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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20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0 S1A5C2A02093108).
불교학연구(Korea Journal of Buddhist Studies) 제70호 (2022.3) pp. 1∼24
임승택 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초기불교 무아설의 유형에 대한 검토와 분류 I*
- 임승택 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목 차
I. 시작하는 말
II. 무아 서술의 일반적 양상
III. 견해(diṭṭhi)로서의 자아 혹은 무아에 대한 거부
IV. 마치는 말
요약문
무아의 의미에 관한 논의는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한국불교계에서는 ‘무아윤회’라는 독특한 이론이 크게 유행하였고, 최근에 이르
러서는 ‘무아윤회’의 논리에 내재된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필자는 ‘무아
윤회’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서 초기불교 본래의 무아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절감
하였고, 그러한 이유에서 니까야(Nikāya)에서 설해지는 무아의 구체적 양상을 확인하는
작업에 나서게 되었다. 본 연구는 무아(anattan)라는 용어의 격변화 형태에 주목했던 선
행 연구를 뒤잇는 것으로, 무아라는 말이 등장하는 구절이나 문장을 검토하면서 무아에
대한 유형별 구분을 시도한다. 여기에는 무아라는 낱말 자체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무아
설로 귀속시킬 수 있는 구절이나 문장 등도 포함된다. 필자는 초기불교 당시 유통되었
던 무아설을 3가지 부류의 11가지 유형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고 본다. 본논문은 지면 관
계상 이들 중 첫 두 부류의 6가지 무아 유형에만 논의의 초점을 모은다. 첫 번째 부류의 3
가지 무아 유형은 무아의 실제 의미가 ‘동일시의 부정’ 즉 비아(非我)에 가깝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들 중에는 ‘나의 것’에 대한 부정을 묘사하는 와중에 오히려 ‘나’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사례도 나타나며, 바로 그것을 무아의 의미로 형식화하여 해설하는 경우도
확인된다. 한편 두 번째 부류의 3가지 유형은 사변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무아에 대한 견
해나 주장마저도 극복의 대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또한 언어의 한계를 지적
하면서 어떠한 형태로든 ‘나’라는 생각에 빠지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필자는 이들
6가지 유형들이야말로 초기불교에서 가르친 무아설의 주류(mainstream)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주제어 ; 무아, 비아, 나, 자아, 견해, 동일시 부정
I. 시작하는 말
초기불교 경전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anattan)가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
이었는지 아니면 오온(五蘊, pañcakkhandha) 등이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었는지
조차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있다.1) 전자는 ‘자아를 결여한다(without self)’는 의
미에서의 무아(無我)를 의미하고 후자는 ‘자아가 아니다(not the self)’라는 의미
의 비아(非我)를 가리키는 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2) 전자는 자아의 존재 자
체를 부정하는 뉘앙스인 반면 후자는 오온과 자아가 서로 다르다는 것으로 자
아의 존재가 부정되지는 않는다. 무아라는 낱말에 내포된 다층적 의미는 무아
설에 대한 이해의 출발선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난제의 하나일 수 있다. 그렇다
면 과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필자는 무아
가 설명되는 문맥에 대한 검토에 나서게 되었고, 각각의 문맥을 유형별로 구분
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1) 황순일 2011, 116.
2) 임승택 2017, 105; 황순일 2010, 103; Bronkhorst 2009, 23 참조
2 불교학연구 제69호
무아의 의미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 틸만 훼터(Tilmann Vetter) 등은 불교 교리의 발달선상에서 특
정한 방식의 의미 해석이 부각되었을 것으로 본다.3) 이들에 따르면 최초기의
불교는 비아에 가까운 쪽인 반면에 후대에 이르러 무아라는 의미가 정착되게
된다. 한편 멜포드 스피로(Melford Spiro), 스티븐 콜린스(Steven Collins) 등은
세속적 혹은 실천적 차원과 궁극적 차원을 구분하여 무아설을 이해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4) 이들에 따르면 세속적 차원에서는 자아가 인정되는 반면 궁극
적인 차원에서는 부정된다. 두 차원의 진리관에 입각할 때 무아의 의미는 다층
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한편 무아와 비아를 회통시켜 서로 공존하
는 관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무아의 입장과 주체성의 입장이 양립할
수 있다고 보고서 각자의 입장에서 쌍방의 입장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와 관련해서는 마스다 히데오(增田英男)와 정승석 등을 떠올릴 수 있다.5) 물론
이와 반대로 어느 한쪽에 치중된 무아 해석의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라든가 칼루파하나(Kalupahana) 등은 무
아에 대한 정통주의적 해명에 주력한 반면, 리스 데이비스(Rhys Davids)라든가
라다크리슈난(Radhakrishan) 등은 비아에 가까운 무아 해석을 제시한다.6)
그런데 필자는 선행 연구에서 니까야(Nikāya)에 나타나는 무아의 용법이 서
술성 주격 anattā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다.7) 나아가 서술
성 주격으로 쓰이는 한에서라면 무아(無我)이든 비아(非我)이든 어떤 의미를
취하더라도 문장 전체의 뜻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예컨대
“rūpaṃ anattā”라는 구문에 대해 전자의 이해방식으로라면 “물질현상(色)은
‘자아 [혹은 나]를 결여한 것(無我)’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고, 후자의 방식이
라면 “물질현상은 ‘자아 [혹은 나]가 아닌 것(非我)’이다.”로 옮길 수 있다. 두 번
3) Vetter 1988, 43; 中村元 1963, 79; 정승석 1999, 32 참조.
4) Spiro 1982, 11-14; Collins 1982, 71 참조.
5) 增田英男 1965, 110-113; 정승석 1992, 33 이하 참조.
6) Rahula 1978, 57ff; Kalupahana 1976, 38; Rhys Davids 2014, 31; Radhakrishan 1977, 152 참조.
7) 임승택 2020, 61-71 참조.
