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2일 막을 내린 제2회 중국 여자국수전서 57세의 쿵샹밍(孔祥明)이 우승했다. 루이나이웨이(芮乃伟) 탕이(唐奕) 왕천싱(王晨星) 등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총 출전한 대회였다. 바둑이 ‘청소년 스포츠’로 굳어가고 있는 마당에 이건 모두가 깜짝 놀랄 만 한 사건이다. 스무 살 송롱후이(宋容慧), 25세 차오요우인(曹又尹)등을 연파한 뒤 결승서 20세 처녀장사 리허(李赫)마저 꺾었다.
쿵샹밍은 중국바둑이 현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80~90년대 중국 여자바둑의 대표 주자였다. 왕후이(王暉․49) 루이나이웨이(芮乃偉․49) 화쉐밍(華學明․50) 펑윈(豊雲․46) 장쉔(張璇․44)등이 각축했지만 역시 가장 선배인 쿵샹밍이 선두주자 역할을 했다. 쓰촨(四川)성 청뚜(成都) 출신인 쿵샹밍은 전성기 시절 일본 고단자들을 물리치는 등 한 때 명성을 휘날렸다.
쿵샹밍은 또 중국 최고스타 계보를 이은 녜웨이핑(聶衛平)의 ‘초대 와이프’로도 유명하다. 두 사람은 80년 ‘세기의 바둑커플’로 주목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그러나 결혼 후 바둑 입신(立身)의 꿈을 접고 오로지 남편의 성공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당시에 대해 쿵샹밍은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 “나도 개인적으로 바둑에 누구 못지않게 큰 꿈이 있었다. 그러나 녜웨이핑은 재능에 관한 한 나보다 훨씬 뛰어났다. 남편을 통해 내 꿈을 실현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판단하고 뒷바라지에 온힘을 쏟았다.” 결혼 2년 만인 1981년 둘 사이에서 2세가 태어났다. 녜윈총(聶雲聰)이라고 이름 지었다.
녜웨이핑은 선천적으로 심장 기형을 타고 났다. 심장에 구멍(천공)이 뚫려있어 대국 중 수시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야 했다. 그런 남편을 쿵샹밍은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89년 제1회 잉씨배 조훈현 대 녜웨이핑 간의 결승5번기 최종국(싱가포르)서 녜웨이핑이 패한 순간, 현장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쿵샹밍이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져 올 정도다.
하지만 이 대회 결승이 끝나고 얼마 뒤 두 사람은 갈라선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녜웨이핑은 이 무렵 미모의 가곡배우에 푹 빠져있었다. 그는 임신한 그녀를 자신이 책임져줘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쿵샹밍에게 이혼을 강요했다. 쿵샹밍은 이혼 서류에 서명한 후 열 살 짜리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와 동시에 아들 녜윈총(聶雲聰)의 성(姓)과 이름도 바꾸었다. 쿵샹밍 자신의 성을 따 쿵상원(孔永文)으로 개명했다.
쿵샹밍은 아들 쿵상원을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시킨 뒤 유명한 기사 양성 전문가 기쿠치(菊池康郞) 문하에 집어넣었다. 98년 입단한 쿵상원은 해마다 승단을 거듭, 현재 일본기원 七단으로 활동 중이다. 2011년엔 일본기원으로부터 ‘일중(日中)교류 특명기사’로 위촉받아 두 나라를 수시로 넘나들고 있다.
<한국 나이로 58세에 중국 여자바둑을 제패한 쿵샹밍. 사진 출처=기성도장>
쿵샹밍은 쿵상원이 어렸던 시절 항상 “꼭 네 아버지처럼 훌륭한 기사가 돼야 한다”고 가르쳤다. 바둑에 관한 한 녜웨이핑의 실력을 절대적으로 신봉했다는 뜻인데, 하지만 이것은 바둑 외엔 아버지에게 별반 배울 게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혼 후 한참 뒤 두 사람은 상하이(上海)서 열린 바둑대회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쿵샹밍은 녜웨이핑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만큼 그를 원망하고 경멸했다는 얘기다.
일본인이자 일본기사가 된 쿵상원은 2003년 22세 때 결혼한다. 그의 장인, 즉 신부 고바야시(小林淸芽)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고바야시 사토루(小林覺) 九단이다.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남아있던 녜웨이핑은 인편에 결혼 축의금을 보냈다. 아들과의 ‘화해’를 이루기 위한 손짓이었다. 이 무렵 녜웨이핑은 두 번째 부인과도 헤어진 상태였다. 공교롭게도 쿵샹밍이 재혼한 2001년에 녜웨이핑의 10년에 걸친 ‘결혼 2기(期)’도 막을 내렸다.
