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을 위한, 일본인의 신도시 중앙동"
광복 70년을 비웃듯 군사대국화를 꿈꾸는 일본이 전세계 어디에서든 군사적 활동을 허용받게 될 미일방위협력지침 개악을 코앞에 둔 4월 25일, 일제하 부산역사를 제대로 배우고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려는 20명의 부산 사람들이 용두산 공원 아래 부산근대역사관 앞에 모였다.
<일제의 조선수탈본산,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이었던 부산근대역사관 앞에서 일정을 공유하는 참가자들>
일제 강점기의 속 내용을 들여다보는 2015 평화발자국 첫 걸음은 일제가 강화도조약이후 토지수탈과 매축, 금융, 여론형성과 경찰력 강화 등을 통해 부산을 침략의 교두보로 만들어나간 과정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번 평화발자국은 지난 해 평화발자국에 참가했다가 해설사로 나선 시민들이 나누어 해설을 맡고 최광섭 부산평통사 대표가 보완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참가자들은 우선 근대역사관 2층과 3층 전시물 중에서 1876년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부터 1910년 한일병합까지의 자료들을 개괄적으포 훓어본 후 중앙동 거리로 나섰다.
부산근대역사관은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이었다. 이곳에서 부산의 토지와 경제수탈이 수행되었다. 해방 후 이곳에 미군이 주둔했다가 미 문화원으로 사용되었고 1999년에야 우리에게 반환되었다.
구한말 일본이 조선에 눈독을 들이면서 가장 잘 활용한 게 바로 초량왜관이다.
1872년 일본은 초량왜관을 접수하여 관리하기 시작한다. 조선인들을 위협하느라 왜관에 대포를 두고 발포를 했으며 거류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군함을 들여와 시위를 하기도 했다. 강화도조약 체결 한 달 전인 1876년 1월 15일엔 군함 6척이 부산항에 입항해 이미 도착해 있는 2척의 군함과 함께 대포를 쏘며 시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1월 23일, 일본은 초량왜관에 준비해 둔 야전포 2문과 탄약 7천발을 싣고 부산을 출발 강화도로 향했고 결국 2월 26일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강화도조약 체결 후 초량왜관은 일본의 조선침략 전진기지가 된다. 일단 강화도 조약에 의해 부산항은 자동 개항이 되었고 이듬해인 1877년 초량왜관 11만평은 일본인 전관거류지로 바뀌게 된다. 지금의 중앙동 일대가 그곳이다.
<중앙로-일본인들의 본정통 길을 따라 나선 참가자들. 이 길을 따라 제일은행 등 일본인들의 은행이 들어서있었다.>
부산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암매와 저당을 통해 서쪽으로는 대청, 보수동, 동쪽으로는 영주, 수정, 좌천, 범일동까지 광범위하게 토지를 사들였다. 1905년 경 전관거류지 11만 평 외에 일본인들이 사들인 토지는 무려 5,381,714평이나 되었다. 계속된 매축도 일본인 거주지의 확장을 도왔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전관거류지를 도심으로 하고 초량과 부산진을 부도심, 온천장을 교외로 한 부산시를 직조하게 된다.
1894년에 5,500명이던 일본인은 1914년에 28,254명(55,904명)으로 조선인보다 많아졌다. 1939년 경 일본인의 도시거주 비중은 15.5%였는데 부산은 51,802명(222,690명)으로 총 인구 대비 23.3%에 이르렀다.
치욕의 거리, 중앙동에는 일제가 경제적 침탈을 위해 세운 제일은행 등 일본들의 은행들이 많이 있었다. 참가자들은 청산하지 못한 일제 잔재의 무게를 실감하며 일본인들의 거리라 불린 관수가 앞에 다다랐다. 관수가는 초량왜관의 최고 책임자 관수가 머물렀던 건물이다. 관수가는 그 앞으로 올라가는 계단만 남아있다.
