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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노동전선 수련회에서 발표한 내용입니다. 그동안 연재한 것을 추리고 약간 편집한 것입니다. 연재한 글을 다시 읽으니 순서를 바꿔야 할 단원들, 중복되어서 정리해야 하는 부분들, 상투적이고 어색한 표현들 등등 최종본 만들려면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절실합니다.
평등과 풍요의 변증법
1. 위기시대와 변증법
위기의 시대가 코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임금은 제자리인데 매일 치솟는 물가와 이자 폭탄으로 잠을 설치는 노동자민중에게 경제전문가들은 한동안 어금니 꽉 깨문 채 버텨보시라는 경고를 쏟아내고 있다. 핵전쟁이나 생화학전으로 짧은 기간 안에 인류문명이 끝장날 수도 있다는 걱정은 오늘날 망상으로 치부될 수 없다. 지구의 총체적 오염과 온난화 혹은 대규모 식량난만 밀려오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제2, 제3의 후쿠시마가 다시는 어디서도 터지지 않으리라고 누가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한국 사회 기득권층의 총궐기로 집권한 극우세력은 ‘노동자 없는 세상’, 즉 노동자들을 노예로 만드는 세상을 꿈꾸며, 국가권력을 사유재산처럼 주무르고 있다. 법을 앞세운 이들의 파쇼폭력은 정적 제거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생존권을 갈아 넣으며 자본독재에 복무한다. 반면에 미국과 일본에 대한 이들의 굴종에는 한계가 없다. 이들이 미-일에 바치는 이권과 국민적 자존심의 대가로 한-미-일 군사동맹이 강화될수록 전쟁위기는 고조될 것이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분노와 수치를 느끼며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권이 교체되어 이른바 ‘친노동’ ‘진보’ ‘좌파’라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다고 해도 오늘의 위기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위기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선두 산업국들이 성장률 둔화⋅정체의 늪에 빠진지는 오래 되었다. 공황은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한국도 성장률 둔화나 주기적 공황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에 저렴한 원료⋅노동력⋅지대, 그리고 시장과 영향력 등을 놓고 벌어지는 갈등과 투쟁은 언제라도 무력 분쟁과 대량살상전으로까지 발전할 위험을 안고 있다. 핵재앙을 포함한 전지구적 환경재앙의 해결사 역할을 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자본증식의 원리를 절대자로 모시는 한 그렇다.
냉정히 돌아볼 때 지금의 무지막지한 파쇼정권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는 민주주의가 언제 실질적으로 구현된 적 있는지 물을 필요도 있다. 민주주의 국가란 본질적으로 국민이 국가권력의 주인인 국가다. 그런데 국민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노동자민중은 오늘날까지 입법⋅사법⋅행정 등 국가권력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런 국가가 극소수 자본가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자본독재 국가임을 명확히 해야 실질적 민주주의를 향해 발을 뗄 수 있을 것이다. 자본독재로 인한 범인류적 위기의 극복은 자본독재 때문에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고 자본의 출발부터 종말까지 자본과 적대적 모순관계에 처해 있는 노동자민중의 지난한 해방전쟁, 즉 독식과 공멸이 아닌 공존과 공영을 위한 인류사적 해방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때 노동자민중이 실질적으로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 즉 노동자국가의 건설은 이 전쟁의 주요 전환점이다.
노동자민중은 매일 매순간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르느라, 또 자본독재 하의 총체적 지배장치들에 얽매여 아직 의식적으로 해방전쟁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를 불변의 자연조건으로 보아서는 결코 안 된다. 그것은 자본독재가 경제성장을 무기 삼아 주도해온 계급전쟁의 중간결산물이자, 해방전쟁에 적극 나서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당면문제다.
성공적인 인류사적 해방전쟁을 통해 자본독재를 극복하고 건설하게 될 대안사회는 그 누구도 사회구성원들 위에서 멋대로 갑질할 수 없는 평등사회가 될 것이다. 또 누구라도 소외된 노동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인류가 이룩해낸 무궁무진한 문화유산과 자연의 혜택을 공유하고 누리며 의미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풍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이 되는 노동자국가 건설은 이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결정적 관문이다.
자본독재로 인한 오늘의 위기를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의 기회로 전환하는 데에는 변증법적 사유방법이 주요 무기가 될 것이다. 어떤 지배적 고정관념이나 사고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당면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봄으로써 근본적 해답을 찾아가는 실천적 사유의 노동이야말로 변증법의 요체다. 이 점에서 변증법적 사유방법의 훈련 없이는 노동자정치의 성공도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도 요원할 것이다.
2. 변증법은 ‘정-반-합’이 아니다
“만물은 유전한다(panta rhei)”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은 변증법의 한 가지 본질적 특성을 나타낸다. 맑스는 이 특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합리적 형태의 변증법’은 “부르주아지 및 그 이론적 대변인들에게 분노와 공포를” 안겨줄 뿐이다. 왜냐하면 변증법은 현존하는 것의 ‘불가피한 파멸’ 내지 ‘일시적 측면’을 파악하며, “본질상 비판적⋅혁명적이어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스미스와 리카르도를 비롯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불변의 자연상태로 전제하는 것과 달리, 맑스는 그것의 ‘일시적 측면’을 직시함으로써 인류사를 근본적으로 바꿀 이론적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변증법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헤겔과 ‘정-반-합’을 떠올린다. 그러나 정작 헤겔 자신은 ‘변증법의 탄생 현장’이라고 평가받기도 하는 정신현상학에서 정-반-합이라는 공식을 피했으며, 도식적 형식주의적 사유방법을 신랄하게 야유한다. 이러한 입장은 맑스와 엥겔스, 레닌에게도 공통적이다. 변증법적 사유는 협소한 도식주의만 아니라 끝없는 표상적 사유의 늪에 빠지는 것도 피하며, 추상과 개념을 통해 ‘사태의 살아 있는 본질’에 이르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개념이 사태와 거리가 먼 도식으로 굳어질 위험도 인정하며, 따라서 개념에 대한 비판과 반성도 필수적이다.
자본독재를 극복하는 데에는, 그 극복의 필요성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인식과 함께 그 극복 운동이 좋다 혹은 멋있다고 여기는 감각과, 극복을 원하는 강렬한 욕구, 나아가 극복을 위해 무엇이든 감수하려 드는 행위까지 함께 작동해야 한다. 그렇더라도 견고한 자본독재의 벽을 허무는 출발단계에서는 인식 혹은 사고방식의 변화가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인식의 변화 없이는 감각이나 욕구의 변화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직적 운동을 통해 새로운 인식과 사고방식을 폭넓게 공유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사고방식부터 공유해가는 것이 자본독재의 종말을 앞당기는 데에 특히 바람직한가? 아마 인간을 평등한 존재로 보는 것이 최우선일 것이다. 차별을 당연시한다면 자본독재를 거부할 이유도 별로 없다. 엥겔스와 맑스는 계급철폐만 아니라 민족해방과 분업에 따른 차별의 극복도 추구했다. 평등은 그들의 실천이론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추구한 평등의 궁극적인 단계는 지배관계 자체가 사라진 사회다. 그 실현 가능성을 그들은 파리코뮌에서 확인했다. 그들은 파리코뮌이 “사회의 심부름꾼이 사회의 주인으로 둔갑하는 것을 막을 절대적으로 확실한 조치들을 취했다”고 강조한다. 이 평등의 정신을 현대사회에 살려내는 노동자민중의 민주국가를 통해서만 자본독재 권력의 폭주를 제어하고 지배관계가 사라진 평등사회로 도약해 가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오늘의 편협하고 딱딱한 위계적 사고방식⋅감각⋅욕망에 호소하는 자본독재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으려면, 변증법적 사유의 비판적 혁명적 본성을 자유롭게 발현해야 할 것이다. 변증법을 ‘정-반-합’ 따위의 공식에 묶어놓지 않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3. 자명한 제일원리는 없다
변증법적 사유는 자명하고 당연한 진리로 여겨지는 제일원리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사유와 구별된다. 제일원리라는 것들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다지 자명하지 못한 것이다. 자본독재의 제일원리인 ‘이윤추구가 기업의 목표다’라는 관념 역시 따지고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절대 진리가 아니다. 사람들의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한 수단이나 방법의 영역에 들어가야 마땅한 이윤추구 즉 돈벌이를 목표의 자리에 앉혀 놓고 있는 것부터가 뒤집힌 논리다. 경제활동의 목표를 ‘인간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물적 조건 형성’처럼 사용가치 중심으로 설정하면 왜 안 되겠는가. 혹은 맑스가 생각했듯이, “연합한 생산자들이 자기들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합리적으로 규제함으로써 그 물질대사가 맹목적인 힘으로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물질대사를 집단적인 통제 아래에 두는 것, 그리하여 최소의 노력으로 그리고 인간성에 가장 알맞고 적합한 조건 아래에서 그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것”을 경제활동의 목표로 삼으면 또 어떻겠는가.
