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상 당선소감>
화두처럼 소설이라는 큰 산을 가슴에 끌어안고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책이든, 문장이든……. 언젠가는 요긴하게 쓰일 곳이 있겠거니 하며 일단 품안에 들어온 것은 허투루 버리지를 못했다. 뒤늦게 낙출허(樂出虛)를 알고 비우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때마침 기회를 얻었다. 이제는 비우기를 해야 할 차례다. 그동안 쌓아온 것을 땔감으로 소진시켜 에너지로 승화시켜야 하리라.
몸살을 앓았다. 머리카락 끝까지 아플 정도로 지독한 몸살이었다. 학창시절 한 학년을 올라갈 때마다 겪었던 성장통 같은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나 보다. 논어의 옹야편에 나오는 지호락(知好樂)을 다시 생각한다. 화두처럼 소설이라는 큰 산을 가슴에 끌어안고, 제대로 아는 단계에 접어들지도 못한 채, 혼자 떠돌며 열병을 앓았던 지난날들이 허송세월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수십 년 더께 쌓인 먼지를 털어 낸 기분이다.
아름답고 소중한 인연을 잊지 않겠다. 새로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길을 터주고, 눈을 열어준 『시에』와 심사위원님들께 두 손 모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끈을 놓지 말라고 격려해주고 손잡아 이끌어 주기까지 했던 시인 장용철 형님께도 큰절을 올리고 싶다. 지금까지 말없이 묵묵히 지켜봐 왔던 가족들에게도 고마움을 꼭 전해야 할 것 같다. 이 소식을 듣고 제주도에서 한 걸음에 달려와 축하한다던 그 친구와도 기쁨을 나누고자 한다.
막연했던 간절함이 현실로 다가온 지금 기쁨만큼 두려움도 느껴진다. 늘 신인다운 자세로, 초발심을 견지해야지 하고 다짐까지 하게 된다. 진정한 지호락의 경지에 들 때까지 세상을 맑고 밝게 하는 글로 고마운 모든 이들에게 화답하겠다.
<신인상 당선작 / 소설>
심출가(心出家)
“악령이닷.”
나는 앉은자리에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고 깍지 낀 두 손을 들어 올려 머리통을 감싸 쥐었다. 순간 짧은 신음이 토해졌다.
놈은 한번 엄습해왔다 하면 마치 머리통을 빠개버리기라도 할 양으로 덤벼들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정도로 잔인하고 기습적이기까지 했다. 그런 놈에게 내가 대항할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앉아서 당하는 수밖에…….
뜨악하게 불쑥 찾아오는 놈이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깍지 낀 두 손을 들어 올려 고통을 참기 위해 뒤로 젖힌 머리통을 감싸 쥐는 것이 고작이다. 짧은 신음이 끝나고 겨우 정신을 차려 욕지거리라도 할 기운이 들 때면 놈은 벌써 한바탕의 유린을 끝내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렇게 놈의 유린은 찰나적이었지만 고통을 당하는 나로서는 그 짧은 시간이 몇 억겁이나 되는 긴 세월처럼 느껴졌다.
“망할 놈.”
나는 놈이 사라지고 고통이 멎었을 때야 항상 해왔던 버릇처럼 놈의 뒤통수에다 대고 한바탕 욕지거리를 늘어놓았다. 놈이 달아난 문쪽으로 저주의 눈길을 보내며…….
놈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분명한 기억을 할 수는 없다. 다만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는 것은 지난여름쯤으로 생각된다. 수은주가 연일 30도를 오르내리며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그러고 보니 놈의 성질도 그때의 날씨를 꼭 닮았다. 언론에서는 찜통더위, 한증막더위, 살인더위니 하면서 말이 풍부하다는 우리말 사전에조차 없는 사돈의 팔촌 격인 어휘까지 동원해가며 매일 말을 바꾸느라 편집자들이 골치께나 썩혔을 때다. 연일 신문이고 방송에서 그렇게들 호들갑을 떨었지만 폭염은 나날이 기세를 더했고 사람들은 아예 무덤덤해 했다. 또 하나 더 생각나는 것이 있다. 뉴스를 좇아가는 것이 매스컴의 생리라지만 그 당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또다른 뉴스가 파괴신드롬이었다. 가격파괴라는 말을 앞세워 다소의 시차를 두고 뒤따르기 시작한 말이 인사파괴, 브랜드파괴에 덩달아 패륜사건이 터지면서 심지어 인륜파괴라는 썩 유쾌하지 못한 파괴바람이 이어졌다.
