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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의 사랑 / 행 10:34-48, 요 15:9-17
오늘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주일, 광주민중항쟁 15주년 기념식에서 조비오 신부는 대상이 있어야 용서고 사랑이고 화해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이 가진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사랑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도 사랑이다. 그러므로 가장 위대한 인물은 사랑의 사람이어야 하고, 가장 위대한 사업가는 사랑의 실천을 많이 한 사람일 것이다. 참된 의미의 인류 역사라면 정치가 군인 사상가 등 세속의 위인들을 그 역사의 장에서 지워버리고, 이웃을 위하여 더 많은 사랑을 쏟고, 또 사랑 때문에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은 사람들을 그 자리에 옮겨놓고 위인의 칭호를 드려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는 인간의 사회에 불행을 가져온 폭군, 전쟁 지도자를 서술하는데 지면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참된 인류애, 그리고 친구를 위하여 고이 생명을 바쳐 죽은 거룩한 인물들의 기록에는 무관심을 표시하는 듯 매우 인색하였다. 과거 이러한 역사 서술은 수많은 파괴주의자들을 길러주는 방조적 역할을 한 셈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 시대에서 새 위인을 발견하고 또 스스로 이 위대한 인물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랑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 사랑을 위하여 생명을 내놓는 사람을 위인으로 받들어야 하고 우리 인생의 지표도 여기에 두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 인류 역사에 있어서 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우러러 보고 그를 전 인류의 선두에 세우려 함에 조금도 주저할 수 없다. 이 예수님은 스스로 우리들에게 최대의 사랑을 가르쳐 주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우리는 이웃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이웃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바치려면 무엇을 바쳐야 할까? 우리가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은 가장 큰 문제이다. 학교에서 선생은 글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참된 교육이 된다 할 수 있는가? 글을 파는 현대 교육은 벌써 학언이 기업체로 바뀌어진 것이다. 남편은 부인에게 생활비를 벌어다 주는 것으로, 아내는 남편에게 밥해 주고 빨래하는 것으로 그것이 가정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가정은 이미 가정이 아니라 하숙집이 된 것이다.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참으로 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나? 이것은 구제품도 아니요, 학문도 아니요, 재산도 아니요, 오직 우리의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 밖에 없다. 참된 사랑의 선물은 생명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
지금부터 6-70년 전 백두산 기슭에서 살던 한 부부의 이야기이다. 남편은 매일 산에 가서 약초를 캐는 일이 직업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해는 기울고 어둠이 짙어지도록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 부인은 어둠을 헤치고 남편이 가던 방향의 산골짜기를 찾아 마중을 떠난 것이다. 횃불을 쳐들고 얼마쯤 가노라니까 자기 남편이 길바닥에 정신없이 쓰러져 있었는데 그 몸뚱이는 부어서 절구통처럼 되었다. 부인이 시체처럼 된 남편을 자세히 살펴보니 독사에 물려 넘어져 거의 죽게 된 것을 알았다. 깊은 산골에서 약을 쓸 수도 없었고, 또 별다른 대책을 세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독소를 빨아내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리하여 자기의 종아리에서 살점을 떼어서 그것을 그 상처에 붙여 독을 빨아내었다. 이것은 산골 사람들이 흔히 쓰는 방법인데, 그런 경우에는 돼지를 잡아서 그 살점으로 독을 묻혀내는 것이다. 한번하고 또 한번 하였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니 또 하였다. 두 종아리의 살을 다 떼어낸 다음에는 엉덩이의 살을 떼어내어 하다가 나중에는 이 부인도 그만 기절하여 넘어졌다. 동천이 훤히 밝아 날이 새어올 때에 이 송장같았던 남편은 정신을 가다듬게 되었고, 그 독소도 상당히 제거된 것을 알게 되었다. 눈을 떠서 곁을 보니 종아리와 엉덩이의 살점을 다 떼어낸 백골같은 여인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그 아내는 자기의 살점을 떼어서 남편이 독소를 묻혀내고 그만 자기가 죽어 넘어진 것이다.