자본독재가 유포하는 제일원리 및 공리체계들을 철저히 불신하는 사고 훈련이 없으면, 우리가 추구하는 풍요도 자동으로 확대재생산 혹은 자본증식, GDP증대, 더 큰 집과 승용차, 더 편리한 가전제품들 등과 동일시되기 쉽다. 또 여기에는 무한경쟁과 장시간의 소외된 노동, 양극화 속의 서열체계, 무수한 차별과 예속관계, 제국주의적 착취와 수탈, 제국주의적 갈등과 전쟁, 환경파괴 등이 필요악으로 따라붙는다. 이 불평등한 서열체계 속에서는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이든 더 높은 곳을 향해 곁눈질하며 궁핍과 불행을 맛보는 것이 정상이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풍요를 누리기 위해서는 오늘의 불평등한 착취구조와 서열체계를 허무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또한 생산력의 발전에 비례해, 즉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위한 노력을 줄일 수 있는 데에 비례해, 노동시간도 보편적으로 축소하고, 실업과 비정규직 개념 따위를 역사교과서에 박제해 놓는 것 또한 불가피하다.
이렇게 확보되는 자유시간에 우리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인류사회에 아직 남아 있는 갈등과 새로 닥쳐오는 문제들도 해결해가며 의미를 찾는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자연과 인류의 무궁무진한 문화유산들을 합리적으로 다루며 함께 누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질 것이다. 또한 인간의 감각과 욕구 혹은 초자아 등도 자본독재의 감옥에서 벗어나 공존과 공영, 그리고 평등을 새로운 제일원리로 발전시키는 에너지로 쓸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노고를 돈으로 환산하는 오늘의 인정체계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인정체계 역시 섬세하게 개발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풍요의 의미도 자명한 것이 아니라 자본독재를 극복한 대안 사회 속에서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4. 대립과 구별의 타당성은 상대적이다
사회적 갈등들을 대증적으로 표면차원에서 무마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대상들의 본질적 상호작용을 복합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를 회피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흐려놓음으로써 그러한 갈등에서 이익을 챙기는 지배자들의 요구에 부응한다. 지배자들의 관심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자의적 분류방식에 따라 대상들을 부적절하게 구분하고, 차이를 이용해 차별을 만들어 적대관계를 유발하거나, 실질적 적대관계를 단순한 차이로 변조하여 적대관계에 대한 인식을 흐려놓음으로써 실제 극복을 어렵게 만드는 것 등은 전형적인 지배수법이다. 변증법은 지배자들이 만드는 대립과 구별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변증법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도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노동자정치운동이 노동자국가 건설이라는 과제의 실마리를 쉽게 풀지 못하는 주요 원인으로는 노동자민중이 노동자국가를 적극적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이 현상의 밑바탕에는 자본독재의 분할통치 전략과 경제성장을 토대로 한 상층부 노동자, 특히 이데올로그들의 매수 효과가 깔려 있다. 이로써 형성된 위계질서에 체념적으로 적응하며 각자도생을 꾀하는 노동자민중의 현재 욕구는 다시 노동자정치운동의 시야에서 노동자국가라는 목표를 지워버리고 자본독재를 강화시킨다. 자본독재가 만들어낸 결과가 정치환경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 반대로 노동자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목적의식적으로 강조하고 이에 대한 공감대를 넓힘으로써, 대안 사회에 대한 전망에 비춰 오늘 노동자들이 당면하는 문제들의 근본적 타개책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러한 발상의 전도가 필요한 이유는, 현재의 문제나 과거의 경험을 건너뛸 수도 없지만 여기에 묶여 있는 한 자본독재가 구축해 놓은 총체적 지배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의 현실적 전망이 없으면 현재의 불평등구조를 극복하자는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이 현실적 전망을 집약하는 개념이 노동자국가다.
노동자민중이 어느 한순간 동시에 노동자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노동자정치운동에 뛰어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수의 노동자민중이 운동에 동참하기까지는 운동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운동에 헌신하는 활동가들, 즉 전위의 역할이 불가피하다. 전위는 무엇보다 대중의 현재 의식상태를 근거로 운동의 발전을 막는 일을 경계하고, 새로운 전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의무를 안고 있다. 또 이에 따르는 위험과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위와 대중의 구별 역시 절대적이지 않다. 전위와 대중이 현실적 변혁전망을 공유하고 그 실현 경로를 함께 만들어감으로써 운동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 경우 이미 대중은 전위와 구별되기 어렵다. 대중의 전위화는 운동의 성공을 가늠하는 지표다.
노동자정치운동이 아직 자본독재의 현실적 대안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주요 원인은 운동의 주체들이 여러 갈래의 조직과 정파들로 분열되어 힘을 모으기 어렵다는 데에도 있다. 대립과 구별의 타당성을 절대화하지 않는 변증법적 사유는 분열 극복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자본독재권력 및 그 대리자들과 이에 맞서는 노동자민중 사이의 구별과 적대적 모순을 흐리는 것은 운동에 대한 범죄다. 그러나 자본독재 극복을 위한 인류사적 전쟁에 가담하는 조직⋅정파⋅세력이라면 어떤 수준이나 형식으로든 서로 간의 경계선을 넘어서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찾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5. 변증법은 상대주의가 아니다
자명한 절대적 제일원리를 인정하지 않고 대립과 구별의 타당성이 상대적임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상대주의를 옹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은 상대주의가 아니다. 특정한 문제와 관련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견해가 서로 충돌할 때, 모든 사유는 그 나름의 조건을 지닌다는 관점에서 각자의 견해를 서로 인정하자는 추상적 원칙에 만족하고, 어떤 공약수를 찾아 그 문제에 대한 좀 더 타당한 인식으로 나아가기를 포기한다면, 지배자의 견해를 진지하게 비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 결과 지배자의 견해는 상대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절대적으로 타당한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상대주의는 본질적으로 지배논리가 된다.
변증법은 각자의 주관이 아니라 대상에 우선권을 부여하며, 각 인식들이 동일한 인식가치 혹은 진리치를 지닌다고 보지 않고 어느 인식이 더 대상에 타당한지 묻는 진리투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한다. 그리고 실천을 통해 그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변증법은 어떤 대상과 관련해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생성된 특정한 인식이 완전무결한 절대적 진리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역사적 제약을 받는 인식능력과 인식의 필요에 따라, 대상의 무궁무진한 속성과 관계들 가운데 미지의 것이 새로 인식되거나 과거의 잘못된 인식들을 논박하고 바로잡거나 아예 근본적으로 뒤집는 일은 늘 가능하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융단폭격을 뚫고 지배관계의 실상을 파악하는 것은 지배관계를 무너뜨리고 평등사회로 가는 첫걸음이다. 그런데 지배관계의 실상이라는 것이 종종 단순명료하지 못할뿐더러 다양한 방식으로 은폐⋅왜곡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피지배자들이 꿰뚫어 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일시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실상을 파악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다른 속임수를 통해 은폐되거나 왜곡되기 일쑤다. 상대주의도 그러한 속임수의 일부다. 어떤 명제나 인식의 진위 문제를 일일이 따지기도 전에 아예 진위 문제 자체가 의미 없는 것처럼 호도하는 것이 상대주의의 본질적 역할이다.
