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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7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본문: 열왕기상 19장 9절~18절
9 엘리야는 거기에 있는 동굴에 이르러, 거기에서 밤을 지냈다. ○그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0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11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곧 나 주가 지나갈 것이니, 너는 나가서, 산 위에, 주 앞에 서 있어라." 크고 강한 바람이 주님 앞에서 산을 쪼개고, 바위를 부수었으나, 그 바람 속에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12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 지진이 일었지만, 그 지진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가고 난 뒤에 불이 났지만, 그 불 속에도 주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 불이 난 뒤에, 부드럽고 조용한 소리가 들렸다.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서, 외투 자락으로 얼굴을 감싸고 나가서, 동굴 어귀에 섰다. 바로 그 때에 그에게 소리가 들려 왔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4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돌이켜, 광야길로 해서 다마스쿠스로 가거라. 거기에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서, 시리아의 왕으로 세우고, 16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므홀라 출신인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서,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해서 도망하는 사람은 예후가 죽일 것이고, 예후의 칼을 피해서 도망하는 사람은 엘리사가 죽일 것이다. 18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놓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이다."
0. 우리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삶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늘 머릿속을 채우는 고유의 고민거리와 생각의 주제들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목사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생각은 목회와 교회에 관한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물론 전혀 사회적, 가정적인 일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된 생각의 흐름은 우선적으로 제 삶의 자리에 가장 많은 범위를 차지하는 교회와 목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는 어디이며, 또 무슨 생각과 고민으로 살고 계십니까? 오늘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고민, 그리고 그와는 매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현실적인 삶을 통해 무슨 일을 주도적으로 이루어가고 계시는지 발견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1. 오늘의 성경 본문을 보다 순조롭게 읽기 위해서는 앞서 진술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예언자)가 활동하던 시기의 이스라엘 민족은 두 개의 나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물론 다윗과 솔로몬은 하나 유대민족으로 하나의 이스라엘 국가를 세웠지만,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시대가 열리자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던 여로보암의 지도력으로 새로운 나라가 세워집니다. 그래서, 북쪽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남쪽에는 유대라는 나라가 존재하게 됩니다. 그런데 두 나라 모두, 하나님을 섬기기로 한 다윗과 솔로몬의 건국이념을 버리고, 세속적인 형편의 어려움을 핑계로 세속적인 우상을 섬기는 어리석은 역사를 이어가게 됩니다. 특히 당시 중동에서 유행하던 바알이라는 이름의 풍요로움의 우상을 섬기지 않으면 국제 정세를 따라갈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이스라엘과 유대의 왕들은(몇몇을 제외하고는) 열심히 바알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를 받아들이고, 백성들에게 권장하였습니다. 이런 우상을 철저히 섬기던 북쪽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바알숭배에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대언하던 선지자 중에 한 명인 엘리야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특별히 아합이라는 이름의 왕의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에서 바알의 숭배가 가장 융성했습니다. 아합은 정략적으로 이세벨(시돈왕 엣바알의 딸)이라고 하는 이방여인과의 결혼하게 되는데, 이 이세벨이 바알을 철저하게 숭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를 온통 바알의 우상으로 가득 채우고, 바알종교의 사제들을 대거 수입하기까지 했습니다.
바알의 사제들과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제물을 놓고 바알과 여호와 중에 참된 신이 누군지 증명하는 영적 시합을 벌였고, 그 시합에서 승리한 엘리야는 바알의 사제들을 모두 처단합니다. 이 일을 보고 받은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복수하겠다고 전언을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엘리야는 바알의 사제들과의 대결에서 보였던 그 담대함과 용기를 모두 잃고 광야로 도망가서 로뎀나무 그늘 밑에 앉아서 죽기를 구하다가 천사의 돌봄을 받았습니다. 천사의 명령으로 엘리야는 호렙산에 올라서 동굴에 앉아 있다가 하나님의 말씀과 대면하게 된다는 것이 오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자랑했던 영적인 대결에서 승리의 희열을 맛본 선지자였던 엘리야도 세속의 살아있는 권력이 복수하겠다는 말 한마디를 던진 것에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심지어 죽기를 구했습니다. 차마 자살할 용기는 없었나 봅니다. 하지만, 그의 머리 속은 온통 절망과 좌절, 낙심, 낙망, 그리고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광야에서 앉아 있던 로뎀나무는 실제로 그늘이 거의 없는 풀무더기와 같은 다년생 식물입니다. 즉, 엘리야가 앉아 있던 로뎀나무 그늘은 휴가를 즐기기 위한 장소였거나, 쉬기 위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만으로 절망에 절망을 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능력의 선지자라고 해도, 아무리 내면세계가 한때는 건강했었다 할지라도 엘리야나 우리는 인간입니다. 인간의 삶이란 언제나 한결같이 형통하고,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이렇게 공포와 낙심, 그리고 좌절감으로 체념할 때가 더 많습니다. 엘리야의 모습에서 자기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에 담아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2. 당시의 바알에 대한 숭배를 오늘날로 표현하자면 대표적으로 우리가 자본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거의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지극히 세속적인 삶의 현장에서 풍요로움을 기원했던 종교가 바로 바알을 숭배하는 삶의 자리였습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자본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자본의 논리와 자본의 권력으로 거의 모든 힘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근대국가가 등장한 이래 국제관계의 역사에서 굵직굵직한 위기들은 거의 대부분 자본흐름의 위기와 그 궤를 함께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알숭배는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영향력,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결합된 우상숭배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에게 자본과 재산이 없으면 인간다운 삶을 향유하며 생활하기는커녕, 생존하는데 위기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육신의 삶을 지탱하는데 자본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바알을 아무리 섬겨도 우상에 불과한 것처럼, 자본도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의 피조물에 불과한 것임을 성경은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세 종류의 눈을 갖고 산다고 합니다. 육안과 심안과 영안이라고 하는 세 종류의 눈을 떴느냐, 감느냐로 사람다운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냐를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 육신의 눈, 즉 육안을 뜨고 삽니다. 