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문학: 말의 심층 - 신두호, 「피뢰」
말들의 사실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과감하게 바깥에서 안으로, 질서에서 방향으로, 랑그에서 랑가주로.
-우선은 벗어나기 전에 거쳐 가자. 말이 지각의 체계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다. 랑그의 진화는, 문법, 어휘, 등등이 더 복잡해지든 단순해지든 모국어 화자들이 더 쉽게 그 단위들을 지각할 수 있도록 고정된 영역을 갖고자 하는 진행이다. 말의 통시성에 대해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말들 사이에 밀고 밀리는 각축이 있을지라도 적어도 그것이 말이라면, 언제나 고정된 지각의 영역을 공시적으로 보존한다. 심지어 한 말의 영역이 다른 말에 돌이킬 수 없이 피탈 당할지라도, 말로서 그래도 있다면, 신기하게도 어떤 말도 공시적으로 만인이 수긍하는 절대영토를 통시적으로 지킨다. 오히려 통시적 변곡을 극심하게 겪은 말들에서 이러한 지각의 공시적 고정된 영역이 더 잘 엿보이기도 한다. 기실 말은 사라질 수도 없는데, 사용되지 않는 것은 이 영역이 영구히 봉인된다는 의미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전을 뒤지는 소설가에게서 이 말은 봉인이 뜯길 수도 있다. 가히 이 고정점을 랑그의 이데아라고 할 만한데, 이 이데아와 접속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말이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를 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언어분석학자들의 일이다. 한편 일상적으로도 우리는 덜 분석된 이 로고스의 영역을 수용하면서, 일단 그것이 말이라는 것을 지각한다. 한국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게 하는 특유의 로고스가 있는 것이다. 말하는 장소, 말하는 시간; 말의 배경이 담론에 영향을 미치더라도, 우리가 그것이 말이라는 것을 지각하고 쓰는 이상은, 주인공은 이 랑그 차원이다.
-과감하게, 그런데 지금 이 차원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우리가 랑가주 세계에 진입해서 말을 파악할 때를 생각해보자. 말을 파악한다는 것은, 언어학자에게마저도 결코 말의 구성성분을 셈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작업은 말을 파악할 수 없게 한다. 우리는 담론 속에서 랑가주로부터 랑가주 자체가 마치 윤곽처럼 둘러쳐지면서 정신의 한 영역이 부각되는 것을 파악한다. 여기서 드러나는 정신이 바로 ‘개념’이고, 이 개념을 파악하는 작용이 개념작용이다. 개념은 말이라는 윤곽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데도, 역설적으로 말이라는 윤곽에만 집착해서는 알아볼 수 없다. 어떤 명화라도 붓질의 묘리에만 빠져있을 경우,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 볼 수 없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여기서는 ‘무엇’이 개념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휘론이, 형태론이, 음성론이, 그렇게 개념작용 안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사라지게 하는 어떠한 힘이 구심적으로 항존한다는 것이다. 기호들은 실상, 그 ‘무엇’이 ‘무엇’으로 작동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신호체계 같은 것일 뿐이다. 강력한 실재는 이 ‘무엇’ 안에 있다. 담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상대 말의 억양, 어조, 강세 등등의 정보가 시시각각 그에게 수신되는데, 그는 이것들을 이 자체로 기억하지 않고, 항상 무엇 개념 안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어가게 한다. 우리는 녹음테이프가 아니므로 당연하다. 심지어 그는 이 개념과 어울리지 않을 경우 그 정보를 버리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곡하기도 불사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상대의 에토스에 대해서 덜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에 대한 온갖 신화의 기원이 된 사고를 마주하게 된다. 말만으로 드러나는 말이 아닌 세계가 쌍으로 태초부터 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들은 말이 심연으로 흘러들어가는 모습을 불편해하며, 말을 말이 아닌 세계의 즉시적이고, 일의적인 현성으로 보고자 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깊이를 가정해보자. 