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부정공파 송소 권우 고택(종택)
- 경북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 557번지
❏ 14. 8. 23(토) 방문 촬영
❏ 송소공(松巢公) 자는 정보(定甫)이고 호는 송소(松巢)이며 명종 7년(1552년)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매헌(梅軒) 금보(琴輔)와 더불어 주역대전을 수사(手寫) 지결(旨訣)을 득문하는대로 단서(端緖)와 적리(的理)를 토론해득하였다.
선조 6년(1573년)의 식년시에 안동 거주 유학으로서 생원 2등 제11인으로 합격하였다.
선조 19년(1586년)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경릉참봉에 제주되고 선조22년(1589년)에는 왕자사부가 되었다. 이때 경서의 의의처(疑議處)를 염출(拈出)하여 왕자로 하여금 문난(問難)케 하고 조목으로 갈라 대책으로 써올리니 임금이 가상(嘉賞)하여 특히 당시(唐詩) 10절과 풍아(風雅) 3첩을 써서 하사하였다.
선조 23년 1590년 3월 26일에 졸하니 수는 39세였다.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되고 옥봉(玉峰) 권위(權暐)가 행장을 짓고 유고는 송소집이 발간되었는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그 발문에서 오당백세지사(吾黨百世之師)라 하였다.
사림의 발의로 경광서원에 배향되었는데 대산(大山) 이상정(이象靖)이 지은 상향축문에서 학문순정 조리견확이라 하였다.
광해군 즉위년 1608년 11월 27일자 실록에 왕이 전교로 "옛적 내가 대군으로 있을 때 사부였던 하락, 박광전, 민응기, 정운룡, 권우 등이 모두 지도의 수고가 있었는데 불행이 세상을 떠났다.
세시(歲時)에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집안을 찾아 위문하고 제물을 주어 후히 돌보는 은전을 시행하라" 하는 기사가 나오고 광해군 2년(1610년) 5월 19일자에는 전교하여 "내가 잠저시의 사부 중 고인이 된 권우 등에게 각기 원래에 받은 직임 위에 당상의 실직을 제수하고 각기 교서를 만들고 관원을 보내 제사케 하라" 고 하는 기사가 나온다.
❏ 14. 8. 23(토) 방문 촬영
- 이계서당 : 송소공의 부친 권대기(1523 ~ 1587년)의 서당이다.
- 권대기 : 중훈대부 사헌부 집의, 용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안동시내에서 이 고택에 가기 위해선 고려 탄생의 시발점이 된 역사적 흔적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일대가 견훤과 왕건이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병산전투(일명 고창전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택은 과거의 역사적 배경과는 사뭇 다르게, 사람들에게 안락함을 선사해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고택을 두고 "자연 향기가 표출(表出)돼 사람들의 오감(五感)을 편안하게 자극한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송소종택에 가려면 후삼국시대에 후백제 시조 견훤의 패배 땅이자, 고려 건국의 결정적 계기가 된 태조 왕건의 마지막 승리의 땅을 거쳐야 한다.
당시 두 수장이 치룬 전쟁의 전설을 담은 가수내를 따라 올라가면 와룡면(臥龍面) 이상리(伊上里)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중앙선 철길을 넘어서면 큰 골짜기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송소종택이 위치한 황새골이다.
"고택이 위치한 마을의 이름은 '마을 뒷산에 황새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고 해서 황새골이라 불렀습니다. 이 집의 주인 권우(權宇)는 이 마을의 이름을 따서 호를 송소(松巢-새 보금자리)라 하고, 집의 이름도 송소종택이라 붙였다고 합니다."
"옛날의 황새와 주인 송소 선생은 없지만 지금까지 골짜기에는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다.
송소종택의 큰 장점으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는 정 남향의 위치를 꼽으며, 종택 뒤를 두르고 있는 언덕배기 야산의 분위기가 안정감을 더해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송소종택의 구조를 살펴보면 집터는 경사진 면을 최대한 살려 마당에서 1m와 1.2m 높이의 기단을 연속으로 두개의 층으로 쌓고 그 위에 一 자형 안채를 세워 아래채와 구별했다.
밖에서 보면 정면은 날개집 모양의 입구(口)자 형태로 보이지만, 대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안채를 받치는 2층의 계단을 경계로 거리를 두고 있다.
동서로 사람들이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이 2칸으로 측면은 앞뒤로 각각 반칸 씩 내어 만든 느낌을 준다. 중간에 6칸 대청을 두고 좌우로 각각 정면 1칸의 작은 온돌방을 두어 서당이나 향교의 강당형태를 취하고 있다. 아마도 아랫채의 대문 칸이 없다면 향교나 서원의 강당과 동서재 형태를 연상할 수 있는 건축구조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안채의 대청 앞부분에는 툇마루를 달아내고 퇴주(退柱)를 둔 모습이 당시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서쪽의 온돌방은 2칸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두고 동쪽의 1.5칸 온돌방은 앞에 툇마루를 대청보다 높게 만들어 변화를 주고 있다.
