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협회 전라남도 지회에서 올해 미술사업으로 '수채로 만나는 남도 풍경' 프로젝터를 진행 중이다. 전국에 산재한 사생 작가들을 일부 초대하여 순천 주변의 멋진 장소를 소개하며 그곳에서 스케치한 작품들의 이미지를 모아 연말에 팸플릿을 제작하여 발표하는 프로그램이다. 많은 인원을 초대하여 한 번으로 끝내는 행사가 아니라 소규모 인원을 초대하여 1박 2일 일정으로 그림을 그리고 관광하며 스케치 여행을 즐기는 시간을 갖게 해주는 사업이다. 사업 기간은 올해 10월까지로 초대된 팀은 방문 일정을 잡고 전남지회로 연락하면 된다. 집행부에서는 가능한 한 편하고 자유롭게 사생을 하고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배려하고 있다.
지난 3월에 스케치를 와 달라는 초청을 받았지만, 코로나19로 집단활동을 자제하는 추세라 사태가 진정되면 가야겠다고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확진자 수가 줄고 완화된 방역 시책으로 순천 스케치 여행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여행은 혼자보다 마음이 맞는 사람과 함께하면 그 즐거움은 배가 된다고 한다. 부산 야외수채화회 회원 몇 분과 동행하기로 했다. 다들 코로나19로 몸과 마음에 누적된 스트레스가 팽팽하게 부풀어 터지기 직전인 상태라 쾌히 함께해주었다.
5월 14일 오전 9시 우리는 승용차 한 대로 부산에서 출발하여 11시 30분쯤 순천에 도착했다. 순천으로 가는 도중 차창 밖 풍경은 연두색이 익어 완전한 초록이 되었다. 오월의 자연은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들판은 가벼운 바람에도 살랑거리는 블라우스를 걸치고 환한 미소로 웃고 있다. 여행의 들뜬 기분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높고 맑은 하늘만큼 큰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순천에 도착하자 우리는 먼저 숙소부터 찾았다.
아트 앤 스테이 호스텔은 순천역 앞 로터리를 끼고 있는 5층 건물의 4층이었다. 전화하니 사장님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 사장님은 목에 명찰을 걸고 환한 미소로 우리 일행을 반겨 주었다. 사장님의 안내를 받아 숙소의 실내로 들어서니 다른 숙박 시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녹색 빛이 미세하게 스며있는 회색 파스텔 색조의 실내는 여느 숙박 시설과는 차별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객실의 복도 끝에 제법 넓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고 책장으로 장식된 벽면에는 책과 장식용 소품들이 거부감 없이 놓여 있다. 홀 중앙에는 8명 정도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이 가로와 세로로 2개나 놓여 있다. 또 다른 벽면에는 그림들이 작은 전시장 분위기를 풍기며 걸려있거나 벽에 기대어 놓았다. 한마디로 예술이 머무는 공간이 있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우리는 사장님이 내어준 차 한 잔을 마시며 여장을 풀고 다음 일정에 관한 안내를 받았다. 먼저 순천 일원의 스케치 장소에 관한 정보와 점심 식사를 위한 식당, 저녁 식사 예약 사항까지 안내받은 후 숙소를 나섰다. 그러니까 아트 앤 스테이는 이번 일정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실내 장식 분위기나 사장님과의 대화에서 느껴지는 예술적 취향을 보면서 왜 이곳이었는지 충분히 알게 되었다.
순천은 여러 번 스케치 여행을 왔던 곳이다. 그림을 그리는 특히 사생을 즐기는 화가라면 한두 번쯤 순천만 갈대밭이나 갯벌을 스케치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리고 순천시에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인 승보사찰로 알려진 송광사가 있고 승선교와 강선루가 매력적인 고찰 선암사가 있다. 또한, 낙안읍성과 순천 드라마 촬영장도 있다. 순천만의 갈대밭과 순천만 국가정원은 순천시를 생태 도시 혹은 정원 도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하고 있다. 우리는 점심을 마치고 화포해변 방향으로 갔다. 야외 스케치를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첫째는 스케치 장소의 선택이다. 그 장소가 아무리 좋은 구도가 있는 곳이라 해도 땡볕에서는 곤란하다. 그림을 그릴 때 하얀 종이나 캔버스에 반사되는 햇빛은 시력을 해치기 때문이다. 인상파 화가 모네도 말년에 시력을 잃게 된 큰 원인은 잦은 야외 스케치에서 햇빛의 자외선에 눈이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무거운 화구를 들고 다녀야 하므로 가능한 차량과 가까운 곳이어야 한다. 수채화의 경우 물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이 좋다.
