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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 개론 : 제4장>
신약시대의 정치. 사회적 상황
1) 신약시대의 정치적 상황
1.1) A.D 1세기 이전의 상황
1.1.1)그리스도 왕들의 경제적인 팔례스티나 지배 (BC.325-175)
1.1.2)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반란. 하스모니아 왕자의 대사제들
(BC.175-63년)
1.1.3) 로마의 지배. 헤로데왕 아우구스투스 (BC.63-4년)
1.2) A.D 1세기 초엽
1.3) A.D 1세기 중엽
1.4) A.D 1세기 말엽과 2세기 초
2) 신약시대의 사회
학 교 : 대전가톨릭대학교(평생교육원)
(교리신학원)
과 목 : 신약성서 개론
담 임 : 오남한(루카)교수
제출자: 김영우(시몬)
제출일: 2007년 4월 26일
1) 신약시대의 정치적 상황
- 신약시대에 있어서 제1세기 이전의 상황을 기술함에 있어서 편의상 1세기를 세부분으로나
누어 볼 것이다.
첫 번째 : 예수님께서 살아계셨던 시기
두 번째 : 그리스도가 입으로 전파되고 주요 바오로 서간들이 작성되던 시기
세 번째 :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이방인들이 증가하면서 신약작품들이 형성되던 시기
1.1) A.D 1세기 이전의 상황
- 그리스와 팔레스티나 사이에서 무역이 수세기동안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새로운 사태는 알렉산더 대왕이 띠로를 정복한 후 계속해서 페르시아 지배하에 있던 사마리아와 유다를 점령한 기원전 332년 이였다. 이는 군사적 정복 그이상의 의미를 갖는데 그 이유는 팔례스티나-시리아 지역의 유다인 들이 우리가 헬례니즘 세계로 알고 있는 그리스와 동방 문명이 혼합에 동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1.1) 그리스 왕들의 경제적인 팔례스티나 지배 (BC323-175년)
- 알렉산더가 죽은 후 그의 대 제국은 그의 장군들의 내분으로 분열되었다. 정치적으로 유다의 대사제들은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왕조들 사이에 키여 있었다. 두 왕조 모두 그리스 장군들로 이어지는데 처음 백년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유다를 지배하였다. 예루살렘 대 사제들은 정치적으로나 또 경제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왕조에게 도움을 줌으로서 긴 기간 동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종교에 간섭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이집트에서 유다인 들은 소수였지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BC3세기 초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그곳에서 진행되었다.
계속되는 전쟁에서 (BC223-200년) 셀우코스 왕조의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3세는 프톨레마이오스를 누르고 팔례스티나 전체를 통치하게 되었다. 충성의 대상이 바뀌는 이기간 동안 유다인 들은 프톨레마이오 왕조로부터 박해를 받았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처음에 안티오쿠스는 경제적인 부담을 줄여주는 것 같았고 예루살렘 성전을 위해 보조금까지 지불하겠다고 약속 하였다. 그러나 로마에 패배한 후 (BC190) 시리아는 엄청난 배상금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돈의 필요가 증가하였다. 셀레우스 4세 (187-175)의 치하에서 시리아의 총리대신 헬리오 도로스(HELIO DORUS)가 엘루살렘 성전에서 비싼 기물들을 강탈한 것이다.