지배자들이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늘어놓으면, 기득권세력의 첨병인 언론은 뻔한 거짓말을 부끄러움도 잊은 채 마구 살포하는 시대다. 뻔한 거짓말조차 반복을 통해 사실로 둔갑하는 현상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지금의 언론환경에서는 명백한 허위를 허위라고 밝히고 진실을 사회적으로 통용시키는 것도 쉽지 않다. 더구나 까다로운 이론들과 자료들로 무장한 허위들을 폭로하고 복잡한 지배관계의 실상을 드러내는 데에는 무제한의 노력이 필요하다. 변증법은 이러한 노력의 총체다.
6. 진리는 구체적이다
노동자민중을 기만하는 데 이용되는 지배이데올로기들은 흔히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 문제들에서 출발한다. 거짓말이 먹히려면 거짓말을 구성하는 개별 요소들이 대체로 그럴듯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자료들을 선별하는 과정에서도 이미 불순한 의도가 큰 몫을 차지한다. 지배관계를 명백히 밝히는 불씨가 될 만한 자료들을 가능한 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려버리는 것이다. 그 다음 선별된 자료들을 일반화하고 해석하여 이론의 외양을 갖춰 갈 때는 좀더 자유롭게 왜곡의 기술을 발휘할 수 있다. 자료를 혼란스럽게 배열하여 인과관계를 뒤집거나 특정 요소를 과장하거나 피상적 현상들로 문제의 핵심을 덮는 것이다. 그렇게 탄생하는 해법이라는 것들은 대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문제를 문제로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데에 쓰인다. 예컨대 거대 양당체제의 과거 폐해를 늘어놓고, 정치적 다양성이나 비례성을 위해 비례대표 의석 확대나 중대선거구제가 필요하다고 외치는 동안,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문제는 대중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노동과 자본의 근본 모순은 정치와 무관한 것처럼 은폐되며 자본독재는 성역화된다.
구체적이고 총체적인 인식은 이러한 속임수를 막는 방법이다. 맑스의 규정에 따르면, “구체적인 것은 그것이 수많은 규정들의 총괄, 다양한 것들의 통일이기 때문에 구체적”이다.자본론 전체를 통해 맑스는 상품에 대한 추상적 분석을 통해 잉여가치의 비밀을 밝히는 데에 머물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전체적으로 혹은 구체적으로 인식해가는 장구한 과정을 감당한다. 이처럼 구체적인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소수 전문지식인들의 과제가 아닌지 물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노동자민중 각자가 자신의 운명이 걸린 해방전쟁의 문제들과 관련해 누구나 전문지식인이 될수록 승산은 커질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엥겔스의 조언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기습 공격의 시대, 자각하지 못한 대중들의 선봉에 서서 자각한 소수가 수행하는 혁명들의 시대는 지나갔다. 사회 조직의 완전한 변혁이라는 문제가 있는 곳에서는, 대중들 스스로가 변혁과정에 참여하여, 그들 스스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그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야 하는가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은 구체성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총체성의 관점은 대상을 제반 본질적 연관과 역동적 과정 속에서 주체의 실천과 관련지어 파악하는 것이다. 자본독재 세력은 자본주의적 재앙들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없다고 선동하거나, 총체적 파악을 필사적으로 방해하려 든다. 총체성의 관점은 루카치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자본독재 세력이 아닌 노동자민중의 주요 무기다. 특히 사유활동을 현실적 과정과 단순히 대립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현실적 과정 전체의 요소라고 볼 때, 객관적 정세를 인식하는 방식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생긴다. 즉 개인적 혹은 집단적 주체의 사유활동⋅발언⋅이론⋅결정 등을 객관적 조건과 별개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그것들이 초래할 변화를 감안하여 객관적 정세를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맥베스에 등장하는 마녀들의 예언은 맥베스 사건과 동떨어진 채 사건 바깥에서 사건을 기술했는데 그 예언이 들어맞은 것이 아니다. 그들의 예언은 사건의 주요 요소로서 함께 사건을 만들어냄으로써 적중해 간다. 이는 여론조사가 여론조작에 쓰이는 원리이기도 하다.
같은 원리로 노동자정치운동의 비약적 발전과 노동자국가 건설이 불가능하다고 끝없이 되뇌고 있으면 실제로도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길을 찾아내면 실제로도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주체들 자신의 사유활동을 비롯한 주체적 요인들을 빼놓은 ‘객관적’ 정세는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이지도 못하다. 객관적인 현실 과정 속에 주체적 요인들을 실천적으로 포함시켜 파악하는 사유방법이야말로 총체성의 관점이 노동자민중에게 제공하는 최강의 무기다.
7. “운동의 결과이자 동시에 출발점인 인간 주체”
인간이 만들어낸 엄청나 생산력과 파괴력을 고려할 때,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인간의 주체적 능력을 의심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 능력으로도 자본독재체제만은 건드릴 수 없다고 믿는다면, 이것이야말로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이 망상을 노동자민중의 몸에 새겨넣지 못하면 자본독재체제는 연명할 수 없다. 인간을 규정하는 요인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부단한 진전과정에서 우리는 자칫 인간의 활동적 주체적 측면을 망각하고 인간을 단지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산물, 즉 제반 조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객체로서만 인식함으로써 비실천적 방관적 태도나 숙명론의 유혹에 빠져들 수도 있다. 이 유혹이 지배자들이 애용하는 무기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런 유혹에 부딪칠 때면 인간 주체를 “운동의 결과이자 동시에 출발점”으로 파악하고 포이어바흐까지의 비변증법적 유물론을 비판하며 ‘실천적 유물론’ 내지 변증법적 유물론의 문을 연 청년 맑스를 상기하면 좋을 것이다.
인식 도구들도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산물이지만 주체 자신의 의식과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인식 도구들 자체를 대상화하여 비판하는 일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비판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럴수록 각자는 지배질서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사고방식⋅감각방식 등에 사로잡혀 자신의 주체적 힘을 망각하고 자발적으로 지배질서에 복종하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자신의 인식 도구들에 대한 비판의식은 주체성을 기르기 위한 기본자질이다. 인식의 확대가 과학의 이름으로 인간 주체를 다시 사회적 역사적 조건의 산물, 즉 ‘운동의 결과’로서만 대하면서 결정론적 냉소주의를 퍼뜨리는 사태로 귀결되지 않으려면, 변혁 주체들이 새로운 ‘운동의 출발점’임을 해방적 실천으로 입증할 필요가 있다.
8. 관념변증법과 유물변증법
자본독재는 다양한 물적 조건을 통해 노동자민중의 주체성을 끊임없이 위축시킴으로써 자체의 수명을 연장한다. 그러나 주체성을 강조하더라도 주체의 현실적 비중을 과도하게 부풀리거나 왜곡하는 관념론의 함정에 빠져서는 곤란하다. 현실인식상의 불필요한 혼선과 희생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의 시대에 관념론은 철학교과서에나 등장하는 역사의 유물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칸트 인식론의 핵심인 물자체에 대한 불가지론은 여러 형태로 현대철학에서 변주되며 존속하고 있다. 그것은 ‘텍스트’⋅‘상징계’⋅‘이데올로기’ 등의 바깥에 존재하는 실재에 대한 인식을 순진한 유물론의 독단적 산물이라고 폄하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런 지적 풍토에서 냉소적 상대주의나 불가지론의 독소가 번창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인식의 개념 자체에서 해독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물질적으로 고스란히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통해 일정하게 추상⋅변형⋅재현하는 것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 인식 과정에는 인식주체의 실천적 필요성이나 인식능력 혹은 인식도구 등과 같은 주체적 조건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어떤 인식이든 부분적⋅제한적이며, 수정⋅보완⋅폐기될 수 있다. 따라서 실재 혹은 물자체를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러한 인식과정 속에는 현상적 요소가 원천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유물변증법의 관점에 의거 인식의 불완전성⋅과정성을 인정하는 한에서, 현상이 아니라 대상 자체⋅실재⋅물자체 등을 인식한다고 말하더라도 아무 문제 없다. 실재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를 따지며 머리를 혹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 혹은 물자체에 대한 인식의 적합성⋅깊이⋅폭 등을 늘이기 위해 고투를 벌이는 것이 유물변증법의 본분이다.
