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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강 권고를 위한 금언들(갈 5:25-6:10)
1. 성령의 인도로 사는 그리스도인(5:25-6:1)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우리는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우리는 잘난 체하거나 서로 노엽게 하거나 질투하거나 하지 않도록 합시다.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앞에서 성령의 열매를 언급함으로써 성령적인 삶의 원칙을 제시하였다면, 여기서는 어느 정도 구체적인 권고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읽어보면 이 권고들은 일종의 금언 또는 격언 형식(sententia)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 반성”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는 그리스 사상이 지배적인 이방지역인데, 명령을 내려서 복종시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단락은 성령을 강조하고, 나머지 금언들은 그리스도교를 넘어선 일반적인 교양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것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사람은 잘난 체하거나, 분노를 유발하거나, 질투하지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을 벌이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데, 그때 필요한 것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잘난 체”라는 말은 지적이고 도덕적인 허풍으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행동입니다. “서로 노엽게”한다는 말은 싸움을 거는 행동인데,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보이는 자극과 도전을 의미하고, “질투”는 같은 상황에서 서로 얼굴을 돌린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남을 자기 아래 굴복시키려하지도, 남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정복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질투와 증오심으로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어려운 금언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면, 바울의 “자신을 돌아보라”는 권고가 어쩌면 핵심적 해결책인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세계에서 벌어지는 “못된 일들”을 보면,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합니다. 본문에는 “죄에 빠진 일”(trespass, παράπτωμα)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때 이것을 바로잡아(restore)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모른 척하거나, 정말로 못 느끼고 넘어가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온유한 마음으로 하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앞에 언급한 대로 잘난 척도, 분노도, 질투도 아닌 마음으로 하라는 것인데, 잘못하면 잘못을 고쳐준다고 나섰다가 자신도 같은 잘못을 범하는 유혹에 빠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은 어떠했는지 돌아보라는 것이 바울의 깊은 권고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깨달음을 얻는 것이 자신에게 정말로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2. 타인과 자신은 서로의 거울입니다(6:2-4)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자기에게는 자랑거리가 있더라도, 남에게까지 자랑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이 “서로 남의 짐을 져주는 것”이라니 무슨 뜻일까요? 친구와의 우정(friendship)에 대하여 이미 소크라테스도 자주 강조했던 것으로 보아, 서로의 짐을 함께 지는 것은 그리스 세계의 덕목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황금률인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라는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문장을 곡해해서 “남을 대접하면 똑같이 자신도 대접을 받게 된다.”고 해석하면 큰 문제를 만듭니다. “서로 남의 짐을 져주는 것”을 곡해하면, 상대방에게 나의 짐을 지도록 강요하는 일도 가능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또는 내 짐을 대신 져 주는 사람에게 계속 기대는 것도 내버려 두어야 할지 모릅니다. 물론 그런 뜻이 아니겠지요.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말 속에 그 해답이 있다고 봅니다. 두 사람이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할 때에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고, 같은 수고를 하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밭을 갈 때 소의 곁에 겨릿소를 함께 멍에를 지도록 묶어주면, 한결 수월하게 일을 마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겨릿소가 제 멋대로 방향을 바꾼다면, 밭일은 엄청나게 힘들어집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데에는 협력이 필요합니다. 같은 정신, 같은 열정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불의한 일”을 함께 도모하거나, 서로의 잘못을 눈감아주는 그런 이상한 “짐져주기”는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아마도 율법과 할례의 짐이 문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같은 문제를 같이 고민하면서 율법 대신에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는 길을 함께 모색하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주는 두 번째 금언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된 것처럼 생각하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라는 말 역시 철학자들이 이미 언급한 것입니다. 델피 신전의 격언 “너 자신을 알라.”와 비슷한 느낌입니다. 여기서는 거짓교사들의 명령 몇 가지를 실천했다고 마치 자신이 성령의 인도대로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향한 경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3장 18절에서도 바울은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말하고, 야고보도 자기 마음을 속이면 헛된 신앙이라고 말합니다(약1:26)
사람은 누구나 “외양”과 “실제 모습” 두 가지를 가지고 삽니다. 저는 이것을 “남이 아는 나”와 “자기만 아는 나”로 부릅니다. 이 두 가지가 완전히 일치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해서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는 외양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실제 모습은 그러하더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남에게 불편함을 끼치지 않는 덧이 더 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체면 같은 것입니다. 더 좋게 표현하면 교양이 있는 것이지요.
