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수상자 : 박선주
수상 년도 : 2024년
수상 작품 : 책으로 쌓은 내공 날개를 달다
ㅡ 권남희의 『민흘림기둥을 세우다』를 읽고
책으로 쌓은 내공 날개를 달다
나는 글을 쓰는 만큼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한다. 문장을 따라가는 길은 혼자여도 둘인 것처럼 외롭지 않아 좋다. 작가의 글 향기를 맡으며 함께 걷는 오솔길에는 어릴 적 할머니에게 들었던 옛날이야기도, 후회 가득한 철부지 시절의 내 모습도, 내가 모르는 삶의 깨달음도 들어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2023년 발리 해외 문학기행에서였다. 풋내기인 내게 첫 해외 문학기행에 참여한다는 건 어쩌면 용기였고 모험이었다. 설렘과 기대는 하늘을 나는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발리의 풍광들은 꿈을 꾸듯 아름다웠다. 그보다는 문학이란 글밭에서 흠모하던 선배님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기쁨이 더 컸다. 게다가 작가가 된 첫걸음을 축복하듯 눈부신 바다를 배경으로 웨딩드레스 촬영까지 한 것은 더 각별하게 다가왔다. 이 특별한 이벤트를 기획하고 준비한 분이 권남희 수필가라고 했다.
어느 날인가 우연히 책을 뒤적이다가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권남희 작품집 『민흘림기둥을 세우다』가 발간되었기에 작가에게 직접 주문했다. 이 책에 쓰인 52편의 작품들은 마치 어렸을 때 갖고 싶어 했던 종합선물 세트를 선사 받은 느낌이 들었다. 포장지를 뜯으니 전형적인 수필의 진수를 보여주는 서정성 있는 작품부터 시사성 있는 글, 임헌영 평론가가 말했듯 큐비즘적이며 실험적인 접근 방식으로 쓴 글 등 작가의 넓고 깊은 시선과 박학다식한 면모가 잘 드러나 있었다. 글 마디마디 다양한 색감의 그림들과 직접 찍은 듯한 사진들은 글이 전하는 사실감과 생동감을 더했다.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던 많은 화가들과 작가들, 여행지의 기억들을 진솔하고도 독특한 문학적 수다로 풀어낸 탄탄한 글들은 격의 없는 친구가 들려주는 재기발랄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또한 40여 년간 작가의 길을 걸으며 얼마나 치열하게 창작활동에 집중해 왔는지 그 내력도 작품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틀수하다, 텡쇠, 가납사니’ 등 잊혀져가는 우리말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여 복원하고자하는 단단한 심지가 엿보이기도 했다. 작가의 작품들은 과거를 짚어내고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현대 수필의 나아갈 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첫 작품인 「연필들이 온다」부터 신선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중 새내기 작가인 내게 성큼 다가온 것은 ‘어떤 마음가짐과 문학적 열정으로 글을 써야하는가’에 대한 글들이었다. 그래서 그런 주제의 몇 작품 위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작품 「우직하게 내공 쌓기」에서 작가는 스스로 어릴 때부터 눈치도 없고 느리고 경제 감각이 없어 어머니에게조차 늘 무능하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고 했다. 그런 작가의 삶을 버티게 한 힘이 무엇이었을까. 등단은 천우신조였다고 작가가 말했으나 지옥 같았던 30대의 극한 고통 속에서도 책을 사러 서점에 들렀다니 ‘책’이 작가의 힘이었고 굳건하게 일어설 수 있는 뿌리였지 싶다. 지금은 책으로 쌓은 내공 덕으로 자신감의 뿌리가 깊어졌고 좋아하는 글쓰기와 종이책 만드는 출판 일까지 하게 되었다. 자신의 가장 큰 재산은 ‘참을성’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간단치 않았을 삶의 여정들이 작품 곳곳에 심겨져 있었다. 「결단의 책상」과 「하늘을 나는 한 마리 새」 작품에서 작가가 얼마나 힘든 환경에서 글을 썼는지 주부로서 공감도 가면서 한편으로는 짠한 연민도 느껴졌다. 둘째 아이가 4살 되던 해에 다시 시작한 글쓰기는 늘 쪽지시험처럼 달랑거렸고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자녀들이 대학 들어갈 때까지 자신의 책상도 없이 식탁에서 글을 썼단다. 엉거주춤한 밥상 겸 책상에서 13권의 수필집을 출간했고 또한 크고 작은 문학과 관련된 결단을 내렸다니 문학에 대한 절심함과 열정이 없었다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이었지 싶다. 작가는 어쩌면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환경’이 동기유발이 되어 반드시 작가의 길을 가야 한다는 고집으로 수없이 날갯짓을 하지 않았을까. 한 마리의 새가 날개를 펼쳐 비상하려면 공기의 저항이 필요하듯 고난과 절망의 시간이 그녀에게 오히려 용기와 극복의 날개를 달아 준 셈이었던 것 같다.