1.1.2)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마케베스 반란 하스모아 왕가의 대사제들 (BC175-63)
- 셀레우코스 왕조로 인한 곤경은 불안전한 성격의 안티오쿠스에 피파네스(175-164)하에서 정점에 달하였다. 그의 국민들은 미치광이라 불렀다. 안티오쿠스는 국민들이 모두 똑같은 그리스 문화의 종교를 공유 하도록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대사제들을 계속 바꾸면서 예루살렘 대사제들의 야망과 돈을 이용하여 그의 목적을 이루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169-167)주민들을 죽이고 성전을 강탈하여 번제를 드리는 성전제단에 제우스 상을 세우며이도시의 요새에는 시리아 수비대를 배치하였다. 167년 예루살렘의 북서쪽에 있는 모데인 (MODEIN)에 살고 있었던 마따니아 (MATTATHIAS)의 주도하에 유대인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그의 아들 요나단 시몬으로 이어지면서 35년 이상 계속되었다. 이형제들은 마카베오 가문에 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똑같은 가문이라 할지라도 시몬의 아들 요한 히르카노스로 시작한 왕조는 하스모니아 왕조로 불린다. 이것은 아마도 증조부인 마라따디아의 이름(ASAM O NAIOS)을 딴것일지도 모른다. 이때 하시딤 (경건한 사람들)이이 반란에 참가하였다. 일진일퇴의 전쟁에서 시리아는 대사제들의 탐욕과 권력에 대한 욕망을 이용하였고 마카베오 형제들은 시리아의 내부정치의 변화를 이용하여 대적하였다. 결국 (164년)유다가 승리하여 제1단이 정화되었고 152년 요나단은 대사제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아크라를 142년에 점령하고 시리아 수비대를 추방하였다.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고자했던 시리아의 마지막 시도가 실패하고 팔례스티나가 자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시몬의 아들인 대사제 요한 히르카노스 1세 (JOHN HYDCANUS : 1 BC(35/4)의 통치 때 팔례스티나를 점령하려는 시리아의 마지막 시도가 좌절되고 로마는 유다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히르카노우스는 그리심산의 성전을 파괴하였다. 그의 아들 아리스 토불루스(ARIS TOBULUS. 104-103)는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대사제직과 왕권이 이렇게 결합하여 그 후40년 동안 그의 계승자들에게 의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알렉산더 안네오스(ALEXAN DEN JANNAEUS ;103-76)는 수없는 전쟁을 하여 나라의 경제를 넓었고 그가 죽은 후 그의 부인 살로메 알렉산드리아(SALOME ALEXAN DRA: 76-69)가 뒤를 이었다. 계속해서 두 아들 히르카노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그의 뒤를 받았지만 권력다툼으로 품베이부스로 대변되는 로마의 간섭이 가능하게 되었다. 비록 로마가 대사제나 왕들을 통하여 일을 하였지만 그때부터 로마는 실질적으로 이 땅의 통치자가 되었다.
1.1.3) 로마의 지배 헤로데왕 아우구스투스 (BC63-4년)
- 로마의 아리토불르스 보다 히르카노스 2세(63-41)를 더 좋아 하였다.그러나 이두메아의 모험가안티파테르 2세(ANTIPA TERLL)가 살인과 결혼을 통하여 팔레스티나의 주요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안티파테르의 아들인 헤로데는 카이사르의 암살이후(BC44)로마의 권력자들이 계속 바뀔 때마다 충성을 보여BC37년경에 그는 유다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OCTAVIAN)로부터 31/30년에 왕권을 인정받고 그의 지역을 넓일 수 있었다.
많은 유다 백성으로부터 자신이 오직 반쪽 유다인 으로경멸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헤로데는 그리스 로마의 분활에 찬성함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의 통치는 광범위한 건축가임으로 특징 지워지는데 북이스라엘의 옛 수도 사마리아를 재건하여 “세바스테” 라고 부르고 새로운 항구도시인 가이사리아 그리고 예루살렘에 안티니우스 요새 자신의 궁전 성전의 엄청난 확장 옥타비아누스는 BC44년 3월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의 죽은 이후 계속된 전쟁에서 살아남는 자로서 BC27년에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부여받음으로서 업적을 인정받고 온 제국에 그의 기념비를 만들었다. 천사와 함께 땅위의 평화를 노래하고 선포하는 루가의 유아시절에 관한 이야기는 인구 조사 중에 아우구스투스를 널이 선전하기위한 것이었는데 그때 태여 나신 예수님에 대해 적용한 것 일수도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를 시작 하였을 때 로마는 공화국이었지만 그의 말년에 로마는 황제가 통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AD1세기 에도 공화국의 조직과 외국인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원로원과 로마사람들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며 따라서 황제는 이집트나 시리아의 왕들과 같지 않았다 황제는 최소한 이론적인 로마사람들의 생각에 여전히 책임을 지고 있다. 그는 정치적 권력의 확장을 통하여 로마가 지배하는 영토 안에서 새로운 속주들을 만들었다.
