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大道廢, 有仁義.
(세상에서 아주 먼 옛날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 큰 도道가 사라지자, (임금이 일부러 일삼아) 인仁·의義를 가지게 되었다.
大道, 上文之太上, 知有也. 仁義, 上文之其次, 親譽也.
“대도(大道;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큰 도道)”는 제17장의 “아주 먼 옛날”, (그 임금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알아차리고 가졌던 바”이다. “인의仁義”는 제17장의 “그 다음 (시대)”, (그 임금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가까이 하고 기렸던 바”이다.
老子之意, 以爲大道, 卽所謂太極, 陰陽. 而仁義, 乃陰陽, 分爲五行, 然後生焉. 則不能如大道之純美無弊.
(짐작컨대) 노자가 뜻했던 바, “대도大道”를 일컬음으로써. (그것은) 이른바 (이것이다) “(대도大道는) 이른바 태극(太極;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큰 바이자, 그것이 끝점에 다다른 바)인 음양陰陽이다. 인仁·의義는 이른바 (태극太極인) 음陰·양陽이 (한 번 일부러 일삼아) 나눈 바이자, (그것이 한 번 일부러) 일삼(아 낳)은 오행五行, (그) 이후에 생겨난 바이다. 따라서 (분별컨대, 인仁·의義는) 대도大道의 (한 번도 일부러 일삼은 때를 가지는 바가 없이 저절로 그러하게 만물을) 참되게 하고(純; 性), (따라서) 아름답게 하며(美; 命),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게 하고(無; 無爲), (따라서) 낡아지게 하는 바(弊; 自然)를 (더불어) 같이 할 수는 없다.”
韓子曰, 老子之, 小仁義. 非毁之也. 其, 見者, 小也. 彼, 以煦煦爲仁, 孑孑爲義. 其, 小之也. 則宜.
(따라서 당唐나라 유학자) 한유(韓愈, 768~824)는 (『고문관지古文關止』 「권칠육조당문券七六朝唐文」 「원도原道」에서) 일컬었다. “노자는 ‘인仁·의義’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작은 바로 알아차렸다. (그러나 노자가 그렇게 했던 까닭은 ‘인仁·의義’) 그것을 (일부러 일삼아) 헐뜯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仁·의義’를) 알아차렸던 (당시의) 임금들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작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임금들은 (백성에게) 자그마한 은혜를 (일부러 일삼아) 베푸는 일을 ‘인仁’으로 삼았으며, (백성 앞에 일부러 일삼아) 외롭게 서 있는 일을 ‘의義’로 삼았다. (당시의) 임금들이 (노자로 하여금 ‘인仁·의義’) 그것을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작은 바로 알아차리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노자가 그렇게 보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
言仁義, 亦是木金, 二氣, 中之太極. 彼, 乃不本於性命. 而徒, 以其用爲仁義也.
요컨대, “인仁·의義”는 (“대도大道”와 분별되지만) 이른바 (태극太極인 음陰·양陽이 한 번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낳은 오행五行의) 나무木와 쇠金이자, 2가지의 기氣로서, (그) 가운데가 태극(太極;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큰 바이자, 그것이 다다른 끝점)인 바이다. (그러나 노자가 살았던 당시의) 임금들은 이른바 (또 다른 오행五行의 나무木와 쇠金이자, 2가지의 기氣로서, 그 가운데가 태극太極인 백성의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을 (“인仁·의義”의) 근본(이자 시작점)으로 삼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 (백성에게 자그마한 은혜를 베푸는 일, 백성 앞에 외롭게 서 있는 일과 같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그) “인仁·의義”(의 근본이자 시작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慧智出, 有大僞.
(임금이 일부러 일삼아 가지는) 지혜가 생겨나자, (백성이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에) 크게 거짓된 바를 가지게 되었다.
慧智, 卽上文之其次畏之也. 五伯, 以智慧機巧相上下. 於是, 有假仁義. 以濟其僞者.
“지혜慧智”는 이른바 제17장의 “그 다음 (시대), (그 백성이) 두려워하던 (임금이 일부러 일삼은 지혜) 그것”이다. (예를 들어, 제齊나라 환공桓公, 진晉나라 문공文公, 진秦나라 목공穆公, 송宋나라 양공襄公, 초楚나라 장왕莊王 등 춘추시대·BC.770~403) 다섯 패자(霸者; 五伯)는 (일부러 일삼은) 지혜와 기교(機巧; 威勢)로써 (그) ‘위’와 ‘아래’를 (더불어) 어우러지게 했다. 따라서 (천하의 백성) 그들은 (일부러 일삼아) 꾸민 “인仁·의義”를 “가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그 “(본래 저절로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자신들의 성性·명命에 크게) 거짓된 바”를 (일부러 일삼아) 건져 올리게 되었다.
六親不和, 有孝慈, 國家昏亂, 有忠臣.
(세상의 부모·자식·형·아우·지아비·지어미) 여섯 가지의 사이가 (본래 저절로 그러한 성性·명命으로써 서로) 어우러지지 못하자, (사람들이 오로지) 효도하는 자식과 자애하는 부모를 (일부러 일삼아) 일컫는 바를 가지게 되었으며, 나라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에 대해) 어두워지고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음으로써) 어지러워지자, (사람들이 오로지) 충성스러운 신하를 (일부러 일삼아) 일컫는 바를 가지게 되었다.
穎濱蘇氏曰, 堯, 非不孝也, 而獨稱舜, 無瞽瞍也. 伊尹, 周公, 非不忠也, 而獨稱龍逢比干, 無桀紂也. 涸澤之魚, 相喣以濕, 相濡以沫, 不如相忘於江海.
(따라서 송宋나라 유학자) 소철(蘇轍, 1039~1112)은 일컬었다. “(아주 먼 옛날) 요堯 임금이 효자孝子가 아니었던 것이 아니지만, (지금의 사람들이) 오로지 순舜 임금을 (효자로) 일컫는 것은 (지금의 세상이 아들인 순舜 임금을 자애慈愛하지 않았던) 고수瞽瞍(와 같은 부모)를 가지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아주 먼 옛날)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이 충신忠臣이 아니었던 것이 아니지만, (지금의 사람들이) 오로지 용봉龍逢과 비간比干을 일컫는 것은 (지금의 세상이 임금에게 간諫하는 신하를 살해했던) 걸桀 임금과 주紂 임금(과 같은 폭군暴君)을 가지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자莊子는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서 일컬었다. 비유컨대, ‘지금’) 물이 마른 연못의 고기가 서로 (입에 머금었던) 물을 뱉아 (서로 목을) 축여주고, 서로 꼬리를 저어 (서로 몸을) 적셔주는 일은 (‘옛날’ 물이 가득 찼던) 강과 바다에서 서로 (그렇게 하기를) 잊어버린 일만 같지 못하다.”
此章, 言古今, 醇澆. 以明本始, 之主宰末終. 以起下章之意. 右第十八章.
이 장은 일컫는다. “(아주 먼) 옛날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도타웠지만, 지금은 (그것이) 얇다. 따라서 (지금의 근본이자 시작점(인 옛날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도타움)을 (다시) 밝혀야 하며, 그것이 말단이자 끝점(인 지금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이 얇음)을 주재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이 장이 앞서) 일으키는 다음 장의 뜻이다. 여기까지가 제18장에 대한 풀이이다.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
늦가을, 초겨울...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세요.
평안하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