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순위와 기준
2024. 6. 2(주일낮예배) 마태복음 6:33
세익스피어는 아테네의 티몬(Timon of Athens)에서 맘몬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이렇게 표현한다.
금? 귀중하고 반짝거리는 순금? 아니 신들이여!
헛되이 내가 그것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네.
이만큼만 있으면, 검은 것을 희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든다네.
나쁜 것을 좋게, 늙은 것을 젊게, 비천한 것을 고귀하게 만든다네.
<중략>
그렇다네, 이 황색의 노예는 풀기도 하고 매기도 하네, 성스러운 끈을,
저주받은 자에게 축복을 내리네.
문둥병을 사랑스러워 보이게 하고,
도둑을 영광스런 자리에 앉힌다네
그리고 도둑에게 작위와 궤배(무릎절)와 권세를 부여한다네, 원로원 회의에서
이것은 늙어빠진 과부에게 청혼자를 데리고 온다네.
양로원에서 상처로 인해 심하게 곪고 있는 그 과부가,
메스꺼움을 떨쳐버리고, 향수를 발라 젊어져
오월의 청춘이 되어 청혼한 남자에게 간다네.
세익스피어는 480년 전인 1564년 4월 26일에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 오래 전에도 금만 있으면 문둥병자가 사랑을 받고, 도둑이 영광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아니 그 금만 있으면 양로원에서 상처받고 굶주린 할머니가 멋진 영감님으로부터 청혼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익스피어는 금을 신들이여!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금을 벌 수 있는 것이 우선순위이고, 또 그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삶의 기준이 되어져 있다.
그런데 맘몬의 세상이 가지고 있는 우선순위와 기준이 지금 우리의 기준이 되어져 있지 않는가? 열왕기상 20장에는 아람의 벤하닷이 이스라엘 사마리아를 공격하는 내용이 기록되어져 있다. 아람의 벤하닷은 32명의 성주와 함께 아합왕을 공격하였는데, 그때 너의 은과 금은 모두 내 것이며 너의 아리따운 아내들과 자녀들도 모두 내 것이다고 말한다. 그 말에 아합은 내 주 왕이여 나와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왕의 것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아합은 벤하닷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합왕에게 13절을 말씀하신다.
(왕상 20:13)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아합왕에게 아람의 큰 군대를 보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큰 군대를 보고 어떻게 싸워서 이길 것인가?를 고민하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합왕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므로, 아합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촛점을 맞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아합왕은 선지자가 명령한 대로 행하여서 전쟁에서 승리한다. 그때 선지자는 아람 왕이 일 년후에 다시 올 것이다고 예언한다. 그래서 아합왕은 일 년 동안 준비하였는데, 일 년 후 아람의 군사력 앞에 이스라엘은 두 염소 떼와 같이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때도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통하여 아합왕에게 또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왕상 20:28)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그 전쟁에서 누가 승리하였겠는가? 이스라엘과 아람은 아벡에서 7일 동안 대치하다가 드디어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아람은 보병 10만명을 잃는다. 그래서 성벽으로 도망했는데, 성벽이 무너져서 2만 7천명이 죽는다. 아합이 승리한 것이다.
어떻게 아합이 승리하였는가? 하나님은 아합에게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승리를 주신 것이다. 그런데 아합은 그 전쟁에서 하나님을 알기를 원치 않았다. 그랬던 아합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벤하닷과 화친을 맺고, 자신들이 빼앗긴 땅을 다시 찾고, 또 아람의 다메섹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광장을 만든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아합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자기의 이름만을 높였던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왕상 22장을 보면 3년의 시간이 흐른 후 아합은 유다왕 여호사밧과 연합하여 아람에게 빼앗겼던 길르앗 라못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전쟁을 한다. 그때 아합은 전쟁 중에 화살을 맞고 전쟁터에서 나오려고 하지만, 전쟁이 너무 극심하여 빠져나오지 못하여 피를 많이 흘려서 죽는다. 그래서 그 수레를 창기들이 목욕하는 못에서 씻을 때 개들이 와서 먹는다.
무슨 말인가? 아합은 두려움과 고통 가운데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죽은 아합의 피를 개들이 핥았다는 말은 그의 죽음이 비참하고, 비천한 죽음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왜 아합이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가? 고신총회 통일대비준비위원회에서 주관한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작년에 세미나에서 북한의 실태에 대한 것을 배웠다면 올 해는 북한과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배웠다. 일반적으로 이런 세미나를 가면 기도해야 한다는 말만 한다. 그런데 이번 세미나에서는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들을 수 있었다.
