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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문선공파는 대안군파 김태서의 직계손이다.
경주김씨 문선공파는 1926년 병인보(丙寅譜) 처음으로 문선공 요(瑤)를 영분공 14세 궤(연성)의 둘째 아들로 계대를 올렸고, 그후 1958년 무술보에 궤(軌)의 첫째 아들로 올렸다.
1961 신축보에는 궤의 세째 아들로 내렸다가 1971년 신해보에 다시 둘째 아들로 올렸다. 그로부터 1974년 갑인보, 1981년 신유보, 1985년 을축보,1988년 무진보에 이르기까지 계속 궤의 둘째 아들로 계대를 올려 왔기 때문에 그 후손들은 지금까지 영분공파 연성(궤)의 둘째 아들로 알고 살아왔다.
영고-인경-궤-영(榮)
요(瑤)-정윤(正潤)-문선공파에서 주장하는 계보
승무(承茂)
그러나 <1785(정조9년)년 발간된 목간본 경주김씨세보>를 보면 궤(연성)의 아들로 영(塋)과 승무(承茂)만 기록되어 있다. 요(瑤)라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1785(정조9년)년 발간된 목간본 경주김씨세보>
보학에서는 오래된 족보의 기록을 신빙성 있게 받아들이므로 요(瑤)의 인물을 연성(궤)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문선공파 후손들이 문선공 요(瑤)의 상계를 보학적 근거 없이 영분공파 계보에 끼워 넣어 문선공파족보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문선공파가 만든 족보, 문선공 요(瑤)를 승무의 둘째 아들로 만든 족보가 퍼져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해 <문선공 요(瑤)의 실체>라는 두툼한 책을 발간한 분이 있으니 필천 김천국 선생이다.
김천국 선생은 연성의 둘째 아들 승무의 후손(시어사공파)이다.
그는 오랫동안 일련의 경주김씨 영분공파족보와 문선공파족보를 대조, 비교, 검토를 거쳐 문선공 요(瑤)는 영분공파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김천국 선생은 정작 중요한 문선공 요(瑤)의 실체를 밝혀내진 못했다. 그런데 최근 보학적 연구를 통해 문선공파 요의 실체가 밝혀졌다.
본 글을 통해 그 내용을 공개하고자 한다.
1. 문선공 요(瑤)의 실체
문선공 요의 후손 계보가 일목요연하게 등장하는 세보(대동보)가 있으니 바로 전주김씨세보(대동보)이다.
어째서 전주김씨세보에 문선공 요의 계보가 등장하는 것일까?
문선공파에서는 자신들이 문장공(文莊公) 김태서의 후손임을 전혀 모르고 있는 실정인데 말이다.
족보는 조상들의 선대기록을 보존하여 대물림하는 가운데 새로 태어난 후손들을 입보한 대동보 또는 세보를 만들어 자자손손 물려주는 것이다.
경순왕과 태조왕건의 딸 낙랑공주 사이에 태어난 대안군 은열의 9세손 김태서를 시조로 삼는 전주김씨세보에 문선공 김요(金瑤)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전주김씨세보에는 김요(金瑤)의 초명을 김상요(金上瑤)라고 기록했다.
족보를 보면 김상요는 충선공 김혼(琿)의 손자인 동시에 계림군 김자흥의 아들로 되어 있다.
<고려사열전 김자흥 편>을 보면 “아들은 김상기(金上琦)·김상보(金上珤)·김상영(金上瑛)·김상린(金上璘)이다”라고 기록되었다.
한문으로 아름다울 옥 요(瑤) 쓰고 있는 문선공 요(瑤)가 김자흥의 둘째 아들 김상보(金上珤)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역사 속에서 잃어버린 문선공파의 상계가 밝혀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현재 전주김씨세보(2003년)와 전주김씨대동보(2004년)에는 상요(上瑤)로 되어 있다. 물론 문선공파세보에는 요(瑤)로 되어 있다.
<전주김씨세보(2003년)>
전주김씨세보(2003년)를 보면 상요(上瑤) 옆에 삼중대광판삼사상장군 시문선공 묘경기도 장단남면자좌 배경주이씨부광한(三重大匡判三司上將軍 諡文宣公 墓長湍郡長端南面子坐 配貞夫人慶州李氏父廣漢)이라 되어 있다.
참고: 한문은 상요(上瑤)인데 한글로는 상보로 썼다. 이는 한문번역의 오기로 보인다.
전주김씨대동보(2004년)을 들여다보면 상요(上瑤) 옆에 삼중대광주국상장군 시문선공 묘장단군남면자좌 배정부인경주이씨광한녀(三重大匡輔國上將軍 諡文宣公 墓長湍郡南面子坐 配貞夫人慶州李氏廣漢女)이라 되어 있다.
문선공파세보를 보면 요(瑤) 옆에 삼중대광상장군계림부원군시문선공 -이하생략- 배정부인월성이씨부광한((三重大匡上將軍鷄林府院君諡文宣公 -이하생략-配貞夫人月城李氏父廣漢)
상보(역사기록과 일치), 상요, 요는 모두 동일인물이며 이름의 기록만 다를 뿐이다.