관념론의 함정들은 맑스⋅엥겔스⋅레닌 등 유물변증법 이론가들의 선구적인 사상투쟁이나 현대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도 소멸하지 않았다. 플라톤이나 버클리 혹은 칸트나 헤겔의 공인된 관념론을 까다롭게 변주해놓은 이론들만 아니라, 엥겔스가 비판하는 형이상학적 사유, 맑스와 루카치가 밝힌 물신과 사물화된 의식, 확고부동한 제일원리에 의존하는 사고 등등의 산물들도 곳곳에서 비현실적 관념 내지 언어의 올가미들로 우리를 얽어매 놓곤 한다. 그러한 관념의 올가미들이 십중팔구는 자본독재의 지배도구라는 점에서, 그것들을 무력화하고 해방의 무기를 개발하는 주체는 노동자민중 자신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때 “독일 노동운동이 독일 고전철학의 계승자”라는 엥겔스의 판단을 참조할 수 있다.
9. 토대의 결정력과 상부구조의 적극성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는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가 거대 양당의 적대적 대립 관계라고 단언하면서, 증오의 정치와 진영논리를 극복하고 국민통합에 기여할 해법으로 다당제를 내세우는 흐름이 있다. 그러나 그런 진단과 해법은 문제의 본질을 흐림으로써 장기적으로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민족과 국가를 통째로 제국주의세력에게 제물로 바치고, 노동자민중을 빈곤과 죽음으로 내모는 자본독재권력을 증오하지 않으면서 어떤 정치를 하자는 것인가. 증오 자체가 아니라 증오의 내용이 문제다. 거대 양당의 대립 관계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그것이 자본독재 내부 분파들 사이의 대립일 뿐이라는 점, 그리고 노동자민중의 권익을 대변할 정치세력이 노동자민중의 현실적 비중에 합당한 만큼 거대 정당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진영논리를 거부하기에 앞서 그 진영이라는 것들이 어떤 진영인지, 노동자민중 진영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 먼저다. 이러한 물음에는 정치조직이나 이념 등의 상부구조가 계급관계를 비롯한 경제적 토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따지는 토대-상부구조론이 전제된다. 현재 한국의 정치적 상부구조는 경제적 토대에 적합하지 못하며, 따라서 토대에 적합해지도록 바꿔갈 필요가 있다.
현실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 토대-상부구조론은 물론이고 토대, 특히 계급관계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논하지 않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유행병처럼 퍼져왔다. 이런 풍토 속에서 토대-상부구조론을 이론 영역에서 몰아내려는 ‘생산력주의’, ‘경제주의’, ‘계급환원론’ 등 경멸적 언사들이 자본독재를 지키는 보조장치로 쓰이기도 했다. 그런 언사들의 주요 역할은 현실적 갈등들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강조하면서, 자본독재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정치운동이 떠맡는 중심적 비중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현상도 지난 30여 년간의 토대변화, 즉 사회주의의 퇴조 및 한국 자본의 성장이라는 토대와 무관하지 않다.
맑스에 따르면 상부구조는 “자연과학적으로 정확히 확인될 수 있는 경제적 생산조건들에서의 물질적 변혁”과 구별되어야 하며, 토대에서의 “충돌들을 의식하고 싸움의 끝장을 내는(ausfechten) 법률적, 정치적, 종교적, 예술적 혹은 철학적, 간단히 말해 이데올로기적인 형태들”이다. 상부구조는 토대의 수동적 부산물에 머물지 않고, 토대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끝장을 내는’ 적극적 변수로 기능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 있다.
상부구조 혹은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을 평가하는 최종 척도는 그것들이 현실을 얼마나 충실히 반영하느냐 하는 측면과 아울러 토대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어떻게 끝장내느냐, 자본독재라는 낡은 토대 혹은 풍요로운 평등사회라는 새로운 토대를 옹호하느냐 반대하느냐 하는 그 적극적 역할에 있다. 토대 차원의 모순과 충돌을 의식하지 않으려 하거나 의도적으로 은폐하는 것은 낡은 자본주의적 토대를 유지⋅강화하는 자본주의적 상부구조다. 오늘날 지배적인 이 자본주의적 상부구조에 현혹당하지 않고 그것의 지배적 본질을 비판하는 것도 낡은 토대를 거부하는 노동자정치운동의 주요 역할이다.
10. 분석적이면서 종합적인 사유방식
대상을 무한정 세분화할수록 더 탁월한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상부구조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위해서는 토대에 대한 그것의 적극적 역할을 파악하는 데에 필요한 만큼의 합리적 분석과 동시에 그것의 전체적 의미를 판단하기 위한 종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레닌은 변증법을 간단히 ‘대립물의 통일에 관한 학설’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주요 요소를 1) ‘개념 및 사물 자체를 관계 및 발전 속에서 고찰’, 2) ‘모든 현상 속의 모순적인 힘과 경향’, 3) ‘분석과 종합의 통일’이라고 파악한다. 분석과 종합의 통일을 꾀하는 변증법적 사유에서는 기존의 특정한 사회를 통째로 인류의 미래사회를 위한 단일 모델로 삼는 것보다, 주요 모델들로부터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에 필요한 요소들을 분석적으로 파악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완벽한 이상사회는 아직 존재한 적 없고 어느 사회에나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있으며, 또한 적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다.
분석을 통해 파악된 각 요소들이 기존 사회모델들 속에서 작동했던 방식을 그 긍정적 부정적 측면에서 전체적으로 인식하거나, 그 사회모델들 자체의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는 데에는 종합적 사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종합적 사유는 미래사회를 위해 각 요소들을 그 비중에 맞게 새로운 맥락 속에 재배치하고 변형하는 과정에서 더욱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이러한 종합은 생산력 발전상태를 비롯한 우리의 실천 조건과 주체적 역량,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이라는 궁극 목표 등을 함께 고려하면서 제반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작업이다. 아직 출발단계에 머물고 있는 이 주체적 종합작업을 통해 이론적 사상적 무기들을 충분히 생산하고 널리 공유해가는 일은 노동자정치운동의 주요 당면과제에 포함된다.
대안이론 생산을 위한 공동작업에서 피하기 어려운 의견 차이와 충돌을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본독재를 상대로 하는 전쟁에 함께 몸을 던진 동지들을 향한 무제한의 존경과, 그때그때의 의견 차이를 운동의 분열이 아니라 새로운 이론 생산의 에너지로 전환해내는 창의적 종합능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식과 헌신도 권력으로 치환될 수 있다. 그리고 권력은 수시로 도취를 유발하고 독선적 배타적 자세와 함께 운동의 분열을 부추긴다. 그럴 때마다 파리코뮌의 주요 교훈, 즉 언제라도 헌신의 위치 혹은 권력에서 소환될 수 있다는 평등사회의 정치원리를 거울삼아, 자신의 지식 권력과 이론적 자부심을 기꺼이 실천적 요구의 바다에 던질 필요도 있다.