<관수가 자리앞에 선 참가자들.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개항 후 관수가는 일본관리관청사(1879년), 부산영사관(1880년), 부산이사청(1905년 을사조약), 부산부청(1914년 부제 실시)으로 바뀌게 된다. 부산부청은 관수가 자리에 1936년까지 존속했는데 관수가 앞을 일본인 거리라 하고 부산호텔에 일본인이 많이 드나드는 것도 이런 역사적 이유가 있다. 이 부근에 경찰서(1880년)와 거류민단사무소 등 행정기관이 위치했다. 부산경찰서는 경남지역 의병들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1920년 9월 4일 박재혁 의사는 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이 이야기에 관해서는 6월 평화발자국에서 소개할 것이다.
의병들은 부산에서 경성으로 향하는 통신을 막기 위해 전신줄을 끊고 불태웠다. 한미일 삼각동맹을 구축하기 위한 한미일 정보공유약정 체결을 막아나선 우리 실천의 뿌리다.
"여기는 신사 앞입니다. 신사 앞 내리실 분 나오세요~"
참가자들은 용두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용두산은 왜관의 중심에 있어서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쪽은 동관, 서쪽은 서관이라 하였다.
일제는 조선인들의 정신을 지배하려고 신궁과 신사를 세웠는데, 용두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신사를 세웠다. 용두산 신사는 원래 왜관에 있던 금비도라신사인데, 개항 후 1894년 거류지신사로 개칭되었다가 1899년 다시 용두산 신사로 이름이 바뀌는데 1936년 경성신사와 함께 조선총독부가 일체의 비용을 부담하는 신사로 승격된다.
김열규 교수가 부산일보에 연재한 기사에 의하면 1934년부터 당시 초등학생 아이들도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는데 용두산 앞 전차정류장 이름이 '신사'였다고 한다. 전차를 타고 가다가 용두산 신사 앞에 이르면 신사를 향해 큰 절을 해야 했다.
일제는 신궁 두 곳, 신사는 1100여개나 세웠는데 해방 후 모두 불에 타거나 파괴되어 지금은 볼 수 없다. 서울 남산의 조신신궁은 조선총독부가 스스로 소각하고 파괴했지만 대부분의 신사는 한국인들에 의해 불탔다. 용두산 신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두 번이나 투옥되고 직장까지 잃었던 기독교인 민영석이 불을 질러 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300년을 이어온 용두산 신사는 사라졌지만 일본의 야욕은 살아있다. 신사가 사라졌듯 독도침탈은 물론 한반도 재침략을 넘보는 일본의 그릇된 야욕이 사라질 때까지 지혜와 힘을 모아 대응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힘으로 개화하려는 허망한 꿈을 꾸던 곳, 대각사"
용두산 공원에서 점심을 마친 참가자들은 대각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87년 6월 항쟁 당시 대규모 집회 장소로 사랑을 받던 대각사는 초량왜관 시절에 일본의 사절단이 머물던 숙소로, 당시로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었다.
초량왜관에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게 되자 일본 황실은 사찰을 건립하기로 하고 개항 이듬해인 1877년에 일본 교토의 '동본원사'의 승려를 보내 이곳에 절을 세워 '동본원사 부산별원'이라 했다. 일본 불교세력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해 많은 승려들을 보냈는데 그 중 가장 많은 승려를 보낸 곳이 동본원사다.
동본원사 부산별원에는 '초량관어학소'를 두어 일본인이 우리말을 배우고 통역관이 되어 침략의 선봉이 되었다. 일본인들만 사용하게 되어 있던 이 어학소에 조선인 청년들이 드나들며 일본어를 배우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개화파의 핵심인 유대치다. 그는 이곳에서 이동인과 개화정책을 논의하고 김옥균, 박영호, 서광범, 윤치호, 서재필 등과 수차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면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곳에서 밀담을 나누고 피난처로 사용했다고 한다. 개화의 꿈은 갸륵한 것이나 자주적인 힘이 아니라 일본의 힘을 얻어 이루려고 했으니 허망한 꿈이었다.
이 동원본사 부산별원은 해방 후 한국정부에 귀속되어 방치되다가 1953년 국제시장 화재 때 전소되었다. 현재 대각사는 1970년 재창건된 후에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에 일본식 절이 있었다는 흔적은 석등과 범종, 그리고 제사 후 음식을 올리는 단 정도다.
