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신경(5) :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3) : 마 27:11-26
기독교의 궁극적인 관심은 ‘잘사는지, 못사는지’에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정의롭게 사느냐, 불의하게 사느냐’에 있지도 않습니다. 기독교의 궁극적인 관심은 ‘사느냐, 죽느냐’에 있습니다. ‘영원히 사느냐?’아니면 ‘영원히 죽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고,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세 번째 시간인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예수님은 그의 유일하신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분이십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심은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씨가 아닌 성령으로 잉태되셨기에 원죄가 없는 사람이십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기에, 의심할 여지없는 참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본체이신 분이십니다. 성부와 성령과 비교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피조된 존재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존재이십니다. 예수님은 참하나님이시며 참사람이신 분입니다. 참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참사람이 되심은, 영광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땅에 와서, 자기 왕국을 만들어,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서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게조차 거절을 당하셨습니다.
요 1:9-11절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 5:43절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사실상 예수님의 고난은 사람의 아들로 나심부터 출발했다고 봐야 합니다. 공생애를 시작하고서도, 민중으로부터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조금 배척을 받은 정도가 아닙니다. 약간 따돌림 당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이려고 했습니다. 막 3:6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요 5:18절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 11:53절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하고,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자기들의 위협이 되는 예수를 살려두었다가는, 자기들이 맘 편히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맘대로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잡고자 했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민중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막 12:12절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기가 막힌 작전을 짜냈습니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을 매수하기로 한 것입니다. 문제는 열 둘 중에서 누구를 매수할 건가 하는 건데, 그들은 가룟 유다를 찍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떨어졌습니다. 막 14:10-11절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열두 제자들에 대한 성향을 잘 파악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실수하면 큰일 나게 되니, 사전 조사를 잘 했던 거 같습니다. 종교지도자들과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사로잡을 디데이로, 유월절 전 날을 잡았습니다. 혹 모를 일에 대비하여,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웠습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만찬에 참석합니다. 예수님 역시 유대인이었기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에 참석하셨습니다. 뜻깊은 잔치였습니다. 제자들과의 지상 최후의 만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뜻깊은 자리에서, 만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13:2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아니, 이게 만찬 자리에서 할 소리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지 않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기회의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정신이 나갔습니다. 가장 연장자인 베드로가 막내인 요한에게, 예수님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했고, 요한이 예수님한테 묻자 직설적으로 답해주셨습니다. 요 13:2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왜 말을 돌리지 않고, 그렇게 답하셨을까요?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마지막 호의마저 저버렸습니다. 요 13:30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예수님이 주신 떡을 받은 유다는, 회개대신 줄행랑을 쳤습니다.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을 떠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밤입니다. 그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은, 다 헛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겨주고, 일이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습니다. 뭔가 자신이 그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을 찾아가서 거래를 무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넘겨준 대가로 받았던 은 30을, 도로 갖다 주며 무르려고 했을 때, 그에게 돌아온 답은 이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그러자 유다는 이런 선택을 했습니다. 마 27: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참으로 안타까운 선택을 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체포된 후, 전현직 대제사장을 거쳐, 당시 총독이던 빌라도에게 넘겨졌습니다. 그래서 심야 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1.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입니다.
사도신경에는 사람의 이름이, 예수님을 제외하면 딱 두 명 나옵니다. 마리아와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중 마리아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고, 오늘은 본디오 빌라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빌라도는 본래 정통 로마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대의 총독까지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는 폰토 지방에서, 로마 황제를 위해 뛰어난 용맹을 떨쳐, 처음으로 요직에 발탁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창술이 매우 뛰어나, 그를 향해 ‘창을 가진 자’라고 해서 ‘필라투스’라고 불렀습니다. 폰토 출신의 필라투스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본디오 빌라도’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는 백부장 시절에, 유력한 로마 귀족의 딸 클라우디아와 연애하여 결혼까지 성공했습니다. 당연히 처가 덕을 봤고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 지방을 다스리는 총독의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에서 총독이란 자리는, 해당 지역의 행정권, 사법권, 군사권, 징세권을 다 가진 최고 직위였습니다. 그렇기에 다시없는 요직으로 꼽혔습니다. 그는 야심찬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에 부임하자말자 무리수를 두었습니다. 로마 군단의 독수리 군기를 성전에 떡하니 내걸어, 유대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습니다. 후에 유대인들이 목숨 걸고 대들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군기를 내리긴 했지만, 유대인들은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 후에 성전의 기금을 압수하여 수로 공사를 하였고, 유대인들이 내는 성전세까지 착복하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성전 기금으로 수로 공사를 하던 중,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의 인부들이 죽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게다가 그 일로 인해 항의하는 유대인들을 강제 해산시키며, 그 중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 제물에 그들의 피를 섞는 말도 안 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민심은 크게 술렁거렸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로마의 앞잡이라 할 수 있는 헤롯 왕가마저, 빌라도와는 원수지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앞에 예수라는 한 사람이 끌려 왔습니다. 유대 곳곳에서 기적을 일으키며, 천국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유대인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마침내는 종교지도자들의 음모로,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어 자신에게 넘겨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오셨을 때는 이미 유대인의 법정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으신 뒤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씌운 죄목은 세 가지인데, 모두 다 정치적인 죄목입니다. 첫째,예수는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둘째,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 셋째,자칭 왕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을 고소한 죄목은 그야말로 억지요 누명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처음에 문제 삼았던 ‘신성 모독죄’가 로마 법정에서는 먹히지 않음으로 조작해낸 음모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법대로 따져 보아도, 잡혀온 예수한테서 죄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법을 신성시하는 로마제국에서 파견된 총독인데, 법을 무시할 수 없는 거 아닙니까?