단지 랑가주가 점점 더 옅어지되, 그러나 표면의 랑가주 세계보다는 더 깊은 층위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개념도 지각으로서의 말을 벗어난 가장 안쪽에서 말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의 진동처럼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말로 표현되었던 개념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만큼, 광역일 것이고, 요동칠 것이지만, 그 풍부함이 그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기에 이 대로는 그다지 유용하지 않았다. 사실상 그것은 말로서의 파토스이다. ‘착한 사람’이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의미’가 전달 될 때는 이 말로서의 파토스를 예감할 때이다. 바로 이 상태를 지금에 우리로서는 힘들지라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언어진화사는 이 말로서의 파토스가 표명된 말이 되겠끔 끓어오르게 해보려는 고군분투의 역사였다. 이 고군분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우리는 말하자면, 소위, 일컫기를, 생각건대, 사실은, 파토스를 억지로 띄워 올리면서 말로 드러나게 몸을 가열한다. 랑그의 문법성이 촉매처럼 이 발산을 돕는다. 거대한 영혼이 작은 두뇌와의 연대성을 이용해서 유용한 행위를 하듯이, 파토스는 말과의 연대성을 이용해서 유용한 기호를 발표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멈추지 말자. 이 파토스를 쏘아 올리는 심층의 의도가 그가 하는 말들 전체를 추동했다. 그리고 이 추동을 헤아리면서 우리는 그 말들이 한 단위의 담론이라는 것, 단지 기호들이 아니라, 기호화작용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그가 말했어”라고 할 때, 여기서 ‘말’은 내가 그에게서 간취한 개념의 모호한 표현지만, 더 깊이는 한때 그와 말하게 한 어떤 추상의 동력을 축약한 것이다. 달리 말해, 이 기호화작용을 통해서 발아하게 했던 한때의 말하려는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그가 노출한 것이다.
말하려는 욕망을 생각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생명체 안에서 말을 사유 할 수 있으리라. 말들의 실재가 말마디로 끊어지는 표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력, 지속하는 질적다양체에서 찾을 수 있는 것 아닐지 탐문해보자. 말하려는 욕망은 한시도 사그라지지 않고 생명체와 함께 하면서 때때로 이러 저러한 개념을 특이점 삼아 ‘말할 수 있는’ 온도를 확립한다. 우리는 언제나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말하지 않고 있을 수 없다. 다만 강도가 있다. 강도의 변주가 욕망을 질적인 다양체로 만드는 것인데, 약한 강도일 때 말은 덜 말인 채로 있을 것이고, 강한 강도일 때 특이점을 넘어 이 욕망은 드디어 말이 될 것이다. 도저히 이때 말하려는 욕망은 표명된 ‘말’ 거기에만 매달려 있는 것으로 발견되는 그러한 것일 수는 없다.
그래서 말은 차라리 가리키는 자(생명)를 암시하는 가리킴(기호); 즉 방향이다. 이 말은 너무나 짧다. 자세히는, 말은 한 방향을 나타내는 기호인데, 이 방향이란 가리키는 자들인 자연에서 생명, 자아, 지각까지로의 향함이므로, 우리는 말의 사실들부터 말의 심연들까지를 사실의 선을 따라 가로지르며, 이 방향이 암시하는 가리키는 자들 자연, 생명, 자아, 지각들을 그 방향 안에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말의 내재성에 대한 연구이다. 당장에 생각나는 방향들만 말해보자면, 자연과 생명 사이에서 언어진화론이 있을 수 있다. 생명과 자아 사이에서 언어정념론이 있을 수 있다. 자아와 말 사이에서 문체론이 있을 수 있다. 이것들을 통하게 하는 언어학을 찾을 때에 나는 말의 내재성을 확보한 것이다. 드러내는 양태도 여러 가지가 있다. 철학자는 개념화를 가동할 것이다. 기호론자는 기호를 표식할 것이다. 작가는 사물을 만들 것이다
-짧은 은유 하나를 덧붙이면서 마치도록 하자. 자기장의 제각각 방향들은 하나의 자석 공간을 그리면서 자석의 권능을 암시한다. 계측된 방향들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관념연합론적 단독성만이 강조되겠지만 전체 안에서 그것은 ‘하나’의 창발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말하려는 욕망의 방향들, 즉 말들은 하나의 공간을 그리면서 생명의 권능을 암시한다.