육안이 아니면 우리의 행동은 많은 제약을 갖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문명과 문화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발전하고, 변화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옛 어른들은 눈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몸이 천냥이면, 눈은 구백구십 냥이다.”라고 말입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 것인 것 모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께서 오시면 앞을 못 보는 자들을 보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주 눈먼 사람들의 눈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귀합니다. 하지만, 육안으로 본다는 것이 귀하다고 해서 보이는 모든 것이 다 바른 것은 아닙니다. 소위 착시현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길이의 직선인데도 어떤 조건에서는 서로 다른 길이로 보이고, 같은 색깔이 배경색에 따라 전혀 다른 색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 착시가 가져오는 우리 육안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으나 마음과 생각으로 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상상하는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심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심안으로 사람들은 삶을 보다 풍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육안으로는 직접 볼 수 없지만, 정성을 다해 만든 작품을 보면서 작가의 마음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육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 남긴 삶의 흔적과 인생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의 사람됨을 헤아릴 수 있는 것도 바로 심안의 능력입니다. 남이 볼 때는 아주 신사적이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실제로 매우 탐욕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람은 결국 탐욕의 열매와 씨앗을 이 땅에 뿌리고 가게 됩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심안으로 보며 참된 것과 거짓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동물과 다른 사람만의 능력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심안을 가졌다고 우리의 삶이 완벽하게 풍요로워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인생의 선배들이 내린 결론입니다. 심안을 가져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탐욕과 비교의식 속에 피폐해 가며, 여전히 죄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오염된 심안으로 오히려 육안으로만 사는 삶보다 못한 인생을 사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육안과 심안이 볼 수 없는 것은 영안이 열리면 볼 수 있습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이 귀하고 귀하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을 보는 것이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보통 영안이 열렸다고 하면 왠지 산신령 같은 모습과 말투로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쯤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리고, 왠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어야만 영안이 열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안이 열렸다는 것과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다(이건 눈치가 빠르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영안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떠졌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눈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고, 보게 하신다는 것을 영안을 열어 주신다는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육안이 뜬 것이 아니라, 영안이 뜬 것을 비유하는 것이라고 성경의 이적을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이 실제로 눈먼 이의 육안을 뜨게 하신 것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모습을 본 이들의 영안을 뜨게 하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먼 사람이 보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했기 때문이죠. 영안을 뜬다는 것과 우리의 심리상태가 환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임을 배우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는 이전과는 다르게 육안과 심안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육신의 문제와 세속적인 어려움만을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만을 기대하고 있던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육안과 심안은 물론이요 영안도 맑게 뜨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3. 엘리야가 호렙산의 동굴에 숨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러자 엘리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육안의 영역).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심안의 영역).” 엘리야가 자기자신은 열심히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하며 살았는데, 이제 곧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에 의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는데,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를 하소연하며, 넋두리를 늘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절망의 원인이 하나님을 열심히 따른 결과인 것 같다고 목맨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은 산을 쪼갤 만큼 격렬한 돌풍과 지진, 불길을 보여 주셨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지난 후 작고 희미한 말씀으로 다시 그에게 다가 가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 엘리야는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죽을 까봐 외투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때 다시 하나님은 또 물으십니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엘리야는 좀 전과 마찬가지 대답을 합니다. 아니 좋지 않은 자신의 처지와 현실에 대해 하소연하며, 넋두리를 합니다. 마치 아담에게 하나님이 “왜 먹지 말라고 한 열매를 먹었느냐?”고 물으셨을 때, “하나님께서 만들어서 배필로 정해 주신 저 여자가 저를 꼬셔서 먹게 했습니다”고 대답했던 모습과 닮았습니다. 엘리야든, 아담이든, 우리든, 인간인 우리의 고통에 대한 반응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엘리야와 같은 상황과 입장에 처하게 되면 같은 반응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 이 정도면 열심히 했잖아요? 제가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습니다. 십일조도 꼬박꼬박 했는데요. 주일도 안 빠지고 잘 나왔어요. 성경을 매년 한 번씩 꼬박 읽습니다. 저 목사예요. 저 장롭니다. 저 선교훈련 몇 기인데요.”, “하나님! 제가 얼마나 많은 능력을 행하고, 얼마나 많은 사역을 했는데, 왜 전 이런 위기 속에 살아야 하죠? 왜 저를 절망시키는 일만 가득하죠? 왜 저는 이런 고생을 벗어날 수 없는 건가요? 왜 전 이런 문제에 시달리며 살아야만 하나요? 왜 하필이면 제가 일본에 있을 때 원전사고가 났나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일부를 포기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물질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에 내어 놓았습니다. 건강도 아끼지 않고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 더운 여름에 이 좁은 공간에서 애기들이 꽥꽥거리는 소리를 참아가며 집중도 잘 안 되는 이 예배에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어요!! 근데 왜!!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현실입니다.