마침 자기 아내도 꿈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에게 예수를 풀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과거 카이사르가 자신이 죽는 것을 꿈에서 본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으로 나갔다가 살해당한 것을 빌라도가 모를 리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아내의 꿈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든 이번 사건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갈릴리가 헤롯 왕의 소관임을 알고는, 예수를 헤롯 왕에게 넘겨버렸습니다. 그럼 헤롯 왕이 알아서 할 줄 알았는데, 도로 자기에게로 넘겼습니다. 이제 자기에게로 공이 넘어온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물었고, 유대인들은 주문에라도 걸린 듯 계속해서 십자가에 죽이라고 외쳤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빌라도를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겠다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이에 아주 질려버린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일에 무죄하다. 너희들이 정 그렇게 원한다면 너희들 알아서 하라”고, 예수에게 십자가 형을 선고하여, 그들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4년 뒤, 빌라도는 그리심 산에서 순례를 온 사마리아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로 인해 황제로부터 문책을 받고 36년에 파면을 당했습니다. 그 후의 행적은 고향에 가서 자살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역사가인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는 수년 후에 유배를 당하여 고심하다가 자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가 죽고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의 이름은 사도신경에 실려, 그리스도인들의 입에 대대로 저주의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죽이지 말라고 청하며, 유일한 변호인이 되었던 그의 아내 프로쿨라 클라우디아를 추앙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녀는 매우 사려 깊은 여인으로,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보았고, 주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며, 그리스와 에디오피아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곳 교회에서 성녀로 추앙 받았다고 합니다. 아내가 그렇게 되었다고 하니, 빌라도의 선택이 더욱 아쉬울 따름입니다. 어렵사리 얻은 총독 자리라서 포기하기 어려웠겠지만, 예수를 십자가에 넘기고 총독 자리를 잠시 유지했지만, 몇 년 못 가서 총독 자리도 잃고, 자기 목숨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2.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입니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십자가 형을 언도하였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나무에 사람을 매달아 죽이는 방법입니다. 사람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것은, 이집트, 카르타고, 앗수르, 페르시아 같은 지역에서 사용해 온 처형 방법입니다. 이것은 불복종한 백성들의 본보기를 삼기 위해서, 또는 패배한 적을 조롱하기 위해서, 시신을 말뚝에 걸거나, 높은 장대에 매달아,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로에 세워 놓은 데서 유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로마에서 사형을 시키는 방법 중 하나로, 식민지 백성들의 정치적인 반역자나, 반란을 일으킨 자들에게 내려졌습니다.