아랫채는 정면 5칸에 서쪽에서부터 2칸의 부엌, 대문, 마구, 문간채를 배치했으며, 동쪽에는 고방과 마루가 서쪽 방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특히 대문의 나무를 조각해 만든 나무돌쩌귀가 특이해서 눈길을 끈다.
송소종택의 앞밭에 있는 이계서당(伊溪書堂·중요민속자료 제203-3호)은 송소 선생의 부친인 권대기 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4칸은 마루를 두고 양쪽은 각각 2칸의 온돌방으로 만들어졌다.
비록 밭 한가운데 자리한 모습이 외롭게 느껴지지만, 당시 선비들이 모여 경서(經書)를 토론하며, 여유와 시간을 풍요롭게 채웠을 것이라 그려보면 자연이 선사한 아름다운 풍경이 새삼 살갑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계서당 창건 당시에는 종택이 서당 가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이도 있다고 한다.
송소종택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한옥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있다"면서 "많은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고 안식을 취했을 '보금자리' 모습을 여전히 담아내고 있다.
이처럼 자연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송소고택의 주인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자.
황새골에 정착한 안동 권우(權宇) 집안은 부정공파(副正公派) 후손들이다. 부정공파는 고려 때 지방 고을의 녹봉에 관한 업무를 보았던 4품의 식록부정(食祿副正)을 지낸 권통의(權通義)를 파조로 하며, 안동 부내 성곡(城谷·지금의 화성동)에 많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1467년(세조13) 함경도 일대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亂)을 평정하다 목숨을 잃은 권징(權徵)의 증손 권위기와 권대기 두 형제가 퇴계 문하에서 생원(生員)이 되어 터전을 일궜다고 한다.
고서(古書)에는 동생 권대기가 안동 이상리 황새골에 이계서당을 열고 지방에서 조목, 구봉령, 금란수 등과 계(契)를 맺고 철마다 모여 경사(經史)를 강론했다고 전한다.
그의 아들 권우 또한 퇴계 선생의 가르침 아래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때 퇴계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 매헌 금보(梅軒 琴輔·1521~1584)가 쓴 '주역대전'을 주며 경학에 밝은 권우를 격려했다고 한다.
권우는 퇴계 선생 사후에도 조목과 구봉령에게 경학(經學)을 공부해 중앙에서 벼슬을 하면서 이름을 날리게 된다. 1573(선조6)년 22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며, 1586년에는 학행으로 추천,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됐다고 한다.
또한 1589년에 세자사부(世子師傅)가 됐는데, 선조가 당시(唐詩) 10절(節)과 풍아(風雅·민요풍의 한시) 3첩(牒)을 써서 특별히 하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듬해 권우는 천연두로 향년 39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학자적 기질은 후세에 길이 전해져 지금까지도 명성이 높다.
"황새골 살던 안씨 집안 갓바우 손대 가세 기울어"
송소종택이 위치한 황새골과 갓바우에 얽힌 묘한 전설
"옛날 이 마을에는 광주 안씨, 안동 권씨, 광산 김씨들이 들어와 살면서 형제처럼 지냈다고 합니다. 그 중에 광주 안씨는 마을 중간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그 후로부터는 하루가 다르게 살림이 점점 늘어나고 윤택해져 다른 성씨들에 비해 부유하게 살게 됐다고 합니다. 물론 자제들도 윤택한 생활환경 덕분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어 벼슬에 오르는 등 부귀공명을 동시에 가질 수 있었지요. 이 때문에 광주 안씨 댁에는 늘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지요."
"그 집안 아낙네들은 매일 손님맞이로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고 한다.
안씨 댁은 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중에 어떤 시주승을 만나 묘안을 제시 받았다고 한다.
스님은 "이 종택 건너 산에 있는 갓바우의 갓을 내리면 나와 같은 걸인들이 찾아오는 일이 절대 없을 것"이라며 묘책을 알려줬다는 것.
스님의 말을 귀담아 들은 아낙들은 어느 날 밤, 마을 사람 몰래 갓바우의 갓을 골짜기 아래로 굴렸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기 시작했다.
"갓바우에 손을 대고 난 뒤부터 안씨 집안의 가세는 점점 기울어졌고, 자제들도 벼슬을 잃고 마을로 돌아오게 됐다고 합니다. 물론 손님의 발길도 뚝 끊어졌지요."
화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원인이 갓바우에 있음을 알고 갓바우를 괭이와 큰 망치로 깨려는 순간 '우르르 쾅'하며 천둥번개가 치면서 바위를 내리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지요. 그때야 사람들은 신령스런 바위임을 알고 굴렸던 갓바우를 다시 올려놓고 사죄하는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이곳엔 돌을 매고 올렸던 새끼줄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