초기불교 무아설의 유형에 대한 검토와 분류 I3
역을 음미해 보자면 주어인 물질현상에 대해 자아 혹은 ‘나’를 ‘결여한 것’으로
보든 혹은 자아 혹은 ‘나’가 ‘아닌 것’으로 보든 실제로는 별반의 차이가 없음
을 알 수 있다. 둘 다 물질현상과 자아 혹은 물질현상과 ‘나’의 관련성을 부정하
는 내용이며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문장 전체의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서술성 명사로서의 anattā에 대한 지적은 무아 혹은 비아라는 두 가지 이해
방식을 놓고서 벌어졌던 해묵은 논란을 종결시킬 만한 파급력을 지닌다. 서술
어로서의 anattā는 주어에 해당하는 물질현상 따위의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
기 위한 용도이다. 즉 오온 따위가 자아(attā)와 동일시할 수 없는 성격의 것임
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으로 사용되는 anattā란 ‘자아
가 아닌 것’ 즉 비아(非我)에 가까운 것으로 결론이 나는 셈이다. 더구나 니까야
전체를 통해 서술어로 사용되는 anattā의 검색 횟수는 다른 용례들에 비해 압
도적으로 많다. 이것을 감안한다면 무아니 비아니 하는 번역을 둘러 싼 논의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무아’ 혹은 ‘무아설’이라는 표현
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사정은 이
교설을 둘러싼 논란의 뿌리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서술성 주격으로서의 무아(anattan)는 오직 그것이 속해 있는 구문이나 문장
안에서만 온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온(蘊, khandhā)이나 처(處, āyatana)나
계(界, dhātu) 혹은 일체법(一切法, sabbe dhammā) 따위에 대해 ‘자아가 아닌 것’
이라고 지시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의 무아란 주어에 해당하는 오온 따위와의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다른 용도를 생각하
기 어렵다. 즉 경험하는 현상들에 대해 “자신(attā 혹은 ahaṃ)과 일치시키지 말
라.”라는 실천적 메시지로서의 한정된 쓰임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
론은 무아라는 낱말 자체만이 아닌 문맥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비로소 분명해
진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이 무아가 등장하는 문맥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무
아설의 의미와 그 서술의 양상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문맥 중심의 연구
는 무아설을 담고 있는 구문이나 문장 혹은 문단을 검토 대상으로 한다. 또한
여기에는 무아라는 용어가 생략된 채 무아설을 전하는 경우도 일부 포함된다.
4 불교학연구 제69호
역을 음미해 보자면 주어인 물질현상에 대해 자아 혹은 ‘나’를 ‘결여한 것’으로
보든 혹은 자아 혹은 ‘나’가 ‘아닌 것’으로 보든 실제로는 별반의 차이가 없음
을 알 수 있다. 둘 다 물질현상과 자아 혹은 물질현상과 ‘나’의 관련성을 부정하
는 내용이며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문장 전체의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서술성 명사로서의 anattā에 대한 지적은 무아 혹은 비아라는 두 가지 이해
방식을 놓고서 벌어졌던 해묵은 논란을 종결시킬 만한 파급력을 지닌다. 서술
어로서의 anattā는 주어에 해당하는 물질현상 따위의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
기 위한 용도이다. 즉 오온 따위가 자아(attā)와 동일시할 수 없는 성격의 것임
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으로 사용되는 anattā란 ‘자아
가 아닌 것’ 즉 비아(非我)에 가까운 것으로 결론이 나는 셈이다. 더구나 니까야
전체를 통해 서술어로 사용되는 anattā의 검색 횟수는 다른 용례들에 비해 압
도적으로 많다. 이것을 감안한다면 무아니 비아니 하는 번역을 둘러 싼 논의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무아’ 혹은 ‘무아설’이라는 표현
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사정은 이
교설을 둘러싼 논란의 뿌리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서술성 주격으로서의 무아(anattan)는 오직 그것이 속해 있는 구문이나 문장
안에서만 온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온(蘊, khandhā)이나 처(處, āyatana)나
계(界, dhātu) 혹은 일체법(一切法, sabbe dhammā) 따위에 대해 ‘자아가 아닌 것’
이라고 지시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의 무아란 주어에 해당하는 오온 따위와의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다른 용도를 생각하
기 어렵다. 즉 경험하는 현상들에 대해 “자신(attā 혹은 ahaṃ)과 일치시키지 말
라.”라는 실천적 메시지로서의 한정된 쓰임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
론은 무아라는 낱말 자체만이 아닌 문맥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비로소 분명해
진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이 무아가 등장하는 문맥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무
아설의 의미와 그 서술의 양상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문맥 중심의 연구
는 무아설을 담고 있는 구문이나 문장 혹은 문단을 검토 대상으로 한다. 또한
여기에는 무아라는 용어가 생략된 채 무아설을 전하는 경우도 일부 포함된다.
4 불교학연구 제69호초기불교 무아설의 유형에 대한 검토와 분류 I5
실제로 본 논문에서 다루는 몇 가지 무아 유형에는 무아라는 단어가 아예 등장하
지 않는다.
무아설의 유형에 대한 구분은 선행 연구자들에 의해 이미 부분적으로 시도
되었다. 예컨대 스티븐 콜린스는 초기불교의 무아 관련 언급을 다음의 3가지
로 분류한다.8) 첫째 내부의 주재자(主宰者)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는 경우, 둘째
무상하고 괴로운 현상을 자아로 간주할 수 없다고 밝히는 경우, 셋째 경험을
배제한 상태에서 자아를 말하는 것의 무의미함을 지적하는 경우 등이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나까무라 하지메는 최초기 불교에서 anattan은 ‘아트만이 아닌
것(非我)’을 의미했고, 그 이후에는 ‘아트만을 지니지 않은(無我)’이라는 의미
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후세에 이르러서는 일체의 사물 속에 고정적인
불변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되었다고 밝힌다. 이들의 연구
는 무아설을 유형별로 갈래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선구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몇몇 경전에 단편적으로 의존해 있으며 니
까야 전체에 걸쳐 묘사되는 유형별 양상에 대한 언급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
했다.
