뽀치 崗仁波齊)는 티벳어로「눈의 보배」라는 뜻이고, 범어(梵語)로는 신의 천당이라 불린다. 현지인들은 카리(Kari)라고 부른다.

곤륜산의 원래 이름은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須彌山)이고, 현재 이름은 카일라스산(Mt. Kailash), 중국 곤륜산맥의 주봉이다(www.naver.com).

 

 

[인용문 9]의 끝에서 카일라스산은 중국 곤륜산맥의 주봉이 아니라 티베트 자치구 남부보란현(普蘭縣)에 있는 카일라스산맥(중국식 山名은 岡底斯山脈)의 주봉이며 산고(山高)는 해발 6,714m이다. [그림 2] 카일라스는 인도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 산을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우주 중심을 차지한 성스러운 수미산(須彌山 부처가 사는 산)으로(Yahoo 백과사전), 중국 사람들은 이상향(理想鄕)으로 여긴다. 곤륜산은 황허의 발원이며, 서왕모가 사는 신화의 본거지로써 신의 천당이라 불린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이 낙원이 서쪽 어딘가에 있다고 믿었으며, 불교가 전입된 이후로는 서방 정토(淨土 western utopia)(고대 인도의 성자들이 서쪽에 극락정토룰 설정한 까닭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다. 대지를 밝게 비추며 이글이글 작열하던 태양이 지고 난 후의 고요와 적막. 여기서 사람의 생각은 저절로 다음날 일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중략- 모든 것을 불태울 듯이 쨍쨍 내리쪼이던 하루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나면 강에서 숲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서쪽에는 틀림없이 고통이 없는 시원하고 안락한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을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발상이다. 극락을 안양(安養) 또는 청량(淸凉)이라고 번역하는데 열대지방에서는 시원한 것이 곧 안락이요 극락이기 때문이다[법정, [산방한담], 서울: 샘터(개정판 9쇄), 327~328쪽])의 설법과 결합하여 서방 낙원에 대한 강한 선망이 장건(인용문 2 관련)을 서방에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중원 사람들의 생각이 조선에도 전이되어서 “山之祖宗은 崑崙山이요 水之祖宗은 黃河水라”는 땅 다지는 덜구소리 사설이 생기고 우리 나라 동해안 칠포에도 곤륜산이 있으며, [악학궤범]에도 곤륜산으로 기록되었음으로 보인다.

 

 

 

 

[그림 2] KBS-1TV는 2007년 12월 말에 Documentary <방송 80년 문명 대기획 Insight Asia-차마고도(茶馬古道)->를 6회에 걸쳐서 매일 밤 11:30에 방영했다. 그 순서는 마지막 마방(24일)ㆍ천년 염정(25일)ㆍ순례의 길(26일)ㆍ생명의 차(27일)ㆍ히말라야 카라반(28일)ㆍ신비의 구게왕국(29일)이다, 위의 capture는 <히말라야 카라반>으로 티벳 창탕(羌塘)고원에서 네팔 후리코트까지 험준한 해발 3,000m에 있는 수심 600m 폭숨도 호반과 5,000m Kailash 산을 넘는 돌포 카라반(Dolpo caravan)이다. 자막은 티벳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의 일부. 이와 관련된 참고 도서는 KBS 인사이트 아시아 차마고도 제작팀 지음 윤영수 구성, 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서울: 위즈덤하우스, 2007.

 

 

 

[여씨춘추]에서 음악가(樂人) 영륜을 보낸 곳이 대하의 서쪽에 있는 완유산 하고도 그 북쪽이라고 했고, 일설에는 (완유산) 해곡을 곤륜산 북쪽 골짜기의 이름이라 하였다(?국역 악학궤범? Ⅰ 1979, 번역 29쪽의 각주 22번). 지도를 보면 [악학궤범]의 <곤륜산>, 즉 수미산(카일라스산)은 오히려 대하-Afghanistan-의 훨씬 동남쪽에 있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고대 중국 사람들과 현대인의 지리 감각의 차이인가?

