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애운동사: 연대와 갈등 사이
유동철(동의대 사회복지학과)
들어가며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노동, 교육, 시설, 이동, 선거, 방송 등 모든 생활영역에 팽배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한편, 차별과 배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차별에 대한 반작용 또한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차별에 대한 반작용은 차별받는 당사자들의 저항운동으로 표출된다. 이와 같은 저항운동을 우리는 장애인 운동이라고 부른다. 김상호(1994)는 장애인 운동이란 장애인의 열악한 삶을 개선하려는 제 활동을 말하며 장애해방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장애해방운동이란 장애인이 장애를 입었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받는 온갖 차별과 소외에서 해방되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 즉 장애인의 인권을 회복하기 위한 모든 사회적인 활동이라고 제기하고 있다. 즉, 장애인 운동의 궁극적 가치는 장애로 인해 차별되고 소외되는 인권의 회복에 있다(유동철, 2017: 335).
이러한 운동은 장애인 정책의 변화로 귀결된다. 최근 제정된 모든 법률들이 장애인운동에 의해 제안되고 형성되어왔다는 점에서 장애인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차별과 배제에 대한 저항운동, 인권회복운동은 항상 동일한 모습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당시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과 이 시기에 조응한 주체의 역량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다른 궤적을 따라 성장한 한국의 장애운동은 같은 듯 다른 길을 꾸준히 걸어오고 있다. ‘서로 다른 길을 가다 가끔씩 연대하고 격하게 충돌’하는 것이 최근 우리나라의 장애운동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한국장애운동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보고 그 갈래길의 근원과 이유를 살펴보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매우 절실해 보인다.
2. 우리나라 장애운동 간략사
1) 장애인운동의 태동기: 1945년 ~ 1980년대 중반
1945년 해방이후 1977년 12월 특수교육진흥법과 1981년 6월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한국에는 장애인 거주시설을 제외하고는 장애인을 위한 체계적인 정책이 전혀 없었다. 정책이 없다는 것은 사회적 관심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로 인해 장애인들의 삶은 피폐해졌으며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장애차별과 억압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긴 하였지만 조직적이고 지속적이며 개혁지향적인 장애운동은 존재하지 않았다. 장애차별에 대한 저항은 주로 입학과 공공직 임용에서 낙마한 장애인들을 구제해 달라는 식의 대응이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67년 부산중학교에 지원한 소아마비 학생이 학과시험에서는 만점을 받고도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해 1968년 한국소아마비아동특수보육협회(현재 한국소아마비협회)에서 서명운동을 벌인 일이 있었다(한국재활재단, 1996: 275-276). 이러한 항의의 결과로 정부는 1972년부터 중학교 및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장애학생에 대한 체능검사를 면제하기로 결정하였다(김윤정, 1997).
입학거부와 같은 장애인차별은 공공 노동시장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노동시장에서의 장애운동의 시발점이 된 사건은 1980년 제22차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4명의 장애인이 1982년 법관 임용에 있어 이유 없이 탈락된 사건이었다. 이에 20여개의 장애인단체가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서명운동, 집단탄원서 제출 등 다각적인 대응을 전개해 결국 대법원으로부터 구제조치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각 대학에서 장애인들의 입학을 거부하는 사건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했고 이렇게 차별에 대해 당시의 장애 진영은 조직적으로 대응하기보다 단발적이고 개별적으로 대응하였으며 그 목표도 개인구제차원에 머물렀다(유동철, 2004).
이 시기 장애인 운동은 일부 단체를 조직했다는 것 이외에 운동의 가치나 장기적이고 합목적적인 전략과 전술은 없었던 시기로 평가할 수 있다. 대부분의 움직임은 특정한 사안에 대한 즉각적 반응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장애인단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장애인재활협회(1954), 대한정신박약자애호협회(1968), 한국소아마비협회(1966), 한국뇌성마비복지회(1978), 한국신체장애인복지회(1981) 등이 조직되었지만 조직적인 운동은 보여주질 못하였다(유동철, 2017: 339). 위 단체들은 대부분 비장애인 또는 장애인으로서 사회에 성공한 전문가들이 만든 단체로서 장애인들을 교육하고 계몽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들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운동의 주체도 장애인당사자라기보다는 장애인 단체의 전문가나 부모,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애인 대중의 자발적인 목소리내기가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또한 이 시기 장애인단체에는 사회를 구조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장애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려는 흐름이 거의 없었으며, 장애인을 지원하고 자립하게 도와야 한다는 흐름이 강했다. 따라서 장애인단체들간에 상시적인 연대 뿐만 아니라 이념적 충돌, 노선 갈등 등은 거의 없었다.