본고는 Digital Pali Reader(https://palemoon.start.me/start)라는 검색 프로그램
에 의존한다. 이 프로그램은 무아설에 관련된 내용의 검색 횟수를 확인해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따라서 무아의 유형을 등장 빈도에 따라 분류하고 대조해
보는 것이 가능하다. 예컨대 콜린스가 분류한 두 번째 유형은 나까무라 하지메
가 언급한 최초기 불교의 ‘아트만이 아닌 것’ 즉 비아(非我)에 해당하며 니까야
에서 수 천 회에 이르는 잦은 검색 빈도를 보인다. 한편 콜린스의 첫 번째와 세
번째에 해당하는 내용은 ‘아트만을 지니지 않은 것’ 즉 무아(無我)에 상응하는
것으로 단지 몇 차례 검색될 뿐이다. 이와 같은 수치를 통한 대조는 니까야에
서 전하는 무아설의 일반적 양상을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이례적이거나 이질
적인 경향에 대해서도 변별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필자는 이 기회에 선행
8) Collins 1982, 97-103; 임승택 2015, 8-9 참조.
역을 음미해 보자면 주어인 물질현상에 대해 자아 혹은 ‘나’를 ‘결여한 것’으로
보든 혹은 자아 혹은 ‘나’가 ‘아닌 것’으로 보든 실제로는 별반의 차이가 없음
을 알 수 있다. 둘 다 물질현상과 자아 혹은 물질현상과 ‘나’의 관련성을 부정하
는 내용이며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문장 전체의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서술성 명사로서의 anattā에 대한 지적은 무아 혹은 비아라는 두 가지 이해
방식을 놓고서 벌어졌던 해묵은 논란을 종결시킬 만한 파급력을 지닌다. 서술
어로서의 anattā는 주어에 해당하는 물질현상 따위의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
기 위한 용도이다. 즉 오온 따위가 자아(attā)와 동일시할 수 없는 성격의 것임
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으로 사용되는 anattā란 ‘자아
가 아닌 것’ 즉 비아(非我)에 가까운 것으로 결론이 나는 셈이다. 더구나 니까야
전체를 통해 서술어로 사용되는 anattā의 검색 횟수는 다른 용례들에 비해 압
도적으로 많다. 이것을 감안한다면 무아니 비아니 하는 번역을 둘러 싼 논의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무아’ 혹은 ‘무아설’이라는 표현
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사정은 이
교설을 둘러싼 논란의 뿌리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서술성 주격으로서의 무아(anattan)는 오직 그것이 속해 있는 구문이나 문장
안에서만 온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온(蘊, khandhā)이나 처(處, āyatana)나
계(界, dhātu) 혹은 일체법(一切法, sabbe dhammā) 따위에 대해 ‘자아가 아닌 것’
이라고 지시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의 무아란 주어에 해당하는 오온 따위와의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다른 용도를 생각하
기 어렵다. 즉 경험하는 현상들에 대해 “자신(attā 혹은 ahaṃ)과 일치시키지 말
라.”라는 실천적 메시지로서의 한정된 쓰임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
론은 무아라는 낱말 자체만이 아닌 문맥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비로소 분명해
진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이 무아가 등장하는 문맥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무
아설의 의미와 그 서술의 양상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문맥 중심의 연구
는 무아설을 담고 있는 구문이나 문장 혹은 문단을 검토 대상으로 한다. 또한
여기에는 무아라는 용어가 생략된 채 무아설을 전하는 경우도 일부 포함된다.
4 불교학연구 제69호
역을 음미해 보자면 주어인 물질현상에 대해 자아 혹은 ‘나’를 ‘결여한 것’으로
보든 혹은 자아 혹은 ‘나’가 ‘아닌 것’으로 보든 실제로는 별반의 차이가 없음
을 알 수 있다. 둘 다 물질현상과 자아 혹은 물질현상과 ‘나’의 관련성을 부정하
는 내용이며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문장 전체의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서술성 명사로서의 anattā에 대한 지적은 무아 혹은 비아라는 두 가지 이해
방식을 놓고서 벌어졌던 해묵은 논란을 종결시킬 만한 파급력을 지닌다. 서술
어로서의 anattā는 주어에 해당하는 물질현상 따위의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
기 위한 용도이다. 즉 오온 따위가 자아(attā)와 동일시할 수 없는 성격의 것임
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으로 사용되는 anattā란 ‘자아
가 아닌 것’ 즉 비아(非我)에 가까운 것으로 결론이 나는 셈이다. 더구나 니까야
전체를 통해 서술어로 사용되는 anattā의 검색 횟수는 다른 용례들에 비해 압
도적으로 많다. 이것을 감안한다면 무아니 비아니 하는 번역을 둘러 싼 논의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무아’ 혹은 ‘무아설’이라는 표현
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사정은 이
교설을 둘러싼 논란의 뿌리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서술성 주격으로서의 무아(anattan)는 오직 그것이 속해 있는 구문이나 문장
안에서만 온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온(蘊, khandhā)이나 처(處, āyatana)나
계(界, dhātu) 혹은 일체법(一切法, sabbe dhammā) 따위에 대해 ‘자아가 아닌 것’
이라고 지시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의 무아란 주어에 해당하는 오온 따위와의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다른 용도를 생각하
기 어렵다. 즉 경험하는 현상들에 대해 “자신(attā 혹은 ahaṃ)과 일치시키지 말
라.”라는 실천적 메시지로서의 한정된 쓰임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
론은 무아라는 낱말 자체만이 아닌 문맥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비로소 분명해
진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이 무아가 등장하는 문맥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무
아설의 의미와 그 서술의 양상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문맥 중심의 연구
는 무아설을 담고 있는 구문이나 문장 혹은 문단을 검토 대상으로 한다. 또한
여기에는 무아라는 용어가 생략된 채 무아설을 전하는 경우도 일부 포함된다.
4 불교학연구 제69호적 존재를 별도로 내세우지 않는다. 따라서 온이나 처나 계 따위에 대해 ‘자아
가 아닌 것’으로 언명한다는 것은 결국 ‘자아가 없다’는 의미로 귀착된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비아란 무아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충분히 가능하
다.10) 그러나 ‘자아가 아닌 것’이라는 언명과 ‘자아가 없다’는 진술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전자는 니까야 자체에 등장하는 전형적
인 무아 서술인 반면에 후자는 교리적 내용에 근거한 해석의 일종이다. 또한
전자는 ‘자아가 아닌 것’들에 대한 각성을 유도하는 실천적 교설로서의 성격
을 띠는 반면 후자는 ‘자아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한 견해(見, diṭṭhi)로서 존재
론적 색채가 뚜렷하다. 후술하는 두 번째 부류의 무아 유형들에서 다루겠지만
붓다는 견해의 일종으로 제시되는 무아에 대한 거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견해로서의 무아는 무아설 자체를 형이상학적 논변으로 탈바꿈시킬 위험성
이 도사린다.