악령과의 불행한 조우도 아마 그때부터인 것 같다. 파괴바람이 바로 우리 회사 안으로 불어 닥치면서부터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잘난 인사파괴 바람 때문에 회사를 떠난 오 부장을 다시 만난 그 무렵이다. 영어회화 공부를 더 하겠다고 수강신청을 하고 돌아서던 때 능글맞은 강을 만났다. 그 후 풀리지 않은 속을 달래려고 혼자 찾아 들어간 카페에서 혜란이를 닮은 여자를 만난 것은 놈의 성질을 더 키운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우리 회사가 인사파괴를 도입할 모양이야. 이제 한바탕 태풍이 불 것 같애. 모르긴 해도 몇 사람은 바람 앞의 호롱불 일거야.”
같은 사무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강의 갑작스런 말이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설마 그럴 리가? 아직 우리보다 더 덩치가 큰 회사에서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인데 잔잔한 찻잔에 평지풍파를 일으킬라고. 시행착오란 게 있을 텐데 …….”
말에 강은 손사래를 치며 모르는 소리하지 말라는 투로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강은 무엇을 한번 한다면 그것도 속전속결로 해치워야하는 마음 급한 사장의 칼 같은 성질을 들먹였다. 그러면서 어느 회의석상에서 말을 흘렸다는 구체적인 증거까지 있다고 했다. 평소에도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강의 말이라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그때는 전혀 믿지 않았다. 내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그날따라 강은 그 답지 않게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며 입 조심을 시키기까지 했다. 회사 정보에 어두운 나로서는 믿을 수도,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한 일 정도로 대수롭잖게 여겼다. 하지만 강의 말이 어딘지 모르게 태풍을 몰고 올 것처럼 예감은 좋지 않았다.
강의 말이 있고 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일은 터지고 말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고 증명되던 날이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막 사무실로 들어와 커피타임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강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오며 만면에 미소를 짓고는 내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영문도 모른 채 복도에 있는 회사 게시판 앞까지 끌려 나간 나는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강은 연신 자기의 말이 적중한 것에 대해 ‘거봐라’는 식으로 나와 게시판을 번갈아 쳐다보며 히죽거렸다.
백화점에서 그리 흔하게 하는 가격파괴, 폭탄세일 물건 하나도 사본 경험조차 없는 나로서는 회사의 파괴식 정기인사가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싸하게 가라앉았다. 얼음장이 따로 없었다. 사장의 모험적인 인사파괴에 피해를 당한 사람이 바로 우리 사무실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직격탄을 맞은 사람은 오 부장이다. 후배 기수인 차 부장이, 한자리를 놓고 벼르다가 이사로 먼저 승진함으로서 오 부장은 자리를 잃은 셈이었다.
“인사발령. 총무부장 차형만 임 상무이사. 자재부장 오용수 명 총무부 대기…….”
“이건 모독이야. 인사파괴가 아니라 인사모독이라고…….”
오 부장은 한참을 말없이 앉았다가 사장에게 따지기라도 할 태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거칠게 말을 뱉었다. 무겁게 내려앉았던 냉기가 일순간 솟구치면서 사무실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모두가 남의 이야기하듯 쑥덕댄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더 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어 어줍잖은 자세로 얼른 밖으로 나왔다. 모두 남의 말을 하는 듯한 그 자리가 싫었다. 사태를 미리 눈치 채고 귀띔을 해주지 못한데 대한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오 부장은 평소에도 차 부장을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라며, 고속으로 승진해 부장딱지를 같이 달고 있는 것이 못마땅해 투덜거리곤 했다. 그러던 것이 마침내 현실화된 셈이다. 차 부장의 고속승진에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오 부장이었기 때문이다. 차 부장의 고속승진은 사실 예정된 일이었다. 사장의 인척관계에다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기 바쁘게 모셔오기 식으로 불러들인 경우이니까 이사 자리 정도는 처음부터 내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 부장이라고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지만, 오 부장을 더 서글프게 한 사실은 차 부장이 남도 아닌 대학 후배라는 점이었다. 오 부장으로서는 그 점이 못 견딜 정도로 얄밉고 못마땅하다고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침부터 영 속이 편치 않아 배달된 신문을 들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좌변기에 걸터앉아 느긋한 마음으로 사회면을 읽어내려 가다가 숨이 멎어버릴 듯한 순간을 맞았다. 뒤보는 일까지 멈춰버릴 정도로 한 순간에 예의 놈이 엄습했다. 나는 악을 쓰며 두 손으로 머리통을 감싸 쥐었다. 아내가 급하게 화장실 문을 열어 젖혔다. 비명소리가 밖으로까지 새나간 모양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순간적으로 시작되고, 순간적으로 끝나는 일이라 아내가 문을 열었을 때 나는 머쓱한 태도로 주섬주섬 바지를 추슬러 밖으로 나왔다.
