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교를 건너는 신뢰(Ⅰ) / 정희연
현수교의 생명줄이라 할 수 있는 주 케이블과 케이블 밴드를 국내에서 생산하지 못하고 중국 업체에 맡겨야 하는 현실은 토목 기술자로서 깊은 아쉬움이 남는다. 수천 가닥의 강선을 초고장력 스트랜드로 엮어내는 평행 와이어 스트랜드(PPWS) 제조 설비부터, 케이블 밴드의 주조 및 정밀가공 라인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설비를 구축하고 운영하는 데에는 초기 투자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유지관리에도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국내 시장의 한정된 수요와 경제성 그리고 국가 전반의 생산 인프라를 고려할 때 이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고품질의 원재료는 우리나라에서 공급하고, 가공과 제작은 중국의 설비를 활용하는 합리적인 분업 체계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주탑과 앵커리지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며, 주 케이블과 케이블 밴드의 입고 준비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공정 일정과 자재 품질을 점검하고자 4박 5일간의 중국 출장길에 오른다. 이번 출장의 핵심은 공장에서 주 케이블의 인장강도와 탄성계수 등 주요 성능을 확인하고 기성검사를 수행하는 일이다. 그동안 수많은 토목 현장을 누벼왔지만 글로벌 무대에서 펼쳐지는 비즈니스 출장은 처음이기에, 마음 한켠에는 낯선 설렘과 함께 결연한 책임감이 교차했다.
비행기가 국경을 넘어 대지를 가로지르는 동안, 머릿속으로는 앞으로 마주할 중국 현장의 풍경을 그려본다. 오늘날 중국의 제조 및 건설업계는 눈부시게 발전하여 비약적인 기술력과 거대한 생산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외형의 이면에는 날로 거세지는 미·중 패권 전쟁의 냉혹한 압박과 국제 정세의 거대한 장벽이 버티고 있다.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나가려 할 때마다 가로막히는 보이지 않는 규제 속에서, 그들 역시 전례 없는 고립과 진출의 애로를 겪고 있다.
이처럼 엄혹한 고충과 국제적 압박에서 시공사와 현지 제작사는 서로 상생의 돌파구를 열어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형 프로젝트인 화태-백야 현수교의 주 케이블 제작을 맡아 성실히 임해온 현지 파트너들은 우리와 긴밀하게 호흡을 맞추며 신뢰를 쌓아가는 중이다. 그동안 공산권이나 제3세계 중심의 실적과 폐쇄적인 인프라 위주로 성장을 거듭해온 그들에게, 까다롭고 엄격한 글로벌 표준과 빈틈없는 기술 검증 체계를 요구하는 한국과의 작업은 일반적인 납품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협력은 자유민주주의 선진 시장으로 나아가는 마중물이자 글로벌 신뢰를 증명하는 관문이었기에, 그들 역시 이번 프로젝트에 특별한 정성과 관심을 쏟고 있다.
냉혹한 패권 갈등과 이념의 냉기가 감도는 국제 정세의 그늘에서, 현장은 국경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는 또 다른 삶의 호흡으로 피어나고 있다. 기술력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의 강점을 조화롭게 맞물려 가며 양국 실무자들은 더욱 깊은 유대를 다져나간다. 도면 한 장, 볼트 하나를 두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이념이나 국적 따위는 아무런 장벽이 되지 못했다. 하나의 완성된 구조물을 향해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하며, 그렇게 신뢰의 탑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있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중국 항공기가 쓰촨성 청두 공항 활주로에 내려앉는다. 입국 심사장에서 간단한 절차를 거친 다음 입국장으로 향했다. 출구 한켠에서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현지 파트너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얼굴에 가득 번진 환한 미소와 함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라고 건네오는 서툰 첫인사가 따뜻하게 다가왔다. 공항 로비를 빠져나오자, 우리를 기다린 것은 여유롭고 안락한 밴이었다. 부드러운 엔진 소리와 함께 복잡한 공항을 벗어나 널찍한 도로를 시원하게 달린다.
내일부터 시작될 기성검사와 자재 품질검사 일정을 생각하면, 가슴 한켠이 다시 팽팽한 긴장감으로 조여온다. 하지만 현수교를 매개로 국경을 넘어 연결된 이 인연이 어떤 결실로 이어질지 설렘과 기대가 가슴 가득 피어오른다.
첫댓글 에구, 중국산 맘에 안 드는데, 신뢰감이 안 드는데 그렇게 되고 말았군요. 이런 글 읽을 때마다 정말이지 선생님이 우러러 보입니다. 대한민국 토목 공학계의 한 축을 담당하고 계시니까요.
부디 선생님의 손길이 닿은 화태-백야대교를 건널 날이 어서 오기를 고대합니다.
따뜻한 격려와 응원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처음에는 우려와 낯섦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지만, 막상 현장을 직접 방문하고 보니 그 생각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들이 보유한 교량 건설 실적이나 생산 인프라 규모는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방대하고 체계적이었습니다.
화태-백야대교 위를 건너기에 앞서 그때까지 아무런 사고가 없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