1.2) 1세기 초엽
- 이기간이 예수님의 생애기간이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예수님은 혜로데가 죽기 전에 태어 나셨다.(BC.4년) 예수탄생 시기는 혜로데 왕의 시대로 추정함은 복음서의 유아시절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몇 가지 특징 중 하나이다. 이 언급이 정확하다는 가정에서 볼 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전”(HEFORE CHRIST)에 탄생하셨다는 모순은 고대 사람들이 AD6세기에 디오시니우스 (DIONYIUS. EXIGUUS=DENIS)는 연대를 로마에 기초로 계산하지 말고 (A.U.C)주의탄생을 기초로 계산하자고 제안하였다. 디오니시우스는 A.U.C.754를 탄생연도로 잡았다. 이 연대를 가장 그럴듯한 계산방법에 의하면 헤로데가 A.U.C.750에 죽었기 때문에 좀늧게 잡힌 연대이다아들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아
헤로데가 죽은 이후 팔레스티나는 헤로데의 두 르겔라오 (ARCHELAUS)는 유다 사마리아 및 아두메아의 지배자가 되었고 혜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와 요르단 일부에서 4분왕이 되었다. 복잡한 혜로데 가계에 대해서는세 번째 통치자는 필립(PHILIP)으로 그는 갈릴래아 호수의 동쪽에 북쪽지역을 BC4년부터 AD34년 까지 통치하였다. 복음서에서 언급된 벳사이다와 가이사리아 필립비와 같은 도시는 그의 영토에 속해있었다. 아르겔라오의 독재는 그의 영토를 황제의 유다 속주로 삼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시리아의 총독 퀴리노(QULRINIUS)는 인구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로 인해 갈릴래아 사람 유다의 반역이 일어났다. 이 인구조사는 복음서에 언급하고 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소년기와 청년기에 팔례스티나 에서 일어난 심각한 유다 폭동으로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는 사건으로 항상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그 시간에는 필연적으로 소란과 긴장이 있을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시간동안 의 로마 총독은 랄레리우스그라투스((VALERIUS GRUTUS)와 본시오 빌라도 (PONTIUS PILATE)로 각각 1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은 폭동이 일어난 시기는 아니었다.
그 후 예수님의 청년기 시절의 팔례스티나 모습은 혜로데왕이 예수의 고향인 갈릴래아와 예루살렘과 유다를 관리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멫년 지나서 빌라도는 사바리아의 종교적 움직임을 박해하기위하여 무력을 사용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시리아의 총독에게 파면당해 AD36년에 로마로 돌아간다.
1.3) A.D 1세기 중엽
- 유다 총독에 의한 유다지배의 첫 번째 시기는 AD39/40으로 끝이 났다. 가이무스와 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 41-54)의 친구였던 아그리빠 1세는 팔례스티나를 지배하는 왕이 되었고 (AD41-44) 혜로데왕이 다스렸던 영토를 회복 하였다.
사도행전 12장은 제비데오의 아들 야고보를 죽였던 박해 사건의 원인이 그에게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한다. 아그리빠의 죽음이후 로마지배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44-46년 동안 로마총독들은 저급한 인물들이었으며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극도의 불안감을 야기 시켰다. 그들의 악정으로 식카리(SICARII) 열혈당원(ZEALOTS)+<무모하게 율법을 고수하는 자들>및 유다반란이 일어나 로마에 대항하였다. 이시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리스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띤 사건은 “주의 형제” 야고보의 처형 사건 이였다. (AD62) 이일은 안나스(ANANUS 혹은ANNAS) 2세가 소집한 산례린 회의 이후일이다.