<유형 1-1>에 해당하는 주격 단수 anattā가 등장하는 문단이나 구문은 니까
야 전체에 걸쳐 대략 75개소에서 검색된다.11) 그런데 본 논문이 의존하는
Digital Pali Reader 검색 프로그램은 반복되는 문장이나 문단을 생략하여 검색
횟수에서 누락시키는 경우가 빈번하다. 예컨대 오온 중 처음 등장하는 물질현
상에 대해서만 “물질현상은 무아이다.”라는 방식으로 온전하게 기술하고, 느
낌(受)이라든가 지각(想) 등에 대해서는 “∽은 무아이다.”라는 반복을 생략한
다. 이 경우 무아라는 용어의 검색 횟수는 1회가 되지만 실제로서는 5회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감안하고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의 세부 항목 각각을 서
술어 anattā의 주어로 대입시켜 계산할 경우 무아의 실제 등장 횟수는 기하급
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만큼 이 유형은 잦은 빈도로 등장했으며 일반적으로 유
통된 무아 서술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형에 속한 변형된 서술방식으로서 anatta라는 어간에 부사화 접미어 to
10) 정승석 1999, 33 이하; 황순일 2010, 103 참조.
11) chrome://digitalpalireader/content/search.xul?type=0&query=%20anattaa&MAT=m&set=dmsak&book
=1&part=1&rx=false (검색일자 : 2021.10.30.); 임승택 2020, 61 참조.
초기불교 무아설의 유형에 대한 검토와 분류 I7
역을 음미해 보자면 주어인 물질현상에 대해 자아 혹은 ‘나’를 ‘결여한 것’으로
보든 혹은 자아 혹은 ‘나’가 ‘아닌 것’으로 보든 실제로는 별반의 차이가 없음
을 알 수 있다. 둘 다 물질현상과 자아 혹은 물질현상과 ‘나’의 관련성을 부정하
는 내용이며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문장 전체의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서술성 명사로서의 anattā에 대한 지적은 무아 혹은 비아라는 두 가지 이해
방식을 놓고서 벌어졌던 해묵은 논란을 종결시킬 만한 파급력을 지닌다. 서술
어로서의 anattā는 주어에 해당하는 물질현상 따위의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
기 위한 용도이다. 즉 오온 따위가 자아(attā)와 동일시할 수 없는 성격의 것임
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으로 사용되는 anattā란 ‘자아
가 아닌 것’ 즉 비아(非我)에 가까운 것으로 결론이 나는 셈이다. 더구나 니까야
전체를 통해 서술어로 사용되는 anattā의 검색 횟수는 다른 용례들에 비해 압
도적으로 많다. 이것을 감안한다면 무아니 비아니 하는 번역을 둘러 싼 논의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무아’ 혹은 ‘무아설’이라는 표현
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사정은 이
교설을 둘러싼 논란의 뿌리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서술성 주격으로서의 무아(anattan)는 오직 그것이 속해 있는 구문이나 문장
안에서만 온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온(蘊, khandhā)이나 처(處, āyatana)나
계(界, dhātu) 혹은 일체법(一切法, sabbe dhammā) 따위에 대해 ‘자아가 아닌 것’
이라고 지시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의 무아란 주어에 해당하는 오온 따위와의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다른 용도를 생각하
기 어렵다. 즉 경험하는 현상들에 대해 “자신(attā 혹은 ahaṃ)과 일치시키지 말
라.”라는 실천적 메시지로서의 한정된 쓰임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
론은 무아라는 낱말 자체만이 아닌 문맥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비로소 분명해
진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이 무아가 등장하는 문맥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무
아설의 의미와 그 서술의 양상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문맥 중심의 연구
는 무아설을 담고 있는 구문이나 문장 혹은 문단을 검토 대상으로 한다. 또한
여기에는 무아라는 용어가 생략된 채 무아설을 전하는 경우도 일부 포함된다.
4 불교학연구 제69호적 존재를 별도로 내세우지 않는다. 따라서 온이나 처나 계 따위에 대해 ‘자아
가 아닌 것’으로 언명한다는 것은 결국 ‘자아가 없다’는 의미로 귀착된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비아란 무아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충분히 가능하
다.10) 그러나 ‘자아가 아닌 것’이라는 언명과 ‘자아가 없다’는 진술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전자는 니까야 자체에 등장하는 전형적
인 무아 서술인 반면에 후자는 교리적 내용에 근거한 해석의 일종이다. 또한
전자는 ‘자아가 아닌 것’들에 대한 각성을 유도하는 실천적 교설로서의 성격
을 띠는 반면 후자는 ‘자아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한 견해(見, diṭṭhi)로서 존재
론적 색채가 뚜렷하다. 후술하는 두 번째 부류의 무아 유형들에서 다루겠지만
붓다는 견해의 일종으로 제시되는 무아에 대한 거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견해로서의 무아는 무아설 자체를 형이상학적 논변으로 탈바꿈시킬 위험성
이 도사린다.
<유형 1-1>에 해당하는 주격 단수 anattā가 등장하는 문단이나 구문은 니까
야 전체에 걸쳐 대략 75개소에서 검색된다.11) 그런데 본 논문이 의존하는
Digital Pali Reader 검색 프로그램은 반복되는 문장이나 문단을 생략하여 검색
횟수에서 누락시키는 경우가 빈번하다. 예컨대 오온 중 처음 등장하는 물질현
상에 대해서만 “물질현상은 무아이다.”라는 방식으로 온전하게 기술하고, 느
낌(受)이라든가 지각(想) 등에 대해서는 “∽은 무아이다.”라는 반복을 생략한
다. 이 경우 무아라는 용어의 검색 횟수는 1회가 되지만 실제로서는 5회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감안하고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의 세부 항목 각각을 서
술어 anattā의 주어로 대입시켜 계산할 경우 무아의 실제 등장 횟수는 기하급
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만큼 이 유형은 잦은 빈도로 등장했으며 일반적으로 유
통된 무아 서술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형에 속한 변형된 서술방식으로서 anatta라는 어간에 부사화 접미어 to
10) 정승석 1999, 33 이하; 황순일 2010, 103 참조.