2) 장애인운동의 성숙기: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중반
(1) 87년 민주화 운동과 장애운동
한국에서 장애를 사회적 구조의 문제로 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였다. 그렇지만 한국의 장애인운동은 장애학이나 장애이론에 도움을 받아 사회구조를 이해하고 행동 지향을 설정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민주화 및 사회변혁 운동 과정에서 이론적 근거를 찾고 운동 지향을 확립해 나갔다.
한국의 민주화는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기점으로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에서는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이 때 사망 또는 실종된 사람이 606명)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대통령이 된 전두환이 1987년 대통령직선제를 시행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자 전국의 민심이 들끓었고 이 때 서울대에 다니던 박종철학생이 고문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연일 ‘호헌철폐, 독재타도’운동이 벌어졌다. 이 운동은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연임하고자 했던 현직 대통령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한국사회에 본격적인 민주화가 진행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당시에 한국에서는 진보적 지식인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사회구성체논쟁 등 한국사회의 억압적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과학적 학습운동이 본격화되고 있었고, 청년 장애인들 중 일부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적 속성에 주목하고 자본주의에서 장애인에게 가해질 수밖에 없는 억압적 본질과 이에 대한 해방적 수단으로서 혁명에 주목하는 학습모임들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모임이 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1986)였는데 이들은 장애 문제의 원인이 장애인 개인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구조에 있다고 보았으며,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1987)도 사회적 관점에서 장애문제를 파악하고 정책대안을 만들어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사실 이 시기에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이 한국에 소개되기 전이었으나 올리버의 사회적 모델과 유사한 고민이 한국 장애인 운동 진영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서울장애인올림픽과 양대 법안 투쟁
사회구조적 관점에서 장애를 바라보기 시작한 장애인들에게 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던 것은 1988년의 제8회 서울장애인올림픽(1988. 10. 15 ∼ 24)이었다. 장애인들은 서울장애인올림픽 거부운동을 전개했는데, 이 당시 한국 정부의 장애인복지예산은 겨우 50억원 정도였으나 장애인올림픽에 배정된 예산은 직접적인 비용만 약 200-300억이었으니(함께걸음, 2003년 12월호: 16), 이러한 반응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동년 4월 16일 명동에서 장애인들의 최초의 대중집회라고 할 수 있는 ‘기만적인 장애인복지정책 규탄대회’를 개최하였으며, 7월 20일에는 장애인올림픽 조직위원회를 점거하여 올림픽의 기만성을 폭로하면서 전시적 장애인올림픽 전면 거부,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 장애인 실태파악 즉각 실시 등을 요구하였다(김윤정, 1997).
1989년 10월 30일에는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과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에 초점을 두고 1988년에 창립된 한국장애인총연맹을 중심으로 전국의 많은 장애인단체가 하나가 되어 ‘양 법안 쟁취를 위한 전 장애인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공동대책위원회 역시 김성재 한국장애인총연맹의 공동대표가 위원장을 맡았으며 장애계의 주요인사들을 고문으로 구성하였다. 또한 각계 사회인사들을 주축으로 하여 자문단을 구성 하여 장애인고용촉진법 등에 대한 논의가 장애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사회문제임을 확산시켜나갔다. 이러한 사회적 명성이 있는 외부인사영입은 사회․정치적으로 지지기반이 약한 장애인운동조직의 입지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측면이 강했다고 분석될 수 있다(이인영, 2001). 이후 지속적인 집회와 명동성당 철야단식농성, 혈서, 삭발, 단식농성, 주요 정당 당사 점거농성 등을 통해 1989년 12월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장애인복지법으로 개정되었고 장애인고용촉진법이 제정되었다.