불과 2년 후 64년 7월 로마의 대화재 사건이 있는 후 네로황제(54-68)는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믿을만한 전승에 따르면 이 박해로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1세기 마지막 후반 1/3은 사도 후 시대라고 불리어 질수 있다 다수의 로마군대와 최고의 장군들이 유다폭동을 진압하는 일에 관여하였다.
1.4) 1세기 말엽과 2세기 초
- 플라비아누스의 황제들이 AD69년에서 96년까지 통치하였다. 첫 번째 황제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는 67년 유다에서 군대를 통솔 하였다.그리고 그때유다 반란은 진압하였다. 그는 68년 네로의 자살이후 로마에 관심을 보이다 69년에 로마군대는 그를 황제로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는 유다진압 사령관으로 남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포위되었고 성전은 70년에 파괴되었다. 유다인 들과 관계에 있어서 70년대 베스파시아누스는 특별한 형세를 부과하였다. 즉 예루살렘 성전세 대신 로마의 유피데스(JUPITER)성전 재건을 위하여 두 드라크마를 지불하도록 요구하였다. 75년경 티투스는 공개적으로 혜로데 아그빠 2세의 자매이며 유다의 공주였던 베르니체(BERENICE) 와 함께 로마에서 살았다. 또한 요세푸스의 첨부된 이름(플라비아누스)이 드러내는 바와 같이 이러한 황제들의 후원 하에 로마에 있던 유다작가 요세푸스도 유다전쟁과 유다인 들의 역사를 기록한 90년대 초의 작품“고대사”(ANTIGUITIES 1세기 유다 교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에서 티투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플라비아누스 왕조에서 베스파시아누스의 작은아들인 도미티아누스는 가장 오래 동안 통치하였다.(81-96) 그는 로마종교의 순수성을 강조하고자 유다 교인들을 무신론자들의 협의로 처형하였다.그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대적이라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96년경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교회의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볼 수있는바와 같이 “클라멘스1서” 로마의 명령이 그리스도 교인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세 명의 플라비아누스 황제들이 통치한 기간 중 안티오키아 에페소 로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아마도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유다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보다 능가하였던 때였을 것이다.
그 회당의 그리스도인 그들의 신학을 표현하는 방법은 그들이 논쟁할 때 교만하게 보이는지의 여부에 의존하였다 어떤 그리스도 공동체는 회당의 유다 지도자들에 대하여 강한 반감을 드러내었다 회당이 그리스도교 인들을 박해하였고 그들을 추방하였다고 비난한다. 신약의 몇몇 구절은 ‘유다인“그리고 율법은 그리스도 교인들과 다르게 다루고 있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또 다른 왕조가 일어났다. 우리가 관심을 가질 대상은 트라야누스 (TRAJAN 98-117)와 그의 계승자 하드리아누스(HADRAN117-138)시대이다 트라야누스와 그 지역의 통치자였던 플리니어스(PLINY) 사이에 주고받았던 편지에서 소아시아의 그리스도교 박해 법령을 반포하였다는 사실을 알수있다. 불리니우스는 그리스도교 인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노예계급 특히 여자노예 사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그리스도 교회가 살아남을 여면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나시오(LRNATIUS)가 언급되었다. 그는 로마로 압송되어 순교하였는데 (110년경)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주교와 연합하는 것이 중요함을 주장하였다.
트라아누스 통치말에는 (115-117) 하드리아누스 통치포에 로마제국의 동부지역에서 유피데르 성전건설과 할례금지령을 내린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으로 인하여 시몬 벤 코시바(SIMON BEN KOSIBA)의 주도하에 제2차 폭동이 일어났다. 이후의 전승에 의하면 유명한 랍비 아키바(AKIBA혹은 AQIBA)에 의하여 그는 메시아로 인정되었다 로마인들은 이 폭동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아키바는 순교하였다. 그리고 그 후 예루살렘에 돌아가는 자는 죽음을 당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아이 했다. 고대의 도시 예루살렘의 지역에 새로운 이방인도시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를 세웠다. 비록 예수님의 친척들이 도미티아누스시대 팔례스티나 교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지라도 (EH.3.20) 그러한 그들의 지위는 트라야누스 시대로 끝이 났다.(EH.3.32.6) 그리고 하드리아누스 시대에 팔례스티나 교회의 지도권은 이방인들의 손으로 넘어갔다고 이야기한다.
