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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과 지식 중간계급의 동맹은 가능할까?
능력주의를 누그러뜨리고 넘어설 대안들을 어설프게나마 짚어 봤지만, 사실 이 가운데에 실행하기 쉬운 대안은 하나도 없다. 어려움의 크기는 상상 이상이다. 능력주의의 극복 자체가 현대사회에서 과연 가능한 일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아무래도 능력주의는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불거진 일종의 과잉이나 일탈만은 아닌 성싶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발전된 자본주의가 수반하는 기본 경향인 것만 같다. 요즘 많이 쓰는 표현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의 ‘기본값’이라고나 할까.
제2차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역사가 능력주의적 상황을 낳고 이를 강화해 온 과정이었음은 이미 살펴봤다. 하지만 능력주의의 미래를 전망하려면, 이 과정을 몇몇 이론가의 논의를 빌려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가령 『자본론』의 초고로 쓰인 글 가운데 하나인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마르크스가 전개한 논의가 있다. 이를 읽는 현대의 돆자들은 이 19세기 사상가가 마치 점쟁이처럼 먼 미래의 자동화 추세를 예언한다고 놀라워하곤 한다. 마르크스가 일단 자동화 추세에 관해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 말부터 자기 시대까지 산업혁명을 이끈 역사의 논리를 날카롭게 집어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산업혁명부터 모든 산업혁명의 핵심은 기계, 더 발전된 기계의 도입이었고(기계를 움직일 동력, 즉 에너지 문제도 그만큼 중요하지만, 우리 논의에서는 생략하겠다), 기계의 요체란 “노동자를 대신해서 숙련과 힘을 가지는” 데 있었다. 산업혁명이 거듭될수록 기계사용은 고도화되고 이에 따라 이제껏 생산 과정에서 노동자가 체화하던 “지식과 숙련”이 노동자가 아니라 “고정 자본”(기계)에 “축적”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노동자의 직접적인 숙련성”에 의존하던 생산이 “과학의 기술적 응용”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점점 더 정교하고 복잡한 인간 능력이 기계로 이전되어 갔다. 만약 이 과정이 극한에까지 이른다면, 마침내 인간의 지적 능력까지 기계 장치로 이전되고 말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궁극 상태를 가리키는 듯한 언급을 암호처럼 남겨 놓았다. “일반적인 사회적 지식이” “직접적인 생산력으로 되었고” “일반적 지성general intellect의 통제 아래 놓였다”는 문구가 그것이다.
많은 이들이 마르크스가 유독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남긴 이 ‘일반 지성’이란 말에서 제3차 산업혁명(정보화) 이후에 도래한 디지털 네트워크를 연상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인공지능을 통해 모든 것이 자동화되는 단계가 닥칠 것이라고 전망한다. 마르크스의 논리를 그대로 좇는다면, 이는 곧 인간의 모든 능력이 남김없이 기계 장치로 옮겨진 단계를 뜻한다.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에 인간의 본성이 인간 바깥의 사물에 투영돼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기에 이르는 상태를 ‘소외’라며 비판한 바 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예감한 인류 발전의 종착점은 총체적이고 극단적인 소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사상 안에서는 이것이 결코 디스토피아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마르크스 사상의 기본 구도는 청년기나 말년이나 일관되게 해방을 향한 일대 반전反轉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외의 절정에서 노년 마르크스가 뽑아 낸 반전의 단서는 자유 시간의 전면적 확대 가능성이었다. 자본 축적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따라 어느 시점에 이르면 기계가 생산하고 인간은 다만 이를 감독하게 된다. 이 상태에서 오로지 이윤을 획득하기만을 바라는 자본 소유자의 지배라는 낡은 요소만 제거한다면, 모든 인간에게 돌아올 것은 짧은 감독 노동시간과 긴 자유시간이라는 축복이다. 인간의 완전한 소외일 수도 있는 상황이 오히려 보편적 자유의 토대로 반전되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평생을 바친 연구의 마지막 결론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며, 오늘날도 그 연장선에서 “완전히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를 향해 나아가자는 이들이 있다.