“당신 왜 그래?”
아내는 언제부터인가 내게 반말을 했다. 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내 탓이겠거니 했다.
“아이다. 신문을 보다가 갑자기 머리가 좀 아파서…….”
아내가 신문을 낚아채듯 집어 들고 양쪽으로 펼쳤다. ‘40대 직장인 돌연사 충격’이라는 큰 제목을 단 기사가 사회면 헤드라인으로 올라 있다. 고용불안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돌연사의 주원인이라고 진단했다. 현대인들의 직장생활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다. 문제는 40대 남성 1천 명 당 1명꼴로 유사한 죽음을 당하고 있다는 놀라운 분석기사까지 따라 붙어있었다. 예사롭게 넘길 수만은 없도록 유도한 듯한 기사다.
신문을 보던 아내가 갑자기 나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만 아예 바투 곁으로 다가와 어린애 다루듯 양 볼을 쥐고 찬찬히 살폈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같이 이어지는 숙취로 설사를 해대며 죽을 맛인데 얼굴은 보지 않아도 엉망일터였다.
“아유 얼굴이 이기 뭐고. 병원엘 한번 가보든지 해야지. 영 반쪽이네. 하다못해 한약이라도 한 질 먹든지.”
아내는 초췌한 내 얼굴을 처음 본 듯,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아침부터 무슨 재수 없는 말이냐고 핀잔을 주자 아내는 갈기를 세운 야생마처럼 달려들며 한술 더 떴다. ‘과부 만들기를 바라거든 멋대로 하라’며 들고 있던 신문을 내 앞으로 휙 집어 던지곤 자리를 피했다. 그쯤에선 나도 어쩔 수없이 한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돈만 날리고 괜한 헛수고를 할 거다 싶으면서도 아내의 등살을 그냥 버텨낼 수는 없었다.
그날 바로 회사에 찾아온 아내의 손에 이끌려 점심시간 전에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중년 남성들의 일반적인 스트레스에 관한 이야기만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언제 날을 받아 정밀진찰을 해보자며 그 자리에서 날짜와 시간을 정해 주었다. 우리 부부가 ‘그러죠’ 하고 일어서려는데 의사가 머뭇머뭇하다가 ‘별다른 증세는 없느냐’고 물어왔다. 의사는 요즘 직장인들 중에 귀가공포증, 섹스공포증이라는 게 있다면서 너는 그렇지 않느냐는 투였다. 내가 서둘러 없다고 하면서 곁눈질로 아내를 쳐다봤다. 아내의 얼굴이 발그레해지면서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의사의 말이 맞다는 투로 살포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하자 의사는 스트레스 받는 일을 피하고 각별히 조심하라며 그날 보자고 했다.
“귀가공포증, 섹스공포증……. 허 참 나…….”
병원을 나서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별 희한한 공포증이 다 있구나 싶어 실 웃음을 지었다. 아내는 의사의 말을 신봉이라도 하듯 연신 풀죽은 저자세로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병원 계단을 앞서 내려서더니 뒤돌아보지도 않고 걸어갔다. 택시 타는 곳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해도 혼자 걸으며 생각할 게 있다며 나를 따돌리고는 등을 보이면서 멀어져 갔다. 뒤태는 아직 처녀라 해도 사람들마다 믿는다고 했던 아내의 말이 불쑥 떠올랐다. 말할 수 없이 쓸쓸해 보이는 아내의 뒤를 그림자 하나가 따르고 있다.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떠난 오 부장을 다시 만난 것은 한 달이 지났을 때쯤이었다. 우연하게 길에서 만나 밤새는 줄도 모르고 술을 마셨다.
“차 이사 잘 있제?”
“잘 있겠죠 뭐. 그나저나 부장님은 어떻게 지냅니까?”
“나야 뭐, 퇴물이 할 일 없이 잘 놀고 잘 먹고 지내지.”
