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의 왕권이야기
역사기행을 하다보면 역사기록물에 대한 의구심이 불쑥 일어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또 이런 저런 상상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재구성해보는 재미는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기쁨을 주기도 한다.
원성왕릉을 돌아보면서 삼국유사를 비롯한 오래된 이야기를 기록한 서적들의 구성에 의심이 간다.
신라 하대의 시작으로 분류되는 37대 선덕왕이 사망하자 아들이 없어 조카인 김주원을 왕위에 올리기로 대신들이 결정했지만 알천으로 불리던 북천이 범람해 상대등으로 있던 김경신이 38대 왕좌에 오르게 됐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평이한 내용이 과연 모든 역사적 사실 그대로 일까?
물난리, 물 때문에 왕위에 오른 원성왕은 물과 관련된 용의 이야기로 치세를 하면서 당나라까지 현명한 군주로 알려졌지만 결국 죽어서도 저수지를 메운 곳에 잠들었다.
물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 한 임금인 것이다.
30대 문무왕이 백제, 고구려를 물리쳐 3국통일을 이루고 당나라까지 축출해 전쟁을 없앴다.
물론 일본의 침략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평화의 시대가 왔다.
그러나 신문왕, 효소왕, 효성왕, 성덕, 경덕, 혜공왕에 이어 선덕왕이 6년의 재위에서 물러나면서 왕위를 이어받은 원성왕도 당나라의 견제와 일본의 노략질, 제공의 난 등 대내외적으로 많은 난을 극복해야 했다.
기록상으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 없이 왕위에 오른 원성왕의 등극 과정과 국난을 이겨나가는 당시의 나라사정,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물기 있는 잠자리에 주검을 놓고 있는 천년을 이어오는 역사를 찾아 기행을 떠나본다.
❚원성왕릉 가는 길
원성왕릉은 괘릉으로 불리다 최근 고쳐 불리고 있다.
왕릉을 안내하는 도로표지판도 ‘원성왕릉’ 이라 쓰고 안내서에 ‘괘릉’이라 표기해 두고 있다.
경주 외동읍의 원성왕릉은 괘릉이 있는 마을이라 마을 이름도 괘릉리로 불린다.
원성왕릉으로 불리는 능은 왕을 화장해 못이 있던 곳에 관을 나무에 걸어 장사를 지냈다고 괘릉으로 불리게 됐다.
왕릉이 있는 안쪽으로도 넓은 들이 있고 마을이 형성돼 있다.
마을과 들 가운데 왕릉을 만들면서 소나무숲을 조성해 야산이 형성돼 높은 곳에서 보면 왕릉이 오히려 섬이 된 형상이다.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길 중간쯤에서 좌회전해 1㎞ 남짓 논둑길 같은 산길을 따라 들어가면 남향으로 훤히 트인 전통적인 신라왕릉의 양식이 드러난다.
왕릉입구에는 넓은 주차장이 조성돼 있고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과 해설사 사무실이 있어 해설사의 도움을 얻어 왕릉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다.
원성왕릉은 보기만 해도 대단한 신분을 가진 사람의 무덤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규모가 웅장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벌써 어디에서도 쉽게 보지 못했던 용도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돌기둥이 양편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만나게 된다.
도로변에서 왕릉을 알리는 돌비석을 시작해 왕릉까지 비스듬하게 경사가 높아지면서 100여m는 됨직한 거리에 잔디가 고르게 자라있고 양편으로 네명의 호위석과 네 마리의 돌사자가 버티고 있어 위압감마저 들게 한다.
원성왕릉은 사적 제26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으며 왕릉의 석상과 석주들은 문화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1427호로 늦게 지정됐다.
❚석주와 돌사자, 호석의 예술
원성왕릉을 지키는 석상. 머리에 띠를 두르고 곱슬머리에 구레나룻 수염이 새겨진 서역인으로 철퇴를 들고 있는 무인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성왕릉을 지키는 석상. 머리에 띠를 두르고 곱슬머리에 구레나룻 수염이 새겨진 서역인으로 철퇴를 들고 있는 무인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원성왕릉을 들어서면 동쪽과 서쪽 양편으로 두 개의 돌기둥이 갈라 서 있고, 이어서 각각 두 명의 돌조각상과 두 마리씩의 돌사자가 있다.
입구의 석상은 머리띠를 두르고 구렛나루 수염이 수북하고 눈이 부리부리한 모습으로 서역인임을 금방 짐작하게 한다.
철퇴로 보이는 방망이를 들고 있어 무인상이라는 해석이 해설사들의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이하게 이 석상의 오른쪽 엉덩이 부근에 주머니가 하나 달려 있다.
신라시대에 서역에서 온 남자가 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이다.
당시 신라와 서역이 무역을 하면서 거래를 위해 인장을 가지고 다녀야 했던 것을 고려해 인장이 들어있을 것이라는 ‘인랑’이라는 해석이 있다.
또 거래를 하면서 셈을 편리하게 하기위해 계산기 역할을 했던 바둑알 같은 것이 들어있는 ‘산랑’ 일 것이라 소개하는 해설도 있다.
왕을 호위하는 사람이 서역에서 온 돈주머니를 찬 무역상이요 무사라니 재미있다.
그 옆에는 비교적 얌전하고 매끈한 피부를 가졌지만 눈매가 예리하고 수염 또한 두텁게 있는 신라인이기 보다는 당나라 사람으로 보이는 석상이 있다.
예전에는 문인상으로 소개되던 돌조각이다.
최근에는 늘어뜨린 도포자락 속으로 칼을 짚고 있는 것과 등뒤의 선명한 갑옷조각이 무인이라는 것으로 분석되면서 문인과 무인이라는 해석은 거의 없어졌다.