그는 삼중대광상장군이며, 시호가 문선공(文宣公)이고, 묘가 경기도 장단에 있다는 것, 그리고 부인은 경주 이씨 광한의 딸이다.
문선공파 입장에서는 문선공파세보에 요(瑤)의 아들은 정윤(正潤) 뿐인데 왜 전주김씨세보에는 정윤의 형으로 처중(處重)이 존재하느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족보를 만들 때는 조상의 직계만 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른 대안군파세보, 대안군파대동보를 보면 상요(상보)의 아들로 처중(處重)만 기록되어 있다. 이는 장자만 기록한 경우다.
대안군파대동보, 전주김씨세보를 통틀어 상요(상보)의 아들로 정윤만 기록된 경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처중만 기록되어 있든지(대안군파대동보), 처중과 정윤이 함께 기록되어 있든지(전주김씨세보, 전주김씨대동보) 둘 중의 하나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요(瑤)의 장남은 정윤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상요(상보, 요)의 아들로 장남 처중(處重)과 동생 정윤(正潤)을 함께 기록한 전주김씨세보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2. 문선공 요(瑤)의 선대(先代)
문선공파세보를 전주김씨세보 및 전주김씨대동보와 비교하여 보면 다음의 차이점이 있다.
문선공파세보는 요(瑤)의 아버지를 영분공파 궤(연성)의 둘째 아들로 만들어 놓은 반면, 전주김씨족보는 상요(上瑤)의 아버지를 김자흥으로, 자흥의 아버지를 충선공 김혼으로 이어가서 김태서를 거쳐 대안군 은열로 올라간다는 점이다.
문선공파세보에서 요(瑤)의 아버지를 영분공파 궤(연성)의 둘째 아들로 만들어 놓은 것은 사실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
이에 대해서는 경주김씨세보(1785년)와의 비교분석에 의해 명백하게 밝혀졌으므로 세삼 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전주김씨세보와 문선공파세보를 대조하여 보면 아버지(상요)와 아들(정윤), 손자(남보) 뿐만 아니라 그 밑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거의 완전하게 일치하므로 문선공파는 대안군 은열의 9세손 김태서의 후손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3. 전주김씨세보(2003년) 및 전주김씨대동보(2004년)에 기록된
문선공의 요(瑤)의 후손들
A. 전주김씨세보(2003년)
상요(上瑤)-처중(處重)-봉령(鳳齡)-신(紳)--인우(仁友)
수령(壽齡)-강(綱)-덕우(德友)-진윤(振潤)
진성(振聲)
정윤(正潤)-남보(南寶)
남공(南貢)-천응(天應)-을권-(乙卷)
을적(乙適)
을진(乙軫)-안
을범(乙範)-원
을초(乙軺)-자양
남길(南吉)
남귀(南貴)-천백(天白)
천노(天老)
천석(天錫)-경좌
경보
천일(天一)
천은(天恩)
전주김세보는 정윤의 둘째 아들의 이름을 남공(南貢)이라 기록했는데 남분(南賁)과 한문이 비슷하다 보니 남분(南賁)을 남공(南貢)이라 기록한 오기가 아닌가 한다.
위에서도 지적하였지만, 한문은 상요(上瑤)인데 한글로는 상보로 쓴 것 역시 오기로 보인다.
B. 전주김씨대동보(2004년)
상요(上瑤)-처중(處重)-봉령(鳳齡)-신(紳)-인우(仁友)
봉수(鳳壽)-강(綱)-덕우(德友)-진윤(振潤)
진성(振聲)
정윤(正潤)-남보(南寶)
남분(南賁)-천응(天應)-을권-(乙卷)
을적(乙適)
을진(乙軫)-안
을범(乙範)-원
을초(乙軺)-자양
상길(商吉)
상귀(商貴)-천백(天白)
천노(天老)
천석(天錫)
천일(天一)
천은(天恩)
정윤의 4남은 모두 남(南)자 돌림인데 상길(商吉), 상귀(商貴)라 기록한 것은 생김새가 비슷한 한자의 오기로 보인다.
4. 고려역사에서 고증해본 요(瑤)의 선대 조상들
문선공(文宣公) 요(瑤, 상보(上珤) 또는 상요(上瑤))의 아버지가 계림군 김자흥이라는 사실은 고려사의 기록이 있으므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상보(上珤)의 아버지 자흥에 대한 고려사열전의 기록은 비교적 간략하다.
고려사열전 김자흥(金子興)
[김자흥(金子興)은 수염이 멋졌고 몸매가 풍성하며 얼굴이 밝았다. 부친의 벼슬 덕에 거듭 승진해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원나라의 사신 바바[伯伯]가 와서 송방영(宋邦英) 사건을 조사하자 김자흥은 김원상(金元祥)·오현량(吳賢良)과 함께 모의하여 흉악한 무리들을 제거하였다. 관직을 두루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으며 예순에 죽었다. 아들은 김상기(金上琦)·김상보(金上珤)·김상영(金上瑛)·김상린(金上璘)이다.]
김자흥의 아들은 김상기(金上琦)·김상보(金上珤)·김상영(金上瑛)·김상린(金上璘)라는 기록은 전주김씨세보와 일치한다.