11. 개념의 운동과 동일성 사유 비판
대상의 가변성과 복잡성에 비춰볼 때, 고정적 의미를 지니는 개념에 만족하기는 어렵다. 개념의 변화는 더 나은 인식을 위해 불가피하다. 헤겔은 그러한 변화를 ‘개념의 운동’ 혹은 ‘개념의 노동’이라고 표현했다. 이와 관련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인간의 개념들은 비운동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는 가운데 존재하고 있으며, 서로 상대방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개념은 살아 있는 생명을 반영하지 못한다.”(철학207) 또한 레닌은 개념의 가변성이 주관적으로 적용되면 ‘절충주의 및 궤변’으로 되고, 객관적으로 적용되면 변증법으로, 즉 ‘세계의 끊임없는 발전에 대한 올바른 반영’으로 된다고 지적한다.(철학55)
아도르노는 개념의 대상 가운데 개념으로 파악되지 않은 부분을 ‘비동일자’라고 칭한다. 그리고 개념과 개념으로 파악된 대상을 동일시하는 사유를 ‘동일성 사유’라고 규정하고, 동일성 사유의 허위와 폭력성을 비판한다. 하지만 그도 개념적 사유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개념적 사유를 받아들이면서 동일성 사유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아도르노는 “인식의 유토피아는 개념들을 통해 비개념적인 것을 밝히되 그것을 개념들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동일성 사유의 극단적인 형태로서, 대상이 어디에 속하고 어느 위치에 있는지만 알려 하고 더 이상 대상 자체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 ‘위상학적 사유’ 혹은 ‘행정적 사유’를 지적한다. 행정적 사유는 “이른바 비합리성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을 관료적 질서 개념들 아래 종속시키고 합리성의 집합과 비합리성의 집합을 깨끗하게 서로 분리하는” 양자택일적 사유방식이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가변적 현실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단순하고 무자비한 결정으로 치닫기 쉽다.
그러나 위상학적 사유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절대화하여 현실적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적대적 진영 구분을 흐리거나 부인하는 것도 비변증법적이다. 무한히 복잡다단한 현실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눈앞의 폭력과 불의에 대한 판정을 미루고 끝없이 개념의 노동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사태 자체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변증법의 척도는 관조적 인식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실천 속으로 이행하며, 이때 위상학적 사유 혹은 진영논리를 절대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변증법적이지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위상학적 사유를 절대화하고 개념의 노동을 중단하라는 것은 아니다. 해방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적시에 적합한 결정의 강을 수없이 건너야 하지만, 결정의 시간들에 앞서 치밀하고 끈질긴 개념의 노동이 쌓일 만큼 쌓여야 할 것이다.
12. 내재적 비판의 효능과 한계
개념의 운동에서는 어떤 명제나 사고를 그것과 무관한 다른 척도로 그것을 비판하는 초월적 비판이 아니라, ‘그 사고와 더불어, 그 사고 자체의 힘에 근거해 그것을 논박하는’ 내재적 비판이 중요하다. 내재적 비판은 적의 언어로 적을 논박하고 대안을 찾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시초축적부터 당대의 무자비한 노동일 연장, ‘흡혈학교’를 통한 아동노동력 착취 등 처참한 자본주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세밀하게, 즉 거시적-미시적으로 비판한다. 이때 그는 사회주의 문헌이나 도덕교과서가 아니라 영국의 의회법령, 공장감독관들의 보고서, 의회보고서 등 적의 언어를 주로 활용한다. 특히 잉여가치의 비밀을 밝히는 과정에서 사기나 폭력 혹은 가치 이하의 노동력 구매나 가치 이상의 상품 판매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이 주장하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자유롭고 평등한 교환관계에서 출발한다. 이처럼 등가교환이라는 시장원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밀고감으로써 그는 착취의 비밀에 도달한다. 그 비밀은 동등한 가치에 따라 판매-구매되는 노동력과 이의 사용가치인 구체적 노동의 구분을 통해 밝혀진다. 이를 통해 맑스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대등하고 독립적인 상품소유자들, 즉 자본이라는 상품의 소유자와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소유자 사이의 자유로운 계약관계인 것처럼 교묘하게 기만하고 있는”(자본1,1054)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은폐된 노예제도”(자본1,1040)임을 폭로한다.
이러한 폭로를 통해 맑스가 자유와 평등의 이념까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이 구현되려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넘어선 새로운 생산양식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자유와 평등의 의미를 수정⋅확대한다. 엥겔스는 평등 개념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프랑스 부르주아지가 대혁명 때부터 부르주아적 평등을 전면에 내세운 이래로,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는 끊임없이 사회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의 요구로 이에 답하였다. 평등은 그때 이래로 특히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전투 구호가 되었다.” 오늘의 해방전쟁에서 평등은 단순한 ‘전투 구호’가 아니라 ‘핵심 이념’으로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정치적으로 당연시되는 민주주의는 현실에 비춰볼 때 선거와 대의제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본독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의 민주주의가 지닌 형식적이고 기만적인 성격을 비판한다고 해서, 민주주의 이념 자체를 버려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비판을 통해 민주주의의 의미를 수정⋅확대하여, 자본독재를 넘어선 노동자민주주의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이 경우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긴밀한 관계를 밝히는 레닌의 주장을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없이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1) 프롤레타리아트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할 수 없고, (2) 일단 승리한 사회주의도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행하지 않으면 승리를 견고한 것으로 만들 수도, 또 인류를 국가의 소멸로 이끌어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비판 대상 자체의 언어나 논리에 근거를 두는 내재적 비판은 이성적 논쟁에서 강력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과 이익의 독점을 위해 자본독재의 대리인들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으면 그들의 애완견이 된 언론이 사방팔방으로 짖어대는 상황에서는, 엄밀하고 예리한 내재적 비판을 통해 그 허위를 논박하더라도 그들을 승복시킬 가망은 전무하다. 그들은 승복에 앞서 타도와 제압의 대상이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하지만 내재적 비판은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자본독재의 폭력에 맞서면서 노동자민중의 공감을 다지고 장기적으로 헤게모니를 넓히는 과정에는 충분히 의미 있다. 그러한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비판 대상을 회피하지 않고 면밀히 연구하는 노고, 개념의 노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누구라도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거짓말이 아닌 복잡한 상부구조물들을 다룰 경우, 단순한 거부보다 내재적 비판을 통한 분석적이고 종합적인 평가가 훨씬 유용하다.
13. 역사적 사유방식과 진리의 시간적 핵심
자본독재가 건재하는 국면에서 변혁적 전망을 고수하는 데에는 자본독재의 역사적 본질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이 필수적이다. “변증법적 철학에는 종국적 의의를 가지는 것, 절대적인 것, 신성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고전36) 자본독재 역시 그 영속성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그들의 선전과는 달리, 이러한 변증법적 인식을 부정할 근거를 내놓지 못했다. 견고해 보이는 표면구조 아래에서 끊임없이 인류문명에 위기를 초래하면서 전세계 노동자민중의 피와 땀으로 위태롭게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엥겔스는 헤겔철학의 진정한 의의와 혁명적 성격이 “인간의 사유 및 활동의 결과가 지금까지의 철학에서 종국적 의의를 가진다고 보는 온갖 견해를 영원히 청산해 버린 데 있다”고 지적한다.(고전35) 나아가 엥겔스는 헤겔 철학이 확립한 진리의 과정적 성격을 강조한다. “철학이 진리를 인식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헤겔의 경우에 그 진리라는 것은 일단 발견된 후에는 그저 암송하기만 하면 되는 기성의 교조적 명제들의 무더기는 아니었다. 진리란 이제는 인식과정 자체에, 과학의 장구한 역사적 발전 가운데 있게 되었다.”(고전35)
진리는 “일단 발견된 후에는 그저 암송하기만 하면 되는 기성의 교조적 명제들의 무더기가 아니”라는 헤겔과 엥겔스의 교훈은, 자본독재 극복을 위한 대안의 구체화 과정이 소수 전문가나 전위의 독점물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대안적 사상과 이론의 생산이 소수의 손에서 시작되더라도, 그것이 현실적 힘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민중의 검증과 비판을 통해 부단히 발전해갈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전위의 의식성과 노동자민중의 자발성이 결합하여 의식적 자발성이 발전하고 대중의 전위화가 진전될수록 노동자민주주의도 확대⋅심화되고 평등사회도 앞당겨질 것이다. 그렇다고 비판과 검증을 위한 끝없는 논쟁이나 분파투쟁 따위가 절대 선이라는 것은 아니다. 논쟁을 중단하고 실천으로 들어가야 할 시점을 놓치면 문제 해결이 불가능해지는 구체적 상황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정치적 판단에서는 시간적 변수가 결정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지난 정권의 핵심인사는 정권 초기부터 ‘이제 투쟁의 시대는 끝났다’고 계급타협의 신조를 자랑스럽게 설교하며 오늘의 반동정권을 예고했다. 노동운동을 대표했던 인사가 앞장서서 사회적 대화로 변혁의 말문을 틀어막았다. 검찰⋅언론⋅교육⋅노동 등 쟁점분야 어디서도 개혁 같은 것은 없었고, 양극화는 속도를 높였으며, 가계부채는 폭발 직전 수준으로 차올랐다. 경제적 서열구조는 요지부동으로 굳어졌다. 노동자민중이 체감할 만한 촛불의 효능은 남북긴장이 조금 완화된 것뿐이었다. 반동정권의 탄생을 위해서는 보수언론들의 단기 공작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면 다음 정권에는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자본독재를 넘어서는 일은 꿈도 꾸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민중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금 자본독재체제에 순응하며 보수정당에 어쩔 수 없이 의존하는 다수의 노동자민중을 독자적 노동자정치운동의 변혁적 자력장 속으로 끌어들여 동화하지 못하면 노동자국가 건설은 불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합법이냐 아니냐, 선거냐 아니냐 등의 방법 문제는 노동자국가와 평등사회 건설이라는 목적의식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 오늘 소수파인 변혁적 노동자정치운동세력이 자본권력과 정치권력에서의 열악한 조건을 뚫고 다수파로 성장하는 것, 독재정권 타도와 자본독재 극복을 위한 노동자국가 건설의 전망 아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에 매진하는 것은 현시점에서 ‘진리의 시간적 핵심’을 움켜잡는 일이다.