참된 사랑은 생명을 내어주는 것이다. 또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이 아니고는 참된 사랑이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누구에게 곧 우리 이웃에게 생명 이외의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이웃에게 주는 한마디의 위로에, 우리가 친구에게 주는 얼마의 물질에, 또 어떤 종류의 권고에 우리의 생명을 첨부하지 않으면 우리가 누구에게 사랑을 표시하였다고 감히 말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충정을 내포하지 않은 미소는 말보다 더 무서운 것이며, 참마음을 함께 하지 않는 구제는 그것이 생명을 삼키려는 독사의 허물인 것이다. 사랑이 물질이 아닌 것처럼 생명도 물질이 아니다. 우리의 사회에서 사랑이 물질로 표시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 물질을 매개로한 생명의 첨부가 없으면 사랑의 진리는 이해될 수가 없는 것이다. 생명을 준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무리 가나한 어머니일지라도 자식에게 젖을 주지 못할 어머니는 없다. 아무리 하찮은 우리도 우리의 조국을 위하여 생명을 바칠 수는 있다.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생명을 요구하고 있다. 선교를 한다는 것은 생명을 내어준다는 것이다. 생명과 생명의 교류가 있을 때 거기서 참인간의 꽃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그가 인간이 되었다는 것, 인간이 되되 참인간, 모든 인간의 약점을 모조리 아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데서 성취된 것이다. 인간을 모르고 인간을 어찌 구원할 수가 있겠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자기의 친구라고 하셨다. 인간들에게 자기의 생명을 내어줄 때 참인간을 아시고 그 인간을 친구로 삼을 수 있으며 이 인간을 수원하실 수가 있었다.
여러분, 이제 우리들은 기름을 바른 아름다운 한마디의 말보다, 우리의 얼굴에 어색하게 나타나는 한 순간의 미소보다도, 또 우리의 이웃을 위한 조금의 물질적 도움보다도 우리의 생명을 내어주는 최대의 사랑을 실천하여 보자. 이 사랑은 최대의 사랑인 동시에 또한 최소의 사랑도 이것 뿐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을 첨가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최대도 최소도 될 수 없는, 곧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너희가 내 친구가 되려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행해야 될 것이라는 말이다. 또 이 말씀을 더 깊이 말하면 너희가 내 이웃에게 생명을 주는 사랑을 못하면 내가 너희를 사랑할 수 없겠다는 말이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내 이웃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줄 수 없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신앙과 불신앙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인 것처럼 이 경우에도 역시 참사랑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느냐 못되느냐의 조건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이 결정적인 순간에 갖다 놓고서 이렇게 질문하고 있다. ‘내 친구가 되고 싶으냐? 그렇지 않으면 나와 관계를 끊겠느냐?’라고. 우리는 무슨 대답을 하겠는가? 우리는 불가불 ‘오 주여, 내가 당신의 친구가 되어야만 살겠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면 그 대답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면 네 생명을 네 이웃을 위하여 내 놓겠느냐?’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이 엄숙한 주님의 물으심에 ‘예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로써 우리는 주님의 친구로 나서는 것이다. 주님의 친구, 주님이 좋아하는 친구, 주님이 늘 못내 사모하는 친구, 주님과 손에 손을 마주 잡고 한길을 가는 친구, 이렇게 주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사상도 같도 생각도 통하고 이념도 동일하며 생활습관도 근사한 주님의 친구로서 살아가는 길은 불가불 주님의 기분에 알맞은 생활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 주님의 뜻에 맞는 친구라면 주님처럼 그 생명을 내어 이웃에게 주는 삶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친구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되려고 애써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택해서 된 것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운명적으로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어 그의 명령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를 불러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를 삼아 주셨으니 서로 사랑하는 것, 곧 생명을 서로 아끼지 않고 내어주는 것이 없이는 멸망 밖에 올 것이 없도록 막다른 길에 세워놓은 것이다. 억지로라도 사랑하여야 하게 되었고 생명을 내어주어야만 하게 되었다. 사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도록 되었다. 생명을 주지 않을래야 안줄 수 없도록 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사 자기의 친구로 삼으신 까닭이다. 주님과 친구가 되었으니 주님과 더불어 미움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생명을 내주려는 사랑의 실천에 미움이 온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 최대의 사랑은 세상이 미워하는 사랑이라는 말씀이다.