11) chrome://digitalpalireader/content/search.xul?type=0&query=%20anattaa&MAT=m&set=dmsak&book
=1&part=1&rx=false (검색일자 : 2021.10.30.); 임승택 2020, 61 참조.
초기불교 무아설의 유형에 대한 검토와 분류 I7가 추가된 anattato가 등장하는 경구가 있다. 예컨대 “세상에는 사랑스럽고 유
쾌한 물질현상(色)이 있다. 바로 그것을 무상으로 관찰해야 하고, 괴로움으로
관찰해야 하고, 무아로(anattato) 관찰해야 한다.”라는 문장이 그것이다.12) 이
경우는 오온 따위에 대해 무아로 관찰해 나갈 것을 권하는 실천적 언명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무아의 실천 양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은 니까야 전체에서 117개소 가량 검색되는
데,13)필자는 이 경우를 <유형 1-1>에 포함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물질
현상을 무아로 관찰한다(rūpaṃ anattato passanti).”라는 언급은 “‘물질현상은 무
아이다.’라고 관찰한다.(rūpaṃ attāti passanti)”라는 방식으로 바꿀 수 있다. 이
경우 anattato는 서술성 주격으로서의 anattā와 사실상 동일한 쓰임이며, 무아에
입각한 통찰의 과정을 묘사하는 용도라는 점에서만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무아의 온전한 의미 파악을 위해 슐만(Shulman)은 우빠니샤드
(Upaniṣad)의 아뜨만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14) 다음의 경문이
그것이다.
눈의 기능(眼)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존자시여, 무상합니다. 무상한 그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존자시여, 괴로움입니다. 무상하고 괴롭
고 변화하는 법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라고 간주할 수 있는가? 존자시여, 그렇지 않습니다.15)
슐만에 따르면 이러한 내용은 그 자체로는 논리적 정합성을 지니지 못한다.
12) SN. II. 111.8-9 등. “yaṃ loke piyarūpaṃ sātarūpaṃ, taṃ aniccato passanti, dukkhato passanti, anattato
passanti.”
13) chrome://digitalpalireader/content/search.xul?type=0&query=anattato&MAT=m&set=dmsak&book=1
&part=1&rx=false (검색일자 : 2021.10.30.)
14) 임승택 2017, 119-120; Shulman 2008, 312 참조.
15) MN. III. 278.11-19. “Taṃ kiṃ maññasi rāhula, cakkhuṃ niccaṃ vā aniccaṃ vāti. Anicc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ā taṃ sukhaṃ vāti. Dukkhaṃ bhante. Yaṃ panā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ṃ, kallaṃ nu taṃ samanupassituṃ: 'etaṃ mama, esohamasmi, eso me attā'ti. No
hetaṃ bhante.”
8 불교학연구 제69호
역을 음미해 보자면 주어인 물질현상에 대해 자아 혹은 ‘나’를 ‘결여한 것’으로
보든 혹은 자아 혹은 ‘나’가 ‘아닌 것’으로 보든 실제로는 별반의 차이가 없음
을 알 수 있다. 둘 다 물질현상과 자아 혹은 물질현상과 ‘나’의 관련성을 부정하
는 내용이며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문장 전체의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서술성 명사로서의 anattā에 대한 지적은 무아 혹은 비아라는 두 가지 이해
방식을 놓고서 벌어졌던 해묵은 논란을 종결시킬 만한 파급력을 지닌다. 서술
어로서의 anattā는 주어에 해당하는 물질현상 따위의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
기 위한 용도이다. 즉 오온 따위가 자아(attā)와 동일시할 수 없는 성격의 것임
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으로 사용되는 anattā란 ‘자아
가 아닌 것’ 즉 비아(非我)에 가까운 것으로 결론이 나는 셈이다. 더구나 니까야
전체를 통해 서술어로 사용되는 anattā의 검색 횟수는 다른 용례들에 비해 압
도적으로 많다. 이것을 감안한다면 무아니 비아니 하는 번역을 둘러 싼 논의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무아’ 혹은 ‘무아설’이라는 표현
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사정은 이
교설을 둘러싼 논란의 뿌리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서술성 주격으로서의 무아(anattan)는 오직 그것이 속해 있는 구문이나 문장
안에서만 온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온(蘊, khandhā)이나 처(處, āyatana)나
계(界, dhātu) 혹은 일체법(一切法, sabbe dhammā) 따위에 대해 ‘자아가 아닌 것’
이라고 지시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의 무아란 주어에 해당하는 오온 따위와의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다른 용도를 생각하
기 어렵다. 즉 경험하는 현상들에 대해 “자신(attā 혹은 ahaṃ)과 일치시키지 말
라.”라는 실천적 메시지로서의 한정된 쓰임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
론은 무아라는 낱말 자체만이 아닌 문맥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비로소 분명해
진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이 무아가 등장하는 문맥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무
아설의 의미와 그 서술의 양상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문맥 중심의 연구
는 무아설을 담고 있는 구문이나 문장 혹은 문단을 검토 대상으로 한다. 또한
여기에는 무아라는 용어가 생략된 채 무아설을 전하는 경우도 일부 포함된다.
4 불교학연구 제69호적 존재를 별도로 내세우지 않는다. 따라서 온이나 처나 계 따위에 대해 ‘자아
가 아닌 것’으로 언명한다는 것은 결국 ‘자아가 없다’는 의미로 귀착된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비아란 무아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충분히 가능하
다.10) 그러나 ‘자아가 아닌 것’이라는 언명과 ‘자아가 없다’는 진술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전자는 니까야 자체에 등장하는 전형적
인 무아 서술인 반면에 후자는 교리적 내용에 근거한 해석의 일종이다. 또한
전자는 ‘자아가 아닌 것’들에 대한 각성을 유도하는 실천적 교설로서의 성격
을 띠는 반면 후자는 ‘자아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한 견해(見, diṭṭhi)로서 존재
론적 색채가 뚜렷하다. 후술하는 두 번째 부류의 무아 유형들에서 다루겠지만
붓다는 견해의 일종으로 제시되는 무아에 대한 거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견해로서의 무아는 무아설 자체를 형이상학적 논변으로 탈바꿈시킬 위험성
이 도사린다.
