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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화해할 때 / 창 3:17-19, 고후 5:16-21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밀림의 왕자인 사자 한 마리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평소 사자는 늘 마음 속에 천하에 자기를 이길 자는 아무도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마침 모기 한 마리가 지나가다가 사자와 싸워보기로 결심하고 사자의 코, 눈, 귀를 사정없이 물었다. 잠이 깬 사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모기를 잡아죽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결국 자기 힘에 지쳐서 쓰러지고 말았다. 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산에 있던 작은 토끼들은 호랑이만 보면 겁을 낸다. 호랑이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가 토끼이기 때문에 토끼들은 호랑이만 보면 도망치지만, 속도가 빠른 호랑이에게 잡히게 마련이다. 하루는 토끼 몇 마리가 의논을 했다. 호랑이가 잘 다니는 곳에 함정을 파두고, 위에는 나뭇가지를 덮어서 호랑이를 유인했다. 멋모르고 토끼를 향해 뛰어가던 호랑이가 토끼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이솝의 우화가 우리에게 잘 읽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약하고 작은 짐승이 강하고 큰 짐승을 골탕먹이는 장면에서 어떤 쾌감을 느끼기 때무이다. 이솝의 우화가 한국인의 심성과 비슷해서인지 한국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 중에 하나라고 한다. 심지어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여러 가지 이솝의 우화가 소개되고 있다.
옛적부터 내려오는 민화에도 이솝의 우화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약자가 강자와 싸워 강자를 이겼다는 내용들이다. 홍길동 전, 봉이 김선달, 놀부와 흥부 이야기가 이런 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민화나 이솝의 우화를 볼 때 우리는 통쾌감을 느낀다. 약자가 강자와 대결해서 이겼다는 데에 동정심과 함께 공감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적인 입장에서 이런 우화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어딘지 모르게 부족한 점을 느끼게 된다. 약자의 한을 강자와 싸워서 해결해 보려는 흑백논리를 발견한다. 대결의식을 보게 된다. 사자와 모기, 호랑이와 토끼, 놀부와 흥부, 강자와 약자, 부자와 가난한 자, 이런 흑백간의 대결, 싸움은 있지만 이들을 화해하게 하는 중보적 역할을 담당한 제3의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 대결이나 싸움은 있지만, 갑과 을이 있지만, 갑과 을을 화해하게 하는 어떤 중보적인 제3의 병이 없다는 것이 이솝 우화나 우리들의 민화가 지니는 약점이다. 대결은 있지만 화해는 없다. 그래서 매사에 투쟁과 싸움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성서는 대결이 아닌 화해의 정신을 가르쳐 준다. 싸움이 아니라 화해의 정신을 가르쳐 준다. 싸움이 아닌 평화를 가르쳐 준다. 사 11:6절은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라고 가르쳐 준다. 얼마나 평화스러운 모습인가? 이리와 어린 양은 강한 자와 약한 자의 관계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집어삼킬 수 있다. 또한 약한 자가 힘을 모아서 강하 자를 놀릴 수 있는 숙적의 관계이다. 표범과 어린 염소, 송아지와 사자와 어린 아이가 평화스럽게 공존하고 있다. 화해와 평화의 모습을 성서는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생각과 너무 대조적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요즘 호주에서는 이색적인 지도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 세계 지도를 거꾸로 그린 그림이다. 남극이 위로 가고, 북극이 아래로 그려진 지도이다. 호주 자체가 얼마나 큰 나라인가?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 보고 있는 세계지도를 호주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자존심이 상할만 하다. 윗쪽에는 미국이나 소련 등의 강대국들이 버티고 있고, 제일 아래 발바닥에 밟힌듯이 호주가 있으니까, 호주는 항상 위에 있는 나라들에게 눌려있어서 큰 나라답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지도 제조업자가 지구는 둥근데, 우주 공간에 떠 있는 공과 같은데, 하나님께서 볼 때 위 아래가 어디 있느냐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북쪽을 위로, 남족을 아래로 하는 개념을 정립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이러한 개념을 바꾸어보고자 한 것이다. 남극을 위로 올리고 북극을 아래로 내렸더니 정말 멋있었다. 미국이나 소련이나 중국이나 북반구 대륙의 강대국들이 아랫쪽에서 두 손을 펼치고, 그 위에 호주가 놓이게 되었다. 호주가 마치 세계의 상층부, 세계의 중심부에 위치한 느낌을 주었다. ‘과연 호주는 멋잇는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호주 사람들이 세계지도를 거꾸로 변경시킨 다음엔 ‘우리가 세계의 중심부에 있구나! 세계가 우리를 떠받들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지도를 거꾸로 변경시켜 놓았듯이, 이 세상을 변혁시켜 보겠다는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많이 나타났다. 그 대푲버ᅟᅡᆨ인 두 인물을 찾는다면, 예수와 마르크스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둘을 비교해 보면 변혁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세상을 윗사람과 아랫사람으로 양분시킨다. 예를들면 높은 자와 낮은 자, 강한 자와 약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이 있는 자와 백성, 기업주와 노동자, 이렇게 양분시켜 놓고 어떻게 하면 윗사람을 넘어뜨리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위치에 올라갈 수 있겠느냐, 곧 위치 변화, 변경의 혁명을 시도한다. 이 변혁의 과정에는 장말 피투성이의 싸움이 계속되기 마련이다. 윗사람은 자기 체제 수호를 위해 싸우고, 아랫사람은 체제변혁을 위해 싸운다. 만약 아랫사람이 성공해서 윗사람이 된다면 또 자기 체제의 구축을 위해서 피를 흘리는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세계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전혀 다르다. 윗사람과 아랫사람, 강한 자와 약한 자, 이렇게 이원적으로 세상을 구분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하나’임을 전제한다. 마르크스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킨데 비해서, 예수는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위와 아래를, 나와 너를 대결적 관계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 ‘하나’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갈 3:28절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본문에 보면 민족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계층이 다르고, 남과여, 성이 다르다. 