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산성>
상당산성의 중요부위인 공남문에서 진동문까지 그 사이의 산성한옥마을과 보화정이라고 하는 동장대 및 저수지까지를 둘러본다. 아름다운' 산성한옥마을에서는 커피 한잔에 김시습의 '유산성'처럼 역사와 산성을 돌아보는 것이 가능하다.
1. 산성 대강
명칭 : 상당산성
위치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 28-2
방문일 : 2024.9.5.
입장료 : 없음
2. 둘러보기
오랜 염원이었던 상당산성을 오늘에야 돌아볼 수 있었다. 우선 공남문에서 진동문까지 돌아보았다. 그 사이 연못을 낀 산성한옥마을과 멀리서 아름답기 그지없는 경관을 가진 정자, 보화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장대를 보았다.
산성한옥마을은 전통적인 한옥 마을은 아니지만 주변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풍광 속에 여러 전통 음식점과 분위기 좋은 카페들이 가득하여 성곽에 안겨 있는 아름다운 마을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프랑스의 '아름다운 마을'을 연상케 한다. 내가 가보았던 마을은 리옹에서 기차로 이를 수 있는 페루즈 마을, 전란을 피해 높은 고지에 올랐던 사람들이 형성한 마을은 그대로 속세와 절연하고 전통을 지키며 살다가 '아름다운 마을'의 경관과 문화를 간직하게 된 마을이다.
이 산성한옥마을도 산성에 싸이고 호수를 마주한 조용한 마을로 마치 난리를 피해 속세를 떠나 있는 듯이 보인다. 마을 뒤로 올라가면 바로 동문인 진동문을 만난다. 진동문의 고지를 조금 내려오다 보면 연못이 내려다 보이고 그 옆의 마을이 드러나는데 신비로운 세계가 숨어 있는 듯하다.
유실된 산성의 복원은 과거로의 통로를 잇는 것과 같다. 더구나 별로 개발되지 않은 지역이어서 현재적 생활공간과의 마찰이 없어서 더욱 그렇다. 백제로까지 시대를 거스를 수 있는 상당산성은 과거로의 먼 여행이다.
아직 복원이 완성되지 못한 보화정은 좀 아쉽지만, 도시를 내려다보고 시가지와 이어진 것 같으면서도 독립된 작은 한옥마을의 살뜰한 모습은 일상을 조금만 떠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당한 공간이다. 도심과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한적하게 과거인 듯 현재인 듯한 '아름다운 마을'로 순간 이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과 깔끔하고 단아한 청주의 이미지를 산성 구역에서도 잘 보여준다.
산성 한옥마을은 지난 1980년대에 30여가구로 조성된 전문음식점 단지이다. 청주시가 한옥마을의 특성을 살린다고 보아 상당산성을 찾는 관광객을 상대로 닭요리 판애 식당을 주로 허가해줘서 닭과 오리 고기 식당이 많았으나 2005년 조류독감 파동을 겪은 이후 판매 음식이 다양해졌고, 분위기 좋은 커피숍이 많이 들어서서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 청주시에서 2012년 곳곳에 공용주차장을 만들어두어 주차하기도 편하다.
수원의 화성과 전혀 다른 모습의 상당산성, 김시습의 시를 이곳에서 발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역사와 자연과 품격 있는 경관과 아름다운 방죽과 한옥마을이 있는 이곳은 멀지 않은 곳에 국립박물관과 동물원 등이 있어 잠시 들렀다 가기는 안까운 곳이다. 성 주변의 나무호텔은 저렴하면서도 조용하고 깔끔하여 1박2일 이상 머무를 것을 요구한다.
1) 소개
청주목(淸州牧)이 백제 때 상당현(上黨縣)으로 불렸다는 점과 ‘상당기지 개석축(上黨基址 改石築)’이라는 조선 숙종 대 축성 기록으로 볼 때, 상당산성이 백제와 연관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성 내에서 발견된 ‘사량부속장지일(沙梁部屬長池馹)’ 기와편 및 남문 밖에서 발견된 7세기 후반의 인화문토기편으로 볼 때, 상당산성의 초축 시기는 적어도 통일신라시대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영조 20년(1744)에 작성된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따르면, “궁예가 축성하고, 견훤이 빼앗았다가 왕건이 다시 빼앗았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성 내에서는 9~10세기경 기와편이 발견되기도 했다.
