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나의 왈츠 이야기 - 왈츠가 무서워...
(2007. 1. 4. 목)
내가 유난히 왈츠에 집착한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그냥 댄스 입문을 왈츠부터 했기에 왈츠가 댄스의 전부인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입문 당시부터 사부님께서 왈츠만 가지고 강조했다.
물론 그 당시부터 탱고도 병행하기는 했지만 탱고는 별 흥미를 못 느꼈다.
왈츠를 잘 할 수 있는 비결은 박스 베이직을 많이 연습해야 한다는 사부님의 그 말 한 마디만 믿고서 열심히 연습을 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잘 되지 않았다.
휘청거리고 비틀거리고 넘어지려고 뒤뚱거리고 발도 안 나가고 밀지도 못하고.
남이 보 내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아도 정말 초라하고 어설퍼 보였다.
그리고 엉터리였다.
박스 베이직이 잘 안된 이유는 나의 신체적 특징 때문이기도 했다.
난 다리가 유난히 길고 비쩍 마른 편이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별명이 내 다리와 관련된 게 많았다.
[황새다리]니 [홍굴래]니.
여기서 [홍굴래]란 경상도 말인 걸로 아는데 곤충 방아깨비를 말한다.
모두가 비쩍 마른 긴 다리이다...
그러니 다리에 힘이 없고, 중심 잡기가 정말 어려웠다.
사부님이 그랬다.
나 같은 체형이 처음에 왈츠 배우기가 어렵다고.
그렇지만 다리에 힘이 길러져서 제대로 배우고 나면 자세나 폼은 매우 좋을 거라고 했다.
또 그 말에 현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힘들고, 어려워도 그 말을 위로삼아 열심히 하는 수밖에...
다른 연습장에서도 나 홀로 많이 연습했다.
학원에 레슨 받으러 가면 레슨 시작 전은 물론이고 레슨이 끝나고도 나 혼자서 베이직을 연습했다.
너무나 박스 베이직에 매달리고 있으니까 나중에는 내 사부님들이 내가 베이직 연습하는 것만 보아도 징그럽다고 하셨다.
여자 사부님이 이제 제발 좀 그만하라고 했다.
하라고 한다고 미련하게 그것만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하시면서.
그것만 한다고 왈츠가 다 되는 게 아니니까 이제 그만 해도 되니까 중단하라고 하셨다.
아마 사부님이 제자더러 베이직 연습을 그만해도 되니까 중단하라고 하는 경우는 드물 거라고들 말했다.
그만큼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잘 한다는 의미겠지만...
그래서 그때부터 베이직 연습의 강도는 좀 줄여 나갔다.
대신에 본격적인 각 동작의 스텝과 피겨들로 연결된 기초 왈츠 루틴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다니던 학원에서도 했지만 주로 토욜과 공휴일에 양재동에 있는 필라라는 곳에서 했다.
그곳에서 내가 박스 베이직을 연습하는 장면을 보신 분들이 많았다.
나는 그 분들은 잘 모르지만 그 분들은 나를 알아보고는 후일에도 그런 얘기를 하는 걸 가끔 듣고 했다.
물론 이렇게 인테넷에다 세상 만방에 떠벌 거리는데 이 글을 보시는 분 중에서도 그 당시에 내가 연습하던 모습을 보신 분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 왈츠란 것이 그렇게 죽기 살기로 연습만 한다고 이루어지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미련스럽고 우직하게 연습에만 매달려도 난 아직도 왈츠가 제대로 안 된다.
선천적으로 소질도 있어야 되고 끼도 있어야 되는지 나처럼 몸치과들은 아무리 해도 난관을 극복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미 시작한 왈츠를 중도에서 포기할 수 없었다.
기호지세라고 했던가.
호랑이 등에 올라탄 이상 내릴 수 없는 상황.
그냥 밀어붙였다.
왈츠 당랑 한 종목만 가지고 용감무쌍하게 댄스파티에도 겁 없이 다녔다.
햇병아리 주제에 대선배 숙녀분한테 무작정 왈츠를 신청하기도 했다.
그래도 파티를 즐길 수 있었다.
왈츠 한 종목만 가지고도 댄스파티에서 나처럼 부지런히 춤을 즐기는 경우도 드물었다.
다른 음악은 기다렸다가 왈츠 음악만 나오면 인정사정없이 나갔으니까.
다행히도 어느 댄스파티에나 왈츠 음악의 비중이 가장 많이 나와서 나를 바쁘게 해주었다.
그런 나의 행동을 보고 어느 댄스계 대선배분이 하시는 말씀이 자기들은 몇 년 동안 10댄스 모두 하면서도 평범한데 저 인간은 왈츠 한 종목만 가지고 댄스계를 평정해버렸다고.
그래서 무엇이든지 한 우물을 파야 빛을 본다나.
그럴 때는 난 왈츠가 어떤 건지도 잘 모르면서 그냥 설치고 다녔던 것이다.
지금은 힘들고 별로 하고 싶지도 않다.
숙녀분이 먼저 하자고 제의를 해도 겁부터 난다.
한창 물오를 그 시기에는 두려운 게 없었다.
어떤 누구를 홀딩하든지 자신감이 있었다.
나의 사부님 같은 초고수분은 물론이거니와 이제 갓 발을 떼는 왕초보 여성들도 부지런히 잡아 주었다.
음악도 제대로 못 맞추고 많이도 버벅댔었다.
나 자신은 그런 걸 모르고 그냥 재미있고 즐겁기만 했었다.
근데, 이제는 왈츠가 두렵고 무섭고 겁난다.
아무나 하고 출 수도 없다. 추고 싶지도 않고.
이제 함께 호흡을 맞추어서 제대로 멋있게 완벽하게 왈츠를 추고 싶다.
한 마디로 왈츠다운 왈츠를 춰보고 싶다.
그렇지 않을 바엔 아예 왈츠를 출 줄 안다고도 하고 싶지 않다.
요즘은 파티장에서도 왈츠 함 추라고 하면 죄송한데 전 아직 서툴러서 잘 못하는데요. 다음에 할께요. 하고 거절하곤 한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너무 거만하고 건방지게 보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진심은 왈츠 추기가 두려워서인데....
댓글
눈동자2 07.01.04 12:36 첫댓글
청노루님의 왈츠 이야기는 저 같은 사람 교본입니다. 너무 겁주지 마세여... 안그래도 넘 많이 버벅대고 그래요. 무도장에선 기냥 들이밀면 웃으면서 잡아 주데요. 오늘 동부 모임 오시면 제 손 부탁해요... 다음글 기다립니다.
겨울나그네 07.01.04 12:46
청노루님의 글을 보면 기가 죽어짐을 느끼면서도 용기 또한 함께주시네요....생생한 님의글 감사드립니다.
더록 07.01.04 13:23
왈츠가 뭔지..............탱고가 뭔지.............ㅠㅠ 참 어렵다............쉽게 이곳에 왔지만 배울 것이 많네여........ 훗날 많은 것을 알게 되고 공감할 날이 있겠죠.......글 잘 읽고 갑니다........
미지 07.01.04 23:20
왈츠 고수님 같은데 아무나 하고 추고 싶지 않음은 당연할 것 같습니다.
보라매 07.01.05 10:58
왈츠에 초지일관 ,집념 대단하신분!! 그리고 일지 정리를 잘 하셔서.. 님의 글읽다가 (거의 다 읽었음)눈시울 붉어진 적 한두 번 아닙니다. 감동적인 글 감사합니다. 부럽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