십자가 형벌을 당하는 사람은, 자신이 달린 형틀을 지고 가야 했습니다. 가는 동안에도 동물의 뼛조각이 박혀 있는 가죽 채찍으로 매질을 당하면서 끌려갔습니다. 처형장에 도착하면 옷을 벗기고, 자기가 지고 갔던 형틀에 손목과 발목을 묶든지 못을 박아서 세우게 됩니다. 십자가 형틀에 매달리면, 근육경련뿐 아니라, 심장 이상과 질식 현상으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는, 고통스럽고 잔인한 형벌입니다. 죽을 때까지 공중에 매달아 놓은 시체는, 그대로 방치해서 뼈만 남을 때까지, 새들이 와서 쪼아 먹도록 방치해두게 했다고 합니다. 십자가형은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하며 치욕스러운 형벌입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 사이에서도,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일 황제가 식사할 때, 누구든지 십자가 이야기를 할 경우는, 당장 끌어내어 매질을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 죄인을 죽이는 잔인한 형틀로만, 또는 저주의 상징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반대로 사람이 손으로 만든 십자가 자체에, 무슨 능력이라도 있는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됩니다. 십자가를 그리며 기도해야 기도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십자가 가까이에서 기도해야 기도의 효험이 큰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리고 동시에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심을, 세상에 확실히 알게 한 표지입니다. 행 2: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 말씀은 베드로가 오순절에 각국에서 모여든 백성들에게 행한 설교입니다.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에, 삼천 명이나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이렇게 한 목소리로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전면에 걸린 십자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한다면, 십자가를 바로 이해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 곧 구세주로만 믿으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분의 역할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 하실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주인으로서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또한 십자가는 대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막 10:45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성서학자 앨버트 반스 박사는, 포로를 풀어주기 위해 지불하는 값을 대속물이라고 했습니다. 전쟁에서 적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몸값으로 지불되는 값이 대속물입니다. 어떤 사람을 형벌이나 고통이나 죄 상태에서 풀어주는 값을 대속물이라고 합니다. 범죄한 인간은 마귀에게 포로로 잡혀 있었습니다. 몸값을 지불하지 않고는, 포로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몸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대속물로 드리셨습니다.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남김없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본받아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폴란드인 콜베 신부입니다. 그는 1918년 4월 28일 사제 서품을 받았고, 폴란드 프란치스코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며 라디오 방송 언론인으로 활약했습니다. 1930년 동양 선교를 위해서 일본을 방문하여 6년간 머물렀습니다. 귀국한 뒤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 원장이 되었습니다. 1939년 폴란드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콜베 신부는 나치의 박해로부터 보호해주기 위해 유다인 2천명을 포함한, 폴란드에서 온 난민들에게 니에포칼라누프 수도원을 은신처로 제공해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1941년 2월 17일, 콜베 신부는 독일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투옥되었습니다. 그해 5월 28일 죄수번호 16670을 부여받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1941년 7월 말, 죄수 중 한 사람이 수용소에서 사라진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사라진 죄수가 탈옥했다고 생각한 수용소 지휘관 친위대 중위 칼 프리취는, 죄수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14A동 블록에 수용되어 있던 열 명을 끌어내서 처형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끌려나온 열 명 중에는, 자기의 온 가족이 다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한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가 울면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그때 콜베 신부가 친위대 중위 칼 프리취에게 나아가 소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친위대 중위 칼 프리취가 ‘소원이 무엇이냐?’묻자, 콜베 신부가 말하길 ‘나는 신부이니까 처자식도 없다. 그러니 이 사람을 살려주시고 그 대신 나를 기아실에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친위대 중위 칼 프리취는, 그 청년 대신 콜베 신부를 벙커로 된 기아실로 끌고 갔습니다. 친위대 중위 칼 프리취는 열 명을 즉시 처형하지 않고, 물과 음식을 일체 주지 않고 굶겨 죽이기 위해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콜베 신부는 감옥 안에서 기도하며, 함께 갇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들은 꼼짝할 수 없는 기아실에서, 콜베 신부의 인도를 따라 함께 찬양을 부르며, 서서히 굶어 죽어갔습니다. 그 후 3주가 지났지만, 콜베 신부와 다른 세 명이 기도의 힘으로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나치는 콜베 신부와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들에게, 독약을 주사하여 모두 살해했습니다. 1941년 8월 14일입니다. 콜베 신부의 시신은 8월 15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 한 화장장에서 소각되었습니다. 콜베 신부는 한 젊은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이 대신 죽은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화목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엡 2:16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우리가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높다란 담이 생겼습니다. 베를린 장벽보다 튼튼한 죄의 장벽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 장벽을 뛰어넘을 수 없고, 허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로 막힌 담을 허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을 누려야 합니다. 누리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히 4: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없으니,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우리가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고후 5:18-19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세상을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을 전해야 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화목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화평의 메시지를 담은 표지입니다. 십자가를 들고 행진하고자 한다면, 싸움이 아닌 평화를 위해서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의인의 죽음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순교자들의 죽음과도 다릅니다. 그 죽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를 미워하시는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으셨습니다. 순교자들은 하나님의 버림받은 죽음이 아닙니다. 스데반의 순교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까? 베드로의 순교가 바울의 순교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친히 하신 말씀이 그걸 말해줍니다. 마 27:46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시편으로 그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버림받은 죽음은 예수님 한 분이면 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습으로 죽어도, 하나님의 버림받은 죽음이 아닙니다. 사명이 끝나서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눅 9:23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이 지라는 제 십자가가 바로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제 십자가는 자기 밖에 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져줄 수 없는 십자가입니다. 사명이 그런 거 아닌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피를 믿음으로 이제 새 삶을 얻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방종하면 안 됩니다. 오직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는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안에서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은혜를 발견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 고백을 할 때마다 우리 자신의 죄를 생각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고백할 때,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한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머리로 하는 고백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고백, 삶으로 하는 고백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