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단체 對 언론지 친일 매도 투쟁
많은 미술단체들이 일치단결해서 언론기관과 전면 투쟁을 벌인 것은 아마 우리 미술계 사상 처음 있는 일인 것 같다.
1983년 4월 18일. 신기회, 백양희, 창작미협 등 36개 미술단체 대표 40여명은 당시 인사동에 있던 예충회관에 모여 중앙일보사가 발행하는 <계간미술(季刊美術)>을 상대로 성토대회를 열고 동지(同誌) 봄호에 게재된 기사내용에 대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대처방안을 논의한 뒤 성명서와 결의문을 채택, 미술인들의 명예훼손과 권익침해에 항의하면서 시정과 사과를 요구했다.
계간미술은 9인의 미술평론가(이경성, 최순우, 임종국 외 6인)의 이름을 빌려 공동집필 형식으로 장장 16페이지에 달하는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이라는 기획기사로 일제 식민잔재가 문제되어야 하는 이유, 청산되어야 할 잔재의 범위, 일본화풍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작가 순으로 논조를 폈다.
그러면서 일정 36년 동안과 해방 후 현재까지의 우리나라의 모든 미술가는 친일파이고 모든 미술 작품은 일본 식민잔재이며 미술교육도 잘못되어 후진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미치게 했다는 식으로 근현대 한국미술을 통틀어 매도하는 한편 19명의 작고 작가와 14명의 현존 미술인, 도합 43명을 일재 잔재의 표본인 양 부각시키고 해묵은 작품 사진과 일부 작고 작가의 얼굴 사진까지 게재해 그야말로 부관참시(剖棺斬屍) 식의 폭거를 서슴지 않았다.
미술인들은 이 어처구니 없는 행위에 대해 좌시할 수 없다는 의견을 모으고 마침내 집단 궐기에 들어갔던 것이다. 일제 잔재 논란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고 또한 미술계의 문제만도 아니었다. 해방직후 반민특위에서 친일인사에 대한 제재와 친일 문필가와 친일 미술인의 제명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논란이 끊이질 않았었다. 사실 일정 하에서 오랜 시간 알게 모르게 영향 받고 물이 든 것도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8.15 광복을 계기로 우리 사회는 자주의식의 회복을 위해 거의 반세기의 자성과 노력으로 현재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계간미술>이 주장한 것처럼 우리 미술이 구제불능의 잔재를 뒤집어 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국전>과 국제전, 그리고 많은 그룹전과 개인전에서 관람자들이 직접 눈으로 판정했을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이 기사를 집필한 평론가들도 평일에 <국전>이나 개인전의 작품평을 쓰면서 입에 침이 마르게 호평과 찬사를 늘어놓지 않았던가?
그래서 우리 미술인들은 흥분했고 궐기한 것이다. 성토대회를 열던 날 현장에는 각 일간지 기자들도 참석했었다.
그러나 동업자 관계 때문이었는지 현장에서 취재를 했던 일간지들 조차 이 뉴스를 일체 보도하지 않았다.
우리 미술인들은 부득이 성명문을 조선, 동아 양대 신문에 유료광고로 발표하고, 4월 16일 조간에 4단 통단으로 게재하게 되었고 즉각 파문이 확산되었다. 전국 미술대학 학장회의가 소집되어 대책을 강구하는가 하면, 미술평론가협회도 성명을 발표, 평론가를 옹호하였고, 문화공보부도 관심을 표명, 관계자들과 접촉을 벌였다.
참고로 성명서 요지를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불신(不信)과 불화(不和)를 조장하는 저의(底意)를 묻는다.
모든 미술가의 미술작품, 미술교육까지 일제 잔재라 밀어붙이고 은근히 한국문화 전반이 그러한 인상까지 비춰 우리 문화의 현실(現實)을 부정하고 결과적으로 사회 여론을 오도(誤導)하려는 의도가 분명한데, 그 배경이 무엇인가 묻고, 원고 집필자 9인은 일정 하에서 어떻게 살아왔으며 민족 수난의 불행했던 역사는 외면한 채 자신들만이 초연결백한 양 고압적일 수도 있는가도 따졌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냉엄한 현실은 학문이건 예술이건 반사회적, 반민족적 부정 논리는 용납될 수 없다.
그리고 결의문을 채택했다.
1. 계간미술은 과오를 인정하고 각 일간지 상에 공개 사과하라.
2. 일제 잔재기사의 각 항목별 필자의 이름을 밝히고 책임 있는 해명을 하라.
3. 계간미술 편집 책임자를 해임하고 집필자 중 공직자는 그 직에서 자진 사퇴하라.
한편 중앙일보사에서도 선후책을 위함인 듯 이종기 사장이 우리 미술인 대표들에게 회동을 제의해 와서 서양화가 김영주, 조각의 김경승, 동양화의 장우성이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서 신문사의 이름으로 신문지상에 사과문을 발표할 것과 기사의 편집 책임자를 즉각 징계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 며칠 뒤 중앙일보 사회면 한 구석에 2단짜리 유감을 표시하는 기사를 보았고, 편집자도 타부서로 전보되었다. 그리하여 한바탕 파란은 지나갔지만 국가민족의 약자로서의 비애를 되돌아보면서 이러한 소모적인 논쟁을 계속 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