<유형 1-1>에 해당하는 주격 단수 anattā가 등장하는 문단이나 구문은 니까
야 전체에 걸쳐 대략 75개소에서 검색된다.11) 그런데 본 논문이 의존하는
Digital Pali Reader 검색 프로그램은 반복되는 문장이나 문단을 생략하여 검색
횟수에서 누락시키는 경우가 빈번하다. 예컨대 오온 중 처음 등장하는 물질현
상에 대해서만 “물질현상은 무아이다.”라는 방식으로 온전하게 기술하고, 느
낌(受)이라든가 지각(想) 등에 대해서는 “∽은 무아이다.”라는 반복을 생략한
다. 이 경우 무아라는 용어의 검색 횟수는 1회가 되지만 실제로서는 5회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감안하고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의 세부 항목 각각을 서
술어 anattā의 주어로 대입시켜 계산할 경우 무아의 실제 등장 횟수는 기하급
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만큼 이 유형은 잦은 빈도로 등장했으며 일반적으로 유
통된 무아 서술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형에 속한 변형된 서술방식으로서 anatta라는 어간에 부사화 접미어 to
10) 정승석 1999, 33 이하; 황순일 2010, 103 참조.
11) chrome://digitalpalireader/content/search.xul?type=0&query=%20anattaa&MAT=m&set=dmsak&book
=1&part=1&rx=false (검색일자 : 2021.10.30.); 임승택 2020, 61 참조.
초기불교 무아설의 유형에 대한 검토와 분류 I7그는 고통스러운 치통(toothache)을 예로 들면서 치통의 무상함은 얼마든지
‘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 경문이 의미를 지니기 위
해서는 영원하고 즐거운 존재로 묘사되는 우빠니샤드의 아뜨만 개념이 논리
적 전제로서 요청된다고 본다. 붓다는 바로 그것을 거부하는 맥락에서 무상하
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으로서의 무아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a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
을지목하면서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그러한 ‘나’는 있지 않으며,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언급하는 사례는 79개소 가량 검색된다.16) 또한
‘변화하는 법’이라는 표현을 생략한 채 오온 따위를 직접 가리키면서 ‘나의 것’
등이 아니라고 기술하는 경우도 대략 20여 개소에 이른다.17) 필자는 이들 사례
에 대해서는 <유형 1-2>로 엮고자 한다. 슐만의 언급처럼 이 유형은 우빠니샤
드의 아뜨만 개념을 의식한 것일 수 있고, 바로 그 점에서 일정 부분 형이상학
적 색채를 지닌다고 할 수도 있다. 아뜨만이란 경험의 영역을 넘어선 존재이므
로 이것에 대한 긍정 혹은 부정은 자동적으로 경험의 영역을 넘어서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유형 1-2>의 사례들은 초월적
존재인 아뜨만을 부정하는 맥락으로 볼 수 없으며 오온 등에 대한 경험적 차원
의 언명에 한정된다고 할 수 있다. 언급된 내용만으로는 아뜨만에 대한 부정으
로도 혹은 긍정으로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유형 1-2>에 속한 구문들에는 무아라는 낱말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
다. 이들은 다만 오온 따위의 현상적 요소들에 대해 ‘나의 것’ 등으로 볼 수 없
다는 논리를 펼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유형 1-2>의 사례가 애초 무아
(anattā)라는 용어와 직접적인 상관성이 없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게 한다. 사
16) chrome://digitalpalireader/content/search.xul?type=0&query=kha.m%20vipari.naamadh&MAT=m&set
=dmsak&book=1&part=1&rx=false (검색일자 : 2021.10.30.)
17) SN. II. 125.10-12 등. “모든 물질현상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그러한 ‘나’는 있지 않으며, 그것
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바로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관찰해야 한다. (sabbaṃ
rūpaṃ netaṃ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chrome://digitalpalireader/content/search.xul?type=0&query=.m%20neta.m&MAT=m&set=dmsak&bo
ok=1&part=1&rx=false (검색일자 : 2021.10.30.)
초기불교 무아설의 유형에 대한 검토와 분류 I9
역을 음미해 보자면 주어인 물질현상에 대해 자아 혹은 ‘나’를 ‘결여한 것’으로
보든 혹은 자아 혹은 ‘나’가 ‘아닌 것’으로 보든 실제로는 별반의 차이가 없음
을 알 수 있다. 둘 다 물질현상과 자아 혹은 물질현상과 ‘나’의 관련성을 부정하
는 내용이며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문장 전체의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서술성 명사로서의 anattā에 대한 지적은 무아 혹은 비아라는 두 가지 이해
방식을 놓고서 벌어졌던 해묵은 논란을 종결시킬 만한 파급력을 지닌다. 서술
어로서의 anattā는 주어에 해당하는 물질현상 따위의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
기 위한 용도이다. 즉 오온 따위가 자아(attā)와 동일시할 수 없는 성격의 것임
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으로 사용되는 anattā란 ‘자아
가 아닌 것’ 즉 비아(非我)에 가까운 것으로 결론이 나는 셈이다. 더구나 니까야
전체를 통해 서술어로 사용되는 anattā의 검색 횟수는 다른 용례들에 비해 압
도적으로 많다. 이것을 감안한다면 무아니 비아니 하는 번역을 둘러 싼 논의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무아’ 혹은 ‘무아설’이라는 표현
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사정은 이
교설을 둘러싼 논란의 뿌리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서술성 주격으로서의 무아(anattan)는 오직 그것이 속해 있는 구문이나 문장
안에서만 온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온(蘊, khandhā)이나 처(處, āyatana)나
계(界, dhātu) 혹은 일체법(一切法, sabbe dhammā) 따위에 대해 ‘자아가 아닌 것’
이라고 지시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의 무아란 주어에 해당하는 오온 따위와의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다른 용도를 생각하
기 어렵다. 즉 경험하는 현상들에 대해 “자신(attā 혹은 ahaṃ)과 일치시키지 말
라.”라는 실천적 메시지로서의 한정된 쓰임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
론은 무아라는 낱말 자체만이 아닌 문맥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비로소 분명해
진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이 무아가 등장하는 문맥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무
아설의 의미와 그 서술의 양상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문맥 중심의 연구
는 무아설을 담고 있는 구문이나 문장 혹은 문단을 검토 대상으로 한다. 또한
여기에는 무아라는 용어가 생략된 채 무아설을 전하는 경우도 일부 포함된다.