상당산성(上黨山城)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차례 개축되고 정비되었다. 『선조실록』에는 선조 29년(1596)에 원균(元均)이 상당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는 이시발(李時發)과 최립(崔笠)을 시켜 성을 쌓았으나 도중에 무너져 그만두었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그 후 효종 2년(1651)에 충청도 54개 고을의 육군을 총괄하는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의 병영이 해미에서 청주로 옮겨짐에 따라, 상당산성은 충청 병영의 진수(鎭守) 산성으로 경영되는 한편 청주 읍성의 보조적인 역할도 수행하게 되었다. 숙종 대에는 상당산성에 대한 개축 공사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숙종 46년(1720)까지 동문부터 서문에 이르는 남쪽 구역이 개수되었다. 『비변사등록』에 따르면 영조 대에는 상당산성의 체성, 수문, 동문, 남문, 서문 등이 보수되었다고 하며, 상당산성 남문 앞 각자(刻字) 등을 통해서는 순조 대 체성, 여장, 병영 등에 대한 개축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1895년 이후 체성 및 문루 등이 무너져 내리거나 없어졌는데, 1957년 6월 남문 등 체성 일부를 개축한 이래 1971년에 홍예문과 체성 등 석축 구간을 개축 · 보수하였으며, 1977년부터 1980년까지 남문 · 서문 · 동문의 문루 등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2) 기록
상당산성은 조선왕조실록에 14번, 승정원일기에 16번, 일성록에 30번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산성이다.
상이 이르기를,
“이순신은 용서할 수가 없다. 무장(武將)으로서 어찌 조정을 경멸하는 마음을 갖는가. 우상(右相)이 내려갈 때에 말하기를 ‘평일에는 원균(元均)을 장수로 삼아서는 안 되고 전시에는 써야 한다.’고 하였다.”
하니, 좌의정 김응남이 아뢰기를,
“수군으로서는 원균만한 사람이 없으니, 이제 버릴 수 없습니다.”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깊습니다. 상당 산성(上黨山城)을 쌓을 때, 원균은 토실(土室)을 만들어 놓고 몸소 성 쌓는 것을 감독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군의 선봉을 삼고자 한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정유(1597, 만력) 1월 27일(무오)조)
이순신과 원균의 임용을 놓고 선조임금이 고민할 때 원균이 이 성을 쌓은 일을 유성룡이 거론한다. 그러나 이순신과의 비교에 있어 우리 상식과 다른 견해가 나온다. 하여튼 원균의 수군절도사 등용의 배경으로 이 상당산성을 쌓은 공적이 평가된다. 그 정도로 중요한 성이었다.
무신창의사적비
진남문. 상당산성의 정문이다. 정문 아래 산록에서부터 출발한다.
매월당 김시습 시비. 산록 아랫 부분에 있다.
<遊山城(유산성)>
芳草襲芒屨 (방초습망구)
新晴風景涼 (신청풍경량)
野花蜂唼蕊 (야화봉삽예)
肥蕨雨添香 (비궐우첨향)
望遠山河壯 망원산하장
登高意氣昻 등고의기앙
莫辭終夕眺 막사종석조
明日是南方 명일시남방
<산성에 노닐며>
향긋한 풀내음 미투리에 스미고
맑게 갠 풍경 싱그럽기도 하구나
들꽃마다 벌 날아와 꽃술 따물고
살진 고사리 비가 적셔 더욱 향긋해
아득히 펼쳐진 산하 웅장도 하다
산성 마루 높이 오르니 의기도 높아라
석양이 저문다고 마다 않고 보네
내일이면 곧 남방에 있을 터이니 (은허 역)
唼 쪼아 먹을 삽, 蕊 꽃술예, 蕨 고사리궐
공남문
구룡사 사적비
진동문과 보화정으로 향해 내려가는 길
보화정
성내 방죽
진동문
#상당산성 #청주가볼만한곳 #공남문 #보화정 #진동문 #산성한옥마을
첫댓글 상당산성 사진을 보고 있으니 상당산성을 거닐고 있는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가까이 고두미마을 신채호 유적지에 갔던 기억도 함께 떠오릅니다. 감사합니다.
신채호 유적지는 못 들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안 가신 곳이 없으십니다. 그래도 이렇게 눈으로 여행에 동참해 주시는 것을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