나는 이 글을 쓰기 오래전부터 <완유산>(阮?山)을 탐색해왔는데 아직까지 그 실체에 닿지 못했다. 그래서 미루어 보건대, [여씨춘추] 당시에 여불위의 식객(食客)들의 풍문(風聞)과 견문(見聞) 중에 지금 우리가 알 수 없는 대하의 서쪽으로 어느 정도의 거리에 있는 어느 산을 완유산이라고 기록했는지도 모를 일이고, 또 그것이 그 당시로써도 2ㆍ3천여 전 황제(黃帝) 시대의 일이어서 미흡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악기 --와 관련된 어떤 먼 곳에 있는 관문(關門)이나 지점, 또는 나라를 의미하는 <阮?>로 썼다고 볼 수도 있겠다. 더구나 [여씨춘추] 1700여년 이후의 [악학궤범] 집필자들의 시대에 중국문헌으로도 분명치 않은 신화시대의 완유산을 중국 사람들의 통시적인 생각(특히 불교)과 깊이 관련된 곤륜산으로 미루어 쓰지 않았는가 한다.

한편 완유산 북쪽에 있는 대나무를 잘라서 <황종>을 만든 점으로 보면 이곳은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 볼 수 있다. 또 김부식(金富軾)은 그의 [삼국사기]에서 횡적(橫笛)인 3죽(대금ㆍ중금ㆍ소금)이 신라에서 기원되었다고 했지만(鄕三竹 此亦起於新羅 不知何人所作([三國史記] ?樂志?). 나는 [三國遺事]에 전하는 저대와 관련된 <萬波息笛>을 海洋 神話로 본다), 진양(陳暘)의 [악서](樂書, 1101년 北宋)에 의하면 횡적은 장건이 서역에 갔다 오면서 서량(西?: 현재의 甘肅城 북부, 도읍은 敦煌)에 전파한 서역계 악기로써 5세기경에 중국 북방을 거쳐서 고구려에 수용된 악기가 신라에도 들어온 것이다(宋芳松 1989, 249쪽. 또 무하마드 깐수 1992, [新羅ㆍ西域交流史](서울: 檀國大學校 出版部), 274쪽에서 宋芳松 1985, [韓國古代音樂史硏究](서울: 一志社), 175ㆍ219쪽의 註釋을 재인용. [樂書] “橫取胡樂也昔張博望入西域 傳其法 於西?” 중에서 <張博望>은 흉노와의 전투 승리로 장건에게 봉해진 <博望候>이다. <博望>이란 넓은 세계를 관찰하여 모조리 통달하고 있다는 광박첨망(廣博瞻望)에서 나온 말인데 장건이 오랫동안 보고 들은 지식으로 공을 세웠다는 말이다. 호아상ㆍ팽안옥 지음, 이익희 옮김, 2007, 27쪽). 우리 나라에도 전래된 서역(중앙아시아)의 여러 기악(伎樂)에 다수의 대나무 관악기들이 사용되었음과 “완유산 북쪽 해계 골짜기의 대나무”라는 [여씨춘추]의 기록으로 보면 이 지역에서 대나무가 많이 생산됨을 알 수 있다.

몽고제국의 구처기(丘處機 1148~1227)가 사마르칸트→비석성(碣石城)→인도로 가기 위한 철문관(鐵門關)과 아무다리야강을 건너면서 수레 밑에 깔려도 부러지지 않는 갈대와 통대나무를 많이 보았다는 기록을 [장춘진인서유기](長春眞人西遊記)에 남겨 놓았다(호아상ㆍ팽안옥 지음, 이익희 옮김 2007, 91쪽). 철문관(鐵門關)은 중앙아시아 Samarkand와 Tabaristan 사이에 있는 險路. 인도에 이르는 要路임. 당나라 玄?三藏이 인도로 불교를 연구하러 갈 때 이곳을 지났는데 좌우의 암석이 鐵色이고 쇠문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함(이희승 1981, 3608쪽). 그래서 이 길을 불타로(佛陀路)라고도 한다(무하마드 깐수 1992, 450쪽과, 정수일 2002, 80쪽. 무하마드 깐수와 정수일은 異名同人이다). 이와 같은 대나무 기록으로 보아서 나는 혹시 완유산 북쪽의 우묵한 해계 골짜기의 대나무가 지리적으로 구처기의 서역 행로와 유사하지 않은가를 상상해 본다. 아래 [그림 3] 사진은 인도의 서쪽 지방 칸문 사람들이 대나무를 뗏목처럼 묶어서 운반하는 장관(壯觀)이다.