4 불교학연구 제69호적 존재를 별도로 내세우지 않는다. 따라서 온이나 처나 계 따위에 대해 ‘자아
가 아닌 것’으로 언명한다는 것은 결국 ‘자아가 없다’는 의미로 귀착된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비아란 무아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충분히 가능하
다.10) 그러나 ‘자아가 아닌 것’이라는 언명과 ‘자아가 없다’는 진술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전자는 니까야 자체에 등장하는 전형적
인 무아 서술인 반면에 후자는 교리적 내용에 근거한 해석의 일종이다. 또한
전자는 ‘자아가 아닌 것’들에 대한 각성을 유도하는 실천적 교설로서의 성격
을 띠는 반면 후자는 ‘자아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한 견해(見, diṭṭhi)로서 존재
론적 색채가 뚜렷하다. 후술하는 두 번째 부류의 무아 유형들에서 다루겠지만
붓다는 견해의 일종으로 제시되는 무아에 대한 거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견해로서의 무아는 무아설 자체를 형이상학적 논변으로 탈바꿈시킬 위험성
이 도사린다.
<유형 1-1>에 해당하는 주격 단수 anattā가 등장하는 문단이나 구문은 니까
야 전체에 걸쳐 대략 75개소에서 검색된다.11) 그런데 본 논문이 의존하는
Digital Pali Reader 검색 프로그램은 반복되는 문장이나 문단을 생략하여 검색
횟수에서 누락시키는 경우가 빈번하다. 예컨대 오온 중 처음 등장하는 물질현
상에 대해서만 “물질현상은 무아이다.”라는 방식으로 온전하게 기술하고, 느
낌(受)이라든가 지각(想) 등에 대해서는 “∽은 무아이다.”라는 반복을 생략한
다. 이 경우 무아라는 용어의 검색 횟수는 1회가 되지만 실제로서는 5회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감안하고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의 세부 항목 각각을 서
술어 anattā의 주어로 대입시켜 계산할 경우 무아의 실제 등장 횟수는 기하급
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만큼 이 유형은 잦은 빈도로 등장했으며 일반적으로 유
통된 무아 서술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형에 속한 변형된 서술방식으로서 anatta라는 어간에 부사화 접미어 to
10) 정승석 1999, 33 이하; 황순일 2010, 103 참조.
11) chrome://digitalpalireader/content/search.xul?type=0&query=%20anattaa&MAT=m&set=dmsak&book
=1&part=1&rx=false (검색일자 : 2021.10.30.); 임승택 2020, 61 참조.
초기불교 무아설의 유형에 대한 검토와 분류 I7실 ‘나의 것’이 아니라는 언급의 이면에는 ‘나의 것’이라는 별도의 무엇이 암묵
적으로 전제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서술방식에는 ‘나’ 혹은 자아
에 대한 긍정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그럼에도
후술하는 <유형 1-3>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나의 것’ 등이 아니라는 언급은 무
아를 설명하는 형식적 논리로 활용되기에 이른다. 이것은 무아로도 혹은 비아
로도 연결될 수 있는 일련의 교설들이 내용적 통일성 없이 유통되던 시기가 있
었고, 이후 다수의 이질적인 교설을 무아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엮어내려는 시
도가 뒤따랐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게 한다.
‘나의 것’ 등을 부정하는 비아(非我)의 서술을 무아로 연결시켜 낸 사례는 다
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물질현상(色)은 무상하고, 무상한 그것은 괴로움이고, 괴로
움인 그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그것은(yad anattā taṃ) ‘나의 것’이 아니
고, 그러한 ‘나’는 있지 않으며, 그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18)
이 인용문에서 무아 즉 anattā는 물질현상(rūpaṃ) 따위의 오온이 지니는 속
성을 부연하는 동시에 관계사 yad 구문의 주어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
문을 지시하는 지시대명사 taṃ은 무아인 물질현상 따위가 “‘나의 것’이 아니
고 ‘나’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님”을 가리키는 역할을 한다. 필자는 바로 이
구절에 대해 무아라는 낱말이 지니는 의미를 니까야 자체적으로 해설한 각별
한 사례로 간주하고자 한다. 무아에 대한 니까야의 서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
타나지만 이처럼 직접적인 방식으로 해설하는 경우란 찾기 힘들다. 전체 21개
소 가량 검색되는 이와 같은 서술방식에 대해 필자는 <유형 1-3>로 부르고자
한다.19) 이 유형을 통해 ‘나의 것’ 등에 대한 거부를 내용으로 하는 <유형 1-2>
18) SN. III. 22. 2-4 등. “rūpaṃ, bhikkhave, aniccaṃ. yadaniccaṃ taṃ dukkhaṃ; yaṃ dukkhaṃ tadanattā;
yadanattā t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ā’ti”
19) chrome://digitalpalireader/content/search.xul?type=0&query=yadanattaa&MAT=m&set=dmsak&book
=1&part=1&rx=false (검색일자 : 2021.10.30.)
