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경험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아침 일찍 잠에서 깬 영우가 병휘오빠 출근길에 큰길까지 배웅하려고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그냥 누워 있으라는 병휘의 만류가 있었지만 다시 누워 있기도 그렇고 그냥 따라나기로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병휘오빠 출근길에 대문 밖까지 배웅을 해본 기억이 없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문을 나서는데 비가 안개처럼 내리고 있었다. 어제 저녁 하늘이 꾸물거리더니 밤새 가을비가 소리도 없이 내리고 있었나 보다.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잤었다. 영우가 얼른 집안으로 들어가서 우산을 챙겨 들고 나와서 병휘에게 건네 주려고 하자 이 정도 비는 괜찮다고 하며 무심하게 뛰어 나갔다. 영우가 몇 걸음 따라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비만 오지 않았어도 출근차타는 데까지 따라나설 참이었는데 날씨가 방해를 했다. 병휘가 고개를 돌려 영우를 한번 돌아보고는 큰길로 내달렸다. 영우는 병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마치 신랑을 배웅하는 새 신부 같다는 야릇한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우산을 쓴 채로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졌다. 다행히 병휘오빠가 차에 타고 이동 중이려니 생각하며 한참을 상념에 잠겼다. 괜스레
비를 맞고 싶어진 영우는 우산을 쓰고 큰길로 내려와서 동네 어귀까지 혼자 걸었다. 비 때문인지 지나는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내친김에 신작로를 지나서 냇가 옆 뚝길까지 걸었다. 우산을 쓰고 홀로 걷는 영우의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로맨틱했다.
말없이 흐르는 냇물과 마을을 병풍처럼 휘감은 산, 비를 맞으며 힘겹게 버티고
있는 코스모스가 어우러져 목가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영우는 한동안 느끼지 못하던 고향의 향수가 되살아나서 동네를 한 바퀴 더 돌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하늘하고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비가 그치고 해가 반짝하며 비추었다.
비도 그쳤고 집에서 할 만한 일을 찾다가 병휘오빠가 퇴근하면 씻을 수 있게 마당에 있는 작두펌프질을 해서 물을 퍼 올렸다. 그 물을 양동이에 담아서 부엌으로 날랐다. 펌프질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병휘오빠가 편하게 부엌에서 씻을 것을
상상하니 즐거운 마음에 혼자 미소 지었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강릉에 다녀올 일이 있다고 했다. 영우는 문득 병휘오빠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급하게 생각해 낸 것이 뜨개질
이다. 대문을 나서는 아주머니께 뜨개질실을 사달라고 부탁을 했다.
“색시가 뜨개질을 하게? 뜨개질도 할 줄 알아?”
“네 조금”
“아주머니는 미덥지 않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색으로 사올까”
“아주머니가 보시고 맘에 드는 걸로 사다주세요”
저녁 무렵 아주머니가 짐을 한보따리 들고 돌아오셨다. 그 속에는 영우가 부탁한 뜨개질실도 담겨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받아든 뜨개질실을 들고 자기 방으로 들어온 영우가 곧바로 뜨개질을 시작했다. 여고시절 가정시간에 배우기도 했었지만 타고난 손재주가 비범해 뜨개질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아직 겨울이 온
것은 아니지만 미리 털목도리부터 떠 보기로 마음먹고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개
만 떠서 병휘오빠에게 주려고 했는데, 실도 많이 남고 시간도 여유로워서 남은 실로 전부 목도리를 떴다. 부대 장병들이 목에 두르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목도리는 이틀 만에 다섯 개가 완성됐다.
처음에 영우가 뜨개질하는 모습에 신기한 듯 쳐다보면서도 ‘편히 쉬고 있지 뭘
그런 걸 하고 있냐’ 며 마뜩잖게 여기던 병휘가 가장 신나서 좋아한다. 다섯 개
중 네 개는 크기나 모양이 모두 똑같은데 한 개는 조금 더 크고 도톰하며 하트무늬를 넣어서 얼듯 보기에도 병휘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영우가 방에서 뜨개질을 하는 동안 아주머니는 거실에서 담배포장지로 종이접기를 하셨는데, 처음 이곳에 오던 날, 방 안에서 보았던 냄비받침이 아주머니 솜씨라는 것을 다음날 바로 알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바깥일이 있을 경우를 빼곤 집안에서는 밥하고 빨래하는 일 외에 거의 매일 담배포장지로 생활소품을 만들고
계셨다. 영우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보아온 아주머니의 종이접기 재주는 절대 신공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담배포장지를 곱게 펴서 켜켜이 쌓아놓고 한 장씩 접은 다음 서로 엮어서 모양을 만들어 내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부드럽고 빠르게 움직이는 손놀림은 거의 신기에 가까워 보였다.