고대사회에서 민족간의 이질감이 얼마나 컸나? 계층간의 갈등이 얼마나 컸나? 지주와 농민, 귀족과 노예, 엄청난 신분의 차이이다. 남자와 여자, 엄청난 성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세상이 사람들을 이원론적으로 분리시킬 때, 기독교는 비록 민족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성이 다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강조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다른 것이 많아도, 너와 내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우리는 화해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이다. 화해적 관계를 어떻게 가져야 하느냐? 성서에서는 화해를 3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과 먼저 화해해야 한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이 하늘과 땅을 아름답게 지으셨다. 해, 달, 별 그리고 온갖 식물과 동물을 지으시면서 그때마다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기뻐하셨다. 6일째에는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를 사람(아담)이라고 부르셨다. 아담이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흙, 먼지라는 뜻을 가진 ‘아다마’라는 말에서 왔다. 인간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또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함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날, 일곱째 되는 날에 거룩한 안식을 취하셨다. 그리고 그 날을 단순히 아름답다고 하지 않으시고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칠일 중에서 마지막 날인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신 것은 이 날을 통하여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안식일의 창조로 완성되었다. 그 후에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으라고 하셨으나, 선악과는 먹으면 죽는다는 경고를 하시며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사람은 뱀의 꼬임에 빠져서 그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과를 먹었다, 그것을 따먹자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 하게 되고, 하나님을 피하게 되었다. 현대인에게도 선악과가 있다. 과학기술의 첨단이라고 할 원자력이 그것이다. 원자력발전은 막대한 에너지를 공급하며, 원자폭탄은 막강한 군사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원자력은 매력적인 선악과이다. 그러나 원자력발전은 여전히 사고의 위험성이 있다. 올해가 구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 폭발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강대국들이 보유한 원자폭탄은 지구를 수십번 폭발시킬 수 있다. 원자력은 매우 탐스럽기는 하지만 매우 위험한 것이다. 이렇듯이 선악과는 예부터 인간을 계속해서 유혹하고 있다.
첫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과 뱀의 꼬임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안목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그 열매를 탐하게 되었다. 지금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마 6:2절의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분명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보다는 재물을 택하고 있다.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과학기술을 더 의지하고 있음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을 버리면 정녕 죽으리라 하여도, 현란한 물질문명에 인간의 영혼은 마비되고 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 죄의 결과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고 결국은 아담의 아들,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그 형제를 죽이기까지 타락한다.
구약 본문의 말씀과 같이 땅이 아담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 그래서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레 25장에서 안식년에 땅을 쉬게 하라고 명령하시고, 26장에서는 너희가 내 계명을 잘 지키면 땅은 소출을 많이 낼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여러 가지 징벌과 함께 땅을 황페하게 하고 민족을 쫓아내서 땅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식을 누리게 하겠다고 하신다. 지금의 인류문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하고 인간중심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결국 땅이 저주를 받게 되고, 생명은 파괴되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레 18:25절 말씀대로 ‘땅이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낼’ 것이다. 무분별한 경제개발은 땅의 안식은커녕 온갖 쓰레기와 농약으로 땅을 오염시키고, 공기와 물의 오염도 땅을 죽이고 있다. 공기 오염으로 내리는 산성비는 흙에 사는 미생물을 죽임으로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으며, 냉장고, 에어컨에 쓰이는 기체는 지구 상공의 오존층을 파괴시키고 그 결과 자외선을 쪼인 동식물에게 질병과 성장장애 등을 일으킨다. 지금 지구 위에 있는 수천만 종의 생물들은 인간이 만든 온갖 화학물질과 자연파괴 때문에 1년에 수십만 종이 죽어가고 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만이 아닌 만물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우주만물)에 오셨다. 인간중심적으로 사는 우리는 피조물이 인간을 위해서 지어졌다고 착가하고 있듯이, 예수님도 인간만을 위하여 오셨다고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분명히 말씀하듯이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보내셨으며, 만물은 그리스도의 피로 화해를 이루셨으며, 고통 당하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를 갈망하고 있다. 주님이 오시는 날은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거하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는 평화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동안 탐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배반하고 땅이 저주받게 된 것을 회개해야 환다. 만물의 으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며 지금까지 피조물 속에서 횡포를 부리며 교만하게 살아온 것을 회개할 때에 만물과 화해하게 된다.