14. 직접성과 매개의 변증법
오늘의 자본독재 하에서 대다수 노동자민중 각자가 겪는 불행을 사회적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국주의단계 자본의 작동방식에 대한 구체적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는 결코 직관에만 의지해 직접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념들을 통한 체계적 인식의 확대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자본독재는 이러한 개념적 체계적 인식의 발전을 어떻게든 막으려 든다.
레닌은 사회민주주의자가 노동조합의 서기가 되어서는 안 되고 민중의 호민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전횡과 억압이 어디서 발생하건, 어떤 계급과 계층에 관계된 것이건’, 그러한 현상들에 대응하여 그것들을 ‘경찰의 폭력과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전체상으로 종합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프롤레타리아트 해방투쟁의 전세계적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기 위해 어떤 사소한 사건이라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사소한 사건’을 활용해 ‘해방투쟁의 전세계적 역사적 의의’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어떤 ‘전횡과 억압’ 현상이든 ‘자본주의적 착취’와 관련짓기 위해서는, ‘모든 문제는 자본주의 탓이야’라는 식의 추상적 예단이 아니라 사소한 사건이나 현상들과 자본주의적 착취 메커니즘 사이의 실제 관계들을 치밀히 관련지어 파악하고 개념화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사고방식⋅감각⋅욕구 등을 압도하는 제국주의적 자본독재의 영향들을 일일이 밝혀내고 극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경제성장과 함께 자본헤게모니가 강고해지는 국면에서 자신의 직접적 체험방식을 사회현실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극복하려는 사람들은 지배조류에 맞서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다. 고군분투의 요체는 제국주의적 자본독재의 물적 토대가 자신의 체험방식에 끼치는 영향들, 혹은 현재의 의식을 형성해 놓은 매개과정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공존⋅공영을 구현하는 노동자민주주의와 평등사회 건설에 적합한 내용과 형식으로 바꿔가는 자기혁신과정이며, 또한 이러한 과정 속에서 얻어낸 새로운 인식과 체험방식을 가능한 한 널리 공유해가는 과정이다.
지금처럼 자본증식의 한계와 위기로 인해 자본헤게모니가 흔들리는 국면에서는 주체 변화에 어느 정도 가속도가 붙으리라 기대할 수도 있다. 레닌이 역설한 ‘호민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자본독재 문제의 본질을 폭로하고 노동자국가와 풍요로운 평등사회의 구체적 청사진을 만들기 위해 복잡다단한 매개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론 생산은 일차로 중요하다. 하지만 이 매개과정을 함축하면서 사태의 본질을 명쾌하게 드러내주는 선전의 언어들을 능숙하게 발명하고 구사할 줄 아는 활동가들의 조직적 체계적 실천 역시 대중적 주체 변화와 운동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이 역량이 자본독재에 맞서는 전쟁 속에서만 폭발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15. 칸트의 이율배반과 변증법적 모순
헤겔은 감성⋅오성⋅이성을 엄격히 분리시키는 칸트와 달리, 오성을 통해 매개되지 않은 감성적인 것 따위는 단연코 없으며, 그 반대도 없다고 본다. 칸트의 이율배반론은 경직된 감성과 오성의 구분에 근거하지만, 헤겔은 그러한 구분을 고수하지 않는다.(입문108)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감성적 경험을 넘어서 인식을 추구한다고 해서 칸트가 주장하듯 과오에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이율배반적 사유 자체가 ‘정신의 본질을 통해 필연적으로 규정되는 활동들 가운데 하나’라는 칸트의 생각을 적극 받아들이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유는 본질적으로 모순들 속에서 운동한다’는 논리를 발전시킨다.(입문109) 이 점에서 칸트의 이율배반론은 변증법적 모순론의 필연적 계기다.
A=A라는 동어반복을 넘어서는 인식형식 A=B는 같지 않은 것을 같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모순을 포함한다. 이러한 모순에 머물지 않고 전체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헤겔이 구상한 변증법적 개념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개념의 운동에서는 개념들의 상호의존성, 상호이행, 대립의 상대성 등이 변증법의 본질적 요소로 부각된다.(철학150-151) 이러한 요소들이 주체의 자의적 궤변의 산물이 아니라 대상 자체에 근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순을 사유의 기관으로 만드는 밑바탕에는 현실 자체의 모순적 적대적 성격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다.(입문134-135)
비변증법적 사유는 화해 없는 배척과 논박의 정신에 매몰되어, 대상의 유동적 본성과 유기적 통일성, 그 계기들의 필연성과 전체의 생명을 보지 못한다. 대립의 상대성이나 개념들의 상호의존성, 상호이행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다. 칸트가 감성⋅오성⋅이성의 역할을 엄격히 갈라놓았듯이, 민족해방과 계급해방, 시민운동과 노동운동, 정치와 경제, 과학과 이데올로기, 예술과 정치, 개인과 사회 등등 제반 영역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칸막이를 치고 그 영역들의 상호의존성 혹은 상호이행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그리고 각자 칸막이 안에 머무는 것을 미덕으로 삼기도 한다. 이로써 어디에나 칸트의 이율배반들처럼 절대적 타당성을 자부하며 영원히 마주볼 뿐 만나지 못하는 평행선들이 그어진다. 이러한 사유방식은 자본독재가 애용하는 분할통치의 좋은 먹잇감들을 양산한다. 칸트의 인식론이 직접적으로, 혹은 여러 우회로를 통해 우리의 운동문화에 남겨놓은 난치병은 물 자체에 대한 불가지론이나 주관적 관념론 이상으로 비변증법적 분류법적 사고방식에 기인한다.