고려사열전에 김자흥은 계림군에 봉해졌다고 하였는데, 고려사절요를 보면 충선왕 임자 4년(1312년)에 김자흥을 계림군(鷄林君)으로 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니까 김자흥은 1312년 충선왕 4년에 계림군에 봉해진 것이다.
김자흥이 계림군으로 봉함을 받은지 4년 뒤 고려사절요 충숙왕 병진 3년(1316)에김자흥(金子興)을 의흥군(義興君)으로, 김자연(金子延)을 의성군(義城君)으로 봉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자흥은 충선왕 때는 계림군으로, 충숙왕 때는 의흥군으로 봉함을 받았고, 그의 동생 김자연도 충숙왕으로부터 의성군 호를 받았던 것이다.
고려사절요 충숙왕 계해 10년(1323년) 6월에 “계림군 김자흥이 졸하였다”
라는 대목이 눈에 띄는데 고려사는 그 분량이 많지 않음에도 김자흥의 졸기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당시에 그가 얼마나 세력이 강한 사람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계림군 김자흥의 아버지는 충선공(忠宣公) 김혼(金琿)이다.
그는 충선왕 즉위년 1308년 충선(忠宣)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계림부원군으로 봉함을 받는다. 계림부원군 김혼(金琿)이 어떤 인물인지 고려사열전을 통해 보기로 하자.
국역 고려사 열전 김혼(金琿)
[김혼(金琿)은 나이 열여덟에 석릉(碩陵 : 희종의 릉)의 수직으로 내시(內侍)에 적을 두었다가 감찰어사로 옮겼다. 충렬왕 때 대장군으로 있으면서 상장군 김문비(金文庇)와 가깝게 지냈다. 한번은 그 집에 가서 바둑을 두었는데 김문비의 아내 박씨(朴氏)가 창틈으로 그의 멋진 모습을 엿보고 감탄하였는데, 김혼도 그 말을 듣고 박씨에게 마음을 두게 되었다. 얼마 뒤에 김문비가 죽고 김혼의 아내도 죽자, 박씨가 사람을 보내어 “제겐 아이가 없으니 당신에게서 아들 하나를 얻어 기르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청을 넣은 다음, 다시 “만나 뵙고 말씀드릴 일이 있으니 한번 와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더니 김혼이 드디어 그 집으로 가서 정을 통하였다. 감찰(監察)과 중방(重房)이 번갈아 글을 올리며 극렬하게 논죄하자 왕은 김혼이 선후(先后)의 친척이라 용서하려 하였지만 어쩔 수 없이 섬으로 유배 보내고, 박씨는 죽산(竹山 :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으로 돌려보냈다.
애초 호구(戶口)가 날로 줄어들자 왕이 사민(士民)들에게 모두 첩[庶妻]을 두게 하였는데, 첩은 바로 양가(良家)의 여자들이었다. 그 자손은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했지만 만약 부부간의 신의를 저버린 채 본처를 버리고 첩을 둔 자는 그 즉시 벌을 내리도록 했다. 주무 관청에서 이 제도를 시행하기로 의논하던 차에 김혼이 예에 어긋난 짓을 했기 때문에 이 제도의 시행은 결국 중지되었다.
뒤에 우승지(右承旨)가 되고 거듭 전임해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첨의참리(僉議叅理)가 되었다. 또 시랑찬성사(侍郞贊成事)로 승진한 후 검교수사도(檢校守司徒)로 옮겼다가 다시 시랑찬성사가 되었으며, 뒤에 중찬(中贊)으로 승진 임명되었으나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났다. 한참 뒤에 시랑찬성사로 기용되었다가 또 우중찬(右中贊)으로 임명되었다. 왕이 원나라에 가면서 김혼에게 행성(行省)의 일을 임시로 맡게 하였으나 얼마 뒤에 파직시켰다. 뒤에 낙랑군(樂浪君)으로 봉하고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의 호를 내려주었으며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바꿔 봉하고 부(府)를 설치해 관료를 두었다. 충선왕 2년(1310)에 판삼사사로 죽으니 나이 일흔셋이었으며, 시호를 충선(忠宣)이라고 하였다.
성품이 관대하고 온화하였으며 용모가 멋졌고 예법에 익숙하였다. 원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갔을 때 대궐에서 황제가 베푼 잔치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홀(笏)을 단정하게 잡고 앉아서 술잔을 돌리는 자가 올 때마다 김혼은 반드시 일어나서 읍하고 마셨다. 원나라 세조(世祖)가 그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은 참으로 고려의 재상답다.”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경순왕후(敬順王后)의 종제(從弟)로 충렬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았고, 또한 숙비(淑妃)와 친척간이었으므로 충선왕도 그를 총애하고 우대하였다. 일찍이 왕을 청하여 남산(南山) 서재(書齋)에서 잔치를 연 일도 있었으며 숙비를 매우 근실히 섬겼으니 만년의 봉배(封拜)는 모두 숙비에게서 나온 것이다. 관직을 두루 거쳤지만 공을 세운 것이 없었으며, 매우 사치스럽게 생활하고 의복과 음식을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아들은 김자흥(金子興)·김자창(金子昌)·김자연(金子延)이다.]
