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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 / 단 4:19-27, 눅 6:39-45
사람들은 대부분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많이 보고 많이 듣고, 적게 말하게 하기 위하여 두 개의 눈과 귀, 한 개의 입을 주셨는데도, 인간은 말을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도 있지만, 침묵을 지키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웬만한 수양을 하지 않고서는 침묵의 미덕을 보이기가 어렵다. 인간들은 천성적으로 남의 일에 흥미를 가지고 간섭하기를 좋아한다. 작은 티라도 찾으려 하고 남의 일을 알고 싶어하고, 보고 싶아하고 찾고 싶어한다. 남의 집 자녀의 학교 진학이나 혼사, 사업을 막론하고 남의 약점, 허점, 나쁜 일, 궂은 일, 안 된 일에 대하여 기를 쓰고 알고 싶어한다. 그리고는 점점 더 살을 붙여 말을 퍼트린다. 남을 헐뜯는 비난의 소문은 좋은 소문보다 본래 더 빨리, 그리고 더욱 엄청나게 불어서 넓게 퍼지는 법이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야고보의 말처러 남을 비판하는 혀는 ‘배를 삼키는 물’과 같고 ‘온 세상을 태워 지옥으로 만드는 무서운 불’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피차에 원수가 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는 성도들은 절대로 남의 험담이나 잘못을 비난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다. 남의 말을 안하는 것, 남을 비판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꼭 지켜야 할 계명이다. 주님은 남의 일을 간섭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멋진 유머로 책망하셨다. 곧 자기 눈 속에 들보를 갖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아주 작은 티를 빼주겠다는 격이라고 하신다. 우리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남을 비판하는 본인 자신에게 더 큰 문제가 있고 실수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책하거나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성경은 우리 인간들을 모조리 다 죄인이라고 말한다. 심하게는 사형을 받아 마땅한 죄수들이라고까지 했다. 이런 죄인들이 형제의 미미한 잘못을 비난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실례를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여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많은 유대인들이 율법대로 그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죽이려고 광장에 모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살피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떨고 있는 간음한 여인보다 나은 점이 없는 죄인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들었던 돌을 슬그머니 땅에 떨구고 하나씩, 둘씩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이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거나 업신여길 자격이 없다.
서로 다른 종파를 비판하기 좋아하는 두 성직자가 이야기를 나눈다. 카톨릭 신부가 유대교 랍비에게 말을 시작한다. ‘당신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드리지요. 어느 유대인이 천국으로 몰래 숨어들었다고 합니다. 파수꾼인 베드로가 천국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유대인을 내쫓으려 했지만 그는 어디론가 숨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베드로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습니다. 천국의 울타리 밖에서 경매할 때 신호하는 북을 쳤더니 유대인이 좋아라 하고 그곳으로 나가 버렸다는군요.’ 이것은 돈만 아는 유대인을 비꼬는 말이었다. 그러자 랍비가 곧 응수하였다. ‘그 이야기의 속편이 여기 있습니다. 자격없는 유대인이 들어왔기 때문에 천국은 이미 더러워졌다고 해서 청결하게 하는 의식을 해야 한다고 신부님을 찾았는데 결국 천국에는 신부님이 한 분도 안계셨다는 군요.’ 남을 비꼬거나 비판하게 되면 피차 손해만 보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교훈을 주기 위하여 누군가 지어낸 탈무드에 있는 이야기이다.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찾아내기를 좋아한다. 어떻게 해서든 남의 결점을 찾아내고자 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열등의식의 소산이라고 하며, 종교적 입장에서는 신앙의 교만에서 오는 자연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인들은 지나친 선민 사상에 젖어 우월감 때문에 다른 사람을 모두 죄인시 했다. 이것은 신앙의 교만에서 오는 것이다. 교만한 교인일수록 남을 비판하기 좋아한다. 바리새인의 특징은 남을 정죄하고 나쁘게 평가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들만이 선민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이라고 자부했다. 그런 못된 자부심 때문에 그들 눈에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쁘게만 보였다. 그들은 그저 남을 악평하는데 열중했다. 그들은 금욕생활을 하며 전도 사업에만 열중하는 세례 요한을 혹평한다. 요한에 대하여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 것을 보니 그는 귀신이 들렸다’라고 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하여서는 ‘그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다’라고 비난했다. 그들이 눈에는 먹어도 문제, 안먹어도 문제로 보였던 것이다.
우리 모두 죄인이요, 다같이 죄의 문제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남을 평할 자격이 없다. 다같이 죄 아래 저주받은 인간들이다. 괴테의 말처럼 집행유예를 받은 사형수에 지나지 않는 피차 마찬가지의 죄수들이기 때문에 남이 눈에 있는 티를 탓할 자격이 없다. 인디언들 중 수족이 있는데 이들은 이런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주님이시여, 내가 두 주간동안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절대로 판단하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참으로 뜻있는 기도이다. 우리는 우리가 대하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예수님 자신의 분신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주시는 귀한 계명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선악에 대한 분별력을 가지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하지만, 심판이나 정죄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권위일 뿐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서 이런 자는 똑같이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 아래 놓이게 된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참된 제자라면 남의 행위를 살피고 비난하기보다, 언제나 자신의 행동을 먼저 살피며 반성하고 돌이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의 허물을 찾고 비난하기보다, 정죄하는 마음을 버리고 허물을 덮어주며 용서해 주는 사랑의 성품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마음에서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열린다는 비유가 이어진다.