16. 모순과 차이의 형이상학
서열체계는 제국주의적 경제성장과 함께 자본독재를 호위하는 최종병기 역할을 해냈다. 차이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지배질서 혹은 자본의 체계적 분할통치 전략과 별다른 마찰을 만들지 않으며 번창해 왔다. 단결투쟁하지 말고 차이를 존중하자는데, 그리하여 각자 차이 나게 살겠다는데, 자본독재가 그것을 권장하면 했지 굳이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어떤 차이가 차이에 머무는 한 긍정하고 존중하겠지만, 그것들이 억압적 지배관계 속에서 차별의 먹잇감으로 둔갑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차이 긍정’의 이념은 차별에 맞선 전쟁에서 ‘차별을 없애라’는 직접적 구호보다 무기력하며, 차별에 맞서는 전략을 생산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차별 문제에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긍정이 아닌 부정을 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차이 형이상학은 부정과 모순을 끝없이 경멸한다. 차이형이상학자 들뢰즈의 주장에 따르면 “모순은 깊이가 얕고 차이만큼 깊지 않”다. “차이는 모든 사물들의 배후에 있다. 그러나 차이의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다.”(차이145)
들뢰즈는 대립⋅모순⋅소외 등 헤겔의 개념이 자본론에서는 사회적 분화(분업)로 대체된다고 왜곡한다.(차이447) 그러나 맑스는 자본론에서도 적대를 명확히 의식하고 드러내며 이를 궁극적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보는 적대의 논리를 구사한다. 변증법은 제반 모순들의 현실적 비중과 상호관계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통해 최적의 해결방안을 찾고자 한다. 지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불평등한 서열체계는 부정의 논리와 극복의 전략을 요구한다. 자본과 노동, 제국과 종속국,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차이를 긍정하자는 말은 역사적 고통과 투쟁에 대한 조롱이 될 것이다. 현실과 사유에 내재하는 모순들을 충실히 감당해내는 사유방법, 즉 변증법적 사유는 그 투쟁의 배후라는 차이의 이념 따위가 아니라, 가시적 ‘표면영역’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구체적 국면들과 씨름하는 데에서 자신의 본분을 찾을 것이다.
17.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현실적 모순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그것에 대한 인식을 흐려놓는 이데올로기들은, 모순의 극복을 방해함으로써 모순관계를 통한 권력과 이익의 독점을 유지하는 데에 봉사한다. 기득권세력은 끊임없이 계급화해와 사회적 대화 등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현실적으로 엄존하는 적대와 모순을 마치 없는 것처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들은 자본독재와 그 토대인 계급모순을 극복할 수 없도록 노동자들의 변혁적 정치적 에너지를 자본독재 내부의 권력투쟁 속에 흡수하려 든다.
레닌이 밝히는 변증법의 주요 특징들 16가지 가운데에도 “대립물의 통일”, “이들 대립물, 모순된 경향들 등의 투쟁 내지 전개”가 포함되어 있다. 나아가 “대립물의 통일뿐만 아니라 각각의 규정, 각각의 질, 각각의 특징, 각각의 측면, 각각의 성질이 저마다의 대립물로의 이행” 또한 주요 특징들에 포함된다.(철학177-178) 이러한 역동적 논리에 비춰볼 때 제반 영역들 사이에 엄격한 칸막이를 치는 사고방식, 예컨대 ‘인식론적 단절’을 들먹이며 초기 맑스의 이데올로기적 특성과 후기 맑스의 과학적 본질을 엄중하게 갈라놓는 알튀세르의 사고방식은 변증법 이전의 기계론 혹은 형이상학으로 퇴행하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의 통일과 상호전도를 추적하면서 맑스는 생산의 출발적 지위를 명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예술적 대상은 −다른 모든 생산물도 마찬가지로− 예술 감각이 있고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아는 공중을 창출한다. 따라서 생산은 주체를 위한 대상뿐만 아니라 대상을 위한 주체도 생산한다”고 주장한다.(요강1,61-62) 이처럼 생산의 출발적 지위를 인정한다면, 노동자민중의 현재 욕구를 근거로 변혁운동의 불가능성을 스스로에게 입증하려 애쓰는 패배주의가 번성할 수 없을 것이다. 맑스의 유물변증법에는 주체가 빠져 있다는 식의 헛소리가 설 자리도 별로 없을 것이다. 운동의 주체는 어떻게 변혁적 욕구를 대중화할 것인지, 이를 위해 어떤 변혁 모델을 생산할 것인지, 자신의 실천을 통해 어떤 변혁 전망을 제시할 것인지 더욱 고심하고 노력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모순에 빠지기도 하지만, 이 모순은 주체들의 적극적 운동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혁명을 통해 생산관계⋅소유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조건을 충족하는 한에서 그렇다. 물론 혁명 없이는 생산관계를 바꿀 수 없다. 생산관계를 바꾸는 것이 혁명의 요체이기도 하다. 현대의 생산력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발전의 형식이 아니라 족쇄로 만든지 이미 오래되었다. 문제는 생산관계를 바꿀 주체의 형성이다.
그렇다면 주체의 측면에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적대적 모순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 이 모순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처럼 자본주의의 특정한 단계에 이르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출발과 함께 형성되며 자본독재가 유지되는 한 존속한다. 하지만 이 모순 역시 영구불변의 자연상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순이며, 따라서 주체들의 적극적 운동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소유관계의 폐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계급 자체를 소멸시킴으로써 극복된다. 노동자국가를 건설하더라도 자본독재의 유물이 노동자들의 삶을 잠식하고 있는 한 이 모순은 설혹 완화된 형태로일지라도 다양하게 변형되어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장애가 될 것이다. 특히 노동자국가가 범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되기 전 제국주의세력과 대결하는 단계에서는 한동안 계급모순의 적대적 성격이 더욱 첨예화될 것이다. 이때 자본독재 하에서 불가능한 생산양식을 통해,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자유롭고 평등한 활동을 보장하는 물적 조건을 만드는 것 자체가 계급투쟁을 결정하는 무기다.
18. 주요모순과 전략적 사유
변증법적 사유는 모순에 집중함으로써 개념적 인식의 전략적 효율성을 높인다. 마오의 「모순론」은 우리의 변혁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나의 주요모순’ 찾기는 운동의 선결조건으로 존중받았다. 그런데 그 결과는 그다지 고무적이지 못하다. 객관적 발전단계에 따라 가변적이어야 할 ‘일시적’ 주요모순이 정파들의 존속과 더불어 수십 년째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주요모순을 파악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 나름 찾아냈지만, 모든 문제가 쉽게 풀리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주요모순 개념의 전략적 생명력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해 자본독재 극복과정의 현단계에서 모순들이 차지하는 현실적 비중에 대해 면밀하게 검토한다면, 어느 하나의 모순을 주요모순으로 확정하는 것보다 자본독재를 관통하는 계급모순과 여타 모순들이 맺는 본질적 상호관계를 밝히는 데에 역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로써 레닌이 구상했던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을 결합하는 사회혁명만 아니라, 부차적 모순들에 전념하고 있는 여러 부문운동들까지 자본독재에 맞선 해방전쟁에 적극 참여할 수 있는 경로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혁명기간 전체에 적용되는 전략과 비교적 짧은 기간에 적용되는 전술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그런데 그가 제시하는 주요 전술적 과제에는 단기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과제가 포함된다. “문제는 전위가 구체제의 존속이 불가능하고 그것의 타도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수백만 대중이 이러한 필연성을 이해하고 전위를 지지할 각오를 표명해야 한다는 데 있다.” 이처럼 수백만 노동자민중이 자본독재 타도의 불가피성을 인식하고 해방전쟁의 주체로 나서는 것은 짧은 기간에 행동노선이나 투쟁방식 혹은 조직형태만으로 해결될 전술 문제가 아니다. 그러한 주체적 조건의 변화를 만들어내려면, 현재의 적극적 운동주체 혹은 전위부터 공유할 이론적 무기를 충분히 개발해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고립분산된 진보적 전문지식인들이나 개별 연구소 혹은 개별 조직 차원의 소생산적 논의구조를 넘어서는 대규모 대안이론 생산 및 대중적 검증⋅공유 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대중적 검증⋅공유 사업에는 무엇보다 장기간의 조직적 실천이 필요하다.