2) 신약시대의 사회
- 앞부분은 로마제국의 정치 역사에 관한 전반적인 모습을 개괄적으로 우리관심을 갖고 있는 기간 동안의 팔례스티나에 대하여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본 단원에서는 팔례스티나의 경우처럼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으나 로마제국의 초기의 지중해연안의 삶에 대한 사회적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것을 알고 있으면 신약성서를 읽을 때 도움이 된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초기의 사람들은 유다 인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들이 신약성서의 모든 저자들일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의 글들과 구약 명절. 자료 및 전승들에 관한 언급으로 가득 차있다. 따라서 유다 교는 신약성서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 한 세기동안 유다인 들은 로마군대가 지배하는 지역에서 살았다. 그리고 예수님 탄생 시기는 유다인 들이 상당수가 그리스어를 사용했을 때 다.그래서 히브리 어로된 성서들은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마카베오 2세나 지혜서 같은 성서들 중 일부는 그리스어로 쓰여 졌다. 구자는 적어도 그리스 철학사상에 대하여 사람들이 알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여러 가지 방법과 문화와 사업에서 유다인 들은 구약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의 모습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므로 신약의 사회적 배경에서는 유다 교뿐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도 고려되어야한다. 신약에 언급된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도시에 위치하였고 로마의 도로체제는 군사목적 이였지만 복음전파자들의 선교여행에 도움을 주었고 도시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도시는 시골보다 인구가 밀접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복음전파자들은 가능한 청중들이 많은 곳을 원했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던 도시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소아세아와 시리아의 도시민들 그리스지역의 로마인들과 유다인들) 로마는 제국의 평화를 위하여 서로다른민족끼리 평화를 유지시키는 것이 정책이었다. 이를 위해 로마제국에서는 유다 인을 특별한 분류로 취급했지만 어떤 도시에서는 유다 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또한 혼합된 민족이었기에 상당한 규모의 인구 이동이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단체들이 ‘소속’된 느낌을 주며 생겨났다. 특히 ‘로마시민’이 아니었던 사람들이 ‘단체’에서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느낌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인 들은 일부 부유계층(축제에 돈을 기부한다거나 후원자 가됨)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들의 종교와 음식에 관한 법 때문에 일반적인 시민들의 삶에서 소외되었다. 가끔 참여의 정도나 깊이는 개인의 판단에 따른 것 이였다 그러나 .필로는 이교도들의 제사에 참여하고자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참여하여 우상숭배 자가된 유다인 들에게 대해서는 중벌을 가하고자 주장하였다.
특히 비유다인들과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민감한 문제로 금지된 음식을 먹을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음식들이 이방의신에 바쳐진 것일 수 도 있다. 이와 같은 식사는 예수님을 믿는 유다인 사이에서 아주 심각한 논쟁의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바오로는 회생제사가 이루어졌던 이교도들의 제의 -식탁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이교도의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리에 따라 제사 들였던 음식을 먹는 것이 우상숭배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요한묵시록 에서는 이를 전적으로 비난하
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다인 들은 공통된 습관과 믿음을 공유할 수 없었고 언제나 의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반유다인들에게 위협까지 당하였다 그러나 다행이 율리우스카이사르(JULRUS CAESAR)가 부여해주고 그의 계승자들이 유다인 들에게 준 특권은 재 확인해주며 법적으로 보호 받았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을 유다 인으로서 생각하는 한 비슷한 보호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 혹은 유다그리스도인들로 일단 유다 교회당에서 거부되면 그들은 더 이상 보호 받을 수 없었다.