충선공 김혼의 고려사열전은 그 아들 김자흥에 비해 보다 자세하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충선왕 신해3년(1311년) 9월 계림군 김혼이 졸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려사에 졸기가 기록되는 것을 흔치 않는 일이고 그만큼 그가 대단한 인물임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김혼의 아버지는 김경손(金慶孫)이다. 그 또한 유명한 인물이다.
1248년 최이(최우)가 죽자 뒤를 이어 실권을 잡은 최항은 그 이듬에 2월에 김약선의 아들 김미(金敉), 김약선의 동생 김경손(金慶孫)을 고란도로 유배시킨다.
고종36년(1249년) 최항은 김경손이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을 시기하여 섬(백령도)로 귀향 보냈고, 2년 후 고종8년(1251년) 장군 송길유를 백령도로 보내 김경손을 바다에 던져 죽인다.
국역 고려사열전 김경손(金慶孫)
[김경손(金慶孫)은 처음 이름이 김운래(金雲來)이며 평장사(平章事) 김태서(金台瑞)의 아들이다. 그 모친이, 오색의 구름 사이로 많은 사람들이 푸른 옷을 입은 아이 하나를 둘러싸고 하늘에서 내려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를 배었다. 태어나니 아름다운 모습인데다가 머리 위에 용 발톱처럼 불룩 솟은 뼈가 있었다. 성품은 장중하고 온유했으며, 지혜와 용기가 다른 사람보다 빼어났고 담력과 지략이 있었다. 방에 있을 때에도 반드시 조삼(皂衫)을 입고 손님을 대하듯 예를 차렸으며 화가 날 때면 수염과 머리털이 꼿꼿이 일어섰다. 일찍부터 음보로 진출하여 화려하고 귀한 벼슬을 두루 거쳤다.
고종 18년(1231) 정주(靜州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 분도장군(分道將軍)으로 있을 때 몽고군이 압록강을 건너 철주(鐵州 :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를 짓밟고 정주까지 침범해왔다. 김경손이 관아의 결사대 열두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가 힘껏 싸우니 몽고군이 퇴각했다. 그러나 뒤이어 대군이 당도하자 주(州)의 사람들은 수비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모두 달아나 숨어버렸다. 김경손이 성에 들어갔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열두 명과 함께 밤중에 산길을 통해 이레 익힌 음식을 먹지 못한 채 귀주(龜州 :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 구성)까지 갔다. 삭주(朔州 : 지금의 평안북도 삭주군)의 수장(戍將) 김중온(金仲溫)도 성을 버리고 도망쳐 오자 병마사(兵馬使) 박서(朴犀)가 김중온에게 성의 동서쪽을 지키게 하고 김경손에게는 성의 남쪽을 지키게 하였다.
몽고의 대군이 남문으로 몰려오자 김경손은 열두 용사와 여러 성의 별초(別抄)를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면서 군사들에게 “너희들은 목숨을 돌보지 말고 죽어도 물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우별초(右別抄)들이 모두 땅에 엎드린 채 명령에 불응하자 김경손은 그들을 성으로 돌려보낸 후 열두 용사와 함께 나가 싸웠다. 검은 깃발을 들고 선봉에 선 기병 한 명을 쏘아서 즉사시키자 열두 명도 용기를 얻어 분전했다. 날아온 화살이 김경손의 팔뚝에 맞아 피가 철철 흘러 내렸지만 북을 치며 독전을 멈추지 않았다. 네댓 번 맞붙은 후 몽고군이 퇴각하자 김경손이 대오를 정비하고 쌍소금(雙小笒)을 불며 돌아오자 박서가 큰절로 맞이하며 울었고 김경손도 마주 절하며 울었다. 이후로 박서는 성을 지키는 일은 모두 김경손에게 맡겼다.
몽고는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밤낮으로 공격해 왔다. 수레에 풀과 나무를 싣고 굴리며 공격해오자 김경손은 포차(砲車)를 사용해 끓는 쇳물을 쏟아 부어 수레에 실은 풀을 태우니 몽고 군사가 퇴각했다. 다시 공격해 오자 김경손은 의자에 앉아서 독전하고 있는데 포탄이 김경손의 머리 위를 지나 뒤에 있던 군졸에게 명중해 전신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부하들이 의자를 옮기자고 청하였으나 김경손은 “안 된다. 내가 움직이면 군사들의 마음이 모두 흔들릴 것이다.”라고 태연한 얼굴빛으로 거절하며 끝내 옮기지 못하게 하였다. 20여 일 동안 큰 전투를 치루면서, 김경손이 상황에 따라 적절히 귀신같이 대응해 내자 몽고는 “이렇게 작은 성이 대군을 맞아 싸우는 것을 보니, 하늘이 돕는 것이지 사람의 힘은 아니다.”라고 혀를 내두르며 결국 포위를 풀고 갔다.
얼마 뒤에 그는 대장군(大將軍)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임명되었다.
고종 24년(1237)에 전라도 지휘사(指揮使)가 되었다.