안부를 주고받으며 술잔을 비우는 사이 오 부장은 예전의 그답지 않게 빨리 취해갔다. 마음이 약해진 탓이려니 하는 생각을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쯤 오 부장의 취기만큼 나도 덩달아 취해있었다. 평생 한 직장에서만 헌신해 온 우직한 중년의 말로를 보는 듯 해 사막이 된 마음속에서는 세상을 향한 모래폭탄이 연발 터졌다.
오 부장은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한동안은 여행을 다녔다고 했다. 그것도 처음 며칠간은 부인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혼자 속을 끓이며 다녔다고……. 그러다 결국 여자의 직감 같은 부인의 넘겨짚기에 낚아 채여 그물에 걸려든 고기 마냥 체념하고 모든 것을 실토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출퇴근을 빙자한 하루짜리 여행을 청산하고 차라리 후련한 마음으로 긴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씀바귀 삼킨 말을 이어갔다.
“어젯밤/우리 아빠 엄마/부부싸움에 잠을 잘 수가 없네/요리조리 따지시는 우리 엄마 아빠에게 뭐라고/쉴새없이 따다다 다다다다 요!/변명도 제대로 못한 우리 아빠/무슨 잘못 하신 게 아닌가 걱정이네/무서운 우리 엄마 뭐가 불만이실까?/엄마가 필요한 건 혹시 슈퍼맨!”
오 부장을 떠나보내고 집으로 가던 나는 집 앞에 있는 서점 겸 시디와 레코드, 비디오테이프 등을 파는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그다지 크지 않은 스피커 소리에 끌려 발걸음을 멈추었다. 요즘 아버지들의 마음을 이처럼 똑 부러지게 잘 표현한 것이 또 있을까 싶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박수를 치며 넋을 잃고 소리 속으로 빠져들었다. 유레카! 나는 새로운 발견을 한 사람처럼 전율까지 느끼며 붙박이가 돼 그 자리에 한참을 서있었다. 불이 환하게 켜진 유리벽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주인 남자는 과연 슈퍼맨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면서 피씩 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아닐 것’ 이라는 섣부른 결론을 내려버리고는 힘없이 발길을 옮겼다.
그날 밤 놈은 처음으로 나를 찾았다. 본래 예의를 갖추지 않은 놈이었기에 첫 대면부터 사정없이 짓이겨 놓았다. 꼭 가위눌린 느낌이었다. 아무리 고함을 지르려고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몸을 버둥거리며 아내를 깨우려고 팔을 뻗었지만 도무지 팔은 펴지지가 않았다. 놈이 떠나고 귀를 만졌다. 꿈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오 부장이 인사파괴라는 괴이한 사건에 휘말려 사표를 내고 회사를 떠난 후 사무실에는 학습열풍이 불었다.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다음의 파괴인사에서 또 누가 어떤 식으로 당할지 아무도 모르는 불안감이 회사의 공기를 바꿔놓은 셈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슈퍼맨 사원을 원하는 사장의 바람은 어느 정도 적중해 가는 듯싶었다. 보신주의에 익숙한 사원들이 스스로 알아서 처신을 해주었던 것이다. 컴퓨터를 배우고 외국어를 익히고……. 각 사무실마다 꼬리를 문 소문이 잠자리 날갯짓처럼 파르르 번졌다. 나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흐름을 좇지 못한다는 것은 현상유지가 아니라 도태라는 것이 현실로 다가온 마당에 험한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거름 지고 장에 따라가듯 투자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하하. 한형도 별수 없군.”
며칠을 망설이다가 막 수강신청을 하고 돌아서는데 강이 거대한 공룡처럼 떡 버티고 서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다가왔다. 순간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어찌할 줄을 몰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강의 번들거리는 능글맞은 웃음은 역겨움을 떠나 징그럽기까지 했다.
“잘해보자고.”
강은 나의 수강시간까지 알고 있었다. 같은 시간이라며 잘해보자는 빈정거림 투의 말까지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그러면서 너무 긴장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무엇을 하든 한 수 정도는 앞서 있다는 거만으로 범벅된 말이었다.
“혹시 날…….”
“아니야,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
강은 내가 미행이라도 했느냐고 막 말하려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서둘러 손사래를 쳐가며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섭섭하게 하나. 별일 없으면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뒤따라 온 것이 이렇게 되어버렸네. 말 나온 김에 소주나 한 잔 하지. 우리 같이 술 한 잔 한지도 오래됐는데…….”