둘째, 서로간에 화해해야 한다.
우리들 서로간에 화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18-19절이 강조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예수님도 화목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이 예배드리러 성전에 와서 예물을 하나님 앞에 바치려 하다가, 누구와 불화의 마음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거기에 두고, 가서 먼저 화해하고 돌아오라, 그리고 예물을 바치라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 원하시는 예배는 여러분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이웃과 화해적 관계,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갖고 드리는 예배이다. 화해자가 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되겠나?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남을 정죄하거나 매도하거나, 나와 다르다고 구분하기 보다는, 그 사람의 입장이 어떠한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 화해할 수 있다. 화해는 먼저 청해져야 하는 것이지 기다리는 것은 금물이다. 먼저 화해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때로는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고 체면이 깎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75년도에 이집트의 싸다트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 이유는 중동의 모든 나라들이 반대하고 있을 때, 싸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을 먼저 찾아가서 베긴 수상에게 화해를 청한 것이다. 그때 세계는 사다트 대통령을 칭송하면서, 평화를 위해 먼저 일하는 자라고 박수를 보냈던 것이다. 화해는 먼저 청해야 한다. 무조건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애굽의 노에로 팔려가 많은 고생을 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형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으로 왔다. 자기들이 팔았던 요셉이 총리가 되어 있는 사실을 알고 형들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때 요셉은 아무 조건없이 형들을 용서해 준다. 먼저 용서해 준다. 먼저 용서하는 마음이 있을 때 화해가 이루어진다. 상대방을 정죄하고 매도하고 욕하는데 급급할 때는 화해가 이루어질 수 없다. 벌써 자기 자신이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섬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특별히 가진 자가 가진 것을 지키려고 노력할수록 갈등과 대립은 더 심화된다. 오히려 내가 이런 것을 가졌기에 가진 것을 통해서 갖지 못한 자를 섬겨야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돈이 있는 분은 돈으로, 지식이 있는 분으 지식으로, 기술이 있는 분은 기술로, 여러면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과 능력이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 이런 능력을 갖지 못한 자를 섬겨야 되겠다는 생각을 할 때 화해가 이루어진다.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의 특권으로 여기면서 그것을 자기를 위해서 할용하려고 할 때 화해보다는 갈등과 불화가 더 심화되어 간다. 이렇게 해도 화해를 도저히 이룰 수 없을 때에는 인간 가운데 화해를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화해의 정신을 키워야 할 것이다.
셋째, 남들간에도 화해를 이룰 수 있도록 화해의 중보자 역할을 해야 한다.
화해를 위해서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게서 신상수훈에서 말씀하시기를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고, 분쟁을 막으며 화평을 조성하는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트러블 메이커인 반면, 다른 한 사람은 피스 메이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어떤 처지, 어떤 환경에 있을지라도 화평을 위해서 일하는 자이다. 화해를 도모하는 자이다. 화해적 관계를 통해서 그 사회에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이룩해 가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여러 분야에서 대립과 갈등을 겪고 있다. 문제를 대결로 해결하려고 하면 결과는 싸움뿐이다. 지금 인간은 지구의 다른 생물종들을 희생시키면서 ‘사람’이라는 하나의 종만을 위해 살아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땅이 죽고 사람도 따라서 죽는 것이었다. 사람의 육체보다 영혼이 먼저 죽어가고 있다. 그것은 환경오염만이 아니라 사회의 각종 범죄와 부정, 부패, 퇴폐문화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은 위기의 시대이다. 그러나 동시에 대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다. 모든 피조물 위에 군림하던 인간이 겸손히 피조물이 자리로 물러서고 예수님을 중심에 모실 때에 만물과의 화해는 일어난다. 이 위기를 감사하자. 인간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이 위기를 맞이하고서 다시 발견하게 하심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피조물과 인간 사이에 정의가 이루어지고 평화가 오면, 인간이 회복되고 땅이 회복된다. 그러면 창조질서가 온전히 회복되고, 참다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방법대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이루고 모든 인류에게 화해를 위해 일하도록 하신 것처럼, 이러한 하나님의 화해를 성취해 가는 것이 인류의 역사요,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하나님의 화해를 이 땅에 성취해 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6-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