 

 

 

 

[그림 3] “인도에선 대나무 이렇게 운반해요” 2008년 1월 2일 인도 미조람 주의 주도 아이자울에서 서쪽으로 235km 떨어진 칸문 마을 사람들이 인근의 롱가이 강물 위로 대나무 묶음을 배처럼 띄워 운반하고 있다. 칸문=로이터/동아닷컴 특약. 2008-01- 05 06:53:15(東亞日報, 2008). 인도도 서역에 포함된다.

 

 

 

[그림 4] 지도를 보면 대하의 서쪽에 있는 파르티아(Partia 安息 Iran)는 BC 248~AD 226년 사이의 국가로써 [여씨춘추]를 남긴 여불위의 생존기간(?~BC 235)에도 맞는다. 여기서 서쪽으로 더 멀리-院?- 가면 터키가 있는 소아시아(Asia minor)에 이른다. 대개 파미르(Pamir) 고원을 넘으면 소아시아로 본다.

 

 

 

[그림 4] 전ㆍ한 시대의 오아시스로(남ㆍ북도). 정수일 2002, 48쪽.

 

 

 

소아시아 서안(西岸) 여러 곳에 있는 그리스의 식민지 가운데 프리지아(Phrygia)는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BC 356~323)의 정복사(征服史)에도 여러 번 나온다. 나는 도시국가인 이 프리지아를 주목한다.

북쪽으로부터 전래된 디오니소스(Dionysus) 축제는 그리스 전역에 퍼졌는데 이 축제에서는 주로 프리지아의 관악기 아울로스(aulos) 음악이 연주되었다.

 

 

그리스 예술에서 <아폴로적>이란 말이 지성주의를 뜻한다면, 몰아(沒我)의 황홀감이라든가 정열ㆍ열광ㆍ감수성 같은 전혀 이질적인 요소를 <디오니소스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프리지아의 관악기 아울로스는 디오니소스 신의 제전의식(祭典儀式)에 즐겨 사용되었으며 음악면에서 그것은 그리스 예술의 농암(濃暗)하고도 방일(放逸)하며 정열적인 측면을 대변하게 되었다(Hugo Leichtentritt 韓明熙 譯 1981, 51쪽).

 

 

참고로 이러한 프리지아의 분방한 정신이 현대에도 남아있는 증표가 바로 우리 나라 사람들도 즐겨 쓰는 프리지아 고깔모자이다. 우리 나라에서 불교 관련으로 들어온 고깔모자를 쓰는 풍물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 강릉 官奴 假面戱에서 프리지아 고깔모자를 쓴 양반 광대가 이채롭다. 이것이 혹시 프리지아 고깔모자와 관계있는지는 알 수 없다).

 

프리지아 모자(Phrygian cap)는 머리에 꼭 눌러 쓰는 원추형 모자. 부드러운 펠트나 양모로 만들며, 앞으로 접히는 뾰족한 관이 특징이다. 소아시아의 고대국가인 프리지아에서 유래했으며,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는 동양인들이 착용하는 모자로 표현되어 있다. 로마에서는 자유의 몸이 된 노예들이 자유의 상징으로 이 모자를 썼고 11, 12세기에 많은 사람들이 다시 착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중인 18세기에 혁명가들이 빨간색의 프리지아 모자를 자유의 모자로 채택하면서부터 또다시 자유의 상징 되었다. 이것은 계속해서 국가적 자유를 뜻하는 우의적인 상징으로 인식되어 왔다(www.daum.net 브리태니커).

 

이 모자는 유라시아 대륙의 아리안계가 널리 쓰던 것이며, 특히 프리지아 사람들이 많이 쓰던 것이다. …고깔 디자인이 본디 말 타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그러고 보니 고구려의 고깔모자를 절풍(折風)이라고 했다. 이 모자는 바람을 가른다(이지훈의 살림의 예술찾기 2007, 195~197쪽).