강은 나의 팔을 끌다시피 학원 모롱이를 돌아 대추나무집 식당으로 들어갔다. 슈퍼맨이 되지 못한 군상들의 피난처이기라도 하듯 그곳은 언제나 붐볐다. 강과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아 무리들 속으로 휩쓸렸다. 술잔이 몇 순 배 돌고 취기가 목구멍을 차오르며 그렁거릴 때쯤 개기름이 번질거리는 강의 얼굴 위로 차 이사의 얼굴이 포개졌다. 순간, 내가 눈을 의심하며 주억거릴 때 악령이란 놈이 또 급습해 왔다. 갑자기 내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머리통을 감싸 쥐자 강이 놀라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렸는지 쨍그랑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왜 그러는 거야. 한형, 왜 그래?”
나는 단 한마디의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놈의 위력에 또 한번 꼼짝 못한 채 당하고 만 것이다.
“한형 병원에 한번 가봐야겠어. 그 두통이 꽤나 심한 모양인데……. 얼굴이 샛노랗잖아.”
“아니야. 자주 그런 건…….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야.”
강이 두통이라고 단정 지어서 한 말에 대해 나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놈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 하지 않았다.
지하 카페는 꽤나 어두웠다. 탁자 두 개를 건너뛰면 옆 사람이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조도가 낮은 실내등이 탁자 위마다 하나씩 힘겹게 매달려 있었다. 강과 헤어진 나는 집으로 가지 않고 카페를 찾았다. 악령이란 놈에게 짓이겨진 몸을 눅자치고, 강의 능글맞은 행동에 비위가 상한 속을 추스르기 위해 강을 따돌렸다. 내가 막 자리에 앉자 어둠을 뚫고 한 여자가 다가와 맞은편 의자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는 제멋대로 술을 시키고 안주를 가져오라고 했다. 물론 뭘 하겠느냐고 물어봤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라고 했겠지만 아예 내 생각은 물어 보지도 않고 제 마음대로 하는 짓이 불쾌했다. 순전히 조종당하는 느낌이라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 생각은 잠시뿐이었다. 실내 분위기에 차츰 익숙해지면서 여자가 혜란이를 쏙 빼 닮았다는 것을 안 순간 얄미운 마음이 싹 가신 것이다. 술이 들어오고 안주가 탁자 위에 얹혀질 때까지 혜란이의 모습을 더듬느라고 다른 생각은 할 틈이 없었다.
“한 잔 받으세요.”
여자가 잔을 권하며 맥주병을 들었다. 나는 어줍잖은 몸짓과 눈빛으로 여자를 쳐다본 다음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카페는 밀폐된 컨테이너 박스처럼 출입구도 잘 보이지가 않았다. 게다가 어둡기까지 해서 놈이 얼씬도 못할 것이라는 엉뚱한 상상을 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혹시…….”
“말을 할 줄 아시네요. 난 또 말을 못하시는 줄 알았네.”
“그나저나, 아니겠죠.”
“뭐예요?”
“아닐 겁니다. 나 처음 보는 거 맞죠?”
“글쎄요. 혹시 또 알아요. 언제 만리장성이라도 쌓았는지. 호호호.”
여자는 앙글방글 내 말을 농담처럼 받아넘겼다. 카페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혜란이를 빼 닮은 그 여자에게 홀려 들어갔다. 반쯤 넋을 빼주고 있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결국 나는 그날 밤 그 여자를 사기로 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그 짓이 마음만 앞선 것이란 낭패감을 맛보아야 했다.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아내와 관계를 하지 못한 것이 꽤나 된 듯하다. 가장 최근의 일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몇 달이나 지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며 잘도 참아주었구나 하는 고마움보다는 측은한 마음이 먼저 일었다. 놈은 나의 머리통만을 유린한 것이 아니라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다니며 몸 전체를 짓이겨놓은 모양이었다. 속살은 다 파 먹히고 딱딱한 껍데기만 남은 죽은 갑각류 같다는 생각이 미치자 똥통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몸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귀가공포증, 섹스공포증’이라는 두 단어가 그 무렵 내 머릿속을 늘 점령하고 있었다. 귀에서는 ‘슈퍼맨의 비애’라는 노래 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다. 오 부장이 술에 취해 혀 꼬부라진 소리로 절규에 가깝게 항변하다시피 했던 이야기도 되새김질하듯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언제 능력을 키우고 교양이라도 쌓을 시간을 우리에게 준 적이 있는가 말이야. 쉴 새 없이 몰아 부치기만 했지 해준 게 뭐 있다고……. 나쁜 놈들. 나이 들어 뱃살 좀 나와 몸놀림이 둔해지니까 단물 쓴물 다 빨아먹고 헌옷가지 버리듯이 폐기처분해도 되는 거냔 말이야. 안 그래. 세상을 오래 산만큼 애들이 모르는 노하우라는 것도 있단 말이야. 내 말이 틀려? 이 친구야. 그래, 안 그래?”