<개화파가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를 하려 했던 개화파가 밀담을 나누던 대각사에서. 일본 범종이 남아있다.>
"부산은 섬나라 일본이 대륙으로 가는 관문. 경성까지 가는 열차는 하행"
참가자들은 롯데백화점 건너편으로 걸어나와 다시 중앙동-일본식으로는 본정통-으로 들어가 해관이 있던 곳에 도착했다.
1876년 조약 체결로 부산포가 개항된 후 한일무역규칙이 일본측 안대로 체결됨으로서 일본의 일방적인 무관세통상이 진행된다. 이에 부당함을 인식하고 1878년 9월 28일 두모포해관을 설치했으나 일본의 무력시위로 인해 개관 3개월만에 폐관된다. 이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미국과의 무역에서 과세 가격의 10%를 관세로 부과하는 등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 한일간의 수차례에 걸친 협상이 이루어져 한일통상장정과 해관세칙이 발효됨에 따라 1883년 부산해관이 개관되었다.
초대 해관장으로 윌리엄 넬슨 라바트(W.Nelson Lovatt)라는 영국인이 취임했으며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외국인 해관장이 6대에 걸쳐 취임하였다. 1906년 부임한 일본해관장은 1907년에 명칭을 부산세관으로 개칭하고 1911년 2층 규모의 서양양식의 세관청사를 준공한다. 이후 세관은 지금의 국제여객선터미널에 자리를 잡았다.
<구 해관자리에 선 참가자들. 일제의 제일은행이 해관세를 징수했다.>
참가자들은 국제여객선터미널까지, 이전엔 바다였으나 일본의 요구에 따라 매축된 길을 걸었다.
1905년 1월 1일,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 기차가 초량역에서 운행을 시작했고,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도 이듬해 개통을 앞두고 있었다. 일본과 한국사이의 정기적 바닷길만 열리면 도쿄에서 유럽까지 길이 놓이는 셈이었다. 그 해 9월 11일 1680t급 부관연락선 이키마루호가 일본 시모노세키항을 떠나 11시간 30분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당시 부두는 잔교(부두에서 선박에 닿을 수 있도록 해 놓은 다리 모양의 구조물)형태를 취했다. '부관'은 부산의 앞글자와 시모노세키(하관)의 뒷글자를 딴 것으로 일본에선 관부연락선이라고 불렀다.
경부선의 시간표가 뱃시간에 맞춰 조정되자, 도쿄에서 출발해 서울에 도달하는 시간은 60시간 정도로 단축됐다. 1912년 6월 15일 지금의 제1부두가 제1잔교부두로 완공돼 관부연락선 부두로 이용됐다. 한일 강제병합 이후 부관연락선은 고통의 상징이 되었고, 한일간 정기뱃길은 2차대전 종전과 함께 끊겼다.
지금도 미국은 부산항을 통해 미군 병력과 물자를 수송한다. 언제까지 부산이 대륙으로 향하는 침략의 물자 수송로가 될 것인가? 전쟁과 침략의 관문인 부산의 오명을 평화의 도시로 바꾸어낼 책무가 우리에게 주어져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일본 제국의 수도였던 도쿄역 방향이 상행, 경부선은 하행이었다. 관부연락선에서 내려 서울로 가려고 열차를 갈아타면 경성행은 상행이 아니고 하행이었다. 당시 이 일을 당한 사람들이 느낀 당혹감과 괴리감이 얼마나 컸으랴! 부관연락선을 통해 부산으로 들어온 일본인들은 부교를 건너 세관을 지나 맞은편 일본식으로 지어진 부산역호텔에 머물렀다. 전혀 다른 나라라고 생각되지 않는, 일본인들의, 일본인들을 위한 도시 부산이 마련된 것이다.
일제에 맞선 부산사람들, 일제의 수탈현장을 돌아보는 다음 평화발자국은 5월 30일에 계속된다. (6월은 항일현장, 9월은 친일현장, 그리고 10월은 해방과 귀환 현장을 돌아봅니다. 참가신청:070-7809-4311)
<국제여객터미널-세관에서 일정을 마무리한 후 기념촬영. 뒤편에 당시 일본이 세운 조형물 일부가 보인다.>
(이 글은 대표해설사 최광섭을 비롯하여 권영주, 김욱, 양화니 해설사가 제공한 자료에 근거한 것입니다.)
* 오마이뉴스에서도 이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03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