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istotle was among the first to recognize that there are at least two ways to pursue happiness. He called one “eudaimonic”-in harmony with one’s good (eu) inner spirit (daemon)-and the other “hedonic”-aimed at positive, in-the-moment, inherently self-centered experiences. Aristotle clearly took a side on the issue, deeming the hedonic life primitive and vulgar, and upholding the eudaimonic life as noble and pure. But, in fact, both of these two approaches to happiness have very deep evolutionary roots. On one hand, human beings seek pleasure because, by and large, the things that bring us pleasure are those that increase our chances of survival. If our ancestors hadn’t craved food and sex, for example, they wouldn’t have lived very long or had many offspring. To some extent, all of us are, as Freud put it, driven by the “pleasure principle.”On the other hand, human beings have evolved to seek meaning and purpose. In the most profound way, we’re social creatures.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추구하는데 적어도 두 가지 길이 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인식한 학자다. 그는 선한 내면의 정신과 조화를 꾀하는 ‘에우다이모니아’가 행복에 이르는 한 가지 길이며, 긍정적이고 순간적이며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 경험인 ‘헤도닉’이 다른 하나의 길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헤도닉을 추구하는 삶은 원시적이고 천박하며 에우다이모니아를 추구하는 삶이 고귀하고 순수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어떤 삶을 지지하는지 분명하게 밝혓다. 하지만 행복에 이르는 두 가지 길 모두가 실은 진화와 뿌리 깊은 관계가 있다. 인간이 한편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데는 쾌락을 안겨주는 것들이 대체로 우리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조상들에게 음식과 성에 대한 욕망이 없었다며 오래 살지도, 많은 자손을 남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프로이드의 주장처럼 쾌락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그런 한편으로 인간은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도록 진화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사회적인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