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1 주일설교
세 사람과 세 교회를 살린 사건
사도행전 9:1~2, 28~31
수년 전에 저는 목회 사역에 큰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면서 예배당을 건축했으나 부채를 감당할 수 없어서 그 예배당을 넘겨줄 교회를 찾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문제를 놓고 기도를 많이 했는데 하나님이 그 예배당을 맡아 줄 교회를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예배당을 다른 교회에 넘기고 한숨은 돌렸지만 이제 우리 교회의 앞길이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 제가 다시 공부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나자 지역교회를 넘어 한국교회를 위한 폭넓은 사역을 감당할 길이 열렸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도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고 분명히 선하게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때로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이러다가는 끝장나는 것 아닌가 하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런 위기는 교회적으로, 국가적으로도 닥칩니다. 지난 3년간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나라는 큰 어려움에 빠졌고 교회도 다시 일어서기 어려운 위기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지겨운 코로나 팬데믹도 결국 엔데믹으로 전환되었고 한국교회도 거의 회복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교회에 갑절의 부흥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는 물러갔지만 교회를 공격하는 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바로 성 혁명 세력의 집요한 공격입니다. 이는 코로나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인데도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목사와 신자들이 많아서 걱정입니다.
오늘날 성 혁명 세력은 조기 성애화로 우리의 다음 세대를 음란한 자녀들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을 수 없겠지만 중학생 교과서에서 학생들에게 성적 자기 결정권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적 자기 결정권이란 자기 성적(成績)를 자기가 결정하는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성관계하느냐, 안 하느냐를 결정할 권리가 학생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현행법에는 만 16세 이하의 청소년과 성관계를 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둘이 합의했더라도 무조건 처벌받습니다. 그런데 중학생들에게 그런 범죄를 하도록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말이 됩니까?
만일 내용을 바꾸어서 도둑질은 범죄인데 학생에게 도둑질하든지 안 하든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가르친다면 말이 됩니까? 마약을 하는 것도 범죄인데 학생에게 마약을 하든지 말든지 결정한 권리가 있다고 한다면 말이 됩니까?
성 혁명 세력의 공격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초등학생에게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도 성관계할 권리가 있으며 친구들이 그것을 지지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사악한 사상이 과목마다 다 들어가 있습니다.
이 외에도 초등학생들에게 온갖 종류의 성관계 방법과 12가지 피임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다음 세대가 모두 하나님을 떠나게 되고 이 땅에 교회를 하나도 남지 않을 것 같은 위기를 느낍니다. 이런 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잘 방어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교회를 위협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일제 침략도 있었고 북한의 침략도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알 수 없습니다. 심각한 문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고 한숨을 쉬며 큰일이라고 세상을 비관합니다. 하지만 저는 희망을 잃지 않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내가 목숨 걸고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과 성도들은 모두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불가능한 싸움을 싸웠고 결국 모두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싸워서 이겨낼 문제가 없다면 우리의 존재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존은 그 자체가 싸움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위해 싸우고, 정의를 위해 싸우고, 생명을 위해 싸워서 이길 때 우리의 존재에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저와 함께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이유는 우리가 해도 안 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이 책임지고 해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는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본문에 등장하는데 바로 사울의 회심 사건입니다.
스데반이 죽은 후에 예루살렘교회에는 극심한 박해가 시작되고 신자들은 정든 집을 버리고 유대 여러 마을과 사마리아로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도망간 그곳에서 전도해서 교회가 부흥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특히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해져서 큰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말을 들으면서 생각나는 말씀이 있죠? 사도행전 1:8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바로 그 약속대로 복음은 먼저 예루살렘을 뒤엎어 놓은 후에 박해를 통해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전파되었습니다. 이제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일만 남았는데 땅끝이란 엄청나게 넓고 상황도 복잡해서 보통 전도자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스데반보다 더 열정이 넘치고 더 지혜롭고 더 학식도 풍부하고 리더십도 더 강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어디서 있을까요? 국내에 유능한 축구 감독이 없으면 외국인을 데려오듯이 교회 안에 없으면 세상 사람을 데려오면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은 우리는 못 하고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 있나요? 그가 과연 누구일까요? 바로 사울, 그 사람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박해로 흩어진 후에 사울은 여전히 위협과 살기(殺氣)가 등등했습니다(행 9:1). 여기서 등등했다는 말의 헬라어 엠프네오(ἐμπνέω)는 숨을 쉰다는 뜻입니다.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예수쟁이들 내 손으로 다 죽여버릴 거야.”라고 말하는 것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이러한 사울의 폭주를 과연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사울은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의 제자들을 체포할 영장을 받았습니다. 사울은 대제사장에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메섹은 시리아 수도인데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240Km 떨어진 곳입니다. 한 주간은 걸어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그런 곳에까지 신자를 잡으러 갈 정도로 사울은 열정이 넘쳤습니다.
