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이렇게 쓰면 안 된다.
1.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 그리면 안 된다
봄내음 물씬 나는 냉이국 밥상머리
자자손손 둘러앉아 웃음꽃 만발하던
그 시절 그리워지며 떠오르는 초가삼간
실개천 버들개지 봄이면 피고 지며
임금님도 지나가다 잠깐 쉬어 목축이곤
너무도 물맛이 좋아 단술禮와 샘泉자로 -서정목, 내 고향 예천 1,2수
이 작품은 한마디로 싱겁다.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 그리고 있다. 제1수에서의 ‘냉이국 밥상머리’, ‘자자손손 둘러앉아’ ‘떠오르는 초가삼간’ 등은 모두 육안으로 보이는 것들이다. 시의 특징 중에 ‘정서와 상상’이 있는데, 정서적인 표현도 없고 상상력을 동원하지도 않았다. 제일 중요한 내포적인 언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 문장이 늘어져서 압축미를 느낄 수도 없다. 그냥 눈에 보이는 사물을 시조형식에 맞춰 나열한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시의 특징 중에 한 가지도 포함된 것이 없다.
제2수도 예천에 대한 설명이다. “실개천 버들개지 봄이면 피고진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이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임금이 지나다가 쉬면서 물을 마셨다는 이야기나 물맛이 너무 좋아 ‘단술 예(禮)자“와 샘 천(泉) 자를 써서 예천이라 했다는 것은 설명이다. 이것이 설명이라는 데 대하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 그리면 이처럼 설명에 빠지게 된다. 소개한 작품은 1998년도 「한국시조 연간집」에 실려있다.
아늑한 산자락에 가부좌를 틀은 지형
햇빛이 춤을 추는 생기 넘칠 터 다지고
전설 속 흙집을 살려 숨 고르며 살으리라
앞자락 밭 일구며 산채를 거두면서
연분으로 이룬 식솔 무릎을 마주하며
자연식 입맛 들이며 웃음꽃을 피우리라 -성호, 황토방 1,2수
이 작품은 4수 연시조인데, 제1,2수만 인용하였다. 구인환이 위에 말한 현대시의 특징은 한 가지도 찾을 수 없다. 그러니 이 작품은 실패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시조형식에 얽어매었다는 생각이 든다.
제1수도 육안에 보이는 것들을 그대로 나열하였다. 초장의 산자락과 가부좌 틀은 지형, 중장의 생기가 넘치는 터, 종장의 흙집 등은 모두가 눈에 보이는 사물이다. 제목이 〈황토방〉인데, 이것은 성호시인이 생전에 원주 부론면에 살 때, 황토방, 즉 흙집을 짓고 살았다는 것을 소개한 것 같다. 시에서는 비유가 생명인데, 그 중요한 비유법을 내던지고 직설법만 애용한 것이다.
제2수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그대로 나열하였다. 초장에서는 빝 일구고 산채 뜯는 이야기, 중장에서는 식구들이 무릎을 맞대고 앉은 모습, 종장에서 자연식을 즐기면서 웃음꽃 피우는 이야기 등 모두가 육안으로 보이는 것들을 작품의 소재로 삼은 것이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를 제시하고 설명한 것이다. 시나 시조는 사물에 대하여 설명할 것이 아니라 그 사물에 대한 느낌을 표출해야 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써본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2.누구나 다 아는 내용을 시에 쓰면 안 된다.
논둑길 걸을 때면 벌레 소리 들려오던
내 고향 해 뜨는 곳 그 바닷물 아름답다
시냇물 바다로 흘러 그 물소리 귀에 들린다 -박정순, 고향의 꿈 제1수
이 작품은 4수 연시조로 되어 있다. 제목은 〈고향의 꿈〉이다. 시의 특징 중에 ‘압축된 형식미’가 있는데, 전혀 압축을 하지 않고 그냥 늘어진 상태다. 그러니 4수 연시조로 끌고 나간 것이다. 또한 시에서 중요한 것이 참신성이다. 무언가 새로워야 독자의 관심을 끈다. 새로운 것이 없다는 건 남들이 뻔히 아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초장에서는 고향의 논둑길을 걸을 때 벌레 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다. 논둑길이나 밭둑길을 걸을 떼 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이거 만인이 다 아는 이야기다.
중장에서 ‘내 고향은 해 뜨는 곳’이라 했는데, 아마도 동해안 어딘가를 지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해는 두메산골에도 뜬다. ‘그 바닷물이 아름답다’고 했는데, 바다가 아름답다는 것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건 시조가 아니라 수필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수필도 이처럼 뻔히 아는 이야기를 늘어놓지는 않는다.