 

 

대하, 즉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발크도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되어서(BC 246~138, 인용문 4ㆍ5 관련) 동방과 서방 문화를 중개하는 역할을 하였다. [여씨춘추]를 남긴 여불위의 생존 기간(?~BC 235)도 대략 이 시기에 든다. 프리지아 음악에 동방적 색체가 있음은 박트리아와 활발하게 교류되었음으로 본다.

고대 세계에서 인류가 가진 꿈의 하나는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일이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이카로스(Icaros)는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았다가 그만 밀랍이 녹아서 에게(Aegean see) 바다로 추락했다. 우리 나라 고대 세계에서 새는 하늘(신)과의 통신(messenger)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자연스러운 수단이었는데 죽간(竹竿) 신앙으로써 높은 장대 위에 새를 얹어 놓은 <솟대>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 나라 아악에서 연주되는 타악기에도 거의 새가 얹어져 있는데 나는 이것을 내 블로그에서 <악기 솟대>로 설명하고 있다(www.blog.daum.net/hsik42). 타악기에 새가 얹어져 있음은 악기의 울림이 곧 새를 통한 신과의 통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신화에서 봉황은 인간의 음악에 뛰어난 감상력을 지니고 있다고 전해온다(인용문 2). 이러한 봉황의 울음소리에 황종의 음높이(音高 pitch)를 맞춘 것은 신(자연)과의 통신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의 음악 문화에서 표준음고(standard pitch)는 오래 동안 정처가 없었음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인용문 10]

 

실제로는 척도(尺度) 그 자체가 불안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주대(周代)의 20cm를 최소로 하고, 명대(明代)의 34cm를 최대로 해서, 그 사이에 여러 가지로 변화했다. 최대의 것과 최소의 것의 비는 3:5이며, 양자의 음악적인 차는 단6도에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주대의 표준음이 C였다고 한다면, 명대의 표준음은 아래의 E였던 것으로 된다. 황종은 애당초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었고, 그런 까닭에 그 결정을 둘러싼 논쟁은 그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의 피치의 역사는 거의 12세기 동안에 걸쳐 혼란과 실패의 역사였다(쿠르트 작스 三頀出版社 編輯部 譯 1986, 175ㆍ177쪽. 중국의 전통은 음악상의 문제를 수많은 음악 외적인 사물에 연결 짓고 있다는 것을 기술해 두겠다. 황종은 최초에는 남자 목소리의 중위(中位)의 피치로부터 대충 결정한 것으로써, 몇 자 몇 치 몇 푼이라고 표준화된 것은 다소 후의 일이었다. 영륜은 어떤 죽관(竹管)이, 자기가 조용히 말할 때의 피치를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재인용 P?re Amiot,). 유럽에서도 표준음고(standard pitch)가 정해진 1834년 이후,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가 헝가리의 제금가 레메니(Eduard Rem?nyi 1828~1898)와의 연주여행에서 Beethoven의 Kreutzer sonata를 연주할 때 반음 낮게 조율된 피아노를 원조(原調)대로 쳤다는 유명한 episode는 1853년의 일이다(Jane Stuart SmithㆍBetty Carlson, 박희석 옮김2000, 246쪽). 이 episode는 당시 유럽에서도 표준음고가 안정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제 [인용문 1] 문단 ⑥에서 “악(樂)이란”은 [악학궤범] 서문을 시작하는 “樂也者, 出於天而寓於人, 發於虛而成於自然, 所以使人心感, 而動?血?流通精神也”이다. <음악>이란 뜻을 서양에서는 물리적으로 정의하는데 대하여 동양의 자연적인 설명이라 하겠다.

문단 ⑦에서 넷째 천간(天干)인 <丁>은 갑골문()에서처럼 제단 위로 솟아있는 태양(日)을 그린 것으로, 제단은 태양신을 모시던 흔적으로 보인다(하영삼 [東亞日報] 2004). 따라서 춘추로 음력 2월과 8월 첫 정일(上丁日)를 택일(擇日)하여 문묘악을 연주하는 석전제(釋奠祭)를 올림은 고대 중국의 태양제의(太陽祭儀) 관련이라 하겠다.