19. 현상과 본질, 그리고 과잉결정
“사물의 현상형태와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불필요하게 될 것”(자본3,1037)이라는 맑스의 주장은, 제국주의 자본독재 이데올로기가 과학의 깃발까지 내걸고 삶의 전 영역을 장악해갈수록 더욱 절실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다. 핵폐수가 안전하다는 핵물리학적 괴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평등사회는 인간의 본성상 불가능하다는 문화인류학적 공론(空論)까지 버젓이 사이버 세계를 휘젓고 다니며 노동자민중의 감각과 사고방식을 잠식하고 있다. 성적⋅인종적⋅종교적⋅지역적⋅세대적 차이 등등 존중해야 마땅할 차이들을 적대적 주요모순처럼 부풀리면서, 자본과 노동 혹은 제국주의 세력과 예속국 민중 사이의 현실적 주요모순을 은폐하고 이로써 지배관계를 유지⋅강화하려 드는 것은 자본독재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 사업이다.
이러한 사정을 원론 차원에서 충분히 의식하고 있더라도, 실제로 총체적 관점을 취하면서 사태의 현상형태를 꿰뚫고 본질을 좀 더 깊이 인식해가는 데에는 지난한 노력이 요구되며 종종 혼선이 야기되기도 한다. 근래에 벌어지고 있는 제국주의 관련 논쟁이 소모전과 또 다른 분열로 귀결되지 않기 위해서는, 특히 현재까지 중국이 보여준 자본주의적 측면 혹은 다자주의의 현상형태 이상으로 본질적 발전경향을 주시하고, 그로부터 무엇을 경계하거나 배울 것인지 파악하는 분석적⋅종합적 사유가 필요할 것이다.
유물변증법을 표방하는 알튀세르의 과잉결정론은 마오의 모순론을 끌어들이면서 경제주의, 환원주의, 목적론, 경험주의 등 비방의 어휘로 맑스의 변증법에서 헤겔의 흔적을 지우려 한다. 그러나 실천론 차원에서 마오의 주요모순-부차모순 개념을 답습한다. 마오의 모순론에서는 ‘하나의’ 주요모순을 찾아내는 데에 전력을 다하면 부차모순들이 손쉽게 해결될 수 있는지 따질 필요 있다. 그런데 알튀세르의 과잉결정도 하나의 주요모순이 존재함을 당연시할 뿐이다.
속류유물론적 경제주의에 대한 비판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과잉결정론 없이도 제2인터내셔널의 경제주의는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논박당한지 오래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경제주의 비판은 현실사회주의 운동의 패배 이후 계급론이나 토대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환원주의로 낙인 찍는 효과를 충분히 발휘했다. 그리고 이는 반-노동자중심주의적 다원주의가 번창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최종심급에서는 경제가 결정적이라는 원론을 고수했다. 그렇더라도 이러한 원론이 각 심급과 현상 전체에 스며들어 지배력을 발휘하는 비판적 연구를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알튀세르는 헤겔 변증법의 주요 개념들인 부정의 부정, 지양, 양질전환, 소외 등을 한묶음으로 쓰레기 취급한다. 이런 악담에 우리가 주눅들 이유는 하나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주요 개념들을 상투어로 타락시키지 않고 해방전쟁의 무기로 활용하기 위한 개념의 노동이다.
20. 현단계 주요모순과 노동자정치운동
주요모순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운동의 양상과 결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주요모순과 부차모순의 구분은 전략목표 설정의 전제조건이다. 이때 모순들의 경중만 아니라 해결의 우선순위, 혹은 동시 해결의 가능성도 함께 파악할 필요가 있다. 또한 주요모순이 다른 모순들과 어떻게 관계하는지를 밝히는 것도, 운동의 역량을 ‘약한 고리’에 집중하거나 필요시 적재적소에 분산 배치하는 전략의 유연성을 위해 유용할 것이다. 나아가 우선적 과제들의 해결에 따라 변화된 국면에서 새로 부상할 주요모순을 예상하는 것도 운동의 ‘방향상실’을 막고 지속적으로 주체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현단계에서 파쇼정권과 노동자민중 사이의 모순이 주요모순으로서 그 폭발력을 충분히 갖춰왔다. 이 모순은 파쇼정권 타도를 통해 긍정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 현정권은 공공연히 노동자민중을 적으로 삼고 그럴듯한 포장도 없이 제국주의 자본독재의 이익에 노골적으로 복무함으로써, 오히려 자본독재에 복무하는 그 본연의 기능을 저버리고 있다. 자본독재세력이 보기에도 눈치코치 없이 나대는 현정권은 지속가능한 효율적 착취와 지배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정권타도를 통해 현단계의 주요모순을 해결해갈 경우, 다음 단계의 주요모순을 어떻게 파악할 것이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새로운 주요모순은 허공에서 갑자기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 속에서 이미 강력히 작동하고 있다. 노동자민중이 우리 사회의 절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과 노동자민중이 그만한 비중의 정치권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사이의 모순이야말로 내일의 주요모순 아니겠는가. 이 모순은 노동자정치운동의 비약적 성장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
파쇼정권 퇴진운동의 열매를 다시 보수 기득권세력에 고스란히 헌납하지 않으려면, 보수양당과 대립하는 독자적 노동자정치운동의 존재이유를 퇴진운동 과정에서도 만천하에 밝혀가지 않으면 안 된다. 퇴진운동 결과로 다시 보수 기득권 세력인 민주당 정권이 들어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 경우에도 민주당 정권이 그 동안 자본독재의 주요 분파로서 드러낸 한계를 대중적으로 폭로해감으로써, 노동자민중이 직면한 제반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독자적 노동자정치운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인식을 널리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독일 사민당이 급성장하던 시기인 1881년에 엥겔스는 영국의 노동자 정치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글을 쓴다. 즉 노동자계급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정치적 이해를 거의 전적으로 토리당원들, 휘그당원들, 급진파의 수중에, 상류계급의 사람들의 수중에 남겨두고 있다. 그리고 거의 이십오 년 동안 영국의 노동자계급은 ‘거대 자유당’의 꼬리를 이루는 데 만족해 왔다. 이것은 유럽에서 가장 잘 조직된 노동자계급에게 걸맞지 않는 정치적 지위이다.” 이어서 엥겔스는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공업 및 농업노동자계급이 인민의 막대한 다수를 이루고 있는 영국에서는, 민주주의란 더도 덜도 아닌 노동자계급의 지배권을 의미한다.”(노동자당485) 하지만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이해를 돌보는 일을 “지주, 자본가, 소매상인 등의 계급”과 “그들을 쫓아다니는 법률가나 신문기자 등등에게 허락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노동자의 이해를 위한 개혁이 그렇게도 천천히, 그렇게도 비참할 정도로 조금씩” 이루어질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영국의 노동자민중은 하려고 하기만 하면 되며,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이 요구하는 어떠한 개혁도 사회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노동자당486-487)
노동자정치운동의 비약적 성장을 위해서는 운동의 통일이 필수적이다. 오늘날 군소정당과 정파들을 통해 소규모로 분산된 채 각자도생 중인 형태로는 대중들의 희망과 에너지를 일깨울 수 없다. 물론 무원칙적 운동 통일로는 노동자정치운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운동 통일의 첫째 원칙은 자본독재 속의 한 분파가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이해에 복무하는 독자적 운동세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원칙은 절대다수 노동자민중이 국가권력의 주인인 실질적 민주국가, 즉 노동자국가 건설을 핵심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원칙은 궁극적으로 제국주의 단계 자본독재를 전인류 차원에서 극복하고 노동자 국제주의 정신에 입각해 풍요로운 평등사회로 나아가고자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을 공유할 수 있는 한, 어떤 개인이든 조직이든 정파든 통일된 노동자당 내부에서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으면서 함께 세부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 연구하고 검증하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당 내부 정파들 간의 세부적 입장 차이들은 자유로운 논쟁을 통해 조율해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협소한 정파적 칸막이들을 허물고, 인류의 무궁무진한 유산들을 재료 삼아 분석적이면서 종합적인 변증법적 사고를 주체적으로 가동함으로써 아직 구체화된 바 없는 대안사상⋅대안정책을 생산하고 범인류적으로 활용할 만한 대안모델을 구현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대안의 요체는 노동자국가를 통한 풍요로운 평등사회 건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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