오늘 본문은 분명하고 강하게 말씀한다. 43절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이것은 자연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좋은 나무가 되고자 해야 한다. 좋은 나무는 좋은 종자로부터 비롯된다. 여러분, 벼나 고추를 심을 때도 이것이 무슨 품종인지 알고 심지 않는가? 그래야 원하는 열매를 수확할 수가 있다.열매를 얻는 것은 심판이요 보상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악을 심어 놓고 선을 거두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악을 심은 자는 결국 악을 거두게 된다. 이것이 심판이다. 좋은 씨앗을 뿌렸는데 나는 잊고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된다. 이것은 은혜이다. 심판도 은혜도 다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악한 열매를 심었기 때문에 악한 것을 거두는 것이다. 여기에 아무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 겉으로 나타난 것보다 속에 있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여기에 관심이 더 있어야 한디 완성은 양에 있지 않고 질에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이지 얼마를 소유했느냐에 있는게 아니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얼마나 평범하고 엄격한 진리인가.
2차 대전 때에 일어난 일이다. 아주 젊은 청년 하나가 총탄을 맞고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다. 그 청년에게 군목이 말을 한다. ‘이제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드리지요. 무엇이라고 쓸까요?’ 청년은 ‘어머니께는 제가 기쁘게 죽었다고 써주세요.’라고 대답했다. 또 이런 말을 덧붙인다. ‘지금 교회학교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어렸을 적 나에게 성경을 가르쳐준 분이지요. 그 분께는 제가 그리스도인으로 죽었다고 써주세요.’ 그리고 눈을 감았다. 군목은 그대로 청년의 어머니에게, 선생님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데 그 선생님으로부터 회답이 왔다. ‘편지를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사실 교회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별로 열매가 없고 지겨워서 한달 전에 사표를 냈는데, 오늘 이 편지를 받아보고 내가 한 일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되어 다시 교회학교 선생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렸을 때 철없이 들었던 한마디가 마음 속에 심어져서 전쟁터에서 죽은 청년의 생명을 인도했다. 심는다는 것, 좋은 씨앗을 심어야 좋은 나무가 된다는 이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굳이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몸부림치지 말라. 다 하잘 것 없는 일이다. 좋은 나무만 되면 언제라도 좋으은 열매는 맺게 되어 있고, 또 그럴 기회는 오는 것이다.
모택동 어록집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공산주의자는 꿈을 꾸어도 공산주의에 대해서 꿈을 꾸어라. 반동적인 것을 꿈 꾸었다면 자아비판을 하라.’ 이는 뭘 알고 하는 소리이다. 여러분, 잠자리 들기 전에 조심하라. 아무 것이나 보고, 허투루 TV보고 그러지 말라. 이상한 것만 보니까 밤새껏 이상한 꿈만 꾼다. 또 그것이 생활 속에 나타나고, 어느 사이에 마음이 황폐해지고 거칠어진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이다. 의식의 세계, 사상의 세계, 상상의 세계, 행위의 세계까지 다 열매라는 것을 잊지 말라. 그러므로 소중한 것, 귀한 것을 심어야 한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좋은 열매를 기대할 것이니까 말이다.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는 그 나무의 열매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나무라고 자처하면서도 열매로 봐서는 좋은 나무인지 젼혀 알 수 없는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자 보라. 마음은 씨앗이다. 말은 열매이다. 뜻은 나무요, 행위는 열매이다. 인격은 나무요, 공인된 것이나 평판은 그 열매이다. 나쁜 열매를 맺었으면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연은 없다. 환경이나 분위기를 탓하지 말라. 이것은 성경을 거스르는 것이다. 세상을 원망하지 말라. 환경과 조건은 양의 문제이지 근본적인 씨를 바꾸지는 못한다. 물론 빠꾸어지지도 않는다. 여러분, 비바람이 치고, 가뭄이 들고, 장마가 지고, 거름이 잘못되고, 또 어떻게 됐다고 해서 콩이 팥으로 되는 것을 보았는가? 콩은 콩이다. 많이 맺고 적게 맺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콩이 다른 것으로 변화하지는 않는다. 환경이 씨를 바꾸지는 못한다. 이것이 성경이 주는 교훈이다.
성경에 보니까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좋은 일, 선한 일을 한다고 애를 썼는가? 그러나 결국은 위선자가 되고, 의식주의자가 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버리는 사람들이 됐다.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다. 왜? 악한 나무였기 때문이다. 예수님 말씀을 보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갈 6장의 말씀처럼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는 반드시 거두기 때문이다. 좋은 나무가 되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열매는 뒤따라 올 것이다. 여러분, 내 의지, 내 지식, 내 성품, 내 고집으로부터 맺힌 열매가 무엇인가? 이제 우리 교회가 이곳에서 새롭게 시작했다. 옛 생활을 벗어버리고 좋은 나무가 되어 지역사회에 복음의 꽃이 활짝 피게 해야 할 것이다. 이럴 때 열매는 저절로 맺히게 된다. 여러분은 어떤 너무가 되기를 원하는가? 어린이 주일이다. 어릴 때부터 좋은 나무로 성장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새롭게 전주에서 시작했다. 좋은 나무에 좋은 밭에서 좋은교회가 되어야 한다. 저절로 되지 않는다. 여러분들이 하기에 달렸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원점으로 다시 가서 생각해야 한다. 가슴을 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은혜 안에 있을 때, 말씀과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할 때에 알게 모르게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좋은 교회 좋은 나무가 되기를 바란다.
(20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