 

 

 

 

[그림 5] 악ㆍ가ㆍ무(樂歌舞)는 원래 釋奠에서만 시행되는 엄격한 예악(social code of etiquette and music)의 concept이 그 본바탕이다. 사진은 <孔夫子 誕降 2557年 秋期釋奠>에서의 烈文之舞. 紅紬衣를 입고 머리에 進賢冠을 쓰며 木靴를 신고 왼손에 ?을, 오른손에 적(翟)을 들고 迎新ㆍ奠幣ㆍ初獻의 절차에 따라서 춘다.

2006. 9. 25. 서울 명륜동 성균관. Sony DSC-V1, 녹화/이해식.

 

 

 

오늘날 문묘악은 고려 예종 11년(1116년)에 들어온 대성아악이 조선조 세종 시대를 거쳐서 완전히 한국화된 <응안지악>(凝安之樂)이다. 이를 오히려 중국 사람들이 배워갔다 함과 서양음악가들이 극찬했다 함은 내가 선사(先師)로부터 들었을 뿐 이에 대한 문헌을 아직 보지 못했다. 다만 1974년 10월 23일의 석전제에 영국의 프랏트 교수와 중국음악학자 Rulan Chao Pian(卞趙如蘭) 등이 연구목적으로 참관했음이 고 장사훈 박사의 [花前態와 花柳態]에 보일 뿐이다(張師勛 1982, 315쪽). 현재 공자 제향인 석전은 한국과 자유중국(대만) 뿐이다. 자유중국의 공자 제사의 음악과 춤은 최근에 이르러 부활된 것으로 전통과 거리가 멀 뿐 아니라 현대적인 요소가 가미된 흠이 있다(張師勛 1982, 315쪽). 2007년 12월 20일부터 2008년 2월 24일까지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에서 기획 전시한 <文廟祭禮樂>에서 대만과 중국의 문묘제례악 동영상을 보면, 무엇보다도 佾舞에서 한국과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여러 관악기는 서역에서 전래된 기악(伎樂)과 함께 유입되었는데 장고와 같은 타악기도 그렇다. 특히 장고는 진양(陳暘)의 [악서](樂書)에서 “銅鼓出於南蠻天竺”이라는 기록과 관련하여(재인용 陳暘) [그림 6]을 보면 북인도에서 전래된 서역 악기임이 분명하다.

 

 

 

[그림 6] 지금도 인도에서 연주되고 있는 장고가 우리 나라의 장고와 동일하다(銅鼓出於南蠻天竺). 오른쪽은 인도 저대(橫笛). KBS-1TV 2005.

 

 

 

오늘날 -모르는 사람들에 의하여- 국악의 모든 분야에 적용되고 있는 악ㆍ가ㆍ무(樂歌舞)는 원래 석전에서만 시행되는 엄격한 예악이 그 concept이다. 여기서 아악을 classic이라 했음은 아악이 격조(格調)있는 예(禮), 즉 질서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 모든 정악을 포함하는 아악이라기보다는 좁은 의미에서 문묘제례악과 종묘제례악만이 진정한 아악(제사음악)임도 알아야겠다.

문단 ⑧에서 “미학자 C. 작스는 <대하>는 박트리아(Bactria)라고 했는데” 이것은 내가 이 칼럼을 기억으로만 쓴 오류의 결과이다. 기억이란 언제나 의심할 여지가 있어서 모름지기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영국의 중국 학자 자일스(Giles)는 박트리아(Bactria)의 일부 지방이라고 믿고 있었으나 근년에 이르러서 오토 프랑크(Otto Franke)에 의해서 토카르(Tochar)의 나라였음이 C. 작스의 저서에 밝혀져 있는 것이다(쿠르트 작스 三頀出版社 編輯部 譯 1986, 171쪽). 이곳 박트리아, 즉 현재의 발크에 진출한 우리 나라의 건설기업은 2004년 삼환기업이다. 이에 대하여 이해식의 [산조의 미학적 구조론]에 상술되어 있다(이해식 2006b, 213쪽과 214쪽의 각주 63번).