만드는 자에게는 작품들이 있다. 여기서 말하려는 욕망은 말 안에서, 만든 말 안에서 무엇인가 다른 것이 되고자 하는 욕망일 수는 없다. 반대로 말하려는 욕망은 자기장과 자석의 관계에서처럼 자기 스스로를 암시하려는 욕망이다. 일단 표면에서 암시되는 것은 자아이겠지만, 이 자아의 고유함에서 무엇인가를 발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이 자아는 결코 소박한 것일 수 없다. 그에게 자아는 자연의 발산인데, 자기 자아로 발산한 이 자연은 자기 생명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권능이고, 말 그대로 자기만이 알 수 있으므로, 존재자들에게 대면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고로 방향을 ‘암시’하여 드러낼 것이다. 이렇게:
말마디가 어둠을 조각내며 사라지는 그 순간, 순간들의 피뢰에 한걸음 씩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불길은 번지지 않고 건넨 말 한마디씩만 나타나고 사라지고 나타났다. 눈앞의 세계가 이따금 밝았고 강물은 우리를 갈라놓으며 흘렀다. 불빛만이 지금을 속삭였는데, 이 지금들은 차라리 방향이었다. 피뢰침의 번갯불은 말의 방향을 분명히 했고, 향하는 것들을 따라서 가리키는 자들, 어슴프레한 초원과 쉼없는 물살이 끝없이 암시되었다. 말을 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무지개색도 너의 형상과 더는 분리되지 않는 생명력 그 자체로 말 안에서 번뜩였으니, 문자처럼 말이 무채색인데는 이유가 있으리, 네가 사랑스러운 데는 이유가 없으리. 그리하여 나는 자연이 그러하듯 지나온 모든 장소에 대화가 깃들었었고, 깃들고, 깃들겠다는 것을 느꼈기에, 말은 사그라질 뿐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목이 잠기던 때에도 침묵하며 걸었다. 말하지 않고 있는 존재가 없다.
「피뢰」전문, 신두호
빛이 모이는 곳을 오래 지켜보아도
불길은 일어나지 않고
건넨 말 한마디만 사라졌다
우리가 건너야 할 강 너머로
어슴푸레한 초원과
쉼 없는 물살이 함께 묘사되곤 했다
흔들리는 추에 관심을 가지고
추의 부피와 운동에 무감각해지면
한걸음씩 다가오는 것이 있었다
한 치 앞에서 떠오르던 무지개가
너의 형상과 더이상 분리되지 않았다
지나온 모든 장소에 대화가 깃들었다
허구적인 마찰이 바람을 만들면
목이 잠기던 때에도 침묵하며 걸었다
눈 안의 세계가 이따금식 밝았고
강물은 우리를 갈라놓으며 흘렀고
불빛만이 지금을 속삭였지만
밤하늘은 언제나 불길하면 보였다
잃어버린 말이 어둠을 조각내는 것 같았다.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 44~45쪽.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07418058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
-책소개
창비시선 407권. 2013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신두호 시인의 첫 시집. 시인은 등단 당시 '이미지와 사유를 능숙하게 발휘하고, 유장한 리듬에 실린 힘 있는 문장을 매끄럽게 운용한다'는 호평을 받았다.
등단 4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참신하고 활달한 시적 상상력과 감각적인 표현을 앞세워 존재와 존재, 현상과 실재가 만나는 다양한 양상과 그것의 의미를 냉철하게 고민하며 세계의 진상(眞相)을 드러내는 색다른 시각의 관념적 시 세계를 펼쳐 보인다. 세밀하고 안정된 문장 속에 "형이상학과 관념론과 모호한 이미지"가 뒤섞인 가운데 철학적 사유가 돋보이는 깊이 있는 시편들을 오래오래 곱씹어 읽는 맛이 각별하다.
-추천사
신두호의 첫 시집은 ‘이행(移行)’과 ‘작용(作用)’의 시들로 이루어진 음악적 세계다. 점에서 점으로, 음에서 음으로, 시의 궤도를 수정하고 확장하면서 존재를 실어나르는 동사들을 보라. 현재진행형이나 수동형의 동사들이 만들어내는 파동 속에서 모든 사물은 어딘가로 가고 있고, 무언가가 되어가는 중이다. 물기가 증발하고 빛과 색이 희박해진 진공상태, 그 무중력의 어둠속에서, 고독이라는 장소에서, 신두호의 시들은 태어난다. 보거나 말하는 자의 능동성을 포기하는 대신 그의 감각은 없는 것을 만지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시인이 생산해낸 얼굴에는 주체의 표정이 비워져 있고 발화하는 입 또한 없다. 사라진 입은 “문 앞에서 증식하는 문”처럼 부재와 침묵의 내부를 열고 들어가 독특한 선율과 화음을 만들어낸다. 그 이행의 과정에서 시어들은 잘 조율된 피아노처럼 힘과 긴장이 고루 안배되어 있다. 이 내향적이고 사려깊은 연금술사의 손끝에서 시의 질료들은 기화와 액화, 상승과 추락을 거듭하며 “진리의 순수한 불순물들”에 가까워져간다. 이 젊은 시인은 왜 그토록 일관되게 ‘선천적 희미함’과 ‘수동적 능동성’을 견지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는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제대로 무력해지기 위해서는 내부에 얼마나 많은 힘을 비축해야 하는지를. 정교하게 엇갈리기 위해서는 서로의 속도와 중력에 얼마나 예민해져야 하는지를.