당시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 형제가 원율(原栗 :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담양(潭陽 : 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등 여러 군(郡)의 무뢰배(無賴輩)들을 불러 모아 해양(海陽 : 지금의 광주광역시) 등 주현(州縣)을 치고 내려오다가 김경손이 나주(羅州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자 나주성을 포위하였다.
김경손이 성문으로 올라가서 적도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는, “적이 비록 숫자는 많지만 모두 짚신 걸친 촌백성들일 뿐이다.”라며 바로 별초(別抄)가 될 만한 자 서른 명 정도를 뽑았다. 그리고 원로들을 모아놓고 울면서 “너희 고을은 왕후의 고향[御鄕6)]이니 다른 고을을 따라 적에게 항복할 수는 없다.” 하고 타이르니 원로들이 모두 땅에 엎드려 울었다. 김경손이 출전을 독려했으나 부하들은 “지금 상황을 보건대 아군은 수가 적고 적은 많으니 다른 고을의 군사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싸우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건의하였다. 김경손이 노해 꾸짖고는 길거리에서 금성산신(錦城山神)에게 제사7)를 지내고 손수 잔을 두 번 올린 다음, “전투에서 승리한 뒤에 마지막 잔을 올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일산(日傘)을 펼치고 성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부하들이 “이렇게 하면 적들이 바로 대장님을 식별하게 됩니다.”하며 말렸다. 김경손이 다시 그들을 꾸짖어 물리친 후 문을 열고 나갔는데, 현문(懸門)8)이 아직 내려지지 않았기에 문지기를 불러 처형하려 하자 즉시 현문을 내렸다.
이연년이 그 무리들에게 “지휘사(指揮使)는 바로 귀주에서 공을 세운 대장으로 인망이 대단히 두텁다. 내가 사로잡아서 도통(都統)으로 삼아야 하겠으니 활을 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그가 화살에 맞을까 우려해 모두 활과 화살을 쓰지 않고 칼[短兵9)]로 싸우게 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이연년이 용맹을 믿고 곧장 전진해 김경손의 말고삐를 잡으려 했다. 김경손이 칼을 빼들고 독전하자 별초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이연년을 죽인 후, 승세를 몰아 적을 쫓으니 적도가 완전히 궤멸되고 이 일대가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김경손이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추밀원지주사(知奏事)가 되자 어떤 사람이 최이(崔怡)에게 “김경손 부자가 상공(相公)을 해치려 하며 또 반역하려는 뜻도 있습니다.”고 참소하였다. 최이가 조사하여 보니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참소한 자를 강에 던져 죽이고 김경손을 다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전임시켰다.
고종 36년(1249)에 최항(崔沆)은 김경손이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을 시기해 백령도(白翎島 :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로 유배보냈다.
2년 뒤에 최항이 계모(繼母) 대씨(大氏)를 죽이고, 아울러 대씨의 전 남편 아들 오승적(吳承績)을 강에 던져 죽였다. 또 김경손이 오승적의 인척이라고 하여 사람을 유배지로 보내어 바다에 던져 죽였다.
김경손은 여러 번 큰 공을 세워 조야에서 그를 의지하고 높이 받들었는데, 갑자기 간악한 도적에 의해 살해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였다. 아들은 김혼(金琿)이다.]
김경손의 아버지는 김태서(金台瑞)이다. 그 역시 <고려사열전 김태서 편>에 실려 있다. 그에겐 아들 셋 있었는데 무신정권 때 맹활약한 인물들로 모두 고려사에 등장한다.
김태서(金台瑞)-김약선(金若先)-김미(金敉)
순경태후(원종비)-충렬왕
김기손(金起孫)-
김경손(金慶孫)-김신(金信)-수령옹주
김혼(金琿)-김자흥
김자창
김자연
국역 고려사 열전 김태서(金台瑞 ?-1257)
[김태서(金台瑞)는 경주(慶州) 사람으로 신라 왕실의 후예였다. 그 부친 김봉모(金鳳毛)는 용모와 행동이 멋졌으며 여진어(女眞語)와 중국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금나라의 사신이 올 때마다 그로 하여금 접대하게 하였으므로, 항상 동각(東閣)에 거처하였다. 신종 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임명되었으며, 거듭 승진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까지 지내다가 죽었다. 그가 죽자 사흘 간 조회를 정지했으며, 시호를 정평(靖平)이라 하였다.
김태서는 급제에 급제한 후 명종·신종·희종·강종·고종의 다섯 왕을 섬겼으며, 관직은 수태보(守太保)·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가 나이를 이유로 사직했다.
김태서는 유학에 종사했지만 글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남의 토지와 전답을 강탈하니, 출입할 때마다 사람들이 길을 막고, “공께서 어찌하여 우리 먹을 것을 빼앗아 가십니까?” 하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아들 김약선(金若先)이 최이(崔怡)의 사위였기 때문에 해당 기관에서 감히 탄핵하지 못하였다.
뒤에 오승적(吳承績))의 사건에 연루되어 집의 재산이 몰수되었다.
죽은 후 문장(文莊)이란 시호를 받았다.
아들은 김약선(金若先)·김기손(金起孫)·김경손(金慶孫)이다. 김기손은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냈으며, 「김경손전(金慶孫傳)」이 따로 있다.]