갑골문 <丁>은 문단 ⑦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내가 쓴 column “노란 색 소리의 씨앗”은 고대 중국 음악의 12율이 내포한 message, 즉 陰呂 또는 六同이라 하여 陰數(짝수)에 배치된 의미로부터 시작하였다. 음수 율 중에서 三呂(大呂ㆍ仲呂ㆍ南呂)는 12율의 척추요 운동곡선으로써 12율이 생명체임을 상징한다(朴容淑 1978, 323쪽 참조). 이중에서도 大呂는 첫째 陽數(홀수) 黃鐘을 도와서 음양의 12율을 완성케 한다. 鐘이 種으로써 소리의 씨앗이 되는 의미를 첫 양수 율 黃鐘에 두고 그 다음 三鐘(夾鐘ㆍ林鐘ㆍ應鐘)을 음수 율에 배정하였다. 나는 이러한 음렬적인 음수 율을 창조의 근원으로 본다.

column을 각 문단별로 확대 설명하고 그에 따르는 문헌을 보완한 본문의 중요점은 呂不韋의 ?呂氏春秋?를 典據로 하여 “황종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탐구하는 문단 ⑤에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본문의 처음 제목도 “황종은 어디에서 왔는가?”였다. 본문에 인용한 지도나 사진들은 모두 황종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보려는 보조 방편들이다.

[呂氏春秋]에 따르면 黃帝가 음악가 伶倫을 보낸 곳이 大夏의 서쪽에 있다는 阮?山 북쪽 계곡이라고 했는데 大夏는 Bactria이고 오늘날 Afghanistan의 Balkh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서쪽에 있다는 阮?山은 알 수가 없었다. 黃帝ㆍ鳳凰ㆍ阮?山 등이 BC 26~27세기경의 신화여서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신화속의 阮?山을 우리 나라의 [樂學軌範] 집필자들은 지리적으 로 實在하는 理想鄕인 崑崙山(Kailash)으로 적어 놓았다. 만약에 [樂學軌範]의 일설대로 (완유산) 해곡이 곤륜산 북쪽 골짜기의 이름이라 면 오늘날의 지리 감각과 맞지 않는다.

더구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의 연구대로 황종을 만들게 한 <黃帝>의 발원지가 中原이 아니라 현재의 간쑤(甘肅)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원래 북적(北狄) 지역이라면 이곳은 중원 사람들이 얕보아 온 西域(western region)이다. 이 서역에서 더 서쪽으로 사람을 보냈음은 서쪽의 음악을 가져왔음이나 다름이 없다고 보는 관점을 아래의 인용문단으로써 대신하고자 한다.

 

 

三分損益과 관련하여 남성과 여성이 교대로 나타나는 성격, 損一과 益一의 세대가 반복 공존함은 일상적인 사상이 아니며 이것은 유태인의 신비적 우주 창조설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여기서 영원한 남성과 영원한 여성이 接合된 兩性은 영원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신비주의에 秘敎的 敎義로써 이집트에서는 태양신ㆍ달의 여신ㆍ오시리스신ㆍ이시스신의 신비가 첨가 되었고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서도 그렇다고 J. F. C. 풀러(Fuller)는 주장하고 있다(재인용 J. F. C. Fuller). 이러한 정신적 세계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의 동양, 특히 수메르ㆍ바빌로니아ㆍ이집트에서도 하아프나 라이어의 開放絃 위에 중국인이 행했던 것과 똑같은 상하 반복식 원리에 기본을 둔 음조직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전설이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黃帝의 음악가가 서방에서 12율을 가져왔다고 함은 이같은 음조직이 전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쿠르트 작스 三頀出版社 編輯部 譯 1986, 175쪽).

 

 

 

위의 인용문에서 중국의 전설이란 물론 ?여씨춘추?에 나오는 黃帝이다. 이미 이해식의 “동동(動動)의 구조”(이해식 1997, 314~315쪽)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의 전통적인 5음 외에 變微ㆍ變宮이 BC 12세기경에 서역으로부터 들어온 데다 그 이전 BC 26~27 세기 황종까지라면 중국음악 이론의 효시는 서역음악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더하여 黃帝의 근원지가 북적 지역이고 7음계가 주로 중국의 북부에서 더 쓰인 점으로 보면 이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중국음악이 우리 나라의 전통음악의 한 자락이 되었음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阮?山의 지점을 확실히 알 수 없어서 본문 제목을 “황종에 관하여”로 하게 되었다. 본문의 첫 의도인 “황종은 어디에서 왔는가?”에 관하여 관심있는 사람들의 도움말을 기대한다(hsik42@hanmail.net).