그때 오 부장의 말에는 시퍼런 살기가 돋아 있었다. 인생을 즐길 줄도 모르고 잘못 살았다며 나에게는 절대로 그렇게 살지 말라는 충고까지 했다. 마음으로부터의 억압을 받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을 당당하게 하며 적당히 여유도 가질 수 있는 일탈을 이야기했다. 그래, 탈출하는 거야. 지하 카페에서 혜란이 닮은 여자를 보고 난 뒤부터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기에 오 부장이 말한 일탈이 엉뚱하게 탈출하라는 메시지로 증폭돼 전해 왔다. 언젠가는 탈출을 할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꼭 혜란이 때문이 아니라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용기를 못 내 머뭇거리는데 오 부장이 불을 붙인 것이다. 밤마다 아내를 볼 낯이 없어 하릴없이 서재에 들어앉아 있던 일도 진절머리 났다. 마침, 어느 해 여름휴가 첫날 평소 회사에 출근하는 것처럼 집을 나서서 원주로 잠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그날 바로 들통 나고 말았지만……. 평소 회사로 좀체 전화를 하지 않던 아내가 뭔 바람이 불었는지 그날따라 전화를 했는데 딱 걸려버린 것이다. 핸드폰만 있었다면 완전범죄를 노릴 수도 있었는데……. 그 일로 회사에서는 ‘간 큰 남자’로 통했다. 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다고 긴 탈출을 감행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면 혜란이를 찾는 것이 유일한 방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묵은 숙제를 끝내야 한다는 마음도 솟구쳤다.
병원에서 아내와 헤어져 사무실로 되돌아온 나는 바로 휴가를 신청했다. 여름 정기휴가를 가지 않고 남겨두었던 게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때가 때인 만큼 이 바쁜 시기에 불쑥 디민 휴가신청이 쉽게 받아들여질 것 같지가 않았다. 적당히 둘러댈 핑계거리를 찾고 있는데 총무과 김 양으로부터 휴가결재가 났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너무 쉽게 얻은 뜻밖의 결과라 혹시 큰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닐까하고 겁이 덜컹 났다. 부장도 사내 네트워크 메신저를 통해 질문 한번 해보지 않고 휴가청원 전자결재에 사인을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일사천리로 사장 재가까지 따내고 나니 뭔가 모르게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 틀림없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더군다나 내가 전자결재판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김 양을 통해 휴가를 가도 좋다는 전화 연락까지 해주는 친절을 보이는 것으로 봐서 ‘어서 영원히 휴가를 떠나라’는 회사의 지시 같아 찜찜함이 더했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 왔을 때 책상 위에 있던 모든 내 물건들이 치워지고 이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앉아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소용돌이쳤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때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려 애를 썼다. 혜란이를 다시 찾는 일보다 더 먼저 해야 할 일은 없다고 생각을 다잡았다. 아내에게는 전화를 걸어 출장이라는 핑계를 둘러대고 곧장 기차를 탔다. 열차가 출발 신호음을 내자 막힌 하수구가 뻥 뚫리듯 답답한 속이 시원하게 마음갈이를 했다. 동대구역에 내리자 마치 혜란이 곁에 이미 온 듯해 들뜬 가슴팍으로 바람이 숭숭 들락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 답답한 일뿐인 서울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마음이다. 위험을 담보한 탈출이지만, 그래도 떠나오기를 잘했다 싶었다.
혜란이와 나는 한때 결혼을 약속했었다. 그러나 종교차이를 이유로 양쪽 집안의 반대에 부닥쳤다. 게다가 직장 때문에 내가 서울로 떠나간 것이 잘못이었다. 전화는 모두 차단되고 편지까지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얼마가 더 지나서 혜란이 어머니는 우리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다가 ‘결혼했으니 더 이상 찾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전화까지 했었다. 집안에서 나를 떼어놓기 위해 거짓으로 꾸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당시로서 달리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집에 찾아가기도 했지만 만나게 해주지를 않아 번번이 주위만 맴돌다가 발길을 돌려야했다. 그해 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홧김에 해외 파견근무를 신청해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나버렸다.
