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존립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이 책에서 나는 5,000년이라는 인류의 긴 역사를 바탕으로 중대한 질문들을 많이 던졌다. 그 질문들에 비춰보면, 나에겐 신용과 금융에 관한 경제학 문헌 중 많은 것들이 변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는 신용시스템을 의심했다. 그러나 신용시스템에 관심을 쏟던 경제학자들은 19세기 중반에 이미 금융시스템을 깊이 들여다보면 겉보기와는 달리 아주 민주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애를 쓰는 인상을 주었다. 당시 가장 빈번하게 제기된 주장 하나가 바로 금융시스템이 “게으른 부자”로부터 “부지런한 빈자”에게로 자원을 이동시키는 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상상력이 부족하여 자신의 돈을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원을 끌어내 부를 창출할 에너지와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바로 금융시스템이라는 주장이었다. 이것이 은행의 존재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그것은 느슨한 통화정책과 채무자들을 위한 보호조치 등을 요구한 포퓰리스트들의 입장도 강화해주었다. 어려운 시기에 부지런한 빈자들인 농민과 장인과 소상인들이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것이 또 다른 단계의 주장을 낳았다. 고대 세계에선 부자들이 가장 중요한 채권자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었다는 식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루드비히 폰 미제스는 케인스가 불로소득생활자의 안락사를 주장하던 즈음인 1930년대에 이렇게 썼다.
“여론은 언제나 채권자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견을 갖고 있다. 채권자들을 게으른 부자와, 채무자들을 부지런한 빈자와 동일시한다. 또한 채권자를 무모한 착취자로 혐오하고 채무자를 억압의 순진한 희생자로 동정한다. 여론은 채권자들의 권리를 축소하려는 정부의 조치를, 극소수 고리대금업자들을 희생시켜 다수의 채권자들을 이롭게 하려는 행위로 받아들인다. 여론은 19세기 자본가의 혁신들이 채권자와 채무자 계층의 구성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솔론의 고대 그리스와 토지법이 있었던 고대 로마, 그리고 중세에는 채권자들 대부분이 부자였고 채무자는 빈자였다. 그러나 채권과 회사채, 모기지은행, 저축은행, 보험회사, 사회보장제도 등이 갖춰진 시대엔 정당한 소득을 누리는 대중이 채권자들이다.”
그런 반면 레버리지 회사들(금융기관에서 빌린 돈으로 매입한 회사들)을 가진 부자들은 지금 중요한 채무자들이다. 이것이 “금융민주화”라는 주장의 골자인데 새로울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이자로 살아가는 계층을 제거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올 때면 언제나 그런 조치가 과부들과 연금생활자들의 삶을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이 늘 있기 마련이다.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엔 금융시스템의 옹호자들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이 두 가지 주장을 다 동원한다는 점이다. 한쪽에 보면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같은 “권위자”들이 있다. 오늘날엔 “모든 사람들”이 엑슨모빌이나 멕시코를 소유하고 있다고 떠벌리길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쪽에 보면 2009년에 『금융의 지배』(Ascent of Money)를 발표한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이 있다. 퍼거슨은 지금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내용을 자신의 주요 발견 중 하나로 내세운다.
“빈곤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탐욕스런 금융가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금융기관이 부족해서 생긴 결과이다. 은행이 있어서가 아니라 은행이 없어서 생긴다는 뜻이다. 차용자들이 효율적인 신용네트워크에 접근할 수 있을 때만 상어 같은 대부업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또 예금자들이 믿을 만한 은행에 돈을 예금할 수 있을 때만 그 돈이 게으른 부자로부터 부지런한 빈자로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주류 경제학 서적들에서 오가는 대화가 이런 내용이다. 이 책에서 나의 목표는 그런 대화를 직접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런 대화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엉터리 질문들을 던지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앞의 인용을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퍼거슨이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인가? 빈곤이 신용의 부족으로 야기되었다는 것이다. 부지런한 빈자들이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는 때는 상어 같은 대부업자가 아닌 안전한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을 수 있을 때뿐이다. 그렇다면 퍼거슨은 사실 “빈곤”엔 관심이 없다. 오직 일부 사람들, 말하자면 부지런하기 때문에 가난해서는 안 되는 일부 사람들의 빈곤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부지런하지 않은 빈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아마도(기독교의 많은 종파에 따르면, 정말로) 그런 사람들은 지옥으로 떨어질 수 있다. 아니면 그들이 탄 배들이 높은 풍랑에 기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운일 뿐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아남을 자격이 없다. 부지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진정으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볼 때, 부채의 도덕이 안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그런 것이다. 금융의 지상명령들이 끊임없이 우리 모두를 약탈자와 다름없는 존재로 전락시키려 들고 있다. 버텨봐도 별 소용이 없다. 금융은 돈으로 바꿔놓을 만한 것을 끊임없이 찾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들에게 인생에서 돈 외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얻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약탈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는 사람들뿐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금융이 거의 모든 차원에서 도덕을 왜곡시키고 있다.(“학자금 융자를 모두 탕감하자고? 그건 몇 년 동안 학자금 융자를 상환하느라 고생한 사람들에겐 불공평한 조치야!” 그래도 나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이 점을 알게 하고 싶다. 몇 년 동안 학자금 융자를 갚으려고 노력한 끝에 마침내 다 상환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주장은 강도를 당한 피해자에겐 이웃을 털지 않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어 보인다.)
