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휘자(諱字)에 대하여 副會長,史蹟會長, 編輯委員 醫學博士 秉 錫 재령이씨는 소판공(蘇判公, 諱 居明)의 6세손 휘 우칭(禹偁)께서 고려 초중기에 문하시중을 역임한 후 보조공신으로 재령군(載寧君)에 봉(封)해짐으로서 경주이씨에서 분관(分貫)하였는데 근래에 분관시조의 휘자(諱字)를 한글로 표기함에 있어서 오류(誤謬)가 발견되어 문헌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우리의 족보는 1636년(丙子譜-家藏舊譜)에 처음으로 만든 필사본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확인이 불가능하고, 1600년대 후반에 간행된 趙從耘의 <氏族源流>와 1716년의 丙申舊譜에 諱 우칭(禹偁)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범례(凡例)에 「일설에 우(偊)」라 하였다. 그러나 1850년의 경술보(庚戌譜)에 휘자를 禹儞으로, 범례에선 禹偁으로 기록하였으며 1941년 辛巳譜 이후에 간행된 대부분의 파보는 분관시조의 휘를 우칭(禹偁)으로 기록하였다. 여기서 경술보에 기록된 儞字를 사전만 찾아 읽으니 있을 수 없는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偁자는 강희자전(康熙字典, 1716년)에『 [廣韻]稱本字 [說文]揚也날릴 [爾雅釋詁]擧也들』 으로 설명되어 있으나, 儞자는 康熙字典과 한국의 자전석요(字典釋要, 池錫永), 신자전(新字典, 1925년 조선광문회편)등에 없는 漢字인데 근간의 사해(辭海) 등에 너라는 뜻의 你(ni)와 같다고 하였고 일본의 漢和大辭典에도 你와 같은 이인칭의 지시대명사로 설명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칭(稱)의 속자(俗字)는 穪자인데 선조분들은 칭(偁)의 속자로 儞자를 사용해 왔음이 분명함으로 같은 칭(儞)으로 읽어야 할것이며 그 증거는 1800년대부터 일제시대에 선조들이 남긴 많은 문헌에서 발견된다. 특히 1910년 전후에 간행된 전고문헌(典故文獻) 전고대방(典故大方)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대동야승(大東野乘)등에 기록된 사람의 이름(諱字)중 偁字는 儞字로 인쇄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예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 북송시대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왕우칭(王禹偁, 945~1001)이 지은 대루원기(待漏院記)에 대한 왕조실록의 내용을 연려실기술과 동문선(東文選)에서는 왕우칭(王禹儞)으로 표기하였고 전고문헌의 중국인물고편에서도 왕우칭(王禹儞)이라 하였다. 대루원기는 王元之(王禹偁의 字)가 지은 것으로 고문진보(古文眞寶)에도 소개되어 있는데 1958년(德興書林刊)에 나온 책에도 왕우칭(王禹儞)으로 되어있다. ㉯ 성종실록에 명숙공주(明淑公主)의 숙부 장흥부사 홍칭(洪偁)을 연려실기술에는 「洪常叔父儞」로 인쇄되어 있으니 홍칭은 좌의정 洪應의 아우이다. ㉰ 전고대방 相臣錄에 南智의 둘째아들 남칭(南偁)을 「二子儞副正」으로 기록하였으나 후손이 남긴 藥泉集(南九萬)에는 「次副正偁」으로 되어있다. ㉱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기계인(杞溪人) 유대칭(兪大偁)을 대동야승 凝川日錄에는 兪大儞으로 인쇄하였을 뿐 아니라 승정원일기를 비롯하여 실록의 국역본과 그 사위(柳韡) 및 외손(閔周冕)들이 합격한 방목에도 마찬가지로 모두 유대이(兪大儞)로 오역되었기에 필자가 기계유씨대종회에 문의한 바 “公의 묘소가 부여의 함양에 있는데 휘 大偁 僉正公이라 하였다” 족보를 확인하지 못하던중 이분의 묘갈을 후손의 문집(兪拓基-知守齋集)에서 확인하였다. ㉲ 순암집(順菴集, 安鼎福) 21券 處士李公墓碣의 「諱禹偁載寧君」을 휘 우니(禹儞) 재령군으로 오역된 부분을 접하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 인조실록의 국역본에 「綾峯守偁」을 儞으로 표기하고 모두 한결같이 칭으로 읽지 않고 이자로 번역하는 오류가 발견되고 있다. 이분은 중종의 아들 永陽君岠의 증손으로 화가로 유명한 綾溪守 晩沙 李伋의 형이다. 왕우칭(王禹儞)만 칭(儞)자로 제대로 번역했을 뿐 그 외는 다른 사람으로 오역(誤譯)한 예가 대부분이다. 필자는 이런 있을수 없는 번역문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할수 있었으며 더군다나 한국고전번역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에도 발견되어 수정을 요구해 놓은 상태이다. 아니 왕우칭만 송나라 사람으로 알고 다른분들은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번역을 했다는 결론이며 우리 시조를 잘 모르는 분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誤譯이 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고대방 조선명신록 전고문헌에 우리의 시조는 諱 우칭(禹儞)으로 되어있다. 구한말부터 일제시대에 간행된 문집 중 俛宇集(郭鍾錫),性齋集(許傳), 晩求集(李種杞), 端磎集(金麟燮),鰲漢集(孫起陽), 安陵世稿(晉州), 東庵集(李鉉郁), 東文選集 등에서 偁자를 儞자로 기록한 예가 있다. 특히 구한말 영남의 유학계 종장이라 일컬는 면우(俛宇) 곽선생의 문집에 「載寧伯禹儞之後」또는「中世至禹偁封載寧君」으로 기록한 예로 보아도 칭자를 偁 또는 儞으로 표기했음을 알수가 있다. 또 밀양에서 간행된 性齋集의 栗澗李公行狀에 諱禹儞封載寧君으로 되어 있으니 아니 司宰令公配位墓碣과 定窩公(諱 聖欽) 四可公(諱 熙吉)의 묘갈을 찬한 晩醒 朴致馥(1824~1894)선생이 우리 시조의 휘자를 모를리 없으며 偁자를 儞자로 인쇄한 것이다. 성종실록(1487년)의 鄭昌孫 卒記에 「有子价偁佸婿金礩」로 기록된 아들 鄭偁은 동래정씨족보를 시대별로 확인하였더니 乙未譜(1655) 丙申譜(1716)에는 鄭偁으로 그후 己未譜(1919) 一統譜(1935)에는 鄭儞로 인쇄되어 있음을 알수가 있고 同名異人인 東窩鄭世美(1583~1624)의 넷째아들 鄭偁도 마찬가지로 일제시대의 족보와 1922년에 간행된 星湖(李瀷)선생문집에 정칭(鄭儞)으로 되어있는데 姪婿가 南九萬이다. 庚戌譜이전의 문헌을 찾아보면 鰲漢集(1825년)에 기록된 息城君의 墓誌에 門下侍中禹儞이라 하였고 江漢集(黃景源) 卷十七의 大司諫李公(李興宗)의 墓誌에 공의 어머니 南陽洪氏正郞禹儞之女로 기록된 것이 1790년으로서 대략 이 때부터 해방전까지 儞를 偁의 동자(同字)로 같이 사용해 왔음을 알수 있다. 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원본(原本) 이미지상 偁자는 대부분이 원문(原文)을 제공하면서 儞자로 기록해 두었으니 칭(儞)자로 번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先祖의 휘자(諱字)는 사람의 이름인 고유명사에 해당되므로 절대로 옥편이나 사전의 발음대로 할수 없는 것이 원칙임을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