「바늘로 얼음 깨기」에서 작가는 어느 날 시장에서 ‘어름’이라는 빛바랜 글자를 보면서 어린 시절 어머니가 큰 얼음덩어리를 이불 꿰매는 바늘로 신기하게 깨뜨리던 기억을 순간 떠올린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어릴 적 홍차와 함께 먹던 마들렌의 향기를 떠올리며 역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3권을 평생 써낸 것처럼, 어머니의 「바늘로 얼음 깨기」는 일상의 안개를 걷어내고 글에 매진하는 계기가 된다. 마치 건전지를 넣자 오래 주저앉아 있던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돌아가기 시작한 것처럼 그때부터 기억 채굴자가 되어 구름떼처럼 이미지로만 뭉쳐있던 기억들을 동굴 속 미로에서 끄집어내며 신들린 듯 글을 썼다. 작가는 수필집 『미시족』을 시작으로 최근의 『민흘림기둥을 세우다』 까지 수필집 13권을 출간했다. 그뿐 아니라 그간 많은 문학상도 받았고 작가의 수필교실을 통해서 후배 수필가들을 키워내고 문학상까지 제정해 다수의 역량 있는 작가들을 배출해 내고 있다. 이제 그녀는 온전한 자신의 책상이 된 식탁을 거실에 내어놓고 날마다 새벽 4시면 일어나 세계뉴스를 듣고 차를 마시며 원고를 쓴다. 현재의 일상이 최고의 시간임을 느끼며 행복한 마음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추기고 있다. 그녀의 책상머리에서 또 어떤 빛깔의 수필작품들이 태어날지 자못 궁금해진다.
2021년 여름, 오래 잊고 있었던 문학이 내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50년 만에, 작가가 되었다는 친구가 최근의 작품집을 보내주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결핵성 늑막염으로 학교를 그만둔 문예반 친구였다. 그의 책을 읽어 내려가며 내 마음속 깊숙이 꺼지지 않은 작은 불씨가 타오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의 작품들이 내 문학의 불씨에 공기를 불어 넣어 준 셈이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짧은 단문이라도 써보자’라고 결심하곤 동창 카톡 방에 “앞으로 10편의 글을 올리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내 글의 첫걸음이었다. 때로는 늦게 얻은 작가라는 이름이 화관인지, 가시관인지도 모르고 덥석 머리 위에 올려놓은 건 아닌지 회의에 빠져들 때도 있다. 수필집 『민흘림기둥을 세우다』 작가의 방대한 독서량, 축적된 많은 경험들은 내게는 넘어야 할 거대한 산처럼 여겨진다. 오랫동안 전업 주부로 살아왔던 현실의 삶에서 작가처럼 글쓰기와 독서의 루틴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작가의 ‘글쓰기를 가로막는 가장 큰 변명은 자질을 갖고 태어난 작가에게만 능력이 있다 믿어버리고 실천하지 않는데 있다’는 그 말이 내 마음을 두드린다. 아직 온돌침대 위 작은 밥상이 나의 책상이며 서재이지만 작가의 말을 디딤돌 삼아 다시 힘을 내어 본다. 프로스트의 ‘마들렌 향기’처럼, 권남희 작가의 「바늘로 얼음 깨기」처럼 나의 가슴 깊숙이 묻혀 있는 무궁무진한 추억과 얘기들이 내 글의 마중물이 되어 끌어 올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쉬지 않고 날개를 퍼덕이는 새가 하늘을 비상할 수 있듯이 나도 폭넓은 독서와 꾸준히 습작을 하다보면 언젠가 저 푸른 하늘을 힘차게 날아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수상 소감
글 숲에서의 숨바꼭질
어릴 적 막연하게 꿈꾸던 작가라는 이름을 늦은 나이에 얻었습니다. 그러나 삶과 일상을 써내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문장들은 때론 환하게 다가오다가도 금세 몸을 감춰 버리는 숨바꼭질의 술래 같습니다. 마음속에 숨어있던 이야기들만 엮어 내면 수필이 될 줄 알았는데 독서도 사유도 부족하니 때론 쉽게 파도에 쓸려가 버리는 모래성 쌓기가 되어버립니다.
올 여름 참 길고도 맹렬했던 무더위에 덜컥 유행성 폐렴까지 걸렸습니다. 한 달 가까이 누워서 할 수 있는 건 책 읽기 뿐 이었습니다. 작가의 책은 무더위와 무력감을 견뎌내게 했던 시원한 옹달샘이었고 산들바람이었습니다.
집 가까이 작은 도서관에 가끔 손녀를 데리고 갑니다. 돌아오는 공원길에 단풍잎들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함께 알록달록 고운 빛깔의 단풍들을 주워 봅니다. 책갈피에 곱게 끼워 넣으면 가을이라는 계절이 추억이 되어 남고 할머니는 그 추억을 이야기로 꺼내어 글로 쓰는 작가라는 말을 처음으로 당당히 해주었습니다. 수상 소식에 활짝 웃어 봅니다. 꾸준히 읽고 쓰며 내공을 쌓아 작가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애쓰겠습니다.
문학적 열정과 수필 쓰기의 즐거움을 가르쳐 주셨던 권남희 작가님, 부족한 글을 올려주신 심사위원님들, 문학의 길을 함께 걷는 문우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박선주
2023년 『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