만일 일은 당연히 미덕이라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아마 그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일이 당연히 미덕인 이유는 하나의 종(種)으로서 인간의 성공을 결정하는 종국적인 척도가 지구촌 전체의 재화와 서비스의 산출을 연 5% 이상 증가시키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노선을 계속 밟을 경우 모든 것이 파괴될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지난 5세기 동안 점점 더 많은 세계 인구를 도덕적으로 스페인 정복자나 다름없도록 만든 거대한 부채 기계가 곧 사회적 및 생태적 한계를 벗어날 것이다. 스스로를 파괴하려 드는 자본주의의 뿌리 깊은 속성 때문에 지난 반세기 동안 이 세상은 몇 가지 파괴의 시나리오 쪽으로 착실히 다가가고 있다. 이런 치명적인 성향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지금 이 순간 진정으로 던져야 할 물음은 사람들이 더 적게 일하면서 더 알차게 살 수 있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도록 어떻게 방향을 돌려놓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들을 옹호하는 말로 이 책을 끝내고 싶다. 적어도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는 않는다. 그들이 일을 하지 않는 그 시간을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보내며 인생을 즐기는 한, 그들은 아마 세상을 우리가 인정하는 그 이상으로 개선시키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지금과 같은 자기 파괴적인 성향이 없는 새로운 경제 질서를 구현하는 선구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희년정신을 기대하며
이 책에서 나는 구체적인 제안을 제시하는 것을 피해왔다. 그렇지만 책을 끝내면서 딱 한 가지만 제안하고 싶다. 내가 볼 때 성경 속의 희년(禧年)정신 같은 것이 오래 전에 필요했던 것 같다. 세계부채와 소비자 부채 둘 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하다. 희년정신이 유익할 것이다. 인간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차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돈이란 것이 신성한 것이 아니고, 부채를 상환하는 것이 도덕의 핵심이 아니며, 이 모든 것들은 인간들의 협상에 따른 것일 뿐이며, 또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가 사태를 다른 방식으로 풀기로 합의하는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는 뜻에서도 그렇다. 함무라비 이래로 위대한 제국들이 이런 종류의 정치에 저항했다는 사실이 많은 가르침을 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테네와 로마가 그런 패러다임을 확립했다. 부채위기에 계속 직면하면서 아테네와 로마는 위기를 누그러뜨릴 법을 만들고, 충격을 완화하고, 부채노예 같은 명백한 학대를 제거하고, 제국의 전리품으로 가난한 시민들(어쨌든 이들 중에서 병사들이 나왔다)에게 온갖 혜택을 주었다. 그러나 그 모든 조치들은 부채의 원칙 자체를 해치지 않는 쪽으로 이뤄졌다. 미국의 통치계층도 이와 놀랄 정도로 비슷한 접근법을 취한 것 같다. 악랄하기 짝이 없는 학대(예를 들면, 채무자의 감옥)를 없애고, 제국의 과실을 이용하여 보조금 같은 것을 지급하고 최근 몇 년 동안엔 환율을 조작해 미국에 값싼 중국제품이 쏟아져 들어오도록 한 것이 그렇다. 그러면서 부채는 꼭 상환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점에선 이 원칙이 극악한 거짓말로 드러났다. 지금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부채라고 해서 모두가 다 갚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사람들만이 그렇게 해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모든 사람들의 서판을 깨끗이 닦아주고, 지금까지 익숙했던 도덕과 결별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어쨌든 부채란 무엇인가? 부채는 약속의 타락일 뿐이다. 그것은 수학과 폭력에 의해 타락한 약속이다. 만일 진정한 자유가 친구를 사귀는 능력이라면, 그것은 또한 진정한 약속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남녀들이 서로에게 할 수 있는 약속은 어떤 것일까? 이 시점에선 아직 말할 수 없다. 지금으로선 어떻게 하면 그런 약속이 가능한 곳까지 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그 여행의 첫걸음은, 누구도 우리의 진정한 가치를 평가할 권리를 갖지 않은 것과 똑같이, 그 누구도 우리가 진정으로 빚진 것이 무엇이라고 말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되어야 한다.(679~685)
[출처] 부채: 그 첫 5,000년
Debt: The First 5,000 Years(2011)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2011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2021년 재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