시인 쉘러는 이렇게 노래했다. ‘참된 기쁨엔 참된 슬픔이 있고, 참된 사랑엔 참된 미움이 있다.’ 참된 사랑 곧 생명을 내어주는 사랑에도 원수가 있다는 것은 역설이긴 하지만 역사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인류의 불행을 거두기 위하여 그 몸을 바친 이의 가슴에 이 세상은 칼을 겨누지 않은 적이 없었고, 참사랑을 쏟으려고 이웃을 위해 생명을 내어놓은 이에게 찬사와 감사를 표시한 인간은 아직 역사상이 있은 적이 별로 없다. 세상은 참사랑을 미워한다. 그 까닭은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한다. 세상도 이웃의 것이 풍족해지기 위하여 내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을 잘 되게 하기 위하여 이웃의 것을 빼앗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미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자기와 자기의 것이 사랑의 중심이 되어 있는 자는 온통 증오 밖에는 가진 것이 없다. 자기의 것을 사랑하려니까 이웃의 것은 저절로 미워지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하려니까 이웃은 경멸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유욕은 증오의 시발점이 된다. 폭군은 자기의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애매한 사람을 미워하고 죽인다.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사랑하고 아끼기 위해 별로 자기와 이해관계가 없어도 빈민을 천시하고 경멸한다. 이와같이 이 세상은 자기와 가기의 것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남과 남의 것을 미워한다. 우리는 세상에 머물러 그리스도의 친구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응당 세상에서 미움을 받아야만 된다. 참된 사랑의 운동은 불의와 정의의 싸움이며 하나님과 세상과의 전투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일생을 전기적으로 읽어보고서 어느 누가 예수가 사랑의 사람이라고 보겠는가? 그는 날카로운 성격의 소유자요, 말씀 한마디라도 듣기 좋게 빙빙 돌려서 하는 일이 없이 단도직입적이었고, 추상같은 그의 교훈에 당시 사람들은 가슴이 찔리는 듯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날이 갈수록 원수가 늘어갔고, 3년이란 짧은 기간안에 벌써 수많은 원수들이 생겼으며, 불의한 자들에게는 최후까지 굴하지 않았고 죽음조차 사양하지 않았다. 그 전기적 인간 예수가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나 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되는 것이다. 그는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안고 세상과 더불어 일대 결전을 감행한 용감한 무사이다. 마치 자기의 애인을 안고 무서운 악령과 싸우는 전설의 무사와도 같은 것이다. 참된 사랑은 불의와 타협하는 사랑이 아니다. 진리와 사랑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불의의 세력에 대한 강력한 도전인 것이다. 참사랑의 순직은 결코 많은 사람의 찬사 속에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 세상은 사랑을 원하면서도 참사랑이 나타날 때는 무서운 증오를 가지고 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 세속적 증오 속에서 무수한 박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박해로부터 도피할 수도 없다. 이 박해는 곧 우리의 생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박해 중에도 우리의 생명을 내줄 이웃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 곧 박해로 받게 되는 생명의 손실이 곧 사랑의 실천이기도 한 것이다.
최대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이다. 그러므로 연약한 인간은 간혹 이 길을 걷다가 넘어질 수가 있다. 사실상 넘어질 수밖에 없도록 험한 길이다. 그러므로 에수님은 이어서 진리의 성령,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힘을 의지하여 강건하게 이 최대의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들의 사고를 무시하거나 의지를 제어하고 인간아닌 다른 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가 주의 뜻을 따라가기 위하여 우리가 사색하는 것과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나 연약한 육체로 인하여 감당하지 못할 때 우리를 도와 성취시켜 주시는 분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요청할 기도의 길이 열려 있다. 이 성령의 힘을 받아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최대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성공할 수 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의 십자가의 길이 힘을 얻도록 기도하신 것이다. 성령의 힘을 의지하여 가면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친구로서 사랑의 실천을 위하여 우리들의 생명을 내어 바쳐야 하겠다. 이것이 가장 큰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갖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가 되자. (1995-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