고려사절요 고종 44년(1257) “평장사로 치사한 태서(台瑞)가 졸하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거듭하여 놀라는 것이지만, 김봉모-김태서-김경손-김혼-김자흥에 이르기까지 무려 5대가 모두 고려사에 등장하며, 김태서-김경손-김혼-김자흥의 졸기가 고려사에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실로 그 세력이 장난이 아닌 집안이다.
김태서의 아버지는 김봉모이다.
고려사절요 신종6년(1203년) “김봉모를 추밀원부사로 삼았다”는 기록과
고려사절요 희종 5년(1209년) “평장사 김봉모가 졸하였다. 봉모는 풍채가 아름답고 또 금나라 말과 한족의 말을 해독하였으므로 매양 금나라 사신이 이르면 반드시 그에게 접대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에 관해서는 김봉모 묘지명(1209년)이 남아있는데 그 묘지명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김봉모 묘지명(1209년, 희종5년)
금자광록대부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 대자대부 정평공(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判兵部事 大子大傅 靖平公) 김씨(金氏) 묘지명
[김씨의 가계는 신라(新羅) 왕실에서 나왔다. 처음 탈해왕(脫解王)이 밤에 금성(金城)의 서쪽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알아보도록 하였는데, 금빛의 작은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왕이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것을 가져오게 하자, 한 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생김새가 훌륭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며, 이에 데려다 길렀다. 그가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성(姓)으로 삼았다. 그후 김씨의 자손이 계속 이어져 왕위에 오른 이가 50여 명이나 된다.
경순왕(敬順王)에 이르러 우리 대조(大祖, 太祖)가 군복자락을 휘날리며 장차 통일하려고 하니, 왕은 형세가 힘껏 싸우지 못할 것임을 알고 곧 나라를 들어 귀부하였다. 태조가 덕스럽게 여겨 상부 정승공(尙父 正承公)으로 봉하고, 지위를 태자(太子)보다 위에 두었으며, 장녀 신란공주(神鸞公主)를 처로 삼게 하였다.
이전에 만일 경순왕이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워 임금의 군대에 저항하고 세력이 다하여 굴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반드시 그 종족이 짓밟히고 무고한 백성들은 참살당하여 간과 뇌가 땅바닥에 으깨어졌을 것이다. 왕이 이에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일이 속한 곳을 있음을 알고 싸우지 않고 항복을 약속하였으니, 나라에는 큰 공을 세우고 인민들에게는 음덕을 주어서, 그 후손이 이 나라에서 반드시 관작과 복록을 누리게 되었다.
공은 그 후손이니, 공의 증조부 한공(漢公)은 공부시랑(工部侍郞)이고, 조부 경보(景輔)는 북면도감판관(北面都監判官)이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세린(世麟)은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여러 차례 추증되어 사공 상서좌복야(司空 尙書左僕射)가 되었다.
공의 이름은 봉모(鳳毛)인데, 정원(貞元) 3년 을해년(의종 9, 1155)에 문음(門蔭)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내시(內侍)에 속하였는데, 임금을 모신 공으로 예빈주부동정(禮賓注簿同正)에 뛰어올랐다. 임진년(명종 2, 1172) 봄에 대구위(大丘尉)에 임명되어 나갔다가 이듬해에 다시 내시에 속하게 되었다.
그 때 남쪽 군(郡)에서 초적(草賊)이 크게 일어나자, 임금이 토벌할 것을 명하여 공은 근신(近臣)으로서 종군하였다. 마주 싸우게 되었는데 적이 속임수를 쓰면서 급하게 공격하니, 그 때 병마녹사(兵馬錄事) 이인정(李隣定)이 말을 잘못 몰아 땅에 떨어졌다. 공이 즉시 손을 뻗어 자신이 탄 말에 끌어 올렸으나, 인정이 이미 기운을 잃어서 금방 다시 떨어졌다. 공이 이에 말에서 내리자 적들이 말을 타고 달려와 에워싸서 매우 급하게 되었는데, 공이 잠깐 사이에 말에 올라 타고 칼을 빼어 분연히 공격하였다. 적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물러났으니, 공이 용감하게 싸워 이기는 것이 이와 같았다.
정유년(명종 7, 1177)에 명복궁녹사(明福宮錄事)로 발탁되고, 군기주부 상식국직장(軍器注簿 尙食局直長)을 거쳤다. 경술년(명종 20, 1190)에 춘방통사사인(春坊通事舍人)을 거쳐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고,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올랐으며 잠시 뒤에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로 옮겼다. 위위소경 겸 지합문사(衛尉少卿 兼 知閤門事)에 임명되고, 형부시랑(刑部侍郞)을 거쳐 여러 차례 옮긴 다음 대부경(大府卿)이 되어 동북면지병마사(東北面知兵馬使)가 되어 나갔다.
공은 성품이 신중하고 부지런하여, 무릇 중앙과 지방의 관직에 종사하면서 임무를 맡아 잘 다스렸고, 외국의 방언(方言)과 속어(俗語)에 이르기까지 훤하게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신종(神宗)이 내선(內禪)을 받아 즉위하자 금(金)나라의 선문사(宣問使)가 이에 이르러 먼저 전 국왕<明宗>을 알현하고 그 다음에 새 임금에게 명(命)을 알리겠다고 전해 오니, 조정의 의논하였으나 어렵게 여겼다.