이 운동은 한국에서 본격적인 장애인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기존의 장애인운동이 개인적 구제라는 목표에 치중되어 있었다면 이 운동은 장애문제를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장애인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운동은 주로 대정부투쟁으로 나타났으며 운동의 구체적인 목표는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에 집중되었다.
이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두 단체가 있었는데, 양법안 공대위에 결합해 있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와 전국지체부자유대학생연합회(1978)였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1987년 민주화 운동의 흐름 속에서 교수·변호사 등 전문가 그룹, 경증지체장애인 및 비장애인 활동가들이 장애인 권익 옹호와 정책개발을 위해 만든 단체이다. 이 그룹은 법안을 만들고 논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주로 하였다. 이 운동에서 대외협력부를 맡고 있던 전국지체부자유대학생연합회는 원래 1978년에 장애 대학생 동아리들이 연대하여 만든 단체였는데 초기에는 운동단체라기보다 친목단체에 가까웠다. 그러나 장애 문제를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서 찾던 울림터가 1987년 전지대련에 가입하면서 직접적인 대결 전술을 전면에 드러내고 활동하였다. 정당 점거농성, 단식농성, 혈서, 삭발 등의 행동들을 주로 이들이 주도하였다.
연합전술의 일환으로 공대위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자 1990년대 중반에는 공대위와 별도로 장애인 유형별 단체의 연맹체가 탄생했다. 1996년 9월에 창립한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가 그것이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1996~1998, 이하 1기 장총련)는 한국지체장애인협회(회장 장기철), 한국농아인협회(회장 안세준), 한국맹인복지연합회(회장 유정종), 정신지체인애호협회(회장 강홍조)로 구성되었는데 지․농․맹․정신지체의 4개 유형별 장애인단체로는 최초의 구성이었다. 그러나 1기 장총련은 정부에 대한 정책건의 등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장애운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1998년에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이 설립되면서 와해되기에 이른다(유동철, 2017: 345).
이 시기 장애운동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장애운동이 장애문제를 사회구조적 문제로 확실히 인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며, 이에 동조하는 광범위한 세력들이 함께 문제를 풀어가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운동조직 면에서도 개별단체의 개별적 운동을 인정하면서도 공대위를 구성하는 연합 전술 및 일반 시민사회단체와도 결합하는 개방성을 보이면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 시기에 결성되었던 공대위는 장애문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이고 공격적이어서 진보적인 노동단체와 다른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의 틀을 구성할 수 있었다. 특히, 장애인계의 숙원이었던 단일한 공동창구 마련을 위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장애운동을 진일보시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장애운동의 인식은 그 당시 한국 사회에 유행했던 민중민주 운동적 관점의 틀을 크게 벗어날 수 없었다. 이 당시 한국에는 장애학이 소개되기도 전이었으며, 사회구조적 또는 정치문화적 측면에서 장애를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연구자들도 드문 상황이었다. 결국 당시 민중민주 운동의 흐름이 장애인의 계기적 불만과 화학적으로 결합되어 폭발한 것이 이 시기 장애운동의 특징이었다.
따라서 이 당시의 운동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경증의 지체장애인들과 전문가그룹, 그리고 양심적 활동가들의 분업과 협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여튼 장애운동 그룹과 일반 시민운동이 광범위하게 결합되고 장애운동 그룹이 운동을 주도해 나가면서 사회를 변혁시키려 했다는 면에서 장애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시킨 매우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3) 장애운동의 갈등과 분화기: 1990년대 후반 이후
(1) 장애인단체간의 갈등, 그리고 장애인고용촉진법 개정 운동
1990년대 초반까지 왕성했던 장애운동은 1990년대 중반 들어 다소 침체되는 분위기였다. 1995년에 결성된 장애인복지대책협의회와 1996년에 결성된 1기 장총련이라는 연대 조직이 있었으나 특별한 활동은 없었다. 특별한 움직임이 없던 장애계는 1997년 국민회의 후보였던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직후 극심한 내홍에 빠지게 된다. 내홍에 빠진 주된 원인은 장애인단체의 이원화와 장애인고용촉진법 개정 과정의 입장대립이었다.
