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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년 전쯤인가 어떤 분이 『. . . 반남박씨의 시대정신』이라는 책을 만들어 배포한 적이 있었다. 그때 종원들의 논의(論議)에서 '반남박씨의 시대정신'이란 표현은 실체적 의미를 갖기 어려운 다소 공허한 어구라는 점이 지적된 바 있다. 그런데 며칠 전 반남박씨 대종중 홈페이지 게시판을 훑어보다가 "반남박씨의 정체성"이라는 말이 눈에 띄었다. '반남박씨의 정체성'? 과연 무슨 의미로 쓴 표현일까?
정체성(正體性)은 영어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국어로 번역하면서 만들어진 용어로 보이는데, 그 뜻은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로 정의된다(『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원). 한편, 영어에서는 identity를 'the difference or character that marks off an individual or collective from the rest of the same kind'로 정의하고 있다(Wiktionary). <개인이나 집단을 나머지 다른 개인이나 집단과 구별해 주는 차이점 또는 특징>이라는 뜻이다.
반복하면, 정체성(아이덴티티)은 개인, 단체(집단), 조직 등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ㆍ가치ㆍ신념ㆍ이미지 등으로, 개인이나 단체(집단ㆍ조직)의 존재(存在 being)를 규정하고, 다른 개인 또는 단체(집단ㆍ조직)와 구별되는 특징을 형성한다(https://anbcom.co.kr/). 따라서 '반남박씨의 정체성'은 곧 '반남박씨라는 집단(단체ㆍ조직)을 여타(餘他) <OOO씨>들과 구별해 주는 어떤 특성(특징)'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반남박씨의 정체성(identity)은 무엇일까? 반남박씨가 밀양박씨ㆍ광산김씨ㆍ전주이씨ㆍ청송심씨ㆍ은진송씨ㆍ여흥민씨ㆍ대구서씨 등등과 구별되는 반남박씨 고유의 특성(특징), 즉 정체성(identity)은 무엇일까? 이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맨 먼저 '반남박씨'라는 집단(단체ㆍ조직)에 대한 정의(定義)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반남박씨'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의 '정체성'을 논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공론(空論)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반남박씨'가 '본관(本貫)이 반남(潘南)인 박씨(朴氏)'라는 동어반복적(同語反覆的)인 정의(?) 외에는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말해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반남박씨 대종중 종약 제2조에 "이 종중은 반남박씨 시조 호장공의 후손인 성년 남녀의 자연발생적 구성체이다"라고 반남박씨 대종종(단체)의 구성을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 규정은 반남박씨 대종중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제약 때문에 '성년(成年)'이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이 단서를 제거하면 반남박씨라는 단체(집단ㆍ조직)는 '(반남박씨) 시조 호장공의 후손 남녀'로 구성한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반남박씨는 시조 호장공(박응주朴應珠)을 정점으로 하는 혈연(血緣) 집단으로 정의되는 듯하다. (참고: 민법(民法)상의 종중은 대체로 '공동선조의 분묘수호와 제사 및 종원 상호간의 친목 등을 목적으로 하여 구성되는 자연발생적인 종족집단'으로 본다(이병태: 한양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따라서, 2005년 7월 21일 대법원은 '공동선조와 성과 본을 같이 하는 후손은 성별의 구별 없이 성년이 되면 당연히 그 구성원이 된다고 보는 것이 조리에 합당하다'고 판결하였다.)
여기서 문제는 '시조 호장공의 후손'을 어떻게 구분해 내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유전자 검사를 통하여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고는 하나 이는 현실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방안이 되지 못한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대한민국 공부(公簿)에 본관이 '반남'으로 적시된 박씨 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집단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현실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결국 의지할 곳은 족보(세보)뿐이다. 즉 반남박씨의 외연(外延)을 족보에 의해 결정하는 것이다.
