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당시 200호가 넘는 마을에는 라디오를 가진 가구는 없고 라디오 자체가 있는 줄도 몰랐었다. 그런 라디오가 처음 도입될 무렵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라 라디오가 마을에는 없었다. 마을 교회가 우리 집 뒤에 있어서 어릴 때는 교회에 자주 놀러 갔다. 목사님이 라디오를 안테나로 설치했기 때문에 라디오 소식을 듣기 위해서 계속 가게 되었다. 어린 내가 암만 보아도 신기하고 라디오 소리는 처음 듣는 이상한 소리다. 배게 목침만 한 작은 상자에서 음악과 말소리가 들리고 요란한 박수 소리도 들리는 일이 신기했다. 우리가 있는 옆 방문을 열어보기도 하고 방 주위를 아무리 살펴도 다른데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작은 상자 안에 사람이 있는 듯하나 사람의 머리도 들어가기 어려운 작은 상자라 의문만 꼬리를 달았다. 처음은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으나 여러 번 들으니 알아차려 진다. 얼마 동안 라디오 듣는 재미에 푹 빠졌었다. 목사님도 신기하게 느끼는 우리를 늘 반기며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던 후 목사님이 다른 교회로 이사하고는 오랫동안 라디오 듣기가 중지되어 아쉬워한 일이다.
마을에 라디오가 귀하니 공동 라디오 청취를 위한 마을 앰프방송 시설이 설치되었다. 새로 라디오를 사려면 매우 비싼 가격이라 서민들은 살 수 없었다. 필자가 처음 라디오 살 때는 엄청나게 지나서도 송아지 한 마리 값이 들었다. 송아지를 팔아서 라디오를 샀기 때문에 기억한다. 라디오 가격이 그전에는 큰 소 한 마리 값으로도 모자랐을 것이다. 그런 시기에 앰프방송 라디오 스피커는 현관 벽에 달아두고 마당에서도 들리게 하는 유선 장치다. 농가마다 손으로 직접 끄지 않으면 24시간 가동하는 라디오 방송이다. 처음에는 시간제로 운영했었다. 신문도 없는 마을에 라디오방송 청취로 소식이 빨라졌다. 농촌의 마을마다 라디오 앰프 스피커를 설치하니 온 동네 세상 모두가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게 되었다. 정해진 사용료를 지불하면 이보다 더 좋은 문화 혜택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우리 마을이 당시 화북면에서 제일 큰 마을이라 라디오 앰프방송이 빨리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큰 마을이다 보니 주어지는 혜택인 셈이다. 라디오 방송을 접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유행가 음악도 듣고 지식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언제던가 한밤중에 사립문 앞에서 앞 골목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불렀다. 급히 나가보니 내 이름이 라디오 토론 시간에 나왔다는 전갈이다. 내가 쓴 글을 아나운서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읽었던 모양이다. 아무나 이름 오를 수 없었던 라디오 방송에 보통 사람인 내 이름과 내가 쓴 글이 소개되어 감동하는 마음으로 다급한 연락이다. 버선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고무신을 끌고 오신 아주머니다. 이웃 인심 고마운 정경을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다시 보는 눈치다. 중학교 입시에서 종합 수석을 차지하여 소문이 났던 참에 금방 명성을 얻게 된 연유이기도 했다. 라디오 방송을 자주 듣게 되니 나도 방송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농가방송 토론그룹을 만들어 여러 번 글을 써서 올리기도 했다. 농민을 위한 심야방송이라 참여하기 편리했다. 나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강의록으로 공부를 하며 농사를 지었다. 그 후 매일신문에도 내가 쓴 글이 오르고 글을 쓰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시절이다.
마을 공동 라디오 앰프 방송은 일기예보 등 생활에 매우 필요한 일들이라 농사일에 보탬이 되기도 한다. 방송 뉴스를 통한 외부 정보도 매우 빨라졌다. 유행가를 따라 부르는 재미와 배우기도 아주 쉽고 편리했다. 내일 모래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는 농사 작업에 도움이 컸다. 평상시 사투리를 즐겨 쓰던 나이 많은 분들도 표준말이 습관화되는 발전의 기회다. 라디오 방송 듣기를 생활화하니 지식의 배움이 많아졌다. 선거 때마다 투표용지에 기호 대신 막대 수효로 표시하던 일을 기호로 바꾸는 일도 라디오 덕택이다. 개인보다 공동 이익이 앞서야 한다는 생각이 저절로 생기는 라디오 영향의 효과다. 라디오 방송이 국민교육을 일깨운 일로 교육 수준과 자녀 교육열은 세계에 자랑하게 되었다. 전체 국민에서 대학생 비율이 높은 순서라면 한국이 단연 상위가 될 것이다.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는 일은 큰 명예를 얻은 것처럼 우러러보던 시절이다. 이는 텔레비전방송이 개통될 때까지 누려온 유명세다. 지금도 그때 그 시절 감동의 목소리를 기억하니 당시의 유명한 성우들이 그립기 그지없다. 연속극 성우들 목소리에 애간장 녹이며 심취하던 그 목소리가 정답고 아름다웠다. 스포츠 중계방송의 아나운서라면 임택근 아나운서와 이광재 아나운서의 인기를 잊을 수 없다. 국민의 심금을 목소리에 담은 기교로 울리고 웃게 하는 정황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다. 온 국민이 귀를 세우고 주먹을 불끈 쥐어 터지도록 하는 마음을 불러내는 목소리였다. 애국심의 발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애국심을 유발해 내는 중계방송 솜씨가 유난했다. 그런 마음을 위정자들은 최대 목적으로 정치에 이용하기도 했던 시절이다. 휴대하는 라디오가 없을 때는 담뱃갑보다 작은 광석라디오로 레시버라고 부른 이어폰을 귀에 꽂고 들판에서 듣기도 했다.
( 글 : 박용 2021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