10 불교학연구 제69호
역을 음미해 보자면 주어인 물질현상에 대해 자아 혹은 ‘나’를 ‘결여한 것’으로
보든 혹은 자아 혹은 ‘나’가 ‘아닌 것’으로 보든 실제로는 별반의 차이가 없음
을 알 수 있다. 둘 다 물질현상과 자아 혹은 물질현상과 ‘나’의 관련성을 부정하
는 내용이며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문장 전체의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서술성 명사로서의 anattā에 대한 지적은 무아 혹은 비아라는 두 가지 이해
방식을 놓고서 벌어졌던 해묵은 논란을 종결시킬 만한 파급력을 지닌다. 서술
어로서의 anattā는 주어에 해당하는 물질현상 따위의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
기 위한 용도이다. 즉 오온 따위가 자아(attā)와 동일시할 수 없는 성격의 것임
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맥락으로 사용되는 anattā란 ‘자아
가 아닌 것’ 즉 비아(非我)에 가까운 것으로 결론이 나는 셈이다. 더구나 니까야
전체를 통해 서술어로 사용되는 anattā의 검색 횟수는 다른 용례들에 비해 압
도적으로 많다. 이것을 감안한다면 무아니 비아니 하는 번역을 둘러 싼 논의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무아’ 혹은 ‘무아설’이라는 표현
이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현실을 부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와 같은 사정은 이
교설을 둘러싼 논란의 뿌리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서술성 주격으로서의 무아(anattan)는 오직 그것이 속해 있는 구문이나 문장
안에서만 온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온(蘊, khandhā)이나 처(處, āyatana)나
계(界, dhātu) 혹은 일체법(一切法, sabbe dhammā) 따위에 대해 ‘자아가 아닌 것’
이라고 지시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의 무아란 주어에 해당하는 오온 따위와의
탈동일시(disidentification)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 다른 용도를 생각하
기 어렵다. 즉 경험하는 현상들에 대해 “자신(attā 혹은 ahaṃ)과 일치시키지 말
라.”라는 실천적 메시지로서의 한정된 쓰임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결
론은 무아라는 낱말 자체만이 아닌 문맥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비로소 분명해
진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이 무아가 등장하는 문맥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무
아설의 의미와 그 서술의 양상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문맥 중심의 연구
는 무아설을 담고 있는 구문이나 문장 혹은 문단을 검토 대상으로 한다. 또한
여기에는 무아라는 용어가 생략된 채 무아설을 전하는 경우도 일부 포함된다.
4 불교학연구 제69호적 존재를 별도로 내세우지 않는다. 따라서 온이나 처나 계 따위에 대해 ‘자아
가 아닌 것’으로 언명한다는 것은 결국 ‘자아가 없다’는 의미로 귀착된다고 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비아란 무아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충분히 가능하
다.10) 그러나 ‘자아가 아닌 것’이라는 언명과 ‘자아가 없다’는 진술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전자는 니까야 자체에 등장하는 전형적
인 무아 서술인 반면에 후자는 교리적 내용에 근거한 해석의 일종이다. 또한
전자는 ‘자아가 아닌 것’들에 대한 각성을 유도하는 실천적 교설로서의 성격
을 띠는 반면 후자는 ‘자아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한 견해(見, diṭṭhi)로서 존재
론적 색채가 뚜렷하다. 후술하는 두 번째 부류의 무아 유형들에서 다루겠지만
붓다는 견해의 일종으로 제시되는 무아에 대한 거부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견해로서의 무아는 무아설 자체를 형이상학적 논변으로 탈바꿈시킬 위험성
이 도사린다.
<유형 1-1>에 해당하는 주격 단수 anattā가 등장하는 문단이나 구문은 니까
야 전체에 걸쳐 대략 75개소에서 검색된다.11) 그런데 본 논문이 의존하는
Digital Pali Reader 검색 프로그램은 반복되는 문장이나 문단을 생략하여 검색
횟수에서 누락시키는 경우가 빈번하다. 예컨대 오온 중 처음 등장하는 물질현
상에 대해서만 “물질현상은 무아이다.”라는 방식으로 온전하게 기술하고, 느
낌(受)이라든가 지각(想) 등에 대해서는 “∽은 무아이다.”라는 반복을 생략한
다. 이 경우 무아라는 용어의 검색 횟수는 1회가 되지만 실제로서는 5회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감안하고서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의 세부 항목 각각을 서
술어 anattā의 주어로 대입시켜 계산할 경우 무아의 실제 등장 횟수는 기하급
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만큼 이 유형은 잦은 빈도로 등장했으며 일반적으로 유
통된 무아 서술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형에 속한 변형된 서술방식으로서 anatta라는 어간에 부사화 접미어 to
10) 정승석 1999, 33 이하; 황순일 2010, 103 참조.
11) chrome://digitalpalireader/content/search.xul?type=0&query=%20anattaa&MAT=m&set=dmsak&book
=1&part=1&rx=false (검색일자 : 2021.10.30.); 임승택 2020, 61 참조.
초기불교 무아설의 유형에 대한 검토와 분류 I7초기불교 무아설의 유형에 대한 검토와 분류 I 11
의 언급이 무아에 대한 표현방식으로 비로소 공식화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첫 번째 부류의 3가지 무아 유형은 무아의 실제 내용이 비
아(非我) 즉 동일시의 부정(disidentification)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선행 논문에서도 언급했듯이 동일시 부정의 무아란 경험적 요소
들로 환원할 수 없는 순수 주체로서의 ‘나’를 오히려 부각시키는 측면이 있
다.20) 이러한 사실은 ‘나’의 존재를 배제하고서는 무아의 실천마저도 가능하
지 않다는 생각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 필자는 이상의 세 유형 중에서도 무
상하고 괴로운 오온 등에 대해 ‘나의 것’일 수 없다고 묘사하는 <유형 1-2>이야
말로 나머지 두 유형의 기본이 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유형 1-1>의 서술성
주격으로서의 anattā는 ‘나의 것’ 등에 대한 거부 즉 비아의 의미에 다름이 아니
다. 한편 <유형 1-3>의 경우는 ‘나의 것’ 등에 대한 거부를 무아라는 용어에 형
식적으로 연결시켜 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나’라는 존재를 물질이나
정신 따위의 경험적 요소들로 환원하지 말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전한다고 할
수 있다.
III. 견해(diṭṭhi)로서의 자아 혹은 무아에 대한 거부
최초로 결집된 경전인 범망경(梵網經, Brahmajāla-Sutta, DN. I. 1-46)에서는
붓다 당시 존재했던 형이상학적 견해들을 62가지로 분류하고서 그들 하나하
나를 고찰한다. 붓다는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지지하거나 혹은 새로운 견해
를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21) 오히려 그는 형이상학적 견해의 추구가
내면의 탐욕과 집착에 연결될 수 있음을 지적하였으며 자아의 유무 등에 관한
존재론적 논의에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붓다가 형이상학적 견해에 대
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요한슨(Johasson)이라든가 칼
20) 임승택 2020, 71-78 참조.
21) 임승택 2013, 18-2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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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無我論 - 初期 佛敎 無我說의 有形에 대한 檢討와 分類 1 (임승택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