족보란 무엇인가? 흔히 족보를 "한 가문의 계통과 혈통 관계를 적어 기록한 책"으로 정의하고 있지만 족보가 "한 가문의 계통과 혈통 관계"의 전모(全貌)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이씨)조선의 통치이념인 주자성리학과 중국의 종법(宗法)을 바탕으로 한 가부장제(家父長制)에 입각하여 모계(母系) 혈통(血統)을 철저히 배격한 기록이다. 즉 족보에 기록된 혈연(血緣)은 순수한 생물학적 개념이라기보다는 사회적(社會的) 개념이라는 것이다(정승모 2010). 흔히 '동고조(同高祖) 팔촌(八寸)'이라 하여 3종형제(三從兄弟)를 대단히 가까운 혈족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같은 8촌 사이인 족증조모(族曾祖母) 형제자매의 증손(曾孫)들에 대해서는 얼굴은커녕, 성도, 이름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족보는 나와 혈연 관계에 있는 사람들 중 극히 일부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반남박씨라는 집단의 외연적 정의는 "반남박씨족보(세보)에 기록된 '반남박씨'라는 성관(姓貫)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될 수밖에 없다(물론 실제로는 '호장공의 후손'이면서도 족보에 등재되지 못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경우는 현실적으로 제외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반남박씨 최초의 족보인 임오보(1642년)에서 최근의 임진보(2012년)에 이르기까지 8차례에 걸쳐 간행된 족보(세보)들을 살펴봤을 때, 대략 40% 정도의 인원이 그 선대(先代) 어딘가에서 석연치 않게 삽입(揷入) 연접(連接)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반남박씨라는 집단을 외연적으로 분명하게 규정할 수 있는 구체적ㆍ객관적 동질요소(同質要素)를 찾기가 대단히 어려움을 실감하게 된다. (과학적) 이론상으로는, 반남박씨를 '시조 호장공(戶長公)의 y-염색체(染色體)를 공유(共有)하는 사람들의 집합'으로 규정하고 싶지만, 이는 모든 (반남박씨) 여성(女性)을 배제하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게다가 약 40%의 석연치 못한 족보 등재 인원 중에는 호장공의 혈손이 아닌 경우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물론 나머지 60%도 모두 한결같이 호장공의 혈손이라고 단언하기도 힘들 것이다).
이와같이 반남박씨라는 집단은 동질요소와 이질요소(異質要素)가 혼재(混在)한 집합체인데, 여기에다 '정체성' 운운하면서 다른 'OOO씨'와 구분되는 고유한 특징(특성)을 어떻게 찾아 규명할 수 있을까? 더구나 혼인이나 지역이동, 그리고 교육 등으로 인해 내부로부터의 이질성과 외부로부터의 동질성이 이리 섞이고 저리 섞인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서 'OOO씨의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가시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물론 그 시간적 범위를 조선시대로 제한한다하더라도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소수의 출사자(出仕者)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반남박씨'들은 '정체성'을 보여줄만 한 어떤 특징(특성)을 제공한 적이 없어 보인다. 굳이 '정체성'을 논하려면, 역사적으로 눈에 드러나는 활동이 많아 나름대로 어떤 특징(특성)을 찾을 수 있음직해 보이는 듯한 특정한 가문(소종중)으로 범위를 좁혀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수는 있을 듯하다. 예컨대, '문강공(박소) 문중의 정체성', '참봉공(박동민) 문중의 정체성', '서포공(박동선) 문중의 정체성', '오창공(박동량) 문중의 정체성' 등으로 말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한 문중(가문)의 정체성을 논하기는 그리 쉬워 보이지 않는다.
끝으로, 반남박씨라는 씨족(氏族)(또는 종족宗族)과 관련한 연구를 시도해 보려는 분이 계신다면, 무엇보다 먼저 반남박씨세보(족보)부터 잘 살펴보실 것을 추천드리고 싶다. 반남박씨세보에는 반남박씨와 관련된 주요 기본 정보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세보(족보)의 내용을 알아야 반남박씨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세보(족보)를 모르는 상태에서 아무리 반남박씨 연구를 해 보아야 그것은 한낱 허상(虛像)을 만드는 일이 될 공산(公算)이 커 보인다. 다시 말해서, 세보(족보)의 내용을 모르면서 '반남박씨는 이렇다, 저렇다'하는 것은 공허(空虛)하게 들리기 십상(十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終
2024.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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