통일을 위한 구체적 방안이 무엇이 있겠는가? 지난 2월 14일 우리나라는 1960년부터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쿠바와 뉴욕에서 외교관계 수립을 맺었다. 그래서 쿠바는 우리나라와 193번째 수교국이 되었다. 북한의 형제국으로 불리는 쿠바가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자 많은 기자들은 대한민국의 외교적 승리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 강의를 한 교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이것은 외교적 승리가 아니라, 북한과 통일할 수 있는 한걸음의 진보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교수님은 북한과 경쟁적 기준에서 외교를 생각하면 통일은 점점 멀어져 가겠지만, 북한과 교류하기 위한 과정으로 외교를 하면 통일은 다가오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바르샤바국립대 김규남 교수님은 통일을 원한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독일과 폴란드의 연합을 설명해 주었다. 2차 대전 때 독일은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하였는데, 그 중에 300만명이 아우슈비츠수용소가 있는 폴란드 유대인들이었다. 그러므로 폴란드는 독일과 절대로 수교할 수 없는 관계였는데, 1970년 두 나라는 수교를 맺고 오늘날 화목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아우슈비츠수용소에 제일 많이 방문하는 민족이 유대인이고, 그 다음이 독일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독일 역사의 수치의 산물인 아우슈비츠수용소에 독일 사람들은 수학여행과 가족여행을 간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우리가 이랬어 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수용소에 가면 아이들에게 히틀러가 이랬어. 그리고 지금의 독일은 달라고 가르친다. 가해자인 독일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3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사건을 우리의 잘못이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피해를 입은 폴란드 유대인들은 히틀러가 그랬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은 사죄하고, 폴란드 유대인들은 사죄하는 독일 사람들이 고마운 것이다.
멋있지 않는가? 잘못한 독일은 우리라는 기준을 가지고 폴란드에 사죄한다. 그리고 사과를 받은 폴란드는 독일이 아니라, 히틀러가 잘못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사죄하는 히틀러가 잘못했는데 자신들이 잘못했다 말하는 독일이 고마운 것이다.
어떻게 독일이 사죄할 수 있었고, 폴란드가 용서할 수 있었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1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하지 말라(1절) 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5절에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고 하였고, 16절에서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구제, 기도, 금식할 때 사람 앞에서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21절에서 네 마음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21절)를 말씀하신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에 어떤 반응을 할 수 있는가? 예수님 설교를 듣고 있는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기 때문에 많은 세금을 내어야 했다. 그랬기에 하루에 두 끼 먹는 것도 버거웠던 유대인들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을 때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한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늘 걱정하며 살았던 유대인들은 먹는 문제만 해결해 주어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하겠다고 결단한 것이다. 이렇게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최고였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오늘 본문을 함께 읽기 바란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서 먼저(πρῶτος)라는 단어는 다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쉬운 일인가? 열왕기상 17장에 엘리사와 사르밧 과부이야기가 나온다. 기근으로 먹을 것이 없었던 사르밧 과부는 들에서 나무를 주워 한 줌의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서 아들과 먹고 죽으려 하였다. 그런데 시돈땅 사르밧에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가 왔다. 그리고 그 나뭇가지로 한 줌 남은 가루로 떡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사르밧 과부였으면 엘리야에게 떡을 주겠는가? 아들을 먹이겠는가? 그런데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말은 그 순간에 자기의 욕심과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다.
왜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인디언들은 매 해 겨울이 다가오면 추장이 그 해 겨울이 얼마나 추울지를 예측해서 그에 맞게끔 땔감을 미리 준비하게 시킨다. 그런데 새롭게 취임한 젊은 추장은 어릴 때 도시에서 현대적인 교육을 받고 온지라 자연의 징후를 보고 날씨를 예측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젊은 추장은 부족원들에게 일단 평소보다 더 많은 장작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였다. 젊은 추장은 부족한 것보다 남는 게 나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장작을 많이 준비하라고 하였지만, 정확한 일기가 궁금하였다. 그래서 기상청에 전화해서 올 겨울에 얼마나 추울지를 물었다. 그때 기상청 직원은 이렇게 대답한다.
올 겨울은 예년보다 많이 추울 것으로 예상됩니다. 왜냐하면 인디언들이 예년보다 더 많은 땔감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기상청이 그해 겨울의 추위를 예상하는데 그 기준이 인디언들의 땔감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놀라운 기적이 우리의 삶에도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를 삶의 기준으로 하고 살아가고 있을 때 저와 여러분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기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사는 성도에게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는 은혜와 사랑이 있어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의 기준과 우선순위를 변화시키는 삶을 저와 여러분이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기준과 우선순위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그 가치를 이 세상에 심어주는 복된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