. 더구나 로마시민들은 그리스도인의 ‘이상한 행동을 의심했고 마침내 무신론자이며 반사회적인 단체로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면 이전의 공동체 삶의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소속에 대한‘ 것은 재확인 받을 필요성을 갖고 있었다.
바오로의 첫째 편지는 나그네와 행인이 되어 악을 행한다고 비난받으며 모욕을 당하던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였다. 이 편지는 그들이 선택받은 민족들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자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그들에게 확인 시켜주고 있다.
로마제국 초기에 모든 도시들이 동일한 방법으로 취급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고린토와 필립비 같은 도시들은 로마의 재건축 혹은 재 확장 때문에‘식민지’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농지는 과세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오랜 도시에서는 비교적 정통적인 관직의 이름이 보존되었다. 그러나 관직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었던 이전 민주정부는 점차 바뀌어졌다.
로마가 독재적인 통치를 더 선호하자 시민들은 특정한 관직에서 제외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제국시대에 공화정말기의 내란동안 부당하게 착취를 하던 세금제도에 개혁이 일어나긴 하였으나 로마행정부는 세금문제에 관하여 그들의 직업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그들이 고용했던 지방 관리들의 행동에 따라 평가를 받았다. 그러므로 세금징수는 최고의 입찰자에게 맡겨지는 일이 많았다. 세금을 내는 쪽에서는 세금이 부당하다고하고 징수자의 탐욕과 무자비함도 한몫 했다고 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 이방인의 권위자에 대하여 그들의 불의함 냉정함을 보여 주기도하고 그 뒤의 동정적임 혹은 공정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로마제국의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부자와 가난한사람 계급사회는 초기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제를 야기 시켰다. 이두가지 문제가 현재 우리에게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논의될 필요가 있겠다.
“신약에서는 가난한자들”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이들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먹을 것이 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갈릴래아 에서 활동하긴 예수의 삶을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복음에서 말하는 가난한자들은 황폐한 땅을 갖고 있는 농부들 혹은 대 지주의 노예들이었다. 이들에게 즉 가난한자들에게 애정을 갖고 있는 예수님은 농부들을 위해 쟁기나 멍에를 만들거나 문이나 기구를 만드는 택톤(TEKON) 즉 목수로 나왔다 이는 마음의 기술자로서 현재 “미국의 중하층 계급의 불루칼라 노동자와 비교 할 수 있다 또 노예에 관해 말하면 신약성서의 번역들은 그리스어 둘로스(DOULOS)를 ‘종’과 ‘노예’로 번역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은 영국의 가정집 종들 혹은 미국의 아프리카 노예들과 같은 19세기와 같은 경우로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그 당시 노예의 신분은 다양하였다. 관리자 의사 선생 학자 시인이 될 수도 있었으며 부를 축적 할 수도 있다. 대형선박에서 노를 젓는 자들 혹은 채석장에서 일하던 자들이 가장 처참한 경우였다. 그러고 가끔 로마제국 이전에 특히 이탈리아에서 스파르타거스의 반란에서 처럼 노예들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다루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또한 기품 있는 이교도들은 노예제도를 비난하기도하였지만 동방의 일부 종교들은 아무런 편견 없이 노예제도를 수용하였다. 이런 노예제도는 약탈자들과 로마제국이전에 자주 일어났던 내란이 그 원인 이였다. 왜냐하면 죄수들과 정복된 도시의 주민전체가 노예로 팔려갔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복음전파자들은 도시의 가난한 자들과 노예들을 개종자로 만들었다. 중유계급뿐 아니라 (그 수가 많이는 않지만) 부유한 가족들까지 개종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긴장이 성찬전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수많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이기 위하여 아주큰 방이 필요했는데 그런 큰방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신자의 개인주택 이층이 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부유한 신자의 집에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내었을 가난한 이들이 초대받은 것이다. 