쿵상원은 아버지가 보내온 축의금을 수령하지 않았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홀로 고생한 어머니 쿵샹밍에 대한 연민이 그만큼 깊었다. 하지만 녜웨이핑의 집념도 만만치 않았다. 2006년 쿵상원이 베이징에 들렀을 때 공항으로 마중을 나간 것이다. 무뚝뚝하고 이기적인 녜웨이핑으로선 좀체 보기 힘든 행동이었다. 15년 간 얼음장 같았던 쿵상원의 마음도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녜웨이핑은 이튿날 저녁 아들 쿵상원을 집에 초대해 파티를 열었고 부자가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손자를 처음 대면한 녜웨이핑은 입이 찢어진 채 “잘 키우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는 손자에 대한 예물대금이란 명목으로 봉투를 건넸고, 쿵상원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한 채 받았다.
2011년 1월 제9회 정관장배 여자단체전이 항저우서 열렸을 때 쿵샹밍이 멀리 청뚜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아들 쿵상원이 일본 팀 인솔자를 맡아 가족들과 함께 가기로 했다는 전갈을 받고서였다. 쿵샹밍은 (자신의 성을 딴) 어린 손자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은 채 놓을 줄 몰랐다. 꼬마는 엄마아빠는 물론 할머니(쿵샹밍)와도 일본어로만 대화를 나누었다. 중국 관계자들로선 제법 당혹스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쿵상원이 검토실에 있던 한 젊은 중국 여자프로기사와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잠시 후 그녀와 꼬마 간의 대국이 시작됐다. 13점 지도바둑이었다. 중국 여자기사는 리혁(李赫․20). 최근 꼬마의 할머니 쿵샹밍과 중국 초대 여자 국수전 패권을 다툰 바로 그 기사다.
<왼쪽부터 쿵상원, 쿵상원의 아들, 녜웨이핑. 사진출처=기성도장>
올해 꼭 60세인 녜웨이핑은 2001년 여름 세 번째 여성과 결혼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자신이 상하이에 설립한 바둑도장의 고객담당부장을 맡고 있던 여자였다. 둘의 나이 차이는 20년이 넘게 난다. 녜웨이핑은 현재의 아내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자랑한다고 한다.
쿵상원도 자기 삶이 즐거워 ‘깨가 쏟아지는‘ 분위기다. 어머니 쿵샹밍을 여전히 극진히 모시는 한편 아버지 녜웨이핑과도 화해했다. 하지만 이 가문 구성원들 가운데 현재 가장 행복한 사람은 쿵샹밍이 아닐까. 승부사들을 가장 가슴 뛰게 만드는 순간은 멋진 이성을 만났을 때도, 일확천금했을 때도 아니다. 승부에서 이겼을 때 그들은 최고의 기쁨을 느낀다. 더구나 57세의 우승이란 아무나 맛 볼 수 없는 극상(極上)의 희열이다.
세계바둑계 최고령 여성 우승기록은 일본의 스기우치(杉內壽子) 八단이 94년 제6기 여류명인전서 4년째 연속 우승했을 때의 67세다. 올해 85세로 원로 스기우치(杉內雅男․92) 九단의 부인인 그녀의 집안도 녜웨이핑-쿵링원으로 이어지는 공(孔)씨 가문 못지않게 화려하다. 남편 뿐 아니라 여동생 2명도 프로기사로 명성을 날려 세계 최강의 3자매 기사로 평가돼 왔다.
1984년 전국개인전 여자부 우승 이후 무려 28년 만에 우승컵을 받아든 쿵샹밍은 시상대에서 이렇게 감격을 표현했다. “전혀, 손톱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마도 후배들이 양보해 준 것 같다.” 샘 많고 야심 넘치는 젊은 아가씨들이 한물 간 노인에게, 단체로 양보해 주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이건 보통 사태가 아니다. 57세 아줌마는 앞으로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일 셈일까.
첫댓글 잘 읽었네요..감사
고수는 나이와 관계없이 영원한 고수다.그런데 입단을 뚫은 프로의세계에서나 세계적대회우승은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결국 쿵샹밍의 우승은 섭위평의 바둑실력을 간접적으로나 경험한바 크다고 생각합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