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산으로 가는 첫 걸음
등산은 그저 남산이나 인왕산 정도 올라가‘야호’소리 한번 지르고, 가져간 간식 먹고 내려와서 산 아래 식당에서 본격적으로 술과 음식을 먹는 것으로 알았다. 산에서 취사와 음주가 가능했던 시절, 등산이라 하면 우이동 도선사 아래 계곡쯤 올라가 고기를 구워 술을 마시고 오는 정도였다. 기껏해야 선배들의 강요에 못 이겨 자의반 타의반 주말등산 모임의 총무를 맡아 1년 정도 몇 번 북한산과 도봉산을 오르내린 것이 등산 경험의 전부였다.
학교 밖을 떠돌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와 여유를 찾을 때까지 20여 년, 나에게 산은 그저 산수화 속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어쩌다 직장 체육행사로 등산을 한다고 해도 산의 초입에서 잠시 행사의 시작이나 뒷풀이에 참석하는 정도였다. 산의 존재와 가치를 몰랐으니 산에 가는 즐거움은 물론 가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산에 가려고 마음먹기도 어려웠지만 피곤에 지친 몸은 그나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다가 50대 후반이 되어 우여곡절 끝에 오랜 교육부와 교육청의 교육전문관료의 생활을 뒤로 하고 학교로 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에 몸과 마음이 적응하느라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던 중, 2014년 12월 동창회의 송년회 자리에서 동창회장으로부터 나의 산을 향한 여정에 첫걸음을 내딛는 역사적인 제안을 받게 되었다. ‘산악활동을 통한 인성교육’을 해 볼 생각이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국산악회 부회장을 역임했고 산악활동의 저변 확대에 관심이 많았던 동창회장은 이 사업을 시범적으로 추진해 보고자 여러 학교에 의사를 타진하던 중이었다. 당시 학교의 분위기로는 산악활동 중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고에 대한 책임 등의 문제로 선뜻 나서는 학교가 없었다. 그러던 중 송년회에서 자신의 모교 교장인 나를 만나 한번 던져본 이야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많은 아이들이 그저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만 안고 있을 뿐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다른 진로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지 못한 채 막연한 불안 속에 방황하고 있었다. 본래 착한 심성의 아이들임에도 따돌림과 폭력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일상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 제안을 듣는 순간 ‘바로 이거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악활동이라는 구체적인 방안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활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산악활동이 몸과 마음을 부딪치며 자신을 찾아가고, 남을 배려하며 함께 어울려 사는 방법을 배우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산에 오르고 밥을 해 먹으며 한 텐트 속에서 잠을 자는 산악활동이 생각과 의견을 나누며 서로 배우고,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양보와 배려를 저절로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선뜻 나섰다.
“해 보겠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꼭 해 보고 싶은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바로 내년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결정합시다.”
동창회장은 바로 그 자리에서 산악교육에 필요한 예산을 지원할 영원무역 회장을 불렀다. 아웃도어 관련 기업을 경영하는 영원무역 회장은 나에게 산악활동을 추진할 의지가 있는가를 확인하고 3년간 충분한 예산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2014년 12월 30일 한국산악회(회장 장승필)와 학교 간 업무협약을 체결하였다. 새학기가 시작되고 한국산악회는 상근 지도강사를 파견하였고, 학교는 산악반을 재창설하고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이듬해 5월 나도 산악교육에 앞장서고자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한국산악회 등산학교 34기 종합과정에 입교하였다. 등산학교에서 일반적인 등산 이론과 기초적인 등반 기술을 배웠다. 물론 용어뿐 아니라 장비의 이름과 생김새조차 모두 생소한 것이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강한 체력과 순발력을 요구하는 교육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팀원들은 지진아인 나를 기피하였다. 도봉산 두꺼비바위, 불곡산 악어바위 등에서 실습할 때 팀원들은 나와 함께 하는 것을 피했고 은근히 그냥 넘어가도록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바쁜 일이 계속되어 출석과 결석을 반복하다가 졸업등반을 하루 앞둔 날 손목이 골절되는 사고가 생겨 양손에 깁스까지 하게 되었다. 졸업등반을 하는 날은 인수봉 아래까지 올라가기는 했지만 함께 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위험을 피했다는 안도감으로 인수봉을 향해 첫 등반을 떠나는 동료들을 배웅하였다. 연수원의 배려로 최소한의 출석 시간을 인정받아 간신히 등산학교를 수료하기는 했지만 등산 또는 등반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