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7 주일설교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
고린도전서 12:1~7
우리에게는 평생토록 고마운 스승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스승, 진정한 스승은 진리의 성령님이십니다. 가장 좋은 스승은 성령님이라는 사실은 지난 주일에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5월 셋째 주,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참 스승이신 성령의 은사에 대해 은혜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령님이 주신 은사란 무엇일까요? 그 은사를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그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첫째로, 성령의 은사란 무엇일까요?
흔히 성령의 은사라고 하면 예언이나 방언이나 기적을 일으키는 신비로운 능력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은사는 그런 것보다 훨씬 중요한 개념입니다. 은사란 헬라어로 카리스마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1)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2)신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3)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오늘은 은사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설교하고 다음 주에는 은사의 종류와 내가 받은 은사를 확인하는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강림 주일에는 은사를 받은 성도가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은사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1절, 신령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한다’라고 말을 꼬아서 표현하는 것은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어 ‘이 말을 안 할 수가 없다’고 하면 ‘이 말을 꼭 해야겠다’는 의미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은 우리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꼭 알기를 원한다, 꼭 알도록 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성령의 은사에 대해 꼭 알아야 할까요?
그 이유는 2~3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헬라어 성경에는 2절 앞에 ὅτι(호티,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전의 처지와 지금의 처지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우리는 이방인이었고 말도 못하는 우상에게 끌려 다녔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은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아서 우상에게 끌려 다니던 사람이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주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성령님이 신령한 은사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은사는 방언이나 예언이나 기적을 행하는 능력 이전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신비한 능력입니다. 우상 숭배하던 불신자가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 것, 이것은 기적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생겨났을까요?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의 놀라운 선물, 성령님이 주신 신령한 은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신자가 이것을 반드시 알기를 원한다고 1절에서 말한 것이죠. 기적 중에 기적은/ 사탄을 섬기던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특별한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여러분은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신자가 10명이라면 10명, 100명이라면 100명 모두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는 예수 믿고 수십 년이 되었는데도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은사란 특별한 사람이 가진 신비한 능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게 하시고 또 신자가 신자답게 살 수 있도록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성령님이 각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는 여러 가지이며 서로 서로 다릅니다. 이 은사는 왜 주셨을까요?
우선 4~6절을 보면, 은사는 직분 혹은 사역과 같은 말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여기에 등장하는 은사, 직분, 사역은 같은 말이고 또 성령, 주(예수), 하나님도 같은 분입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는 여러 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직분도 다양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도 각각 다릅니다.
목사 중에도 설교를 더 잘하는 분이 있고 상담을 더 잘 하는 분이 있습니다. 또 집사님들 중에도 봉사를 잘 하는 분, 전도를 잘 하는 분, 친교를 잘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 다양한 은사에 대해 14~27절에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 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여기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몸의 각 지체와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고 각각 하는 일이 다릅니다. 그런데 그 지체들 하나하나가 모두 다 중요합니다. 지체들끼리 자기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거나 다른 지체를 보고 필요 없다고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머리카락 한 올은 물론이고 속눈썹 한 개 조차 필요 없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받은 성령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어떤 부분인가를 차지하고 어떤 역할인가를 감당합니다. 몸의 각 지체와 마찬가지로 각각 다른 은사를 받은 성도들은 각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몸에 협조하지 않으면 큰일입니다. 눈꺼풀이 안 움직여도 큰일이지만 저절로 파르르 떨려도 큰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붙어서 협력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게 됩니다. 머리이신 예수님 뜻이 아닌데 혼자 파르르하는 성도는 온 교회의 근심거리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령님이 우리 각자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신 것은 예수님의 몸에 서로 협력하라고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 협력해야 할까요?
성령님은 서로 협력하라고 성도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는데 성도들은 무엇을 위해 협력해야 할까요? 7절에 보면 서로 협력하는 것은 유익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무슨 일에 유익하게 해야 할까요? 바울이 쓴 에베소서를 참고하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에베소서 4:12).
이제 선명하게 답이 나왔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각자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시고 온전하게 하시고 서로 협력하게 하신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데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은 자기의 유익이나 자기 자랑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교회를 유익하게 하라고 성령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고 은사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첫 번째로, 다른 사람을 두 번째로 유익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은사를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으면 나를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면 됩니다. 내가 은사를 사용하여 내 주위에 유익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은사를 잘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은사를 바르게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난다면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손톱으로 나를 할퀴는 것이 아니라 가려운 곳을 긁어주어서 내 몸을 유익하게 하듯이 내게 주신 은사를 사용함으로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에게 유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익하게 하라고 성령의 은사는 우열이 없습니다. 서로 서로 다르지만 다 귀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4:1~5은 마치 은사 중에 더 귀한 것과 덜 귀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이 말씀을 얼핏 보면 방언보다 예언이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바울은, 방언은 자기 자신을 유익하게 하고 예언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한다는 점에서 예언이 더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은사의 목적은 자기 유익보다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것의 중요성은 방언과 예언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담을 잘 하는 은사나 병 고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그것으로 자기 잇속을 챙긴다면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슨 은사가 더 중요한가의 논쟁이 아니라 은사를 어떻게 유익하게 사용하느냐는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덕을 세우는 것이고 유익을 끼치는 것이고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유익하고 영혼이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능력으로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으시고 사람들이 얼마나 유익을 얻는지 계속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은사를 주신 이유는 자랑하며 교만하며 이익을 챙기라고 주신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는 (1)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라고 주셨습니다. (2)우리가 신자답게 살게 해 주시려고 주셨습니다. (3)그 결과 공동체와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라고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령님이 주신 다양한 은사를 사용하여 교회 공동체와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이 유익하도록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또 그 은사를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