1998년 12월 또 하나의 장애인단체 연맹체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이하 한국장총)이 출범하였다. 장애인복지대책협의회장을 맡고 있던 김성재교수가 초대 회장을 맡고 당시 국민회의의 이성재의원이 한국장총에 깊게 결합되어 있었다. 정치적인 파워를 지닌 두 사람이 깊게 개입되어 있는 이 단체의 출범으로 인해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의 회원단체였던 한국농아인협회와 정신지체인애호협회가 한국장총으로 넘어가고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는 와해되고 말았다.
장애인단체가 이원화되는 과정에서의 분열은 장애인고용촉진법 개정 과정에서 또 다시 재현되었다. 장애인고용촉진법과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의 문제점이 불거지면서 장애계에서는 장애인고용촉진공단을 복지부로 이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장애인복지공동대책협의회는 1998년 2월 공동대표회의를 갖고 ‘고용촉진공단의 복지부로의 이관’에 대한 입장을 가지고 ‘새 정부는 장애인직업정책을 복지담당부처에서 관리하도록 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1998년 2월 9일에 발표한다.
노동부의 반대입장에도 불구하고 1998년 9월 15일 여당인 국민회의는 8년간 시행한 결과 뚜렷한 효과를 보지 못한 이 법을 재검토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하고 장애인직업정책기획단(단장 김명섭의원)을 발족하기에 이른다. 장애인직업정책기획단이 결성되어 법 제정 움직임이 공식화되자 공단의 이관을 찬성하는 분위기였던 장애계에 반대하는 장애인조직의 입장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장애계는 ‘직업재활법 제정 찬성세력’과 ‘직업재활법 제정 반대세력’으로 이분되기에 이른다. 장애인직업재활법(안)에 대한 찬성 움직임은 주로 한국장애인복지공동대책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장애인단체, 기존의 장애인단체총연합회의 구성단체였던 농아인협회, 맹인복지연합회, 정신지체인애호협회였고, 반대세력으로는 한국지체장애인협회,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 한국장애인연맹(DPI), 교통장애인협회 등이었다. 반대 입장에 서 있는 단체들은 ‘복지는 복지부에서, 장애인고용은 노동부에서’라는 성명서를 제출하면서 가시화되었으며 11월 8일 여의도에서 한국지제장애인협회가 중심이 되어 직재법 제정을 반대하는 ‘범국민장애인총궐기대회’를 가져 본격적으로 반대하였다(이인영, 2001).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한 직업재활법(안)과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한 장애인고용촉진법 개정(안)이 법사위에 계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직업재활법 제정이 임시국회에서 무산되고 청와대 김유배 노동복지수석의 ‘장애인의 60%인 지체장애인이 장애인직업재활법 제정을 반대한다’는 발언이 이어지자 한국장총은 1999. 8. 12일 ‘장애인직업재활법 제정촉구를 위한 범장애인 결의대회’를 국민회의 당사앞에서 개최하게 되었고 이때 시민․재야단체 및 사회복지계 전반에서 장애인직업재활법 제정촉구를 위한 연대․지지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장애인직업재활법 정책지연과 이 법안을 놓고 장애계가 갈등을 보이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시민단체에 조정을 요청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시민단체는 1999년 10월 정책비교를 위한 공개토론회를 개최하여 양 세력의 갈등을 중재하려 하였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중재노력은 장애인직업재활법 제정을 반대했던 지장협과 DPI측의 불참으로 무산되었다(이인영, 2001). 이러한 장애계의 갈등으로 인해 장애인고용촉진법은 ‘장애인고용촉진및직업재활법’이란 어정쩡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지장협을 중심으로 한 장애운동 그룹들은 2002년 3월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이하 장총련)란 이름으로 새로 결집하였다. 초대 회장으로는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정광윤회장이 추대되었으며, 2017년 5월 현재 한국지체장애인협회, 한국교통장애인협회, 한국산재장애인협회,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한자련), 한국장애인인권포럼,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한국근육장애인협회, 한국청각장애인협회로 구성되어 있고 한자련의 안진환회장이 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2) 이동권투쟁과 전장연의 등장
1980년대 양법안 쟁취투쟁의 성과를 바탕으로 전국적 조직으로 재편된 한국의 양대 장애인단체들(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의 운동 방식은 비교적 온건한 운동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두 단체에서 해 온 일들이란 대부분 세미나, 교류대회, 공청회, 연수회, 정책간담회, 교육, 자료집발간 등에 국한되었다. 그 동안 성장한 풀뿌리 장애인단체들은 법인화된 두 거대단체의 운동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새로운 운동을 이끌어 가는데 그 시작이 바로 이동권투쟁이었다.