이 개성적인 시인이 입문한 ‘새로운 자연’ 앞에서, 그 ‘조화(調和)로운 조화(造花)’의 풍경 앞에서, 독자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수학적 치밀함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서정적 물기와 실물감을 걷어낸 ‘표본의 세계’가 이렇게 유려한 음악을 들려줄 수 있다니! - 나희덕 (시인,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판사 제공 책소개
“치밀함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없는 것을 만지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탁월한 감각의 시
타고 남은 너의 얼굴은 잿빛이었다//한번도 불붙은 적이 없는 것은 네 얼굴이었다//머리 한가득 연기를 품고//네가 거닐던 어디에서든 흩날리는 것은 재로 변했다//한때 너의 일부였던 표정들이//도처에 마음을 묻으려고 했다(「호명」 전문)
2013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신두호 시인의 첫 시집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이 출간되었다. 등단 당시 ‘이미지와 사유를 능숙하게 발휘하고, 유장한 리듬에 실린 힘 있는 문장을 매끄럽게 운용한다’는 호평을 받았던 시인은 등단 4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참신하고 활달한 시적 상상력과 감각적인 표현을 앞세워 존재와 존재, 현상과 실재가 만나는 다양한 양상과 그것의 의미를 냉철하게 고민하며 세계의 진상(眞相)을 드러내는 색다른 시각의 관념적 시 세계를 펼쳐 보인다. 세밀하고 안정된 문장 속에 “형이상학과 관념론과 모호한 이미지”(함돈균, 해설)가 뒤섞인 가운데 철학적 사유가 돋보이는 깊이 있는 시편들을 오래오래 곱씹어 읽는 맛이 각별하다.
풍경은 징후와도 같은 울림으로 포착된다/더이상 호소하거나 맹세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을 때/문 앞에서 증식하는 문을 보았다/유리볼에 담긴 샐러드를 뒤적이며/중얼거렸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 미안하게 됐다/소독과 오염이 구분되지 않는 거리에서/우리의 고해를 위한 몇개의 빈소를 마련하고서/(…)/째깍거리는 심장 소리를 확인하려/창백한 손목들에 귀를 가져다 대면서/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면서/고백했다 몇번의 비명과 함께 날이 밝아오고/구겨진 신발들이 구석에서 벗어나게 되면/물이 멎듯 고요해질 선언들로 남아(「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 부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를 다루는 신두호의 시는 다소 난해한 일면을 보이면서도 색다른 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이 있다. 시인은 현상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꿰뚫는 견자(見者)의 눈과 “없는 것을 만지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나희덕, 추천사) 탁월한 감각으로, “어둠속에서 말라가는” 평면화된 존재들의 “뒷모습을 이해하기 위하여” “입체안경을 쓰고 세계를 일종의 수사선상에 놓아”(「증후군」)본다. 그리고 “이견으로 엇갈리고 회의가 난무하는 곳”(「여론의 기억」), 연대와 공존이 사라진 메마른 현대문명의 거리에서 “상대적으로 희박해”(「자연에의 입문 3」)질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비극적 인간관계의 이면을 보여준다.
