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요전번에 본 연극은 하기 쉽지 않은 선택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막이 오르면 두 남자가 나온다. 한 명은 변호사고, 다른 한 명은 미결수다. 이 두 명 중 한 명은 죽어야 한다. 무대 앞쪽 정중앙에는 컵이 두 개가 놓여 있는 테이블이 있다. 하나는 독이 든 컵이고, 하나는 그냥 물이다. 두 사람은 왜 자기가 살아야 하는지 자기변호를 해야 한다. 변호의 시간이 끝나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독이 든 잔을 마셔야 하고 말이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면서 인구의 절반을 무작위로 줄여야 하는 사태가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두 명의 인간이 한 방에 갇혀서 왜 자기가 살아야 하는지 변호할 시간을 갖는 일이 전국에서(아마도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중이다. 미결수는 아내를 죽인 살인자다. 변호사는 사회에 악한 영향을 끼친 기업이나 사람을 대상으로 변호하여 무죄를 받아낸 경력이 쌓인 인간이다.
처음에는 관객이 배심원이 되어 배우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관객 참여형, 관객의 참여로 결말이 바뀌는 그런 연극인 줄 알고 긴장했다. 변호사와 미결수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대체 둘 중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지 고심하느라 머리와 마음이 미란([糜爛]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연극은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의 사연을 들려줄 뿐이고, 보이지 않는 존재(배심원)가 따로 있었다.
극은 사회악적 기업을 변호해서 무죄를 받아내고 돈을 벌어 온 변호사보다는 미결수 쪽에 중심을 싣고 있었다. 그래서 미결수가 자기 얘기를 많이 하게 하는 구조였는데, 미결수의 아내는 미결수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을 피웠다. 두 사람은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했는데, 친구는 죽고 미결수의 아내는 숨만 쉬는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
미결수는 사고가 나서야 두 사람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분노에 휩싸여 친구를 죽이러 갔다. 하지만 친구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는 17년이 넘도록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어느 날 아내가 회복의 기미를 보였다. 조금만 더 지나면 휠체어를 탈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될 거라고 했다. 그런데 아내가 의식이 돌아오자 제일 먼저 물은 것은 바로 상간남의 안부였다. 그 순간 남자는 아내를 죽였다.
(사회적 살인의 부역자인) 변호사와 (바람 좀 피웠다고) 아내를 죽인 살인범, 둘 중 누구를 죽여야 할까? 극의 마지막까지도 혼자 이 생각을 곱씹고 있었는데, 의외로 결론은 빨리 났다. 연극을 볼 당시에는 아니 이게 대체 무슨 경우야, 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생각하니 나름 적절한 결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연극의 제목은 <양팔 저울>이다.
첫댓글 연극 제목이 '선택'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네요.^^ 연극 대본이 '지구의 자원' 문제로 보고...죄목이 사회부도덕과 개인적 필요, 그중 하나를 제거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설정한것 같네요.
기후 변화 대체에 대한 연관성은 그만큼 해결이 어렵다만 아주 단선적으로 미미하게 되긴합니만,
무게중심이 다르니 그럼 사회부도덕 제거에 총동원되어야겠다는 결론인것 같네요. ㅎ
저도 적절한 결말이라고 봅니다. 저울질해서 평가하는 것.
저도 제가 사랑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원수를 사랑해야하는데, 왜 결말이 시원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네요...
근데 누가 물 마신 거예요?
스포를 염려하여 누가 독을 든 잔을 마셨는지 밝히지 않았는데 굳이 물으시니 답을 하자면, 인류를 위해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맞다고 스스로 판단한 한 명이 독배와 물잔을 다 마셨습니다. 미결수가요.
꼬리짜르기가 원제목이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