능력주의에 관한 논의의 결말로 향해 가는 대목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꺼내는 것이 느닷없다 싶을지 모른다. 사실 현재 인류가 도달한 상황에 마르크스의 전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논의가 더 필요하다. 아무래도 ‘완전’ 자동화가 똑 바람직하냐를 따지기 전에 아직은 과학소설의 영역인 것 같다. 노동조합이 노동자 숙련 형성에 적극 개입하자는 앞의 논의도 실은 인간 사회가 머지않은 미래에 그 정도로 자동화할 수는 없다는 판단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의 주장을 굳이 소개한 것은 그의 놀라운 예견에 우리의 관심사이기도 한 결정적 요소 한 가지가 빠져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이 요소를 더한다면, 마르크스의 전망에서는 낙관주의의 비중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반면에 해방을 향한 반전은 더 어려워진다. 그 요소란 바로 “과학의 기술적 응용”을 담당하는 독자적 사회 집단이다. 마르크스의 논의에는 두 개의 주요 집단만이 출연한다.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 기계를 도입하고 그 사용을 더욱 고도화함으로써 의도하지 않게 자유 시간 확대의 가능성을 여는 배역은 오롯이 자본에 할당된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자본가계급에게는 이 역할을 맡길 제3의 집단이 필요했고, 실제로 이들을 대량으로 창출했다. 다름 아니라 이제껏 우리가 ‘지식 중간계급’이라 부른 집단이다. 마르크스는 산업혁명이 거듭되면서 이 제3항의 위상과 역할이 지금만큼 커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전개된 그의 미래 전망은 너무 단순화되어 버렸다.
그러나 지식 중간계급은 그렇게 간과해도 좋은 요소가 결코 아니었다. 산업혁명이 진전될수록 고정자본이 거대하게 축적됐을 뿐만 아니라 그 관리를 담당하는 집단이 급성장했다. 그들은 단순히 좁은 의미의 기계를 관리하는 엔지니어나 과학자들만이 아니었다. 20세기 미국 사상가 루이스 멈포드는 공장에서 증기력이나 전기력으로 움직이는 기계는 실은 더 큰 기계, 거대기계megamachine의 일부일 뿐이라 간파했다. 기계를 사용한 대량생산이 이를 소화할 만한 대량소비와 만나려면 공장 바깥의 사회조차 마치 기계처럼 작동해야만 하며, 그리하여 사회 전체가 무시무시한 생산성을 재료로 무시무시한 권력을 만들어 내는 거대한 기계가 되고 만다. 즉, 기계 사용의 고도화는 항상 거대기계의 등장과 성장을 수반한다. 지식 중간계급은 이런 거대기계의 핵심 기능들, 멈포드가 5개의 P로 정리한 기능들(정치politics, 권력power, 생산성productivity, 이윤profit, 선전publicity)을 담당하는 요원들이다. 거대기계의 진화와 함께 그들은 더욱 중요한 존재가 될 뿐만 아니라 숫자 또한 늘어난다. 이로써 대중은 거대하게 양분된다. 마르크스가 전망한 전반적 소외는 현실에서 이러한 대중의 분열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한쪽에서는 마르크스의 분석 속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기능과 능력을 기계에 빼앗기는 이들이 늘어나지만, 다른 쪽에서는 거대기계의 작동에 필요한 지적 능력을 갖추고 거대기계의 곳곳에 배치돼 상대적 특권을 누리는(혹은 누리고자 하는) 이들 또한 늘어난다. 대중 내부의 이런 구조적 분열 탓에 전반적 소외를 보편적 자유의 실현으로 반전시킬 가능성은 제약되고, 그 기회는 끊임없이 유예된다. 지식 중간계급을 노동계급과 만나게 하려는 힘은 슬프게도 너무나 빈번히, 지식 중간계급을 자본가계급에 더 단단히 결박시키려는 힘에 압도되곤 한다.
지식 중간계급을 자본가계급에 단단히 결박시키는 힘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힘 한 가지는 이미 분명해졌다. 비록 논란 많은 작명이기는 하지만, 마이클 영은 그 힘에 이름을 지어주었다. ‘능력주의.’ 이것은 지식 중간계급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인구 또한 늘어나는 사회에서 이 계급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에 퍼지기 쉬운 정서이자 상식, 인간관이자 세계관이다. 즉,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의 상수다. 이탈리아의 자율주의 사상가·운동가 프랑크 ‘비포’ 베라르디는 인지 노동이 중요해지면서 경제 권력이 이들의 사회적 연대를 파괴하기 위해, 이들 노동자들이 ‘우수함’, 혹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복종하게 만들려 했다고 진단했다. 불행히도 이 시도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실패를 맛본 적이 없다.(190-196)
능력주의 극복의 최전선, 한국 사회
그럼에도 ‘비포’ 베라르디는 능력주의의 온상 격인 그 집단, 즉 지식 중간계급 내부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찾는다. 지식 중간계급 안에서 거대기계의 부속품 신세에 회의하고 자유와 연대를 추구하는 이들이 생겨날 것이고, 그때에만 현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 질서가 등장할 수 있다고 한다. 