일부 부유한 신자들이 이처럼 사회적으로 어색한 상황을 피하기 위하여 신자들의 친구들을 먼저 식사에 초대하였고 그 결과 성찬전례에 초대받은 다른 신자들이 오기 전에 그들이 먼저 먹고 마셨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이것을 비난한다. 또한 바오로는 필례몬에게 보낸 짧은 편지에서 도망쳤지만 그리스도인이 된 노예의 문제와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오로는 주인에게 도망친 자를 다시 형제로 받아드려 달라고 요청하는데 이는 그에게 심한 형벌을 주지 말라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그러므로 바오로는 노예 계층이 있는 사회구조를 비난하지 않지만 (이는 아마도 세상의 종말이 임박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노예해방이 바람직 하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교육역시 신약에서 생각해보아야할 문제이다 예수님과 복음전파자들의 교육 및 청중들의 . 교육이 이시기의 유다교육에 대한성격과 깊이 있는 중요한 논쟁 꺼리이다 왜냐하면 일부학자들이 모든 도시에 성서를 읽히는 유다 초등학교와 율법을 공부하는 상급학교가 있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회의적으로 생각하여 그때에는 아직은 그렇게 확립된 제도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읽고 쓰는 능력이 정도를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요셉(JOSEPHUS AGAINST APION 2.25<#204>는 아이들로 하여금 “조상들의 행위나 율법에 관한 학문을 가르침 받도록” 하였다고 유다 법을 해석하는데 이는 부모의 경건함과 가까운 회당의 존재여부에 따라 그대로 행해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성서에 대하여 논쟁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히브리어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제자들에게도 베드로와 요한을 ‘학문 없는 천한 사람’ 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히브리어에 대한 능력의 가능성은 있다.
그리스의 학교교육형태는 로마제국시대에 확립되었는데 기초문학에서 쓰기 음악 운동을 가르치고 그다음은 문법을 가르치며 마지막으로 소수인원 즉 엘리트에게 수사학과 철학을 가르치는 것으로 구성되어있었다. 그리스어의 학문이 신약시대에 팔례스티나에 널이 퍼져있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비록 사회과학과 고고학을 통하여 AD1세기의 갈릴래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최근 2-30년 동안 빨이 성장하였다.예수님의 삶의 환경에 대해서는 분명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갈릴레아 호수 가에 있는 그리스 도시 세포리스 (SEPPHORSS)그의 문화가 예수님께 미친 영향을 과장되게 이야기 해서는 안 된다.
- 또한 마을사람들은 이질적 이 도시에 대하여 불신감이 아주 컸다. 세포리스와 나자렛 사이에 접촉 또한 노동력을 고용하도 수확물을 사는 것과 같은 경제적 접촉이 있었다. 이런 물질의 상호교류가. 예수께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통합된 문화정신의 존재를 반드시 확증 시키는 일은 아니다. 예수께서도 헤로데를 “저 여우”라고 경멸하는 말투로 이야기하시는 것으로 보아서는 헤로데 시절의 중심이었던 세포리스가 예수께서는 반갑지 않은 곳 이였을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님과 그 같은 도시의 관계에 대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님과 제자들이 거래상 혹은 일상의 삶속에서 그리스어를 말하는 자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일부표현법에 대해서는 익숙해있었을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리스어를 아주 잘 알았던 바오로와 관련하여 그가 다르소 에서 자랐는지 아니면 예루살렘에 서 자랐는지에 관하여서는 논쟁이 되고 있다. 다르소 에서 자랐다면 그는 기본적인 그리스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소수의 그리스도교 설교자들은 보다 더 나은 그리스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아폴로는 말을 잘하는 자로 묘사되고 있으며 히브리서의 저자는 신약성서에서 최고의 그리스어를 사용한자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신약의 글들은 코이네 혹은 그 당시 일상생활에서 사용된 그리스어로 기록되어 있다.
일부 그리스어에 미친 셈어적 영향 마르코 복음의 구어체적 성격 요한묵시록의 문법적 실수들로 인하여 학교 교육과정을 전부다 잘 받은 천중들에게 이 작품들은 불완전한 것으로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암시적인 자기방어로 바오로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치는 말로” 선포 하지 않음을 고백함은 당연한 것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