주머니에서는 늘 손을 목격한다/누구의 것도 아닌/손을 위해 걸어야 했다/안개 속의 사람들이 고립되던 무렵이었다//할 말을 잇지 못하고/시야의 모든 사물로부터 멀어졌다/이글거리는 물풀이/도시에 불어나던 게 기억의 전부였다//시간이 초침 단위로 뚝뚝 끊어지고/손을 쥘 줄 모르는 손가락들이/보폭 속으로 서서히 잊히고//방향이 모든 감각으로 나뉘어갔다/곳곳에서 바지와 양말이 수거되었다/점들을 옮기려고 이동하는 몸을 만났다//(…)//사물들을 선으로 이어주는 건 혼잣말일지도 모른다/숨을 쉬어보면/밤하늘의 깊은 곳으로 옮아가는 점들//도시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물결//무리에 섞여드는 네가 나를 기억해냈다/구분할 수 없는 손가락들이 손에서 손으로/안개 속을 떠돌아다녔다(「다가가는 행위」 부분)
신두호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안개’나 ‘연기’는 왜곡된 관계의 표상으로서, 시인이 대면한 세계의 모습이자 “당겨야 할 문을 밀면서/밀리지 않는 문을 당기면서” “서로의 실물에서 빠져나”(「당기시오」)가는 세계의 증후이다. “서로를 감춰주던 장애물”(「연인들의 연인」)이면서 존재들의 고립과 부재를 일깨운다. 그리하여 시인은 스스로 분리되거나 흩어지거나 소외되는 이 “감은 눈의 세계”(「캐비닛」), “연기가 검은 혀처럼 굳어”가고 “생물들이 안개가 된 세계”(「11월」)에서 “소리 없는 얼굴에 생명을 불어넣”는 “새로운 시대의 인공호흡이자 심폐소생이며 자기보존의 현장”(「폭포」)으로서 ‘새로운 자연’에 ‘입문’하고자 한다.
거리는 시민으로 성장할 기회를 모두에게 배분합니다/비물질적인 차원으로 흩어져 있는 인류와/동식물들은 전례 없이 생략되고 있습니다/불빛마저도 안개 속에서 창궐합니다/거리에 속도만이 전시되어 있을 때/우리는 누군가로 기억될지 알지 못합니다/어깨를 부딪치고는 영원히 멀어집니다//(…)/이곳에선 언약이 악수를 대신합니다/시민들 중 누구도 사회와 접촉하지 않으며/극소량의 숨을 서로에게서 전달받습니다/최소한의 양분으로 성장하기 위해/모두들 각자의 속력으로 엇갈립니다(「자연에의 입문 3」 부분)
시인은 “금식 중이고” “섭식장애가 있고” “늘 소리를 내지르”는 존재들의 세계에서 “장애물이 있는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뒤집히면 날개로 나는 벌레”(「버드나무들과」)처럼 “불가능한 종류의 고난”(「폭포」)을 견뎌내며, 부정을 통해 긍정으로 도약하는 존재의 변증법을 기원하고 실천하고자 한다. 존재와 세계에 대한 물음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철학적 개념과 사상을 시적 공간으로 끌어들여 ‘변증법적 인식론’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무중력의 어둠속에서” 혹은 “고독이라는 장소에서”(나희덕, 추천사) “빛을 밝히고 어둠을 더욱 어둡게 하”(시인의 말)면서 우리 시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자못 진지한 주제로 관념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나가는 이 젊은 시인의 행로를 두고두고 함께하고 싶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면 착지할 수 있을까/바닥이 높은 곳이 되고/다시 떨어진 곳에서 높이를 발견한다면//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까/양손을 펴고/번갈아 뒤집어보면서/실제로 태어난 것에 감사해할 수도/있겠지만//아무것도 쥘 수 없을 때 손은/스스로의 깊이에 매료되었다/커지는가/무한해지는가/건네줄 수는 있는지//어쩌면 이는 누군가의 두 눈을 가리기 전에/피 흘리는 손목을 거두어들이는 일//물속에 팔을 담그고/바닥을 더듬으면 닿을지도 모르는/수심에서//바닥은 잃어버린 높이를 찾는다//내디딘 무게만이/매번 새로워지는 곳으로/떨어진다(「높이의 깊이」 전문)
첫댓글 세월 네월은 세는 게 아니니...
"깊은 말"로 제목을 붙이고 싶었는데, 이 글에 어울리지 않아서 미뤄둔다. /글쎄 이 글을 쓰면서 내 생각이 기존 언어관에서 약간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도 결국 언어 발생론의 아주 오래된 논쟁, 프시스와 노모스 논쟁에서 프시스 편을 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