가장 큰 문제는 “실제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외양”으로 보이는 모습이 자신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데, 똑같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그렇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일 수 있어야 남을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무엇을 좀 잘 하였다고 해서 남에게 드러내 놓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4절에서 “자기 일을 잘 살펴보십시오.”라고 하는 말 속에서 “살펴보다”(dokimazo, δοκιμάζω)라는 말은 “시험하다”(test), “증명하다”(prove)의 뜻입니다. 적당히 보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치르듯이 뜯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당시 철학자들이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비판적으로 검토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용어를 채택한 것은 당연히 할례와 율법준수 같은 행동주의적인 단순한 신앙을 경계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가지 행동을 남기는 사람은, 그 행위를 기억하고 자랑거리로 내놓기 좋아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가르치는 신앙은 그리스도인의 “자기성찰”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부족한 것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입니다. 그 때문에 교회 안에서 분쟁이 생기고, 부끄러운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3. 자신의 책임을 스스로 감당하기(6:5-6)
“사람은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인 스스로 져야할 짐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당시의 격언 중에 “세속적인 직업을 감당조차 못하는 우리가 철학자라는 직업을 맡고 있다니 얼마나 무거운 짐인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철학자라고 해서 먹고사는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앞서 서로의 짐을 대신 져주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자신이 맡아야 할 것을 남에게 미루지 말라는 의미도 되고, 또 자기가 질 수 있는 만큼만 감당하려고 하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맡아야 할을 남에게 미루지도 말아야하고,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자기가 지겠다고 욕심을 부리지도 말아야한다는 뜻이 되겠지요.
끝으로 등장하는 금언은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6절) 역사적 정황과 문자적인 내용을 고려하여 나온 해석은 “학생은 스승과 생활용품을 나누라.”는 것인데, 고대의 교부들이 이렇게 해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혀 그리스도교 적인 특성을 담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혹시 이 말이 당시에 관심을 끌던 “공동재산제”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말이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갈라디아의 교육상황에 관한 언급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즉, 갈라디아 교회의 교육을 담당하는 진정한 교사들에 대한 처우를 언급한다고 추측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4. 종말론적 경고(6:7-9)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다 심는 사람은 육체에서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에다 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자기를 속이지 말라.”는 경구가 반복해서 나오는데, 저는 이 말을 “자신에게 속지 마시오.”라고 이해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행위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라는 말이 참 가슴에 와 닿습니다. 조롱한다는 것은 “경멸한다.”는 뜻입니다. 드러내 놓고 하나님을 경멸스럽게 대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속이면, 그리고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면 자기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게 됩니다.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도 새로운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니, 마지막 심판을 뜻하는 것입니다. 할례와 율법주의를 따르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미 없게 만든다는 갈라디아서 전체의 사상이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경구 안에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 한 번 더 강조하는 것입니다. 육과 영을 대비시켜 썩을 것과 영생을 비교합니다.
9절은 종말론적인 권고의 마지막 부분인데, 바울은 지금까지의 권고들을 “선한 일”이라고 부릅니다. 선한 일은 5장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져주면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내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선한 일은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지녀야하는 끈기 있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5. 요약(6:10)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갈라디아서의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교인들에게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주의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대한 신앙을 방해하는 것이 문제였다면, 오늘날에는 어떤 경우에 해당될까요?
신앙의 외적인 형식만 충족하면, 그 외의 다른 모든 일들이 자동적으로 신앙적인 판단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쉬운 말로하면, 교회 일에 충성하고 인정받으면, 정말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일까요? 그의 모든 삶에서 하는 일이 그리스도의 신앙에 합당한 일이 될까요?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반성하는 자세가 오히려 더 신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실까 숙고해야하고, 혹시라도 이것이 나의 육신적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 고민해야합니다.
믿음의 식구끼리 각각의 욕심대로 판단하기 때문에 충돌과 분열이 발생합니다. 서로 자기 뜻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믿음의 한 식구가 아닙니다. 한 편이라도 한 발 물러서서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아니라 이 믿음의 공동체가 중심이 되도록 자신의 입을 닫고 침묵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렇게 서로를 온유하게 대하기 시작할 때, 성령께서 직접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2025년 2월 23일
홍지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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