이 소식은 즉시 다메섹교회에 전해졌습니다(13~14절). 이제 곧 다메섹교회도 초토화되게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 세운 교회, 성령님이 강력한 은혜로 세운 교회가 이렇게 무너지고 말아야 할까요?
대제사장을 등에 업은 막강한 사울을 교회는 감당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누가 무슨 방법으로 막는단 말입니까? 사람이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때,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입니다. 예수님이 등장하실 때입니다.
살기 등등한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때가 정오였는데 하늘에서 정오의 해보다 강력한 빛이 비치었습니다(사도행전 26:13). 그러자 사울과 일행들이 모두 땅에 엎드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살기 등등한 사울, 사람들이 절대로 통제할 수 없는 사울은 예수님이 직접 거꾸러뜨렸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사울은 그 사건에서 시력을 잃었는데 하나님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 아나니아를 보내어 사울에게 안수해서 다시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예수쟁이를 잡으러 왔던 사울은 회당에 가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아라고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메섹 온 도시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다메섹의 유대인들은 사울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밤중에 광주리를 타고 성벽으로 탈출해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에게 간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가서 합류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교회는 평안하고 부흥했습니다. 1절과 31절은 완전히 대조적인 표현입니다.
사울 한 사람의 변화로 온 교회가 든든하고 평안하게 되었는데 특히 세 사람과 세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사울 자신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히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만일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평생 교회를 박해하고 신자를 잡아 죽이다가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찾아와서 사울을 만나 주심으로 모든 것이 180도로 뒤바뀌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찾아와 주지 않았다면 불쌍한 인생입니다. 예수님이 만나 주신 것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두 번째 사람은 다메섹의 아나니아입니다. 그가 다메섹에 살면서 어떻게 해서 제자가 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여간 아나니아는 사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한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팠고 그가 다메섹으로 온다는 소식에 크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환상 중에 예수님이 오셔서 사울에게 찾아가서 안수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나니아는 변화된 사울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되었고 사울의 멘토가 되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사람은 변화시키는 결정적 순간에 쓰임받는 제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도 같은 소원을 가졌다면 큰 소리로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사람은 의사 누가입니다. 누가는 바울은 만나 예수님을 믿었고 후에는 바울의 전도 여행에 동행하였습니다. 그는 바울이 전하는 모든 복음을 잘 정리하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함으로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누가가 바울을 만나지 않았다면 병을 치료하며 세상적인 글을 쓰다가 끝났겠지만 변화된 바울을 만남으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재능과 물질도 주님 나라와 복음 전도에 쓰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울의 변화는 세 교회를 살렸습니다. 사울이 변화되기 전에 예루살렘교회는 뿌리까지 뽑힐 뻔했지만, 사울의 변화로 다시 든든하게 섰습니다. 다메섹교회도 사울의 방문으로 초토화될 위기에 놓였지만 오다가 예수님을 만난 사울 때문에 큰 위로를 받고 오히려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변화된 바울 때문에 크게 부흥했고 전 세계에서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놀라운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을 볼 때 우리가 위기를 당할 때 절망하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 하고 있으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이러다가 완전히 죽을 것 같은 위기에 봉착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이 살리십니다. 큰일 났다고 하지 말고 자기 일만 충실히 감당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위기를 극복해 주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다시 든든히 섭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한 명, 한 명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버림받을 수 없고 실패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믿음과 소망으로 승리하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