신라시대 당시에 무인과 문인의 구분이 거의 없었다는 시대적인 상황과 석상의 차림새를 상세하게 뜯어보면서 해설사들의 해석 또한 그렇게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석상을 지나면 네 마리의 돌사자가 양편에서 두 마리는 서로 마주 보고, 두 마리는 남쪽과 북쪽을 바라보고 있어 사방을 지키는 것으로 보인다.
사자들은 각자 얼굴에 웃음기를 한껏 머금고 둘은 입을 크게 벌리고, 둘은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사자를 신라시대 석공들이 어떻게 보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했을까 라는 의문이 있다.
용은 상상으로 그린 그림이고 조각이라지만 사자는 보지 않고 사실적으로 그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서역인들의 조각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서역인들이 신라로 들어오면서 사자나 사자 그림을 들여왔을 것이라는 상상과 서역인들이 신라에 왔던 것처럼 신라인들도 서역으로 진출해 그들의 문물을 직접 보고 듣고 들여왔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원성왕릉은 12지신상이 분명하게 조각된 호석으로 둘러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불교문화와 뛰어난 예술성이 그대로 전해지는 모습이다.
이와 함께 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호석에는 12지신상이 예술적으로 조각돼 있다.
조각품들은 모두 그림으로 그린 듯 정교한 솜씨로 통일신라시대의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다.
❚왕의 길 열어 준 해몽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으로 김양상과 난을 일으켜 혜공왕을 살해하고 김양상을 37대 선덕왕으로 옹립하는 쿠데타의 주역이었다.
당시 선덕왕이 즉위하는데 기여한 공으로 2인자의 위치인 상대등에 올랐다.
삼국유사는 선덕왕이 아들 없이 죽자 왕의 조카인 김주원을 왕위에 추대하기로 했지만 주원은 서라벌 왕궁에서 알천을 건너 북쪽 20리 되는 곳에 있어 신하들이 “임금이라는 큰 자리는 본래 사람이 마음대로 꾸민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큰 비는 하늘이 주원을 왕으로 세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상대등으로 있는 김경신은 왕의 아우이고 덕망이 높아 임금의 자격이 있다”고 주장해 김경신을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경신이 왕위에 오른 것은 꿈 해몽과도 관련이 있다.
김경신이 꿈에서 복두귀인이 쓰던 모자를 벗은 채 흰 갓을 쓰고 12줄 악기를 들고 천관사 우물 속에 들어갔다.
김경신은 “모자를 벗은 것은 관지에서 떠날 징조이고 나무로 만든 악기를 든 것은 칼을 쓰게 될 조짐이고, 우물에 들어간 것은 감옥에 갇힐 징조”라는 해석을 듣고 문 밖 출입을 삼가고 있었다.
그러나 “모자를 벗은 것은 공의 위에 앉을 다른 이가 없다는 것이고 흰 갓을 쓴 것은 왕관을 쓰게 된다는 것, 12줄 악기를 든 것은 12대 후손이 대를 이을 징조”라는 해석과 함께 “왕이 되려면 북천(과거 알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좋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해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는 설이다.
선덕왕과 함께 혜공왕을 살해하고 최고 관직에 올랐던 김경신이 차기 왕위에 엉뚱한 김주원이 거론되자 다시 거사를 도모해 왕권을 차지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사가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회자되고 있기도 하다.
당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김주원은 서라벌을 등지고 강릉으로 이사해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기록이다.
❚독서삼품과 시행하고 만파식적 지키다
원성왕은 귀족들의 세를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젊은 신진관료들을 등용하는 제도를 신설했다.
독서삼품과를 실시해 국학의 학생들을 수준에 따라 나누어 무술실력으로 채용하던 제도를 학문실력으로 바꾸어 인재를 뽑았던 것이다.
원성왕은 아버지로부터 만파식적을 받아 간직하고 있어 다른 나라의 군사를 쉽게 물리치고 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일본 사신이 금 1천냥을 주면서 만파식적 보기를 부탁했지만 원성왕은 이를 거절했다.
‘만파식적’을 소유한 왕이 정통성을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해 원성왕은 만파식적을 내황전에 깊숙이 숨겨 간직했다.
만파식적은 신문왕이 문무왕과 김유신으로부터 선물받은 신라의 보물로 전해지고 있다.
또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 사람들을 데리고 서라벌에 와서 한 달간이나 머물다 돌아가면서 분황사 우물에 있는 용을 저주해 작은 물고기로 만들어 가는 것을 하양관까지 직접 쫒아가 잔치를 베풀면서 “우리나라 용을 잡아간다면 모두 사형에 처하겠다”고 꾸짖어 용을 찾아 당나라 사신이 이에 감복했다는 설이 전하고 있다.
괘릉으로 전해지는 원성왕릉이 진짜 원성왕릉인지는 아직 의문이 간다.
단지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유추할 뿐이다.
삼국유사에서 홍수로 물이 범람해 왕의 조카가 왕궁으로 제때 들어오지 못해 상대등이었던 김경신이 왕위에 올랐다는 기록도 전후 사정을 유추해보면 석연치 않은 것으로 역사적인 사실들이 베일에 가려져 이를 상상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힘으로 얻어낸 왕권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잠들지 못하는 노력들도 역사기행에서 하나씩 들춰보는 가운데 묘한 흥분으로 다가온다.
원성왕릉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반대편으로 1㎞ 정도 가면 영지와 영지 석불좌상이 있고, 원성왕릉에서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감산사지 삼층석탑과 비로자나불을 볼 수 있다.
첫댓글 원성왕의 첫째와 둘째 아들이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사망하고
손자에게 왕위를 잇게 된 과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자료 가지고 계신분 있으시면 올려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