팔달교만 찾으면 된다. 어림잡아 찾아 간 팔달교는 그대로 있었다. 다만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왕복 찻길을 소화했던 옛 팔달교는 대구에서 칠곡으로 가는 길로만 이용되고 있다. 2개 찻길을 4개 찻길로 넓히면서 다리를 하나 더 건설했기 때문이다. 팔달교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어진 비탈길을 따라 10여 분 올라가면 혜란이가 살았던 마을이 있고 집이 있을 터다. 팔달교가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쉬 집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안도감이 든다. 다리 건너 야트막한 산과 교회를 끼고 있는 작은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도심 한가운데 떠있는 섬처럼 개발바람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용케도 버티고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집을 찾아 들어가 기웃거리자 젊은 새댁 한 사람이 마침 마당어귀에 있는 것이 눈에 띄어 주저 없이 다가가 혜란이를 들먹거렸다. 새댁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나의 신분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이것저것 몇 가지를 물어본 후에야 혜란이의 부재를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대전에 있다는 귀띔을 해주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절대로 말해주지 않았을 거라며 왜 이제야 찾아왔느냐는 투로 한참동안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기까지 했다. 나는 연거푸 고개를 떨구었다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손에 들고 있던 선물을 땅에 내려놓고 종종걸음으로 집을 나왔다. 대문을 나서자 긴장이 풀리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내 현기증까지 일어 발걸음을 더 이상 옮길 수가 없었다. 상상을 비껴간 혜란이의 변신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기뻐할 일인지, 슬퍼할 일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귀까지 먹먹해 왔다. 분명히 대전 선화사라고 했다. 수녀원이 아니었다. 교인이었던 혜란이가 출가했다는 말인가? 나는 입술이 파르르 떨려 그 말은 차마 물어보지를 못했다. 혜란이가 스님이 되었다는 것은 순전히 내 탓이다. 어머니에 대한 반발로 다른 종교를 찾아 새로운 길을 떠난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길로 고속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향했다. 차 속에서 스님이 되어있을 혜란이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좀 더 적극적이지 못했던 죄책감만 뭉클뭉클 밀려들어 두 팔로 몸뚱어리를 결박하듯이 압박했다. 가슴이 빠개질 것처럼 아팠다. 혜란이를 만나더라도 변명은 하지 않으리라 속다짐을 했다. 대전에 내려 시내버스를 다시 갈아타고 혜란이 새 언니 되는 사람이 일러준 절 입구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떨어진 뒤였다. 일주문은 깊은 삼매에 빠져들어 굳게 닫혀 있었다. 일주문 옆 요사채로 보이는 길다랗게 배치된 방마다 창호지로 바른 문을 뚫고 새나온 불빛이 일주문까지 얼비치었다. 그다지 큰 절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어둠에 휩싸인 절은 적막감만 감돌았다. 닫힌 일주문을 뚫고 절 안으로 들어갈 용기도 없었지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여관방을 찾아 들어갔다. 여관방은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몇 년은 족히 비워두기라도 했는지 사람의 훈기라고는 없었다.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방이지만 하루종일 지친 고단한 몸을 눕히자 이내 스르르 잠이 밀려왔다. 그런 와중에도 깊은 잠에 빠져들지는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치가 떨렸다. 혹시 놈이 엄습해 오기라도 해 객지에서 불귀의 객이 된다면 아내에게도 면목이 없지만 온갖 소문들로 나를 두 번 죽이게 되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느물느물 일어나 정신을 사납게 했다. 그러나 금세 쏟아진 잠이 공포감을 일순간에 잠재웠다.
혜란이를 만나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불가에서의 이름 두 자도 모른 채 속인으로서의 이름 석 자만을 달랑 들고 찾아 나선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이었다. 그것도 중년의 사내가 말이다. 요사채 앞뜰을 거닐며 인기척을 냈으나 문을 열거나 내다보는 사람 하나 없었다. 한참을 배회하다가 승가대학이라는 간판이 내 걸린 건물로 걸음을 옮겨 바투 다가서서 살폈다. 섬돌에는 20여 족은 될법한 흰고무신들이 짝지어 도열해 있었다. 사람이 있다는 흔적을 찾고 기쁜 마음까지 들었다. 나는 무턱대고 마루로 올라섰다. 문틈으로 방안이 조금 들여다보였다. 방안에는 한결같이 우윳빛 얼굴을 한 젊은 스님들이 조그만 책상을 하나씩 앞에 하고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누가 혜란이인지 도무지 분간 할 수가 없었다. 그 스님이 그 스님 같아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놀라서 냉큼 물러서며 뒤돌아보니 제법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한 스님이 마당을 가로질러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처사님 뭣하십니까? 여기는 학인들이 공부하는 곳입니다. 정숙을 유지하기 위해서 출입이 금지돼 있습니다. 저기 팻말을 보지 않았습니까?”