4.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성실하면 우리의 세속적인 삶도 형통해 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접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적인 직업에 속해 있거나, 교회의 핵심 멤버에 가까운 직분을 받았거나, 신령하게 보이는 사람이 기도하면 분명히 어떠한 병도 낳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말하는 행동지침을 잘 따르면 언제나 장밋빛 낭만과 행복이 가득한 생활을 영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만이 복된 삶이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행복한 삶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전혀 그릇된 것이거나, 완전히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아주 지극히 당연한 기대이고, 소망이며, 하나님은 그런 기대와 소망에 응답하실 것을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만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닌 것을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철저히 배우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넋두리를 늘어 놓은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명령과 약속을 주십니다. 새로운 세속시대를 열어갈 왕들과 예언자를 세우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입을 맞추지도 않은 7000명의 사람들을 남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여호와를 섬기던 사람들은 자신만 남고 다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이것이 현실적이고, 가장 사실적인 보고(혹은 고백)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착각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냥 칠 천명을 친히 남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들을 스파이처럼 “이미 남겨 두었으니” 그들과 접선하여 새로운 일을 시작하라고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미래형으로 “이제 남길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전에 먼저 그가 해야 할 일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될 예후와 아람(시리아)의 왕이 될 하사엘과 엘리야를 뒤이어 예언자(선지자)가 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원래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는 그의 직무에 충실함으로 새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예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의 불만과 낙심, 그리고 넋두리와 한숨을 들으시면서도 우리가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해야 하는 삶을 이어가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부족하다 할 지라도 그 일들을 통해 하나님은 영적으로나, 세속적으로나 새로운 질서를 주도적으로 창조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역사는 흐르고 있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구속(구원과 대속)의 역사도 완성되어 가고 있습니다. 세속의 역사든 영적인 사역의 역사든 그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바알이라는 우상 앞에 무릎도 꿇지 않고, 입도 맞추지 않은 사람들을 남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칠천이라는 숫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칠 천명을 남기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완벽하고 많은 수의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즉 온전하게 바알을 숭배하지 않고, 순결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세우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순결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구원받은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로마서의 약속과 일맥상통하는 약속의 말씀, 곧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세속적인 풍요로움만을 기대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시간 안에서 모두 썩어져 버릴 것에 몰두하는 것으로 머물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에 관하여, 그 말씀에 관하여 알면 알수록 우리는 이생의 소망보다, 영생의 소망이 더 커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영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리면 하나님의 약속, 구원의 약속, 복음이 보이는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의 생각으로, 우리의 육안으로, 우리의 심안으로는 도저히 가늠하거나, 헤아릴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고, 과학적으로 추측할 수 없는 구원의 역사를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주도하시고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우리 인간의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사람을 부르시고, 세워가시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구원역사의 완성은 반드시 도래할 것입니다. 우리의 세속적인 현실에서 성령의 생각과 성령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구원역사의 흐름을 볼 수 있는 눈이 영안입니다. 우리 모두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을 믿습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스스로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신앙생활 했다고 생각하며 마음이 풍족해지지만, 순식간에 세속적인 문제와 위기나 불만사항에 맞닥뜨리자마자 낙심하고, 절망하고, 신경질이 나서 참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는 세속의 문제는 세속적으로 풀어야 한다며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에 소홀해 지기도 합니다. 바알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던 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였던 엘리야의 영적인 승리가 우리의 현실적 삶에서 잠시 허락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엘리야처럼 곧 몰려오는 육안과 심안으로 보이는 우상의 위협에 우리도 안절부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나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바알 우상은 무엇입니까? 자본과 재산입니까? 명예입니까? 자존심입니까? 종교적 열심입니까? 과학적 사고와 매스컴의 소문과 경제위기의 정보, 그리고 최신유행입니까? 무엇이 우리를 위협하고, 협박하고, 불안하게 하고 절망하게 합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의 육안과 심안을 혼란스럽게 하는 그 모든 우상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를 달라고 주님께 기도합시다. 우리의 영안으로 깨어서 하나님의 약속과 복음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합시다. 우리 앞에 펼쳐진 육안으로 볼 때 화려하고, 멋진 볼거리가 가득한 우상의 잔치에 현혹되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을 성령의 생각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합시다. 과거 내가 맛보았던 짜릿한 영적 승리에 자만하지 않도록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 달라고 기도합시다.
마침내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세속적인 어려움과 환란을 견디어 내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초라한 삶의 자리에도 감사하며, 순종하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경륜인 구원역사에 동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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