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33) 성종 4
*거란과의 전쟁 -2
성종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난상토론을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수도로 돌아가시고, 대신 한명으로 하여금 군대를 인솔하고 가서 투항을 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 서경 이북의 땅만을 적에게 넘겨주고 황주로부터 철령에 이르는 경계선으로 국경을 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일 것으로 사료 되옵나이다.” 신하들의 입에서 나오는 대책이라는 것이 대부분 이러하였습니다.
이에 성종은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서경 창고에 쌓아 두었던 쌀을 주민들에게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쌀이 많이 남자, 성종은 이 쌀들이 거란의 궁량미로 이용될 것을 우려하여 대동강에 버리라고 명하였습니다.
이에 서희가 참지 못하고 나서서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가히 지킬 수 있고 싸움에서 승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패는 병력이 강하고 약한데에만 달린 것이 아니고 적의 약점을 잘 알고 행동하면 승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귀한 쌀을 버리려 하십니까. 하물며 양식이란 백성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물건인데, 차라리 적에게 이용 될지언정 어찌 강물에 흘려 보내버린단 말입니까. 이는 하늘의 뜻에도 부합되지 않으리라 생각하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성종은 서희의 의견을 옳게 여기고 그만두게 하였습니다. 서희는 다시 한 번 아뢰었습니다.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고려의 안북부에 이르는 수 백리 어간은 모두 생여진이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광종 때에 이를 되찾고 성을 쌓았는데, 이제 거란의 의도는 이 두 개의 성을 탈취하려는 데 불과한 것이 분명하고,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겠다고 주장하나 실상인즉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들이 병력을 과시하는 것만으로 서경 이북을 떼어준다면 그들의 계책에 말려 들어가는 것이고 올바른 대책이 아닙니다.
그들이 만약에 산각산 이북을 모두 내놓으라고 강요한다면 그 땅 또한 모두 고구려의 영토인데 모두 내 주겠나이까. 하물며 국토를 떼어 적에게 바친다는 것은 만세에 치욕입니다. 성상께서는 수도로 돌아가시고 저희로 하여금 적과 한번 판가리 싸움을 하게 하신 후에 다시 논의 하여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 되옵니다.” 이번에도 성종은 서희의 주장을 옳게 여기고 서희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한편 화의를 신청하러 왔던 이몽전이 돌아간 뒤에도 한동안 고려 진중에서 아무런 답변이 없자 소손녕은 안융진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상을 뒤엎고 소손영의 군대는 고려군에 패하여 퇴각을 하게 됩니다. 고려를 얕보는 마음이 없지 않았던 소손영은 아차 싶어 다시 공격을 하지는 못하고 진중에 머문 채 사람을 보내 항복을 독촉하기만 합니다. 이에 성종은 화통사(和通使, 강화를 체결하는 사신)를 합문사(閤門使, 정6품으로 담당실무책임자 정도의 계급) 장영을 보냈으나 거란 진영에서는 지위가 높은 대신을 보내오라고 요구하면서 장영을 쫓아버립니다.
장영이 힘없이 돌아오자 성종은 여러 대신을 모아놓고 누가 거란 진영에 가서 화친을 성사시키고 오겠냐고 물었으나 아무도 자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서희가 나서 “제가 비록 불민하나 감히 전하의 왕명을 받들겠나이다.”하고 자원하자 성종은 크게 기뻐하며 강가에까지 배웅을 나와 그를 위로하며 전송하였습니다. 자칫하면 협상이 파탄이 나면, 소손영의 칼에 목이 떨어져 나갈 수도 있는 불리한 상황에서 의젓하게 나서는 서희에게 성종은 무한한 애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서희는 통역관만을 데리고 뚜벅뚜벅 적진으로 향합니다. 그의 운명 그리고 고려의 운명은 어찌 될까요....
고려왕조실록(34)성종 5
*서희,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다.
국서를 가지고 거란의 영문에 도착한 서희는 먼저 통역에게 회견하는 절차를 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소손영은 거만하게 “내가 대국의 지체 높은 귀인의 신분이지만 모처럼 온 손님이니 내 친히 뜰 마당까지는 나가는 호의를 보이겠으나 고려의 화통사는 나에게 큰절을 올려야 하느니라.”
서희는 기가 막혔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당하에서 절을 하는 것은 예법에 있는 일이나 양국의 대신들이 대면하는 자리에서 어찌 그리 부당한 요구를 하는가.” 하고 답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소손영은 재차 삼차 절을 하라고 고집을 하지만 서희는 꿈쩍도 하지 않고 숙소로 들어가 버립니다. 내심 서희의 인품이 비범함을 알아본 소손영은 결국 당상에서 대등하게 대면하는 예식절차로 갈음하자며 한발 물러서게 됩니다. 그제야 서희는 소손영과의 담판을 시작합니다.
“당신의 나라는 옛 신라 땅에서 건국하였고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에게 소속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당신들이 침범을 하였는가? 또 우리나라와 국경이 연접하여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는 까닭은 무엇인가?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회복한다면 무사하리라.” 소손영의 목소리는 엄중하였습니다.
그러나 서희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그의 말을 맞받아쳤습니다.
“그러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후계자이다. 그러므로 나라이름도 고려라 정하고 서경을 국도로 정하였다. 그리고 경계를 가지고 말하자면 귀국의 동경이 우리 국토 안에 들어와야 하는데 당신이 어찌 침범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겠는가. 또 압록강 안팎이 역시 우리 땅인데 이제 여진이 그 중간을 점하고 있으면서 간악한 태도로 교통을 차단하고 있는 마당이라 귀국과의 왕래는 바다를 건너기보다도 어려운 형편이다.
이는 여진의 탓이지 우리의 뜻이 아니다. 만약 여진을 구축하고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여 길을 통하게 된다면 어찌 국교를 통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약 나의 의견을 귀국의 임금에게 전달하기만 하면 어찌 접수하지 않으실 리가 있겠는가.”
서희가 이처럼 논리 정연하고 당당하게 논박하자 소손영은 강요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자기나라 임금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고려의 의견을 받아들일까요? 아니면 일전을 하여 고려를 굴복시켜 버릴까요?”
거란 임금의 회답은 “고려의 요구를 들어주고 정전하라” 였습니다. 결국 땅을 빼앗으려고 전쟁을 일으켰다가 더 많은 땅을 붙여주게 된 셈이었습니다. 거란이 이렇게 해서라도 고려와 국경을 트고자 한 것은 송나라와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송나라와 고려가 굳건히 결속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거란은 늘 쫓기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거란과 고려가 국교를 맺었으니 고려와 송의 사이가 소원해 지는 것은 뻔한 이치이고, 그리되면 거란은 한결 편안하게 송나라와 전쟁을 치를 수 있기 때문에 반대로 영토를 주면서까지 고려와의 관계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윈윈작전이었지요. 이리하여 고려는 서희의 뛰어난 협상력으로 별다른 희생없이 강동의 6주를 공짜로 얻게 됩니다.
이후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고 송나라와의 관계 또한 은밀하게나마 이어갔습니다. 이처럼 실리 외교를 통하여 나라를 안정시키고 개혁정치를 펼처 나가던 성종은 997년 10월 16년간의 재위를 마치고, 자신의 조카이자 형 경종의 아들인 개룡군 왕손에게 왕위를 돌려주고서 향수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게 됩니다. 4명의 왕후와 1명의 부인이 있었으나 자손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혹시나 자신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왕위가 바뀌었을 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