이 때 공이 이전에 공예대후(恭睿大后)가 승하하였을 때 금(大金)의 칙제사(勅祭使)가 따져 묻자 역관(譯官)과 행인(行人)이 아무 말도 못하였으나 공이 능히 마주 대하여 분명하게 밝힌 일이 있었으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공에게 요청하였다. 이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관(館)으로 가서 형편을 보아가며 타이르고, 물음에 따라 대답하고 따지니, 그들이 모두 의심을 풀고 따랐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이 더욱 중하게 여겼다.
무릇 국가의 연향(宴享)과 대례(大禮)에 공을 전례(典禮)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응대하는 것이 민첩하고 행동거지가 자세하고 훌륭하여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며 복종하였다. 그러므로 인진사(引進使)에서 판합사(判閤事)에 이르기까지 무릇 다섯 개의 관직을 거치는 동안 모두 지합문사(知閤門事)를 겸하였다. 계해년(신종 6, 1203) 겨울에 추밀원부사 형부상서(樞密院副使 刑部尙書)에 임명되고, 동지원사(同知院事)를 거쳐 병부(兵部)로 옮겼다. 금자광록대부 지문하성사(金紫光祿大夫 知門下省事)로 뛰어 오르고, 참지정사 판공부사(叅知政事 判工部事)를 거쳐, 정묘년(희종 3, 1207)에 중서시랑평장사 대자대부(中書侍郞平章事 大子大傅)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병이 들자 여러 번 글[表]을 올려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아직 나이가 되지 않았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이 병들고 또한 쇠약해진 것을 염려하여 동중서문하평장(同中書門下平章)으로 승진시키고 이에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도록 하였다. 금(大金) 대안(大安) 1년 기사년(희종 5, 1209) 6월에 병이 더욱 깊어져서 이 달 29일에 집에서 돌아가셨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 몹시 슬퍼하여 사흘 동안 조회를 그쳤다. 시호를 정평공(靖平公)이라 추증하고, 근신에게 명하여 장례일을 돕게 하였다. 이 해 7월 병진일에 대덕산(大德山) 서쪽 기슭에 장례지내니, 예(禮)에 따른 것이다.
장례를 지내려 하면서 집안사람이 ▨ 행장을 가지고 와서 묘지명을 청하였다.
명(銘)하여 이른다.
김씨의 선조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神)으로
선원(仙源)은 아득하게 오래되어, 공(功)이 쌓이고 어진 이가 거듭 나오도다.
우리 태조 때에 하늘에 부응하고 인사에 순종하여
그 후손인 경순왕이 싸우지 ▨(않고) 신하로 내부해 오니,
나라에 공이 있고 백성에게 덕이 있어
대대로 이어진 복이 공(公)에 이르러 새롭게 되도다.
지위는 높아 삼태(三台, 三公)에 오르고 나이는 칠순을 바라보았으나
▨▨ 세상을 떠나 이제 참[眞]으로 돌아가셨네.
훌륭한 이름을 전하고자, 명(銘)을 지어 여기 단단한 돌에 새기노라.]
해석자: 김용선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 상(2001)〕
김봉모 묘지명(1209년)에 따르면, 경순왕과 신란공주(낙랑공주)의 사이의 태어난 대안군(은열)----------한공(漢公)-경보(景輔)-세린(世麟)-봉모(鳳毛)으로 고증된다.
김봉모의 아버지 김세린(金世麟)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할아버지 김경보는 검교태자소보를 지냈는데 그의 묘지명(1150년)이 1784년(정조8년)에 발견되었다.
김경보 묘지명(1150)
[신라 경순왕 김부(敬順王 金傅)의 칠세손(七世孫)인 검교태자소보(檢校太子少保) 김경보(金景輔)는 아버지가 공부시랑(工部侍郞) 한공(漢公)이고, 조부는 공부상서(工部尙書)로 추봉된 계삼(繼蔘)이며, 외조부는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김태기(金台器)이다.
나이 82세로 금(大金) 황통(皇統) 10년(의종 4, 1150) 4월 17일 계해일에 집에서 돌아가시니, 7월 17일 을유일에 오룡산(五龍山)에 장례지냈다.
아들은 유림랑 감찰어사(儒林郞 監察御史)로 비어대(緋魚帒)를 받은 작문(作雯)이고, 맏사위는 정주사 시전중내급사(靜州使 試殿中內給事) 윤유연(尹裕延)이며, 둘째 사위는 전옥서승(典獄署丞) 유면(柳冕)이다.]
김용선 〔출전:『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김경보 묘지명(1150년)
경순왕-( )-( )-( )-계삼(繼蔘)-한공(漢公)-경보(景輔)-작문(作雯)
김봉모 묘지명(1209년)
경순왕(傅)-( )-( )-( )-( )-한공(漢公)-경보(景輔)-세린(世麟)-봉모(鳳毛)
김경보 묘지명(1150년), 김봉모 묘지명(1209년)을 비교해 보면 김경보 묘지명에는 경보의 아들이 작문으로 되어 있고, 김봉모 묘지명을 보면 봉모의 아버지가 세린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작문과 세린은 동일인으로 보인다.
