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개혁주의> 삼송제일교회 정대운 목사의 율법주의 관련 설교 입니다. 제목은 제가 붙여 보았습니다.
* 다 떠나서.. 윤동주 시인이 말한 "하늘"이 "내 윤리적 기준 내 양심"이었을까요?
"율법주의 끝판 왕 윤동주 시인"
여러분들이 일반 본성적인 양심가라고 칩시다. 그리스도로 화하여 된 양심가가 아니라 그냥 본성적인 양심가에요.
그러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내가 하고 싶지만 억제를 하면서 내가 남을 위해서 행동을 하는거에요. 내것이 있고 싶지만 그거 포기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합니다. 헌신해요.. 그랬더니.. 사람들의 칭찬이 장난이 아닌거에요. 그리고 자기 스스로도 상당히 뿌듯해 지는거에요. 하나 더 해, 하나 더해, 두개 더 해, 세 개 더 해.. 자꾸 자꾸 더 하다가 마지막에 하나만 안하면은 사람들에게 뭐라고 손가락질 당하냐? 내로남불입니다. 라고 손가락질을 당해요.
처음에는 하나 두개 하다가 점점점점 점점점 많은 율법에 예속되기 시작합니다. 점점 많은 율법에 종이 되기 시작해요.
그래서 작은 것도 지키지 못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요. 이게 하나님이 주신 양심가에 대한 벌이에요.
제가 우리 성도들한테 이 말씀을 하면서 꼭 알려주고 싶은 건 뭐냐면 그러면 제 눈에 율법주의 끝판왕이 누구냐 제 눈에 율법주의 끝판왕이 누구냐라는 것을 제가 여러분에게 소개를 해 드릴게요.
윤동주시인입니다.
제가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양심가 또는 율법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손바닥을 치며 환영을 받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율법주의를 많이 배웠기 때문에 윤동주가 율법주의인 걸 깨달아야 돼요.
제가 윤동주 시를 한번 읊어볼게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있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벌써 마음이 따뜻해지고, 나도 그와 같은 길을 가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잖아요. 시는 그 저자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되는 거야. 무엇이냐. 그래서 제가 이걸 조사해 봤어요.
윤동주 시인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 하늘이 뭐냐.
그 시를 평론한 사람들은 하늘을 양심 윤리적 기준이라고 봐요. 윤동주는 나는 죽는 날까지 내 양심을 쳐다볼 때 나는 죽는 날까지 내 윤리적 기준을 볼 때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소망했어요.
여러분하고 많이 달라요. 우리는 이렇게 부끄러움이 엄청 많은데 윤동주 시인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추구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나 저나 윤동주 시인을 약간 이해는 할 수 없을 거라지만... 그러나 들어보면은 너무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저 하늘이 뭡니까? 양심, 윤리적 기준이야. 나는 죽는 날까지 내 윤리적 기준 내 양심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을 얻기를 소망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잎새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이 잎새 이는 바람이 뭐냐면 작은 흔들림, 작은 괴로움을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작은 흔들림에도 내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 말이에요. 작은 흔들림에도 양심을 가책을.. 그리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작은 흔들림에도 작은 것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누가요? 양심가는 그렇게 되어 있다. 양심가는..
그러면 이 윤동주는 지금 자기 양심이 괴로움을 느끼니까 이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이 별은 뭐냐면 “희망, 이상, 순수함, 희망, 이상, 별, 희망, 이상, 순수함”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나는 이상,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걸 사랑해야지....
아까 물고기도 사랑하고.. 이 자연도 아름답게 사랑하고.... 다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지는 길을 걸어가야지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오늘 밤도 별이 뭐예요? 별이 별이 희망, 순수함, 나의 소망인데 오늘 밤에 그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바람이 뭡니까? “시련, 현실” 현실이 이상을 힘들게 하는구나.
여러분. 어.....이분은요. 이게 자기 본심이면 율법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너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니까 또 양심의 가책을 잠재시켜서 또 선행을 행하고 선행하고... 아 그래 그래 그래
그런데 이 양심 심판대에 딱 가게 되면 우리 주님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배설물로. 야 그 배설물이야 필요 없어 이 땅에서 작~~은 바람에 스치우는... 그 비리와 그 불합리함만 봐도 내 양심이 괴롭도록 살아왔는데 마지막 심판대에서 그거 필요 없다.
오직 여러분 양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의, 예수 그리스도가 내 대신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의 피, 그 보혈의 피로써 나에게 전가시켜주는 전가되는 의를 받아들여서 양심을 지배해야 돼요. 이 방식은 제가 다음번에 설명해 드릴 거예요.
어떻게 해야, 그러면 내가 이 그리스의 의가 내 속에 들어와서 내가 이 속에 있는 것을 내가 율법을 지키고 내가 선을 행함으로 내 양심의 가책을 느끼니까, 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방식으로 내가 선을 쌓아서 양심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그 의, 그게 내 것이 되었을 때예요. 그럴 때 심판대 앞에 가게 되면요. 그때 심판대 앞에 가게 되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그 수많은 의, 양심가가 가지고 있어서 밤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잠 못 이루면서 내가 어떻게 선하게 살아야 될 것인가?
그렇게 외쳤던 그 윤동주 시인의 그 양심은.. 주님이 내가 너를 알지 못해 이것은 그런데 나는 너무나 큰 죄인이니 나는 너무나 큰 죄인이니 나는 도저히 이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 심판자 앞에 갈 수 없으니 주여 나를 도소서 이 죄인을 도우소서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의를 전가시켜주는 거예요.
그래서 세리나 창기나 도둑보다 도덕과 윤리를 즐겨 지키는 바리세인이 훨씬 지옥에 가깝다고요.
훨씬 이 세상에서 그렇게 고난당하고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편하고 돈 벌 수 있는 그것도 다가 포기하고 윤리와 도덕과 양심을 지키려고 살아갔는데 마지막에 그것은 네 의야. 너의 의야. 그거 가지고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이렇게 되는 것이 얼마나 슬픕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