종장에서는 “시냇물이 바다로 흘러 그 물소리가 귀에 들린다”고 했다. 그 시냇물이 바다로 흐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는가? 그 물소리가 귀에 들린다고 했는데,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처럼 뻔히 아는 이야기만 늘어놓으면, 이것은 시조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다.
금강 물 굽이굽이 유유히 흐르는데
웅진 성 옛터엔 잡초가 우거져서
풀벌레 울음소리만 산허리를 흔드는데 -박찬홍, 공산성에서 제1수
이 작품의 제목은 〈공산성에서〉이다. 공산성은 충남 공주에 있, 백제 때 쌓은 성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3수 연시조인데, 제1수만 인용하였다. 이 작품도 그야말로 만인이 다 아는 이야기만 나열하였다.
초장에서는 “금강 물이 굽이굽이 유유히 흐른다”고 하였다. 강물이 굽이굽이 흐르고 유유히 흐르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시조는 상식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으면 그 내용은 상식이 된다.
중장에서는 “웅진 옛 성터엔 잡초가 우거져 있다”고 했다. 옛 성터에 돌보는 이가 없어 잡초가 우거지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그 다 아는 사실을 시라고 쓰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종장에서는 그 옛 성터에서 “풀벌레 울음소리만 산허리를 흔든다”고 하였다. 얼마나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으면 산허리를 흔든다고 표현했을까? 잡초가 우거진 곳에서 풀벌레가 요란하게 우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시에서는 너무 당연하고, 맞는 이야기고, 합리적인 이야기를 써놓으면 잘 썼다는 평가를 못 받는다. 오히려 거짓말 같고, 엉뚱한 소리고, 비합리적인 내용을 써놓아야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3.산문적인 서술을 하면 안 된다.
아내를 잃고 나선 충격으로 나간 정신
되돌려 보려고도 무진 애를 다 썼건만
지금도
후유증 때문
골치 앓고 있어라 -박일송, 아내를 잃고 나선 제1수
이 작품의 제목은 〈아내를 잃고 나선〉이다. 3수 연시조인데, 제1수만 인용하였다. 구인환은 그의 「문학개론」에서 시의 특성에 ‘운율적, 내포적 언어’를 제시하였다. 그러면 운율은 무엇인가?
“운율을 별도로 음성구조(音聲構造)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시를 읽으면 마음속에 어떤 흥겨움이 일어나는 수가 있다. 그리고 그 흥겨움은 의미구조가 갖는 건축적 단면과는 달리 일종의 가락을 지닌다. 이렇게 흥취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요소를 우리는 시의 운율(韻律)이라고 한다. 운율은 시의 여러 요소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단면을 이룬다. 시의 여러 요소 가운데는 이미 말한 정서적 언어의 사용이라든가 이미지, 역설 아이러니 등이 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여러 측면은 시 아닌 소설이나 희곡 등에도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운율, 특히 한 작품을 이루는 흥청거리는 가락은 시 이외의 경우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정한모, 김용직 문학개설
우리나라에서 보통 운율이라고 하는 것은 ‘韻’과 ‘律’ 두 가지를 아울러서 말하는데, ‘韻’이란 운자의 제한 즉 압운을 뜻하고 ‘律’은 음절수의 제한을 뜻하므로, 엄밀히 말해서 우리나라의 시에는 율조만 있지 운은 없다고 해야 옳다. 그러므로 시의 운율이란 시문의 음성적 형식을 말하며 ‘주기적인 악센트’나 가락의 지속과관련된 음악적 구문의 특징을 뜻한다. -구인환, 구창환 문학개론
정한모는 운율을 음성적 구조라 했고 한 작품을 이루는 흥청거리는 가락이라고 하였다. 김용직은 우리나라 시에는 율조만 있고 운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운율이란 시문의 음성적 형식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설명은 어렵게 표현한 것이고 쉽게 말하면 리듬이 있다는 이야기다. 더 쉽게 표현하면 음악성이 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렇다면 위에 인용한 작품 제1수에서 리듬을 찾아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필자가 보기에 박일송의 위 작품은 산문을 그냥 행갈이 해논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 작품을 이어서 쓰면 “아내 잃고 나서 충격으로 나간 정신을 되돌려 보려고 무진 애를 다 썼건만 그 후휴증 때문에 골치 앓고 있어라.”는 산문이 된다. 이것을 시조의 3장 6구 12소절의 형식에 꿰어 맞춘 것이다. 위의 작품은 시문이 아니라 산문이다.
첫댓글 완전 내 이야기네요.
종장에서 머리를 딱 때리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시인님의 충고가 떠오릅니다.
누구나 다 이렇게 시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