앞으로 과제는 ‘공통의 의식을 구축하고 신경 노동자들[코그니타리아트] 사이에 가능한 사회적 연대 의식을 확산시키는 것“이며 ”수백만 명의 기술자·예술가·과학자들의 윤리적 각성은 우리가 그 윤곽을 이미 어렴풋이나마 보고 있는 놀라운 퇴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러한 기대와 전망이 실현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또한 어떤 경로가 됐든 앞으로 지식 중간계급의 상당 부분이 적극 동참하지 않는 사회 변혁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미 관리자본주의 국면에 진입하고 그 구조가 깊이 뿌리내린 사회에서는 지식 중간계급의 중요한 부분이 함께 하지 않고는 어떤 변화도 성사시킬 수 없으며, 단 며칠도 사회를 지탱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기후 급변에 맞서 탄소 배출 제로 사회로 전환하려면, 마치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그랬던 것처럼, 국가가 전면에 나서서 시장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이런 기능은 어느 날 갑자기 법령을 마련하고 예산을 배정한다고 하여 실행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장 그것을 맡아 할 능력을 갖춘 요원들이 필요한데, 그들은 십중팔구 현재 지식 중간계급에 속한 이들일 것이다. 따라서 지식 중간계급이 중요한 역할을 전혀 하지 않고 오직 거대기계의 외곽에 있는 이들의 힘으로만 이뤄지는 미래 혁명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현대사회가 바뀌려면, 어떻게든 지식 중간계급 안에서 이의 제기와 반항, 변신의 조짐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지식 중간계급 내부의 각성과 변화는 과연 어떻게 시작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지금껏 논의한 내용이 이 물음에 답하는 데 일정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다룬, 능력주의를 이완하고 해체하는 방안들은 지식 중간계급 ‘안’에서 시작되기보다는 그 ‘바깥’에서 시작돼 지식 중간계급의 변화를 자극하는 전략들이다. 물론 지식 중간계급 가운데 정보통신 산업 같은 현대 자본주의의 주요 영역에 종사하며 독점에 맞서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 자본주의 경기 부침 속에서 사회를 경쟁 사다리로 보길 거부하고 나선 젊은 세대, 남성에 비해 여전히 열악한 구조적 불평등을 더는 묵묵히 찾지 못하는 여성 등등이 송곳처럼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며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지식 중간계급의 문화적 자장 바깥에서 전혀 다른 문화를 추구하는 흐름들이 대두할 때 훨씬 더 강력하고 활기 넘치게 전개될 것이며, 이 두 물길이 만날 경우에 기존 질서는 돌이킬 수 없는 충격에 빠질 것이다. 지능의 독재가 당연시되는 영역 바깥에서 다원적 능력 사회를 지향하거나 더 근본적인 자유를 지향하는 조직들이 발전하여 지식 중간계급 내부의 반성과 조우하고 이를 환대하며 마침내는 서로 합류해야 한다. 즉,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지식 중간계급의 하위 계층과 노동계급이 만나는 광범한 점이지대에서 벌어지는 활발한 소통과 교류, 상호 영향과 종합이다. 이를 통해 노동계급과 지식 중간계급의 굳건한 동맹이 구축되어야 한다. 그때에만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궐위기interregnum를 끝내고 인류사의 새로운 지평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자주: 궐위기-이제껏 전 세계의 유일 진리 노릇을 했던 신자유주의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나 이를 넘어설 대안은 좀처럼 강력하게 등장하지 않는 과도기, 즉 현시대를 일컫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 ‘공정’ 논란으로 드러난 한국 사회 상황이 지구자본주의의 가장 첨예한 문제와 직결됨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지식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상호 작용은 지식 중간계급 쪽의 능력주의 추종과 노동계급 쪽의 무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지식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동맹이 능력주의를 넘어선 사회를 열기는커녕 둘의 긴장과 충돌, 크나큰 세력 격차가 능력주의의 지배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지식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관계에 관한 한, 한국 사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실험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 지식 중간계급과 노동계급의 동맹을 통한 사회 전환을 모색하기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이런 일이 마침내 성사된다면, 인간 사회 어느 곳이든 능력주의와 같은 현재의 질곡을 넘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난제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이 책의 시론적 분석은 논의의 출발점을 잡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능력주의 현상을 둘러싼 계급 간 역학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들이대며 합리적 대안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하거나 “자본주의에 시달리는 모든 이들이여, 일어나라!”라고 선동하는 것만으로는 한국 사회를 바꾸지 못하는 이유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는 우선 노동계급 일부의 경제적-조합적 실천과 지식 중간계급 전반의 능력주의 추종이 서로 얽혀 있는 복잡한 실타래부터 풀어 나가야(아니면, 끊어 내야) 한다. ‘공정’ 논란에서 시작된 우리의 모든 탐색과 논의에 의미가 있다면, 바로 이 진실을 확인한 데 있을 것이다.(196-200)
〔출처〕 능력주의, 가장 한국적인 계급 지도
유령들의 패자부활전
장석준·김민섭 지음, 갈라파고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