화포해변은 순천시 별량면 학산리 앞바다에 있는 해변을 말한다. 순천만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여수시 남쪽으로는 고흥군 서쪽으로 보성군의 바다와 접한 곳이다. 우리는 해안과 근접한 도로를 따라 이동했다. 천천히 창밖 경치를 즐기며 가다가 어느 작은 마을 마을회관 옆 도롯가에 화구를 펴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산 그늘이 드리워진 곳으로 순천만의 갯벌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득하게 보이는 건너편 마을이 와온 해변이다. 맑은 햇살에 초록은 묵은 갈대의 황색과 섞여 환상적인 빛깔을 품고 있다. 갯벌로 내려가 보니 작은 뻘게와 짱뚱어들이 지천이다. 인기척이 나자 갯벌 속으로 재빨리 숨는다. 생태계가 건강하게 살아있는 순천만이다. 언젠가 순천만 수로를 오가는 탐사선을 탄 적이 있었다. 탐사선 주변으로 보이던 수천수만의 철새들의 모습은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그 새들의 울음소리 또한 잊지 못할 자연의 소리였다. 자연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할 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자연 친화적이며 서정적인 평화의 공간을 수채화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종이 위에 연필 스케치를 끝내고 넓은 붓으로 물을 칠한 후 옐로우 오크로 부분마다 색을 입혔다. 그리고 물이 마르기 전 세룰리안블루 cerulean blue로 하늘을 표현했다. 이때 갯벌도 함께 하늘을 그리는 방법으로 색을 칠해 준다. 나중에 갯벌을 묘사할 때 갯벌에 남은 물길의 밝은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먼 산과 가까운 산은 색상의 채도를 이용하여 원근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풍경화에서 원근은 화면 구성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게 한바탕 붓질을 끝내면 가능한 덧칠은 자제해야 그림이 맑아진다. 그림 그리기는 몰입의 순간이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시간 내내 새들의 울음소리가 붓을 내려놓으니 더 또렷하게 들렸다. 서쪽으로 해가 많이 기울고 있었다. 오후의 늦은 시간에는 사물의 윤곽이 정오 시간보다 또렷하게 보인다. 태양의 입사각이 낮을수록 그림자가 길어져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화구를 챙기고 화포해변을 거쳐 거차 뻘배 체험장이 있는 마을까지 사진을 찍으며 갔다. 멀리 보이는 섬들 사이로 밀물과 어둠 살이 함께 밀려오고 있었다.
저녁 식사 후 다시 숙소로 돌아왔을 때 숙소의 휴식 공간에는 사장님이 마련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잠시 후 전남 미협 사무국장님이 도착했다. 인사를 나누고 가볍게 술잔을 나누며 담소를 즐길 때 나안수 한국미술협회 전남지회 지회장님도 도착했다. 다시 한번 이번 행사의 취지와 순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가 그려 온 그림을 감상하는 시간도 가졌다. 나 회장은 내가 그린 그림을 보더니 금방 우명마을이라고 말해 주었다. 필자도 그곳이 우명마을인지 몰랐다. 우명마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 한쪽에서 그리움 같은 것이 불쑥 밀려왔다. 내가 그린 그림이 새삼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 듯 보였다. 우명마을 이름을 들었을 때 불현듯 곽재구 시인의 '우리가 별과 별 사이를 여행할 때'의 책머리 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달빛 환한 밤 우명마을에 간다.
마을 언덕 위에서는 만의 반대편 와온마을에서 떠오르는 달을 볼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환한 달이다.
달빛과 만나는 바다는 튀어 오르는 빛살들로 꽃밭이다. 참 장한 꽃밭이다."
"만 주위로 몇 개씩의 등불을 내다 건 마을들이 있다.
달빛 속 갯마을의 불빛들은 치차꽃 같기도 하고 홍화꽃 같기도 하다.
나는 시가 만 건너편 마을의 불빛만큼 따스하고 마을 주위에 머문 어둠만큼 푸르스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쇠리. 거차, 창산. 봉전, 선학, 궁항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주름살만큼 깊고 고요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술잔의 술보다 더 많은 대화가 쌓여가는 시간 내일의 일정을 위해 우리는 자리를 파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스케치 일정을 더 진행할 수 없음에 섭섭한 마음마저 비가 되어 내렸다. 아침 식사를 숙소에서 마련한 빵과 오븐에 구운 토마토랑 치즈와 채소 등으로 맛있게 먹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짧은 1박 2일 일정의 순천 스케치 여행은 우리가 가슴이 무거울 정도로 퍼 담았던 풍경과 곽재구 시인이 거명한 마을 이름들이 차창 유리에 부딪히는 비에 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