“스님 죄송합니다만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름이 이―혜―란, 대구 사람입니다.”
“글쎄요. 그런 사람 없습니다.”
내가 합장까지 해가며 간절한 낯빛을 보였건만 스님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일언지하에 ‘그런 사람 없다’는 말만하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하는 수 없어 대웅전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는 절답게 독경소리가 울려 나왔다. 다가갈수록 독경소리가 크게 들렸다. 혹시 혜란이가! 하는 생각에 눈을 치뜨고 안으로 들어가 먼발치께서 보았다. 혜란이가 확실했다. 굳이 얼굴을 확인해보지 않아도 그녀가 혜란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우선 목소리부터가 그랬다. 체구는 말할 것도 없고, 키도 꼭 그대로다. 사뿐사뿐 움직이는 가냘픈 몸놀림도 영락없는 그녀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당장 앞으로 가서 얼굴을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몸이 기우뚱하며 뒷걸음질치다가 마룻바닥 찧는 소리를 냈다. 나는 더 이상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또다시 ‘쿵’하는 소리가 났다. 혜란이의 독경소리는 그때까지 흔들림 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대웅전의 독경소리가 잦아들자 승가대학에서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스님들이 줄을 지어 이동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움직이는가 싶었다. 공양의식이다. 밥을 먹으러 가는 것도 의식이고, 밥을 먹는 행위도 의식에 따른다. 일사불란한, 흐트러짐이 없는 법도다. 혜란이는 대웅전을 나서며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찾아오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을 것이다. 설사 내가 와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외면했을 것이란 생각이 놈의 기습처럼 전신을 파고들었다. 애착도 병이다. 왜 이제야 그런 마음이 드는지 화가 났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혜란이는 이내 대웅전을 나서서 젊은 스님들의 뒤를 따랐다. 지독한 수행을 위해 부모지간의 정도 끊는 판에, 이미 잊혀졌을 연정이 대수일까 하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쳐들고 올라왔다. 혜란이는 이제 우리네의 삶과는 다른,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없는 처지라는 뒤늦은 깨우침도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송곳에 찔린 듯 가슴이 아렸다. 이제는 내가 놓아주어야 할 차례인가? 속이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입술이 타들어 가며 갈증이 났다. 나는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 대웅전을 나섰다. 약수터라고 조그마한 팻말이 걸려 있는 곳에 가서 벌컥벌컥 목구멍으로 물을 넘겼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찬물을 갑자기 삼켰을 때처럼 싸하게 통증이 이는가 싶더니 눈앞에서 별빛이 부서져 내렸다.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놈의 엄습이 걱정됐다.
심출가(心出家)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출가를 했다 해도 때로 환속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심출가를 한 경우 환속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진정한 일탈은 떠남이 아니라 마음으로 찾는 평정이라던 말도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찰나, 놈이 나의 몸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순간적이었다. 놈의 시달림에 만신창이가 되었던 몸과 마음도 덩달아 가뿐해졌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기지개를 켜듯 두 팔을 쭉 뻗었다. 등줄기로부터 새로운 힘이 솟았다. 내 몸에서 빠져나온 놈은 이내 또다른 ‘박제된 슈퍼맨’을 찾아 도량의 경계를 뛰어 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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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축하합니다! 지독한 수행의 길, "심출가(心出家)"를 곰곰 생각해 봅니다.
많이 배우고 쓰겠습니다
소설 속에서 진정한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소설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큰 기대를 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더욱 소설의 큰 지평을 열어줄 작품으로 보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축하합니다... 시에를 더욱 빛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 가슴에 끌어안은 큰 산, 문단에서도 우뚝 솟은 큰 산이시길 기원합니다.
큰 산! 정진하겠습니다
마음의 빛을 닦는 글을 기대합니다. 축하드려요
부끄럽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묵직하고 유려한 문장들이 돋보이는 소설이네요.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흡입력 있는 문체^^ 잘 읽었습니다. 건강과 건필을 기원합니다.
동행하는 김혜경 시인님도 건필과 문운이 함께하시길 빕니다