756년간 땅 속에 묻혀 잠자고 있다가 김경보 묘지명(金景輔墓誌銘 1150년)과 함께 1784년(정조8년)에 발견된 묘지명이 있으니 곧 대안군 은열 묘지명(1028년)이다.
고려시대에는 시신을 화장하여 묘지명과 부장품을 함께 매장했는데, 대체로 묘지명에는 고인의 가문내력과 행적을 적었다.
고려평장사보국대안군 김공은열묘지명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의 네째 아들로, 시중 시랑(侍中 侍郞)이고 고려의 평장사(平章事)인 은열(殷說)이 무진년 3월 초 4일 기축일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성의 북쪽 10리 되는 종암(鍾岩) 아래 오룡산(五龍山) 남쪽 기슭의 쌍룡(雙龍)이 어우러지는 북쪽[壬坐] 언덕에 장례 지냈다.
형은 일(鎰)이고, 다음은 황(璜)이며, 그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이고,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이다.]
<해석자: 김용선>
형은 일(鎰)이고, 다음은 황(璜)이며, 그 다음은 명종(鳴鍾)이다.
아우는 중석(重錫), 건(鍵), 선(鐥), 종(鍾)이고,
아들은 강릉군(江陵君) 태화(泰華)이다.
-대안군 은열 묘지명에서-
김용선 교수는 대안군의 둘째 형의 이름을 굉으로 번역했으나 김사목의 대안군 은열 묘지명 해설에 따라 황(璜)으로 고쳤다.
우선 논할 것은 경순왕 넷째 아들 보국 대안군 은열(殷說)의 작고 연대에 대한 해석이다.
대안군 은열이 세상을 떠난 무진년은 광종19년(968년)이라는 해석(김용선교수)과 현종18년(1028년)이라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대안군 은열은 경순왕과 고려태조의 맏딸 낙랑공주 사이에 태어났는데, 경순왕과 낙랑공주의 혼인은 935년 11월에 있었으니 대안군 은열의 생년은 936년 이후일 것이다.
대안군의 생년을 936년으로 잡으면 광종 19년(968년) 그의 나이는 32세가 된다.
묘지명에 나타난 대안군 은열의 관직은 시중 시랑 평장사 (侍中 侍郞 平章事)다.
시중(侍中)은 최고 관직으로 종1품이었다.
문하시중은 재상직으로 통상 나이가 지긋한 원로들이 맡는 관직이었다.
대안군 은열의 졸기를 광종 19년(968년)으로 본다면 대안군이 불과 32세의 나이에 시중이 되었다는 건데, 아무리 대안군 은열이 경순왕과 낙랑공주(신명순성왕후의 딸)의 아들로 정종, 광종의 누나 아들이라 하더라도 불과 32세의 나이에 문하시중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고려 평장사라는 관직이다.
고려 평장사는 성종 때 3성6부(三省六部)의 관제가 확립되면서 처음 설치된 관직이다.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에 내사시랑평장사와 문하시랑평장사가 있었는데, 품계는 정2품이었다. 따라서 대안군 은열에게 평장사 (平章事)란 관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처음 사용했던 성종 때까지 생존해 있던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대안군 은열의 졸기 무진년은 광종 19년(968년)이 아니라, 현종 18년(1028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1. 대안군 은열 묘지명(1028년, 현종 18년)
2. 김경보묘지명(1150년, 의종4년)
3. 김봉모 묘지명(1209년)
4. 왕온 처 김씨 묘지명(1335년)
5.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사열전
위 다섯 가지 사료를 종합하여 대안군 은열의 직계 라인을 고증한 결과는 아래와 같다.
경순왕(傅)-은열(殷說)-태화(泰華)-( )-계삼(繼蔘)-한공(漢公)-경보(景輔)-세린(世麟)-봉모(鳳毛)-태서(台瑞)
지금까지 발견된 사료로는 태화와 계삼 사이는 고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경주김씨세보에서 태화의 아들을 정구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그 기록에 따르면,
경순왕(傅)-은열(殷說)-태화(泰華)-정구(正矩)-계삼(繼蔘)-한공(漢公)-경보(景輔)-세린(世麟)-봉모(鳳毛)-태서(台瑞)가 된다.
태서(台瑞)-약선(金若先)-미(敉)
순경태후(원종비)-충렬왕
기손(金起孫)
경손(金慶孫)- 신(信)-수령옹주(왕온의 처 김씨)
혼(琿)-자흥(子興)-상기(上琦)
상보(上珤)-처중
정윤
상영(上瑛)
상린(上璘)
자창(子昌)
자연(子延)
노란색을 덧칠해 놓은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고증해 본 문선공(김상보)파 계보 라인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 문선공파는 더 이상 영분공파가 아니고, 대안군파임이 분명해졌다.
잃어버린 조상의 상계를 찾은 것은 더없이 경사스런 일이다.
문선공파는 이와같은 보학적, 역사적 고증을 진지하게 논의하여 대안군파임을 천명하고 올바른 족보를 편찬하여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2016년 6월 11일
경주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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