아주머니의 손을 거쳐 탄생한 물건 중에는 냄비받침이 가장 많았는데, 그것 말고도 반짇고리 연필꽂이처럼 집안에서 필요한 여러 가지의 생활소품을 만들고 계셨다. 그렇게 만든 물건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만물차 아저씨한테 주고 대신
생선 같은 먹거리나 플라스틱 바가지 같은 생활용품으로 바꿨다. 아저씨는 이것을 다른 마을로 가서 필요로 하는 단골손님들한테 하나씩 나눠주기도 하고 많은 양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받고 팔기도 하는 모양이다.
뜨개질도 끝내고 다시 할 일이 없어졌다. 이곳의 생활은 지속적인 것이 없어보였다. 여기의 원래 주민들은 계절이 바뀌거나 예상치 못한 마을행사가 있을 때마다
계절에 적합한 일을 하거나 하루의 일과를 수시로 바꾸며 빠르게 적응한다. 그러나 횡계 생활 초보인 영우에게는 매일 할 일을 찾아서 하는 건 쉽지 않았다. 병휘는 영우가 가만히 집에만 있기를 바라지만 혼자 할 일없이 시간만 소비하는 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따분한지 병휘오빠는 모르는 것 같다. 그나마 하루의 가장
행복한 때는 병휘오빠가 퇴근해서 돌아오는 시간이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병휘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대문 밖 큰 길가에까지 나와서 병휘오빠를 기다리던 영우가 퇴근하고 돌아오는 병휘의 가슴에 매달려서 엉엉 울어버린 적도 있다. 지나던 마을사람들의 시선은 문제 되지 않았다.
이곳은 작은 시골 마을이다 보니 마을의 대소사를 마을주민 모두가 함께 공유했고 남의일도 자신의 일처럼 여기며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작은 일도 금방 소문이 나게 마련이었다.
영우가 이곳에 와서 기약 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던 순간에도 이미 마을에는 누구누구네 집에 군인 색시가 새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모르고 있던 영우에게 어느 날 영우보다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가
찾아왔다. 처음 보는 인상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았는데, 조금은 화장이 진하다는 느낌은 받았다. 키가 조금 큰 편이고 몸매가 서구적으로 늘씬하면서 볼륨감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한마디로 미녀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 같다.
“큰 길 건너 사는 정아라고 해요. 반가워요”
“아!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
대뜸 인사를 건네는 당돌함에 잠시 당황했지만 영우도 인사를 했다.
“별 이유는 없고 잘 지내보고 싶어서요. 며칠 전 길가에서 병휘 중사님 한테 매달려서 울고 있는 모습을 봤어요”
“어머 그때는,,,”
영우가 밀려오는 창피함을 애써 숨긴 채 말을 더듬었다.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저도 그랬었거든요. 저는 박창기 중사님 만나서 연애하다가 일 년 전에 결혼식을 올리고 이곳으로 와서 살고 있어요.”
정아 씨는 묻지도 않는 말을 술술 하면서 영우에게 이곳에 비슷한 환경의 여자
친구들이 몇 명 있다고 해주었다. 정아 씨는 이곳의 사정은 시시콜콜 다 말해 주면서 정작 본인은 박창기 중사님과 어디서 어떤 인연으로 만나서 연애를 하게 됐는지 물어봐도 대답을 흐리며 자세한 말을 아끼는 듯 보였다. 영우는 무슨 깊은
사연이 있나 보다 하고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영우자신은 집이 부천이고 병휘오빠 하고는 수원에서 처음 만나서 병휘오빠를 따라서 여행차 이곳에 오게 됐고 며칠 머물다 집에 돌아갈 생각이라는 얘기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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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요.
SNS카페에서 시도하는 연재소설!
그 자체만으로도 문학사에 남을 빛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섬세하고 사실적 표현과 물 흐르는 듯한 유려한 문장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