2001년 한국의 지하철4호선 오이도역에서 장애인용 휠체어 리프트가 추락하면서 70대 장애인이었던 부인은 죽고 남편은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이도역 장애인 수직형 리프트 추락참사 대책위원회’가 구성되면서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위 대책위원회는 장애인이동권확보를 위한 운동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해 2001년 4월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공동대표 박경석 외2인)를 발족하고, ‘단식농성’, ‘장애인 버스타기 운동’과 ‘이동권확보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천막농성’. ‘지하철역선로점거농성’, ‘이동권침해 손해배상소송’ 등을 전개하면서 장애인이동권문제를 우리 사회 전역에 확대시켜 왔다. 이들은 대부분 중증장애인들이었다.
그러나 2002년 발산역에서 또 다시 휠체어 리프트 추락사고가 발생했고, 2003년에는 송내역에서 시각장애인(장영섭, 57세)이 선로에 떨어져 들어오던 열차에 치여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여 장애인이동권연대만이 아닌 전체 장애인계로 운동의 파장이 넓혀져 갔다. 2004년 9월 24일에도 지체장애 1급인 이광섭씨가 제37차 ‘장애인도 버스를 탑시다’ 행사에 참여했다가 귀가하는 길에 서울역의 휠체어리프트가 추락해 두개골 일부가 파열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와 함께 장애인이동권연대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장애인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이동권이 침해되었다는 이유로 서울시, 지하철공사, 도시철도공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으며, 보건복지부장관을 상대로 “저상버스도입의무 불이행”이 위헌임을 구하는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등의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는데 법률적 소송행위에서는 성과를 보지는 못했다. 이에 이동권운동진영측은 철로 및 버스 점거를 통한 시위와 함께 “이동권보장에관한법률제정”이라는 입법 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교통약자의 이동권보장에 관한 법률(2005)’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이 법은 정부가 교통약자의 이동권보장 계획을 수립하게 하고 저상버스와 장애인콜택시를 의무적으로 도입하도록 하였으며, 이동편의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하게 하는 등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장애인들이 매년 지속적으로 진행했던 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결과로 결성한 단체가 전장연이다.
(3) 당사자주의의 등장과 장애운동의 분화
한국에서 자립생활운동(Independent Living Movement, ILM)이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당사자주의의 기치를 걸고 활동해왔던 단체는 DPI의 한국지부 성격으로 1986년에 결성된 한국DPI이다. 한국에서 당사자주의 논쟁은 기본적으로 제도권 내 사단법인 단체들의 연합체인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약칭 한국장총 Korea Differently Abled Federation, KODAF)과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약칭 장총련 Korea Federation of Organization of the Disabled, KOFOD)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한국DPI, 한국지체장애인협회(약칭 지장협), 한국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약칭 한자연), 한국장애인인권포럼 등이 중심이 된 장총련은 한국장애인재활협회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한국장애인부모회 등이 참여하고 있는 한국장총을 장애인의 단체(organization of the disabled)가 아닌 장애인을 ‘위한’ 단체(organization for the disabled)라며 장애인계의 대표성을 자임했고, 한국장총은 장총련이 이권 다툼을 중심으로 한 이익단체에 머물고 있다며 비판했다. 그러나 장총련의 회원단체였던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약칭 한시련)가 한국장총에 가입하면서, 소위 말하는 지․농․맹 3개 ‘당사자’ 단체 중 농과 맹을 대표하는 조직이 한국장총에 포진하게 되자 이러한 논쟁의 구도는 다소 흐려지게 된다(김도현, 2012: 174).