 

 

중심어: 黃帝ㆍ鳳凰ㆍ阮?山ㆍ崑崙山ㆍBactriaㆍ西域ㆍPhrygiaㆍ三呂ㆍ三鐘.

 

 

 

참고 문헌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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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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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 C. Fuller, The secret wisdom of the Qabalah, London(1937)를 쿠르트 작스(Curt Sachs) [音樂의 起源] 上(서울: 三頀出版社 編輯部 譯, 1986), 171쪽을 요약하고, 이와 관련한 181쪽의 尾註 20번을 재인용함.

P?re Amiot, M?moire sur la Musique des Chinois, Paris, 1779, p. 86n을 쿠르트 작스(Curt Sachs) [音樂의 起源] 上(서울: 三頀出版社 編輯部 譯, 1986), 172쪽에서 재인용.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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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亞日報], 2008. 1. 5. A18면. 칸문=로이터 연합뉴스

[영대신문], 2004. 5. 24. 11쪽.

사진: 烈文之舞. 2006. 9. 25. 孔夫子 誕降 2557年 秋期釋奠.

하영삼 경성대 교수 ysha@ks.ac.kr, [한자 뿌리읽기]<4> “음(陰)과 양(陽),” [東亞日報], 2004. 1. 12. C4면.

KBS-1TV 2005. 9. 25. 11: 40.pm. 인도 영화 <Lagaan: Once upon a time in India>(2001). ※Lagaan은 세금이라는 뜻의 인도어.

 

Web site

http://enc.daum.net/dic100/viewContents

http://kr.dic.yahoo.com/search/enc/=박트리아.

http://100.naver.com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

www.blog.daum.net/hsik42 카테고리: 솟대와 적석(돌쌓기).

www.daum.net 브리태니커.

www.naver.com

Yahoo 백과사전 “카일라스 산맥.”

 

 

 

 

Abstract

 

On the Huangzhong(黃鐘)

 

Lee Haesik(professor at Yeungnam university)

 

This thesis starts from the meaning that sanlu(三呂: 大呂ㆍ仲呂ㆍ南呂) and sanzhong(三鐘: 夾鐘ㆍ林鐘ㆍ應鐘) are laid out in a negatives(陰數) in the 12 rules(律) of old China. This researcher sees such a serial negatives as the origin of creation. The focus of this thesis is that "Where was the huangzhong(黃鐘) originated?" searching Ruan-yushan(阮?山) in which the old Chinese Huangdi(黃帝), sent the musician, Ling Lun(伶倫) to the north valley of Ruan-yushan located in the west of Bactria(current Balkh), and had him make the huangzhong rule in bamboo based on Lu Buwei's(呂不韋) Lushi chunqiu(呂氏春秋). But that the compilers of Akhak guebeom(樂學軌範) in Joseon(朝鮮) Dynasty changed Ruan-yushan to Kunlunshan(崑崙山) is considered from the reason that Ruan-yushan is a myth, which is not concretely revealed. Thus this thesis title was made it as "On the Huangzhong."

Professor Xie Xiaodong(謝小東), a muslim announced that the origin of the old Chinese myth, Huangdi is not China proper(中原), but northern barbarian(北狄) regions, that is, Western regions(西域). Furthermore, that a musician was sent to the west is considered to no more than have brought in the Western regions music, whose viewpoint is supported by the theory seeing it as the tone system as China which was in the old east(orient) of esoteric religion in relation to Jews' mysticism. In this situation, it can not be overlooked that the Chinese music theory based on that of Western regions is a part of Korean music.

 

Key words: Hwangje(黃帝)ㆍ bongwhang(鳳凰)ㆍWanryunsan(阮?山)ㆍ Gonyunsan(崑崙山)ㆍBactriaㆍseyoyok(西域)ㆍPhrygiaㆍ samryeos(三呂)ㆍsamjongs(三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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