그러다 2001년부터 이동권 투쟁을 시작으로 성장한 현장 대중투쟁 중심의 진보적 장애인운동 세력이 2007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약칭 전장연, Solidarity Against Disability Discrimination, SADD)로 집결하면서, 당사자주의 논쟁이 새롭게 부활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즉, 당사자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한국DPI와 한국DPI 세력이 주도하는 한자연은 전장연을 비장애인 운동권 세력에 의해 휘둘리고 있는 조직이라고 비판한다. 한자연의 상임대표였던 고관철 씨는 2007년에 조직의 활동목표를 밝히며 회원단체에게 배포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운동에 있어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비장애인 운동권들이 장애인들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간의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운동에 있어서 학생운동은 학생이 주인이었으며, 노동운동은 노동자가, 농민운동은 농민이 여성운동은 여성이, 시민운동은 시민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자기 운동이 주체가 되었을 때, 이 사회에서 서로 평등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비장애인운동권이나 정당의 이념에 장애인들이 제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장애인 스스로 주체적 이념, 즉 당사자주의에 의한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비장애인들과 정당을 포함한 시민사회단체들이 지원자로서의 역할을 할 때, 우리의 주체적 운동에서 그들을 이용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진보적장애인운동으로 올바르게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계급운동이나 정당주도의 정치운동으로 오염된 장애인 운동을 거부하고 우리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당사자주의에 기반한 자립생활운동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고관철, 2007)
한편 전장연은 보수화된 장애인 단체들이 장애인계의 대표성을 인정받아 정책 결정 파트너가 되고 예산 지원을 선점하는 데 있어 생물학적 당사자주의를 방패막이로 삼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4) 자립생활운동과 당사자주의의 강화
자립생활운동은 장애인 당사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고 그 생활 전반에 걸쳐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러한 철학이 당시 한국 DPI를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던 ‘당사자주의’라는 단어와 결합되면서 한국의 자립생활운동은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
자립생활운동은 일상적이고 자발적인 운동이었다. 사실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급속히 확대된 계기는 활동보조지원사업이었고 이것을 제도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장애인들이 맨몸으로 기어서 한강대교를 건넜던 이벤트였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소속 장애인들은 활동보조인을 제도화하라고 서울시청앞에서 39일째 노숙농성을 하던 도중인 2006년 4월 한강대교를 맨몸으로 기어서 건너는 이벤트를 진행했고 이것이 다음 해인 2007년 활동보조인의 제도화에 큰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자립생활운동의 중심에는 이동권 투쟁을 경험한 중증 장애인들이 있었다. 2003년 전국 11곳 센터가 모여 한국장애인IL단체 협의회를 결성하고 그 다음해에 명칭을 한국장애인자립생활협의회(이하 ‘한자협’)로 변경했다. 이 과정에서 이동권 투쟁을 이끌었던 현장 투쟁 중심의 장애인 그룹과 당사자주의를 중심으로 운동과 서비스를 병행하자는 그룹들 간의 의견대립이 발생하고 결국 당사자주의를 강조하는 성향을 가진 서울센터, 제주센터, 양천센터 등이 한자협과 결별하고 2005년에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연합회를 결성한다. 이들은 현장 투쟁 중심 노선에 비판적이었다. 2006년에 10개 센터가 추가로 한자협에서 탈퇴하여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연합회에 가입함으로써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이하 ‘한자연’)가 만들어진다. 그 뒤 지금까지 자립생활운동에서 한자연과 한자협의 경합 구조가 지속되고 있다.
(5) 지금 한국장애인운동이 머물러 있는 곳
앞서 살펴보았던 이정표적인 장애인운동 외에도 2000년대 들어 장애인운동은 활발하게 이어져왔다. 장애인연금법 제정운동,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운동, 활동보조 법제화 운동, 발달장애인지원법 제정운동, 건강권 보장 운동, 장애등급제 폐지운동 등 수많은 운동들이 성과를 이루어가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운동들은 서로 다른 단체들에 의해 주도되며 운동과정에서 일시적인 협력은 있었으나 운동단체들이 공동으로 협력하고 함께 운동의 동지로서 고민하는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 같은 장애인 운동을 한국의 3대 단체들을 중심으로 거칠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한국의 주요한 장애3단체의 특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